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할링하우젠
Martin Harlinghausen마르틴 할링하우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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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 아이언 [1]구스타프 |
태어난 | 독일제국의 레다 | 17 1902년 1월
죽은 | 1986년 3월 22일 구테르슬로, 서독 | (84세)
얼리전스 |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서독 |
서비스/지점 | 라이히스마린 루프트와페 독일 공군 |
근속년수 | 1923–1945 1957–1961 |
순위 | 제너럴루트넌트 |
구성 단위 | 플리그코프스 X |
보유된 명령 | 아틀란틱 플리에거프 총통 플리에거프뢰르 툰시엔 플리그코프스 2세 |
전투/와이어 | |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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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할링하우젠(Martin Harlinghausen, 1902년 1월 17일 ~ 1986년 3월 22일)은 독일의 군용 비행사 겸 장군이었다. 할링하우젠은 해상간섭 및 항습작전에 특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할링하우젠은 자신에게 부여된 22척의 선박이 파괴되면서 대함전의 선두 주자였다.[2]
1902년에 태어난 할링하우젠은 바이마르 해군의 라이히스마린에 입대했다. 1931년 그는 선원에서 조종사로 전환했다. 1933년 제3제국이 결성된 후 할링하우젠은 루프트와페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콘도르 군단에서 반선하 부대를 지휘하도록 선발되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였다. 할링하우젠은 효과적인 전투 전술을 개발하여 민족주의 스페인에 의해 크게 훈장을 받았다. 할링하우젠은 1939년 반선배 플리에거코프스 X의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할링하우젠은 참모 장교 중에도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1940년 5월 5일 그는 노르웨이 캠페인에서 반배송 부대를 지휘한 공로로 철십자 기사단장을 받았다. 1940년 중반에 플리에거코프스 X는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로 이적했다. 사령부는 대서양 전투와 영국 전투에서 크리그스마린을 지원했다. 1941년 1월 그는 기사단에게 오크 잎사귀를 수여받았다. 1941년 2월 할링하우젠은 새로 창설된 플라이거프 총통 아틀란틱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할링하우젠은 병력 확대를 위해 열심히 로비를 벌였지만 다른 군사 극장들이 우선권을 받았다. 1941년 10월, 그는 지휘봉을 비운 호송차를 공격하던 중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1942년 1월 5일 울리히 케슬러는 할링하우젠을 대신했다. 할링하우젠은 캄프게슈워더 26의 게슈와더코이티코레와 다스 루프트토르페도웨센(공중 어뢰 전권위임)의 베볼메히테르가 동시에 임명됐다. 1943년 1월 할링하우젠은 플리그코프스 2세의 지휘를 받고 5개월 후인 6월 10일에 석방되었다. 그는 1943년 10월 데르 캄플리에거 장군의 참모총장으로 복직했다. 그의 마지막 지휘는 1944년 8월 21일부터 1945년 4월까지의 루프트가우 14세였다. 할링하우젠은 임명 기간 중 1944년 12월 1일 제너럴루트넌트로 승격되었다.
할링하우젠은 1945년에 포로로 잡혔고 1947년까지 전쟁 포로로 남아 있었다. 그는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연방정부에서 일했다. 할링하우젠은 상사와의 분쟁으로 위원직을 사임하거나 퇴직할 수 밖에 없었다.
