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몰타 침공

French invasion of Malta
프랑스의 몰타 침공
지중해 캠페인의 일부
프랑스 혁명 전쟁의
Nap malta.jpg
나폴레옹 몰타 상륙
날짜1798년 6월 10-12일(2일)
위치35°53°N 동경 14도 27도 / 35.883°N 14.450°E / 35.883; 14.450
결과 프랑스의 승리
영역
변화들
프랑스의 몰타 점령
호전성
프랑스.

몰타

지휘관과 지도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First French Empire 장안도체 주노
First French Empire 루이 데식스
First French Empire 루이 바라기 디힐리어스
First French Empire 클로드 앙리 벨그랑드 드 바우보이스
First French Empire 장 루이 에베네저 레이니어
페르디난트 폰 호메페슈 Surrendered
현재의 전투
1799년 8월 23일까지 지휘하는 나폴레옹

프랑스의 몰타 침공(말타: 인바우조니 프란치히아 타 몰타)는 몰타고조 섬의 성공적인 침공이었으며, 당시 성장지배를 받았다.은 1798년 6월 프랑스 혁명전쟁의 지중해 캠페인의 일환으로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제1공화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초기 상륙작전은 기사단과 몰타 민병대 모두의 어느 정도 반발에 부딪혔지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아 프랑스가 수도 발레타를 포함하는 정비된 항구 지역을 제외한 몰타 군도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기사단은 포위 공격을 견뎌낼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본국인 몰타 주민들뿐만 아니라 프랑스 회원들의 불만 등 일련의 상황들이 휴전으로 이어졌고, 이 상황은 기사단의 항복으로 끝났다.

따라서 이 침략으로 몰타에서 268년간 지속된 호스피스탈러 통치가 종식되었고,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이 몰타를 점령하게 되었다. 침략 몇 달 후, 일어나고 있던 개혁으로 인한 불만은 봉기로 이어졌고, 이 봉기는 영국인, 네폴리탄인, 포르투갈인의 도움을 받은 몰타 반군들에 의해 프랑스 수비대의 봉쇄로 진화했다. 봉쇄는 2년 동안 지속되었고, 1800년 프랑스군이 영국에 항복하면서 끝났고, 몰타는 보호국이 되었고, 164년의 영국 통치를 개시했다.

배경

나폴레옹이 1798년 4월 19일에 쓴 편지에는 루이 데식스 장군이 시비타베키아에서 출항하여 몰타에서[1] 만나도록 지시하였다.

18세기 동안 성 훈장.은 이슬람교도들과 싸우는 기능이 구식화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프랑스에 의존하게 되었고, 기사단 구성원 대다수가 프랑스인이었다. 프랑스 혁명에 뒤이어 큰 차질을 빚게 된 기사단은 1792년까지 심각한 재정난이 있었다. 한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은 중부 지중해에서의 전략적 위치와 유럽에서 가장 강했던 요새 체계 때문에 몰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2]

1798년 3월, 기사단은 프랑스군이 툴롱에서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아일랜드에 대한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랜드 마스터 페르디난드 호메슈 볼하임은 몰타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다고는 믿지 않았다. 문제의 문건의 진위여부는 논란이 되고 있지만 홈페슈는 6월 4일 테러 사실을 통보받았을 수도 있다.[3]

침공작

6월 9일: 프랑스 함대의 도착과 최후통첩

몰타를 다스린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 페르디난드 호메슈볼하임의 그림

프랑스 함대는 6월 6일 고조 앞바다에서 목격되었고, 호메슈는 전쟁 평의회를 소집하고 민병대를 소집했다. 말타 군인과 군단원들이 이끄는 민병대는 그랜드 하버 지역인 발레타, 플로리아나, 비르구, 센글레아, 코스피쿠아 등 요새화된 도시들의 방어를 책임졌다. 다른 정착지와 해안선은 국가 민병대와 일부 기사단이 지키기로 되어 있었다.[4]

한편 프랑스군은 몰타 제도에 상륙하여 점령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6월 9일, 나폴레옹은 그의 보좌관 캠프인 장안도체 주노트를 보내 프랑스 함대가 몰타에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그랜드 마스터에게 허가를 요청했다. 호메섹은 협의회를 소집해 허용 여부를 논의했고 항만 입항은 한 번에 4척만 허용하기로 했다. 이는 교전 기간 동안 기독교 국가의 4척 이상의 선박에 한꺼번에 몰타 항구에 입항하는 것을 금지한 오래된 법령에 따른 것이었다.[4]

