
11일 오후 서울의 한 홈플러스 매장 모습. 서울회생법원은 이날 홈플러스 매장 내 점포 임차인들에 대한 회생채권 조기 변제를 허가했다. 전민규 기자
“마진요? 제 인건비 빼면 거의 남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다른 장사를 더 해보려고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이 난리가 나는 통에 다 멈췄어요.”
지난 10일 서울 한 홈플러스에서 만난 음식점 사장 A씨는 직원 6명의 2월 급여를 주기 위해 적금 통장을 털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홈플러스가 지난 4일 기업회생신청을 하면서 그는 1~2월 두 달치 매출 정산금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했다. 임금 체불 상황에 몰리자 그는 아끼고 아껴 악착같이 모아뒀던 비상금을 끌어다 직원들 월급을 줬다.
A씨는 “저는 그나마 급한 불은 껐는데 여윳돈이 전혀 없는 점주들은 현금 서비스나 마이너스 통장으로 버티고 있다”며 “식당들은 그날그날 식자재비 댈 자금이 없으면 당장 문을 닫아야 할 처지”라고 했다.
홈플러스 기업회생절차가 개시된 이후 그는 못 받은 정산금이 들어올 날짜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다. 지난 10일엔 ‘2월 매출의 일부(12~28일치)만 이번 주중에 정산해 준다’는 통보를 받았다가, 11일엔 다시 ‘1월 매출은 12일에 , 2월 매출은 31일에 각각 입금된다’는 소식을 받았다. A씨는 “테넌트(점포 임차인) 담당자로부터 구두로 들은 거라, 실제 돈이 들어와야 안심할 것 같다”고 전했다.
홈플러스의 기습적인 기업회생절차 신청 이후, 대형마트를 믿고 입점한 생계형 자영업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홈플러스 본사가 “소상공인과 영세업자 등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겠다”며 대금 지급을 공언했지만, 상당수는 두 달치 매출에 대한 정산금을 못 받고 있다. 당장 생활비, 인건비, 식자재비로 쓸 자금이 막히자 이들은 급히 현금을 조달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전국 126개 홈플러스 지점에 입점한 업체는 8000여 개다. 올리브영 같은 대기업 점포도 있지만, 상당수는 식당, 카페, 약국, 안경점, 미용실, 꽃집 등 개인 자영업자들이다. 홈플러스의 POS(판매시점 관리시스템) 단말기로 받은 결제 대금을 일단 홈플러스 본사에 보낸 뒤 수수료를 제한 나머지를 익월 30일에 정산받는 입점 계약이 대부분이다. 지난 2월의 경우 30일이 없어, 3월 첫 영업일인 지난 4일에 1월 매출 정산이 이뤄질 예정이었다. 롯데마트와 이마트는 정산일이 익월 10일(최대 40일)인 데 비해 홈플러스는 20일 더 걸려 정산까지 최장 60일이 소요된다.
![서울회생법원이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홈플러스의 구조조정 담당 임원(CRO) 위촉을 허가한 11일 서울의 한 홈플러스 물류입고장 모습. [뉴스1]](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03/12/06788327-b3fe-4f8a-8642-3378b2467ffb.jpg)
서울회생법원이 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홈플러스의 구조조정 담당 임원(CRO) 위촉을 허가한 11일 서울의 한 홈플러스 물류입고장 모습. [뉴스1]
그런데 이게 순연되면서 줄줄이 문제가 생겼다. 장기간 불황으로 폐점 소문이 돌던 지점에 입점한 가게들은 분위기가 특히 안 좋다. 어린이용품 가게를 운영하는 점주 B씨는 “2020년 코로나19 이후 우리 지점이 매각될 거란 소문이 돌기 시작한 뒤 공실이 계속 늘었는데 설마 기업회생절차가 개시돼 돈을 못 받게 될 줄은 몰랐다”고 허탈해했다.
서울의 한 홈플러스 입점 음식점에서 일하는 50대 직원은 “사장님에게 카드값이 급하다고 말해 일단 월급의 60%만 받았다”며 “우리는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홈플러스가 입점업체에 지급해야 할 상거래 채권은 발생 시기에 따라 공익채권과 회생채권으로 나뉜다. 기업회생절차 개시 전 20일 이내에 발생한 공익채권은 법원 허가가 필요 없어 홈플러스가 지난 6일부터 순차 지급하고 있다. 문제는 1월 1일부터 2월 11일 사이에 발생한 회생채권이다. 법원의 변제 허가가 필요한데, 홈플러스가 지난 7일과 11일 두 차례에 걸쳐 법원의 승인을 받은 변제 채권 규모는 4584억원이다. 11일 현재 이 중 약 1000억원만 지급됐다. 홈플러스가 법원에 변제 승인을 신청할 채권 규모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김영옥 기자
게다가 지점·업종마다 정산 규모와 날짜, 안내 방식도 제각각이어서 혼란과 불신이 커지는 분위기다. 이날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는 “홈플러스 본사가 일부 점주들에게 1월분 정산금을 조만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전체 업종이 아닌 식음료 중심 일부 업종에 제한되는 차등 지급”이라고 지적했다. 또 “여전히 공식 입장이 아닌 구두를 통해 정산 계획을 알려오고 있어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홈플러스는 “순차적으로 지급하고 있으나 14일까지 상세 지급 계획을 전달해 불안을 최소화할 것”이라며 “대금 지급이 지연돼 협력사가 긴급 운영자금을 대출 받으면 그 이자 비용도 지급해 피해가 없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 가게’를 꿈꾸는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대형마트는 백화점·공항 등과 함께 특수상권으로 꼽힌다. 자영업자가 비용이나 노력을 들여 홍보하지 않아도 대형 유통 플랫폼의 프로모션으로 비교적 쉽게 모객할 수 있고, 매출도 안정적인 편이라서다. 입점 계약에 따라 다르지만 매출액의 20% 안팎을 수수료로 낸다. 하지만 대주주인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자구 노력을 다하지 않은 채 기업회생절차를 개시하자 입점 소상공인들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이다.
서울 한 홈플러스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C씨는 “온라인 시대라지만 디지털 광고를 잘할 자신도 없고 해서 대형마트에 입점했는데, 대기업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홈플러스는 지난달 28일 시작한 할인행사인 ‘홈플런’을 연장해 현금 유동성을 계속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정연승(경영학부 교수) 단국대 경영대학원장은 “대기업인 납품업체들은 상대적으로 자금 여유가 있지만, 입점 자영업자들은 돈줄이 막히면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며 “입점 소상공인을 최우선으로 배려하고 보호하는 게 홈플러스가 도의적 책임을 다하는 자세”라고 했다.
한편 이날 국회 정무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18일 홈플러스 사태와 관련해 긴급 현안 질의를 하기로 했다. MBK파트너스의 김병주 회장과 김광일 MBK파트너스 부회장 겸 홈플러스 공동대표, 조주연 홈플러스 공동대표, 금정호 신영증권 사장, 강경모 홈플러스 입점협회 부회장이 증인으로 채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