초년기
할링하우젠은 1902년 독일 제국의 레다에서 태어났다.[3] 산업가 빌헬름 할링하우젠(1866–1942)과 테세 수르뮐렌의 아들. 그는 1940년에 잉게 루헨스트로스와 결혼했다.[4] 할링하우젠은 1922년에 초, 중등 교육을 받았다. 아비투르를 마친 후 괴팅겐 대학에서 한 학기[4]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5]
1923년 4월 1일 라이히스마린(독일 해군)에 입대하여 어뢰정 훈련을 하였다. 1931년 할링하우젠은 파일럿 훈련을 시작했다.[6][7] 1927년에는 Leutnant jur see, 1929년에는 Oberleutnant jur see로 위촉되었다.[8] 나치 정권의 압류, 제3제국의 건국과 함께 1933년 10월 베흐마흐트(나치 독일군)의 공중전 분부인 루프트와페로 이적하였다.[3] 이때 할링하우젠은 뢰트난트 수르 시(Lt zS 또는 LZS)의 낮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9] 1934년에 그는 훈련 학교에서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6][7] 1934년 10월 옵서버로 훈련을 받은 후, 그는 라이히슬루프트파흐르트르티움 훈련부에 들어갔다.[7] 그 부처에서 한스 가이슬러의 동료가 되었다. 두 사람은 독일에서 최고의 반배송 전문가가 됐다.[10] 그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베를린-가토우 항공전 학원에서 근무했다.[8]
할링하우젠은 1931년 워네뮌데 해군기지에서 게이슬러 휘하에서 복무했다. 할링하우젠은 1937년 1세스타펠을 지휘하게 되었고, 스테펠카피테른의 지위에 올랐다.[9] 1937년 10월, 그는 퀴스텐 메어즈벡 스태펠(küsten mehrzweck staffel 3./506 (506기동대)을 지휘하도록 임명되었다.[8]
스페인 내전
1938년 1월 당시 하우프트만(함장)으로 서열된 할링하우젠은 콘도르 군단의 반선박 부대인 AS/88(Seefliegerstaffel—해상비행대대대)을 지휘했다.[11] 그의 지휘 아래 상선에 대한 폭격작전의 빈도가 증가했다.[6] 그 비행대는 발발 이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해 왔다. 이 부대의 주 무기는 헤이켈 헤 59호였다. 1937년 1월부터 이 유형은 수송선과 군함에 대한 공중 투하 어뢰 실험을 시작했다. 할링하우젠은 목표 대상을 폭탄과 소형 무기 발사로 해안 통신까지 확대했다.[12] 할링하우젠은 항공기의 심각한 손상과 공기 중 유지를 위한 능력을 위해 헤59호를 선호했다. 바르셀로나 상공에서 그가 방금 떨어뜨린 폭탄의 폭발로 항공기가 파손되었다. 헤59호는 동체가 뒤틀리고 아랫날개가 여러 군데 부러진 채 살아남는다.[13]
그의 지휘 아래 AS/88은 선박과 해안 공격 전술을 개발했다. 특히 지상 목표물에 대해 잘 이용된 접근법은 엔진이 꺼진 상태에서 고공 비행을 한 다음, 1,000피트(300미터)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여 방출한 다음, 성급한 출발을 위해 엔진을 시동하는 것이었다. 1938년 8월까지 매주 16개의 정렬이 비행되었고, 각 항공기가 1톤의 폭탄을 운반하는 3개의 작은 형태였다. 12 헤 59대는 1938년과 1939년에 실종되었다. 3대부터 야간투사까지.[14] 손실은 사르디니아를 거쳐 말로르카에서 날아온 항공기로 대체되었다.[15] 이때 부대는 하이켈 헤 115s 2대를 운용해 평가하였다.[14]
스페인 AS/88 운영은 지원 서비스의 부족으로 인해 위축되었다. 헤 59대는 크릭스마린에 의해 루프트와페로 이전되었지만 해군은 여전히 복잡한 기계를 위한 예비품을 보관하고 있었다. 유일한 엔지니어링 유닛은 세비야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영구적으로 운영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전되지 않았다. 그 항공기는 독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들은 캐디즈로 날아가 해체되고 운송되었다; 3개월 동안 지속되고 종종 그 부대에 심각한 재원을 공급받지 못하게 하는 과정이었다.[16]
그의 첫 전투 임무에서 그는 얼마 동안 최우선 목표였던 발렌시아의 캠프사 연료 저장소를 파괴했다.[17] 할링하우젠은 1938년 7월 21일 발렌시아 항구[18] 앞바다에서 화물선을 침몰시켰을 때 공중 낙하 어뢰를 이용해 배를 침몰시킨 최초의 조종사가 되었다. 4798톤급 화물선의 이름은 Thorpeness, British이다.[19] 그것은 발렌시아에서 1해리 떨어진 곳에 가라앉았다.[20]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그 배가 기뢰에 부딪혔다고 영국인에게 알렸다.[21] 1938년 8월 1일 할링하우젠은 소령으로 진급되었다.[21] [22]