6월 10일, 나폴레옹은 카루손에 의해 쓰여지고 서명된 최후통첩을 받아쓰게 되었고, 그것은 호메프슈에게 전달되었다. 메시지에는 더 많은 프랑스 선박의 항만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 훈장에 대한 나폴레옹의 실망이 언급되었고, 상당한 프랑스군과 어떤 저항의 무용성이 언급되었다. 서한은 더 나아가 홈페슈에게 적대행위를 피하기 위해 협정을 체결할 것을 요청했다. 프랑스가 기사단을 적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몰타 인구의 종교와 관습, 재산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명시했다.[5]

6월 10일: 프랑스 착륙과 초기 저항

6월 10일 아침, 프랑스군은 몰타 본토에 있는 세인트 폴스 베이, 세인트 줄리언스, 마르삭스록크, 그리고 고조 람라 만 주변 등 몰타 제도의 4개 지역에 병력을 상륙시키기 시작했다.[5]

세인트 랜딩 폴스베이

몰타 북부의 세인트 상륙은 루이스 바라기디 힐리에스가 지휘하는 부대가 맡았다. 말티족은 어느 정도 저항을 제의했지만 그들은 재빨리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아무런 인명피해 없이 성 바오로 만과 인근의 멜리에사 요새를 모두 점령할 수 있었다. 수비대원들의 사상자는 기사 1명과 몰타 병사가 살해되고, 150여명의 기사와 몰타 병사가 포로로 잡히는 것으로 구성됐다.[6]

마르사슬로크 상륙

약간의 저항 끝에 프랑스군에게 함락된 로한 요새

루이 데식스가 지휘하는 병력이 몰타 남부의 큰 만인 마르사슬로크에 상륙했다. 착륙은 성공적이었고, 프랑스군은 약간의 저항 끝에 간신히 로한 요새를 점령했다.[7] 요새를 점령한 후, 수비대원들은 다른 해안 요새들을 만으로 내팽개쳤고, 프랑스군은 저항 없이 대부분의 병력을 상륙시켰다.[8]

세인트 랜딩 줄리안과 밀디나의 포획

클로드-헨리 벨그랑드바우보이스가 이끄는 군대는 세인트루이스에 상륙했다. 줄리안과 주변 지역. 갤리선 한 척과 두 척의 갤리선, 그리고 군함 해군의 샬루프 한 척이 상륙을 막기 위해 그랜드 하버를 항해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헛수고였다.[9]

제4경보병 3개 대대와 제19경보병 2개 대대가 상륙하여, 발레타로 후퇴하기 전에 토큰 저항을 제안한 몰타 연대 일부 기업들과 만났다. 프랑스군은 마르사슬로크에 성공적으로 상륙한 데식스의 부대와 합류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자 호스피스탈러 수비대원들은 반격을 시도하고 퇴각하기 시작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군대를 내보냈다. 호스피스탈러와 말티즈는 진격했으나 라인 19의 대대에게 매복되어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프랑스군은 총진을 시작했고, 수비수들은 요새화된 도시로 후퇴했다. 방어군의 선두에 있는 기사단의 깃발이 프랑스군에게 잡혔다.[6]

발레타를 포위한 바우보이스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상륙을 따라 남은 민병대가 후퇴한 옛 도시인 MDina로 갔다. 주교 궁에서 열린 시의회 회의에서 저항은 헛된 것이라고 결정되었고, 국민의 종교와 자유, 재산이 존중된다면 항복하기로 합의했다. 약 12.00년쯤에는 조건이 합의되었고 도시는 바우보이스에게 항복했다.[8][10]

고조 상륙 및 포획

상륙지 근처에 위치해 침입에 어느 정도 저항감을 주었던 소푸탑.

고조섬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제3차 그레나디에스 컴퍼니와 제95차 데미브리가데로 구성되었고, 장 레이니에가 이끌었다. 장 우르뱅 푸지에르[fr]는 레이니에를 대동하고 공격에 가담했다. 고조(高祖)는 총 2300명의 병력에 의해 방어되었는데, 300명의 정규군(기마 30명), 1200명의 해안경비대 연대, 800명의 민병대로 구성되어 있다.[11]

착륙은 약 13.00에 레덤 케비르 지역에 시작되었다(말테즈: Rdum Il-Kbir)는 나두르 부근에 있는 Ramla Right BatterySopu Tower 사이에 있다. 수비수들이 프랑스군을 향해 포문을 열었고, 그들은 람라와 소푸 타워의 배터리에서 나온 포병대의 도움을 받았다. 프랑스 폭격기들은 배터리에 불을 다시 붙였고, 프랑스군은 집중 사격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더 높은 지대로 진격했다. 람라의 전지를 빼앗았고, 프랑스군은 간신히 나머지 병력을 상륙시켰다. 침략군의 사상자 중에는 상륙 중 총탄에 맞아 숨진 베르트랑 소령도 포함됐다.[11]