스페인에서 지휘를 하면서 할링하우젠은 폭탄으로 배를 정확하게 공격하는 선구자가 되었다.[23] 주로 하이켈 헤 59호와 하이켈 헤 60대인 독일 항공기는 공화당군이 잃어버린 554척 중 144척을 격추시켰다. 예를 들어, 1939년 바르셀로나가 무너지기 전에, 독일 항공기는 항구에서 30척의 선박을 침몰시켰고,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24]
프랑코, 히틀러, 무솔리니의 민족주의 승리로 끝난 전쟁 말기에 AS/88은 52척의 배가 침몰한 것으로 인정받았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배송팔은 스페인에서 어떠한 전략적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할링하우젠은 오버코만도 데어 루프트와페에 반대하여 이 방치된 영역을 계속 발전시켰다. 최고사령부는 대영제국과의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군 공군력 문제에 초연했다.[26]
할링하우젠은 AS/88을 떠나 1938년 12월 가토우 항공전 학교를 반납했다.[22] 1939년 4월 그는 당시 루프트플로텐코만도 2(항공함대 2)로 알려진 루프트플로테 2([27]항공함대 2)의 작전관이 되었다.[22]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이틀 후인 1939년 9월 3일, 한스 게이슬러는 루프트플로트 2의 스태프를 해임하고 플리에거코프스 X의 지휘를 맡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9월 5일 결성 당시 10번으로 명명되었다. 할링하우젠은 1939년 11월 1일부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본부는 함부르크의 블랑켄세스에 위치해 있다.[28][29][30] OKL은 해상에서의 전쟁과 영국 해상 통신의 파괴를 영국 공군(RAF)과 영국 항공 산업의 패배에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1939년 9월 할링하우젠의 플리에거코프스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면서 동잉글랜드 근해에서 산발적인 작전을 수행했다.[31]
1939년[9] 10월 3일 사단 명칭을 변경하고 사단으로부터 군단으로 결성된 후, 지휘부에 I./Kampfgeschwader 30과 I./Kampfgeschwader 26이 주어졌고, 준커즈 주 88과 헤이클 헤 111이 갖추어졌다.[29] 공군대는 포니 전쟁 기간 동안 북해에서 작전을 수행했다.[32] 해군은 1940년 1월 15일자 비망록에서 당시 개발 중이던 도니에 도 217 폭격기를 조달하기를 희망했으나, 루프트와페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모든 공격작전을 새로운 유형과 함께 플리에거코프스 X로 이양하려는 의도를 들어 거절했다. 헤 115호는 대신 해군에 배속되었다.[32] 할링하우젠은 해군의 작전을 위해 헤 111호를 지지하는 헤 115호의 제작을 끝내는 데 영향력이 있었다.[33]
할링하우젠에게는 가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1939년 10월 17일, 항공대의 요소들이 영국 해군의 주요 정박지인 스카파 플로우를 공격했다. 나치의 선전은 항공모함 아크 로얄이 침몰했다고 잘못 주장했다.[34] 1939년 12월 17-19일 북해에서 작전은 10척의 선박과 모든 낚시꾼들을 2,949톤으로 침몰시켰다.[35] 1939년 12월 17일, 최소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하는 등 5명의 트롤러가 침몰했다. 다음날 침몰한 두 마리의 트롤어선에서 세 명의 사망자가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피해를 입었고 세 명의 승무원을 잃었다. 12월 19일, 스코틀랜드의 스타는 그녀를 침몰시키려는 시도로 세 명의 사망자를 냈다.[36] 1940년 1월 9일부터 30일까지, 항공대는 12척의 화물선을 침몰시켜 23,994톤을 영국 동부에서 벌어들였다.[35] 구체적으로 KG 26과 30은 1월 29일 한 차례에 걸쳐 선박 4척을 침몰시키고 4척을 추가 파손시켰다. 다음 날, 35 하이켈 헤 111은 2개 더 가라앉았고 8개가 더 손상되었다.[35]
선박운항은 1940년에 스코틀랜드로 확장되었다.[37] 1940년 3월 독일 항공기는 57척의 상선과 38척의 트롤러를 공격했다. 전자의 7개, 후자의 1개가 크게 파손되었다. 할링하우젠호는 플라이거코프스X의 참모총장임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수행해 6827t급(GRT)의 상선 2척을 침몰시켰고, 8,441g급 여객선 도말라호가 크게 파손됐다.[38] 세인트 캐서린 포인트에서 발생한 이번 공격으로 98명이 사망했다.[39] 1940년 3월 1일 할링하우젠이 탑승한 코프스퓌룽케트(Corps Command Section)/플라이거코프스 X의 111호가 코핀세이 섬의 남동쪽 1388g 노르웨이 화물선 베스포스를 침몰시켰다.[39] 3월 20일, 그는 영국 해협으로 남하하는 무장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수송선 반 힐(5,439 grt)을 침몰시켰다. 배는 브라이튼에서 침몰했다. 배는 얕은 물에 모래톱에 가라앉았고 그녀의 화물은 인양되었다.[40]
작전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12번 그룹 RAF와 13번 그룹 RAF는 스코틀랜드와 노섬브리아 비행장으로 더 큰 힘으로 이동했다. 이런 움직임으로 RAF 전투기사령부의 요격 횟수가 늘어났다.[41] KG 26 폭격기 10대는 1939년 10월 17일부터 1940년 8월 15일까지 노섬브리아와 더럼 상공에서 소실되었다. KG 30은 전투기 1대를 제외한 나머지 항공기를 잃었다.[42] 4월 8일부터 10일까지 오크니 섬에 대한 공격 중에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침략의 전조로 이러한 요격들이 많이 이루어졌다.[43]
베세뤼붕 작전
운송금지 작전이 중단되었다. 1940년 3월 5일 할링하우젠과 가이슬러는 베를린으로 여행을 갔다. 그들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할 의도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침략에 대한 계획은 북해에서 집중작전의 전망을 종식시켰다.[31] 1940년 4월, 공군 전투의 질서는 상당한 강화를 보여주었다.[44] 1940년 4월 루프트와페 전투명령에는 융커스 쥬 52를 장착한 수송그룹 KGr zbv 101–108이 포함되었다. 캄프페슈와이더 4, 26, 30은 폭격력을 제공했다.[45] 할링하우젠은 비서실장으로 남아 있었다.[46] 긴 해안선은 장거리 항공기의 사용을 허용했다. 약한 잠수 폭탄 유닛만 할당되었다. Fliegerkorps X는 500대의 항공기를 제공받았다; 단지 40대만이 잠수 폭탄이었다.[47] 공군은 모든 해군과 육해공군에게 최종 계획을 명령하여, 공군이 침략 계획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시사했다.[30]
웨세뤼붕 작전은 1940년 4월 9일에 시작되었다. 덴마크는 하루 만에 독일 수중에 들어갔다.[48] 공수부대는 에거순드, 크리스티안산드, 오슬로 공항, 포르네부 포획을 돕는다.[49] 남쪽의 스타방거에서 북쪽의 트론드하임까지 모든 항구는 일단 포획되면 공기로 보강될 예정이었다.[47] 둘째 주부터 플리에거코프스 X는 딘달스 상륙작전을 무찌르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돔브스 전투와 남소스 전투를 지원했다.[50]
노르웨이의 남부 및 중부 지역은 수일 내에 확보되었다. 북쪽에서는 왕실 해군이 나르빅의 포획을 막았고 이후 이어진 나르빅 전투는 독일 해군의 연이은 패배로 끝났다. 할링하우젠은 보다 공격적인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얻었고 임시 플라이거프 총통 트론드하임의 지휘에 뛰어났다.[51] 영국 해군은 공군단의 효과를 인정했다. 찰스 포브스 제독은 홈 함대에 대한 일련의 파괴적인 공습이 있은 후 노르웨이 해안과 거리를 유지했다.[52] 포브스는 특히 구르카를 잃은 후 그의 순양함과 구축함에 대해 우려했다.[52] 할링하우젠의 공군 부대는 그의 군대가 나르비키 전투와 싸웠기 때문에 침략 후 며칠 동안 에두아르 디텔에 보급품을 날랐다. 눈과 기상 조건 때문에 착륙과 이륙이 어려웠다. 항공기는 좁은 피오르드에서 취약했다. 공급 작전은 제한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기를 향상시켰지만 디텔의 군대의 전투력을 향상시키지는 못했다.[53]
1940년 4월 30일 할링하우젠은 506호 승무원 중 한 명인 KüFlGr(코스타 플라잉 그룹) He 115s 중 한 명을 타고 트론하임과 남소스를 순찰했다. 남스피오르드 상공에서 그는 많은 목표물을 발견했다. 그의 정찰 임무는 3./StG 1을 그 지역으로 안내했고 준커즈 주 87 스투카스는 대잠수함전 트롤선인 시레토코, 자르딘, 워릭셔호를 침몰시켰다. HMS Bittern은 또한 심하게 손상되어 HMS Juno에 의해 그녀의 뒤틀림이 필요했다.[54] 할링하우젠은 1940년 5월 5일 헤인켈 헤 115s를 서비스 조종하고 플라이거퓨러 스타방거라는 특별 단체를 지휘한 공로로 철십자 기사단(리터크루즈 데 아이제른 크뤼제스)을 수상했다.[55][56] 할링하우젠의 지휘부는 연합국의 해상 통신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노르웨이의 전쟁에서 독일의 승리에 상당한 작전 기여를 했다.[27] 1940년 5월 18일 할링하우젠은 아마도 1,500그램 화물선으로 알려진 55세의 브리트 시리우스호를 침몰시켰을 것이다.[57]