레이니에와 제95대 데미브리가데의 일부는 이후 몰타와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고조의 주요 항구인 마하르를 지휘하는 참브레이 요새로 진군했다. 그 요새는 주변 마을에서 온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약 14시에 전복되었다. 한편 나머지 제95대 데미브리가데는 사그라를 거쳐 섬의 수도 라바트치타델라까지 행진했다. 분견대가 마샬폰 타워를 점령했다. 치타델라는 해질녘에 항복했다. 프랑스군은 116발의 포를 포획했는데, 그 중 44개는 치타델라, 22개는 참브레이, 나머지는 여러 해안 요새에서 포를 포획했다. 머스크에트와 밀 3개 저장고도 포착됐다.[11]

6월 10-12일: 항구 지역의 상황

프랑스의 침략에 저항하려다 이 과정에서 폭격을 받은 티녜 요새.

성공적인 착륙에 이어 발레타와 코튼테라에서도 소란과 혼란, 불만이 만연했다. 그랜드 마스터와 평의회는 많은 다른 기사들과 함께 궁전에 모였다. 성직자들은 자비를 빌며 성 바울 동상과 함께 행렬을 조직했다. 이 도시에 있던 프랑스인 2명이 침략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살해되었다. 노예 감옥의 죄수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12] 코튼테라에서 두 명의 젊은 기사가 살해된 후, 질서에 대항하는 몰타 봉기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13]

도시 내에는 프랑스인을 지지하는 파벌과 이에 반대하는 파벌들이 있었다.[10] 프랑스의 몇몇 기사단원들은 공화당의 기치를 가지고 있었고 나폴레옹을 지지했다. 재무장관이기도 했던 장 드 보즈레돈 데 란시야트(Jean de Bosredon de Ransijat) 기사단장이 포트 세인트(Fort St)에 수감됐다. 안젤로는 호메프슈에게 프랑스군과 싸우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뒤 이 분쟁에서 중립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8] 일부는 호메페슈에게 나폴레옹과 협상하고 평화 조건을 제시하라고 압력을 가했고,[10] 몰타 대표들은 그랜드 마스터에게 휴전에 도달해 달라고 탄원했다.[14]

한편 항만 지역의 요새는 침략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리카솔리 요새마노엘 요새는 여러 차례의 공격을 견뎌냈으며, 그들은 기사단의 항복에 서명한 후에야 항복했다.[15][16] 프랑스군은 티녜 요새를 봉쇄하고 6월 11일과 12일 반복적으로 폭격을 가했고, 그 수비수들은 당시 벌어지고 있던 협상을 모르고 있었다. 수비수들은 6월 12-13일 밤 티녜를 포기했고, 프랑스군은 곧 장악했다.[9]

6월 11-12일: 협상과 항복

몰타의 나폴레옹 망토를 묘사한 판화

의회는 결국 휴전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바타비아 공화국의 집정관인 무슈 드 프레모(Monsieur de Fremaux)는 처음에 프랑스에 휴전을 요청하는 서한을 품기로 선택되었다. 프레모의 노령으로 인해 참모진인 무슈 메를란이 대신 파견되었고, 그는 6월 11일 09.00에 프랑스의 대표 인 L'Orient에 도착했다. 멜란은 나폴레옹이 사절을 보낼 것이라는 구두 메시지를 남기고 돌아왔고, 주노트 장군은 12시쯤 작은 사절단을 이끌고 도착했다. 그는 잠시 투옥된 뒤 풀려난 란시야트를 비롯해 프랑스인들에게 동정심을 가진 다수의 기사단과 함께 했다.[17]

호메섹과 주 의회 의원들은 사절단을 받았고, 그들은 L'Oriental에서 협상을 계속하는 24시간 휴전에 합의했다.[18] 6월 12일, 나폴레옹과 기사단과 말티즈 대표들은 발레타와 몰타 제도의 요새를 개조하고 그 섬의 주권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협약에 서명했다. 프랑스는 몰타의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그랜드 마스터의 공국을 획득할 것을 약속했다. 그들은 개인 기사와 몰타인의 사유재산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랜드 마스터와 프랑스 기사단에게도 연금이 주어졌고, 시잘핀, 로마, 리구리아, 헬베틱 공화국 출신 기사들의 유사 연금을 확보하겠다는 약속도 나왔다.[19]