이 캠페인은 노르웨이에서 연합군이 철수하면서 6월 9일에 끝났다. 루프트와프는 베흐마흐트 해력의 약점을 보완하며 균형을 맞췄다. 선로 진입, 항공우월 및 수송 작전은 결국 독일의 승리에 결정적이었다. 이 공격으로 플리에거코프스 X 1,130명의 승무원이 사망했으며, 341명이 전사하고 448명이 실종됐다.[58]
지중해에 대한 영국의 전투
플리에거코프스 X는 노르웨이에 남아 있었다. 루프트플로트 5호(공군 5함대)의 유일한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59] KG 26과 30, 이 수송방지 전문가들은 그 지휘 하에 있는 유일한 폭격기 부대였다. KG 4는 1940년 10월 같은 수의 비행단으로 결성된 미니레이닝 부대인 플라이제리비전 9에 재배치되었다. 네덜란드 전투, 벨기에 전투, 프랑스 전투 등 폴 겔브가 발효된 동안플리에거코프스 X호는 영국 해안선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60] 1940년 6월 캠페인이 마무리되면서 JG 77은 유일한 단발성 전투기 그룹을 제공했다. ZG 76은 북해 상공에서 전투기를 호위하기 위해 참석한 장거리 전투기 그룹이었다.[citation needed] 공군단은 1940년 8월 중순까지 영국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으며, 루프텔포테 2와 3은 남부 Englanḍ에서 주력을 수행했다.[61]
1940년 8월 15일, 루프트플로트 5호는 지상 목표물에 대한 전투의 유일한 대규모 폭격 공격을 수행했다. OKL은 전투사령부의 전투기 편대를 분열시켜 영국군 섬들을 사방에서 공격함으로써 파괴하기를 바랐다.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공군대는 폭격기와 장거리 전투기 호위대 사이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공군함대(효과적으로 플리에거코프스 X)는 한 분류에서 전력의 10%를 잃었다.[62] ZG 76은 3분의 1의 손실을 입었다. 북해와 영국 해협 상공에서 19대의 항공기가 피해를 입었다. 이날 독일 공군기들은 77대의 항공기를 잃었다.[62] 이후 본토에 대한 작전은 불가능했다. 공군 함대는 전투 기간 동안 영국 상공에 다시 도전하지 않았다.[63] 노르웨이와 덴마크에 본사를 둔 이 독일 항공기는 영국 해군과 상선 교통을 상대로 전쟁을 재개했다.[62]
할링하우젠은 1940년 루프트와프가 영국 상공에서 사용했던 선박 공격 전술을 정비하고 개발했다. 폭격기는 낮은 수위로 빔에 접근해 폭탄을 투하해 선체를 수선 아래로 파손시켰다. 표적이 된 선박의 종류는 독일인들이 합법적인 표적으로 본 경선과 어선까지 확대되었다. 1940년 공격해 파손된 선박은 1940년 127척, 1941년 164척으로 늘었다.[64] 1940년 11월 3일 할링하우젠은 6000gt급 선박을 침몰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는데, 아마도 킨네어드 헤드에서 3,871g의 킬데일을 침몰시킨 것으로 보아 그의 주장은 총 10만gt에 달한다.[57]
공군대는 1940년 말 이탈리아 시칠리아로 파견되었다. 몰타에서 집중적으로 폭격을 가한 영국 기지와 지중해 전투에서 축군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제1의 물결의 공격을 형성했다.[65] 공군대는 1941년 6월 축이 보유한 그리스로 이동했고, 이때 할링하우젠은 군단을 떠났다. 1941년 상반기 작전 중 공군부대는 영국 해군 잠수함국과 10번째 잠수함인 플로티야호를 효과적으로 진압했다.[66] 두 명의 반격 전문가가 지휘관, 참모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공군은 섬의 방어를 무력화시키거나 마비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 직원들은 제한된 물자와 다른 전선의 방만함을 더 많은 것을 달성하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국 해군에게 시칠리아 해협을 폐쇄한 탓으로 돌렸다.[67]
할링하우젠은 해협을 폐쇄하는 것을 돕기 위해 레지아 마리나로부터 원조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생각은 해군들이 그의 공군들이 적을 볼 수 없도록 어둠 속에서 순찰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인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적을 미행할 수 있었는데, 그 때는 그의 공력이 그들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이 지역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1월 11일 순양함 사우샘프턴호가 침몰하고 글로스터호가 파손되면서다.[68] 그는 1941년 1월 30일 오크 잎으로 철십자 기사단(Ritterkreuz des Eisernen Kreues mit Eichenlaub)을 받았다.[69]
할링하우젠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영국 호송차에 대한 참혹한 습격의 일부였다. 4시간 후 그들은 최남단에 도달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할링하우젠은 나머지 7명에게 대체 대상을 물색하라고 지시했다. 페리를 공격한 할링하우젠은 그레이트 쓰디 호수에 흩어져 있는 호송대를 발견했다. 머리 바람도 예상보다 두 배나 불어 헤 111호 모두 연료가 바닥났다. 할링하우젠과 코왈레스키 충돌 사고는 벵가지 남쪽 280km 사막에 상륙했다. 그들은 5일 후에 구조되었고, 세 명의 선원이 붙잡혔다.[70]
아틀란틱 플리에거프 총통
1941년 2월 28일 할링하우젠은 플라이거퍼 아틀란틱(플라잉 리더 애틀랜틱)으로 임명되었다. 선박 공격 전문가로서 그는 대서양 항공 작전을 이끌 논리적인 선택이었다.[23][71] 그의 본부는 브랜데리온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72] 할링하우젠은 퀘스텐플리에게르그루페(KuFlGr)와 미넨수크루페(MSGr—minesearch 그룹)가 그 목적으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함대와 U보트 지원, 기상 임무, 심지어 해안 보호까지 담당했다. 그는 겨우 100대의 항공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X 플리에거코프스의 직원들을 관리하면서 지중해 작전 극장에 대한 그의 헌신은 1941년 3월 31일까지 지휘를 연기했다. 그는 BdU의 칼 도니츠의 작전 방식에 동의했는데, 그는 4개의 엔진인 포케-울프 Fw 200 "콘도르"를 사용하여 호송차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U-보트를 그들의 채석장으로 유도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리고 나서 호송차를 격퇴하기 위해 조정된 공해공격을 개시했다.[73]
할링하우젠은 헤르만 괴링의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약한 힘을 얻었다. 그의 임무 중에는 크리그스마린의 U-보트와 함께 호송차에 대한 공격을 조정하는 것도 있었다. 할링하우젠의 지휘는 효과적이었고, 호위함의 정확한 위치를 전송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잠수함의 우둔함 때문에 대응하지 못했다. 할링하우젠은 긴밀한 협조보다는 보다 유연한 접근방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뒤니츠와 단언했다. 할링하우젠은 작전 배치를 놓고 해군 제독과 자주 충돌했으며, 서부 접근방식과 반대로 지브롤터 해로를 폐쇄하는 쪽으로 공중작전을 전환하는 것에 반대했다.[74]
할링하우젠의 임명은 할링하우젠이 부임했을 때 이미 그 막바지에 빠르게 접근하고 있던 '첫 해피타임'과 겹쳤다. 예를 들어 1940년 크리스마스까지, KG 40은 약 10만 톤의 19척의 선박을 침몰시켰고 37–18만 톤의 선박을 손상시켰다. 1941년 1월, 17척의 배가 6만 5천 톤에 달하는 침몰하고 5척의 피해를 입었다.[75] 2월은 영국이 Fw 200에 21척의 배를 빼앗겨 총 8만4,301톤에 이르는 최악의 해였다.[76] 1941년 1/4분기 동안 콘도르인들은 17만1천 GRT를 침몰시켰고, 대부분은 외로운 배였다. 한 경우 1941년 2월 26일 OB 290호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이 7척에서 9척(4만9865GRT)을 차지했는데, 모두 KG 40 Fw 200에 의해 침몰되었다. 그러나 8대 이상의 항공기가 운항하는 경우는 예외였다. 곧 영국 CAM선(캐터펄트 항공기 상인)이 등장했고, 가벼운 콘도르 손실 시기도 끝났다.[73][76]
할링하우젠은 1941년 5월 27일 침몰한 전함 비스마르크호의 상실을 막지 못한 루프트와페의 책임을 통감받았다.[77][incomplete short citation] 그의 지휘는 비스마르크호를 돕기 위해 II./KG 1, II./KG 54와 I./KG 77로 강화되었지만, 배가 침몰하기 전에 공군력이 전투 지역에 도달하지 못했다.[35] 독일 캐피탈호는 다시 대서양으로 출항하지 않고 U보트 전쟁만을 남겨두었다.