합의서에는 포트 마노엘, 포트 티그네, 포트 세인트라고 적혀 있었다. 안젤로, 비르구센글라요새, 산타 마르게리타 선코튼테라 선은 6월 12일 12시까지 프랑스에 항복할 예정이었다. 발레타 요새, 플로리아나 라인, 세인트 엘모 요새, 리카솔리 요새와 나머지 요새는 다음날 12시까지 항복할 예정이었다.사령부의 해군은 6월 12일까지 프랑스 장교로 이양될 예정이었다.[20] 6월 12-13일까지 프랑스군은 섬 전체와 요새를 장악했다. 그들은 또한 약 1200개의 포병, 40000개의 사향초, 150만 파운드(68만 kg)의 화약, 2척의 함선, 프리깃함, 4척의 갈릴리 등을 포획했다.[21]

여파

나폴레옹이 침략 후 며칠 동안 머물렀던 발레타에 있는 파리지오 팔라초

몰타 점령에 이어 나폴레옹은 6월 13일 발레타에 상륙했다. 그는 대부분의 프랑스 함대가 이집트에서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까지 [21]6일 동안 섬에 머물면서 반카 주라탈레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나중에 파리리오에서 머물렀다. 바우보이스 장군은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수비대를 거느리고 섬에 남아 프랑스군의 몰타 점령을 확립했다. 짧은 체류 기간 동안 나폴레옹은 프랑스 공화당의 이상과 일치하도록 몰타 정부와 사회를 획기적으로 개혁한 지시를 내렸다.[22]

항복한 지 며칠 후, 그랜드 마스터와 많은 기사들은 몇몇 유물들과 아이콘들을 포함한 이동 가능한 소지품들을 가지고 섬을 떠났다. 기사단은 러시아의 1세로부터 은신처를 받았고, 그는 결국 몇몇 기사들에 의해 그랜드 마스터로 선언되었다. 이 훈장은 점차 몰타 군령으로 진화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주권은 있지만 영토는 없다.[2]

몰타인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훈장 추방에 기뻐하며 프랑스인들에게 동정심을 보였으나, 프랑스가 훈장 빚을 갚지 않고, 새로운 세금을 도입하고, 연금 지급을 거부하고, 교회의 특권을 제한하는 법을 도입하고, 교회를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의견이 달라졌다.[23] 석 달도 안 되어 말티족은 점령군에 대항하여 일어나 영국인, 나폴리인, 포르투갈인의 원조로 대부분의 섬을 장악하였다. 발레타와 코튼테라의 프랑스 수비대는 1800년 바우보이스가 영국에 항복하기 전까지 2년간 뒤이은 봉쇄를 견뎌냈으며 몰타는 보호국이 되었고 164년간의 영국 통치를 개시했다.[24]

참조

  1. ^ Xuereb, Charles (25 July 2020). "Newly-acquired Napoleon Bonaparte letter mentions Malta as meeting point". Times of Malta.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8 July 2020.
  2. ^ Jump up to: a b 카사르 2000, 페이지 138–139
  3. ^ 하드만 1909, 페이지 44
  4. ^ Jump up to: a b 하르드만 1909, 페이지 45
  5. ^ Jump up to: a b 하드맨 1909, 페이지 46
  6. ^ Jump up to: a b 하드만 1909, 페이지 48
  7. ^ 하르드만 1909 페이지 50
  8. ^ Jump up to: a b c 하드만 1909, 페이지 51
  9. ^ Jump up to: a b 슈피테리 2011, 페이지 68
  10. ^ Jump up to: a b c 하드만 1909, 페이지 52
  11. ^ Jump up to: a b c 하드만 1909, 페이지 47
  12. ^ 하드만 1909년, 페이지 54
  13. ^ 하르드만 1909, 58
  14. ^ 하드만 1909, 페이지 57
  15. ^ 보니치 2004-2007, 페이지 35
  16. ^ 슈피테리 2014, 페이지 188–191
  17. ^ 하드만 1909년 페이지 59
  18. ^ 하드맨 1909 페이지 60
  19. ^ 하드만 1909, 페이지 61
  20. ^ 하드만 1909, 페이지 62
  21. ^ Jump up to: a b 하드만 1909, 페이지 64
  22. ^ 카사르 2000, 페이지 141
  23. ^ 카사르 2000, 페이지 142
  24. ^ 카사르 2000, 페이지 144

참고 문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