1941년의 마지막 반쪽은 아틀란틱에게 심한 타격이었다. 4척(1만298t)만 침몰시켰고 7척 등 16척의 콘도르를 분실해 2척의 피해를 입었다.[78] 아틀란틱은 1941년 3월 15일부터 10월 31일까지 57대의 호송차를 보고했다. U보트 74척과의 협력을 통해 총 39만t, 항공모함 1척, 구축함 1척이 침몰했다. 이 사령부는 90만3000g에 161척의 선박을 침몰시켰으며, 아마도 31,000gt에 7척의 선박을 침몰시켰으며, 59만g에 113척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79] 6개월 만에 이러한 경향은 급진적인 변화를 겪었다. 1941년 12월 중순 OKL 전시보고서에 따르면 콘도르를 다른 극장으로 이전하면서 공중잠수함 협력이 "정지"되었다.[80]
할링하우젠은 10월 13일 아일랜드 해역에서 수송선을 공격하던 중 평소 조종사 로버트 코왈레스키 없이 총에 맞아 부상한 뒤 전투작전을 펼치겠다고 고집해 지휘 지휘권을 상실했다.[81] 선원들은 가까스로 반스 근처의 프랑스 해안으로 되돌아갔고, 그곳에서 그들은 어부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그 후 3개월을 병원에서 보냈다. 1942년 1월, 그는 플리에거페흐러 아틀란틱으로 울리히 케슬러에 의해 대체되었다.[82]
북아프리카, 지중해로 귀환
1942년 1월 할링하우젠은 반선박 폭격기 날개인 캄프게슈워더 26의 게슈와데르코르로 임명되었다.[83][3] KG 26은 그룹 3개의 그루펜을 동시에 운영했지만 종종 다른 극장에서 운영되었다. 할링하우젠과 참모 사령부는 지중해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citation needed] 할링하우젠은 오랫동안 어뢰 폭격기 개발의 지지자였다.[84] 작전 지휘부와 함께 그는 다스 루프트토르페도우엔의 베볼메히텐(Bevolméchtigen)으로 임명되었다.[84]
KG 26은 1942년 초 이탈리아로 이적한 뒤 그로세토에서 어뢰 훈련을 시작했다.[83] 할링하우젠은 곧 흑해 유세에 스태펠른(6) 1명을 잃었다. I와 III./KG 26은 작전준비가 되어 노르웨이에[83] 배치되었고, II./KG 26은 4월에 동부전선으로 이양되었다가 8월 초에야 복귀했다. 할링하우젠은 1942년 2월 몰타 호송차에 대한 집중 공격을 통해 날개 사령관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의 성공 중에는 로왈란 성이 있었는데, 로왈란 성은 그녀의 호위대가 그녀를 위협한 후 가라앉았다.[85] III./KG 26은 노르웨이에서 렌네즈 근처 프랑스로 이동했다. Scilly Isles 남서쪽에서는 8월 3일과 4일 소형 호송차에 대한 첫 어뢰 공격을 감행했고 소련에서 회수된 6척의 배가 악명 높은 Bradel 호위함에서 2척의 화물선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86]KG268월.[87]
1942년 5월부터 KG 26은 노르웨이에서 온 목표물과 교전하여 상당수의 선박을 침몰시켰다. KG 26과 30의 호위함 PQ 10과 호위함 PQ 14는 항공기로 2명, 잠수함 공격으로 2명이 침몰했다.[88][incomplete short citation] 호위함 PQ 16을 공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89] 1942년 9월 I./KG 26은 북극 호송 중 호위함 PQ 17의 파괴와 호위함 PQ 18에 대한 공격에 연루되었다. 이후 작전에서 III./KG 26은 52명의 승무원이 실종되고 7명이 부상하고 5명이 사망했다. [90] PQ17에 맞서 U보트는 이미 공습으로 불구가 된 선박을 주장했지만, 항공기는 24척의 선박 중 10척을 침몰시켰다. 이는 침몰한 14만2000gt 중 5만6000g에 이른다. KG 26은 어뢰를 장착한 헤 115s의 지원을 받았다.[91] PQ18에 대항하여 13척의 배 중 10척이 공습을 받아 침몰했다. KG 26과 30은 3개를 더 침몰시키는 데 일조했는데, 모두 300개의 분류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다; 44대의 항공기.[92] 그 작전은 비록 손실에도 불구하고 할링하우젠의 정당성과 어뢰 폭격기의 사용이었다.[92]
1942년 11월 북아프리카의 축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는 이집트에서 그들의 거점을 파괴하고 영국군에 의해 리비아를 가로질러 추격하도록 만들었다; 토치 작전은 알제리, 모로코를 점령하고 튀니지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OKW는 신속하게 대응했고 튀니지에 공군과 육군을 파견하여 교두보를 유지했다. 튀니지를 위한 달리기는 액슬이 튀니지 캠페인을 시작함으로써 가까스로 승리했다.[93] 할링하우젠은 플라이거프 총통 툰시엔으로 임명되었다.[94][95]
할링하우젠은 튀니지 교두보를 완전히 지휘하게 된 초기 단계에서 남부 최고 사령관 알버트 케셀링에게 책임이 있었다. 이용 가능한 한정된 병력은 축군이 유지할 수 있는 대로 주 공급항에서 내륙까지 한 곳, 최단 물류선을 가진 방어 불가능한 지형에 그들의 항로를 설정하도록 강요했다.[96] 할링하우젠은 튀니지 제1야전대대대의 3개 중대, 낙하산 1개 중대, 대공포 1개 중대, 14개 중대, 104 기갑 그르나디에 연대,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 5 낙하산 연대(장교 3명, 사병 150명)의 전진배치 등을 지휘했다. 할링하우젠의 부대는 11월 13~14일 밤 비시 프랑스군의 대부분이 튀니지에서 철수하자 그의 부대와 함께 튀니지의 요직을 점령했다.[96] 할링하우젠은 전투기 109대를 포함해 140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다.[97]
할링하우젠은 1943년 2월부터 5월까지 플리에거코프스 2세의 지휘권을 받았다.[3] 공군대는 1943년까지 튀니지를 둘러싸고 방어전을 벌였다. 튀니지의 축 공군은 연료와 탄약 기아의 지속적인 위협을 받고 있었다. 튀니지에 도달한 물자는 즉시 소진되었다.[98] 3월부터 4월까지 연합 해군과 공군은 전체 액슬 공급 선박의 41%인 108척을 침몰시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할링하우젠은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자신의 항모전단 부대에 본토용으로 사르디니아에 전진기지를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연합군 군함에 대한 매일의 출격은 11에서 2로 떨어졌다.[99]
1943년 4월 플랙스 작전은 시칠리아에서 튀니지로 가는 항공 다리를 영구적으로 교란시켰다.[100] 4월 말에는 레이더 세트를 가동하거나 작업장에서 탱크를 옮길 연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101][incomplete short citation] 튀니지를 공급하려는 헛된 노력은 참담했다. 1943년 4월과 5월 첫째 주에는 177명의 Junkers Ju 52s가 분실되었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실패한 공중 양력이 시작된 지 6개월 후였다.[102] 할링하우젠은 식량과 연료, 탄약에 굶주린 13만명의 군인들이 항복한 5월 13일의 항복에서 탈출했다. 할링하우젠은 케셀링과 일련의 분쟁으로 1943년 6월 10일 지휘부에서 해임될 때까지 한 달 더 생존했다.[99] 할링하우젠의 휴식과 캄프그루펜 재건에 대한 열망은 괴링에 의해 기각되었다. 라이히스마샬 챌린지는 밤에 연합군 항구에 대한 공습을 강력히 요구했다. 할링하우젠이 케슬링에게 불평한 것은 생산성에 반하는 것이었고 그가 해고된 주된 이유였다.[103]
이후 명령
할링하우젠은 해임 후 케슬러의 참모로 잠시 플라이거프뤼허 아틀란틱으로 돌아왔으나 1943년 6월 26일 예비역에 배치되었다. 1943년 10월에 그는 더 캄플리에거 장군에 임명되었다. 11월 11일, 루프트와페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은 헤르만 괴링은 노르드만을 포함한 루프트와페 고위 장교들의 모임을 조직했다. '아레오파그'라고도 불리는 이 회의는 베를린-가토우의 루프트크릭사카데미(항공전 아카데미)에서 열렸다. 이 루프트와페 버전의 그리스 아레오파거스는 악화되는 공기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을 주었다.[104]
1944년 12월 할링하우젠은 그가 적대행위를 종식할 때까지 지킨 직책인 루프트와펜코만도스 "웨스트" 셰프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군에게 붙잡혀 1947년에 석방되었다.
전후 경력
할링하우젠은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신서독 공군에서 복무했다. 그는 1961년 F-84 썬더스트레악 사건에서 적절한 수사를 요구했다가 전후로 정치적 불편함을 겪던 중 정년퇴직으로 보내졌고, 이후 자그돔베르게슈와데르(JaBoG) 32대 사령관인 오베르스틀루트네트 지그프리드 바르스가 제대로 된 조사도 받지 못한 채 자리에서 물러났다.[105]
할링하우젠은 1986년 3월 귄터슬로에서 사망했다.
수상
- 칼과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의 스페인 십자가
- 아이언 크로스(1939년)
- 오크 잎이 달린 기사의 철십자사
- 그레이트 크로스 오브 메리트[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