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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루블프 (영화)

Andrei Rublev (film)
안드레이 루블레프
Andrei Rublev Russian poster.jpg
극장판 발매포스터
연출자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작성자
생산자타마라 오고로드니코바[A]
주연
시네마토그래피바딤 유소프
편집자
  • 류드밀라 페이기노바
  • 타티아나 에고리체바
  • 올가 셰브쿠넨코
음악 기준비야체슬라프 오비치니코프
생산
동행이
출시일
  • 1966년 12월 16일 (1966-12-16) (모스크바)
  • 1971년 12월 24일 (1971-12-24) (소련)
러닝타임
  • 타르코프스키 첫 컷:
  • 205분[1]
  • 타르코프스키 최종 컷:
  • 183분[2]
나라소비에트 연방
언어들
  • 러시아어
  • 타타르
  • 이탈리아의
예산130만 루블

안드레이 루블레프(러시아어: аарр рууувв,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감독하고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와 공동 집필한 1966년 소련서사시 전기 사극 영화다.이 영화는 소비에트 연방의 브레즈네프 시대 첫 10년 동안 검열되었던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에 따른 열정이라는 제목의 1966년 영화로부터 다시 편집되었다.이 영화는 15세기 러시아의 우상 화가 안드레이 루블프의 삶을 대략적으로 다루고 있다.이 영화에는 아나톨리 솔로니친, 니콜라이 그링코프, 이반 라피코프, 니콜라이 세르게예프, 니콜라이 불랴예프, 타르코프스키의 아내 이르마 라우시가 출연한다.러시아의 유명한 복원가 겸 미술사학자사바 얌시코프는 이 영화의 과학 컨설턴트였다.

안드레이 루블프15세기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비록 이 영화는 안드레이 루블프의 삶을 느슨하게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이지만, 중세 러시아사실적인 초상화를 묘사하고자 한다.타르코프스키는 러시아 역사의 격동기에 '세계사적 인물'로, '러시아 역사 정체성의 공리로서의 기독교성'[1]으로 예술가를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려 했고, 결국 러시아 차르돔을 탄생시켰다.

이 영화의 주제는 예술적 자유, 종교, 정치적 모호성, 자폐증, 억압적인 정권 하에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을 포함한다.이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1966년 단 한 차례의 심사를 제외하고는 완공 후 몇 년 동안 공식적인 무신론자 소비에트 연방에서 국내로 발매되지 않았다.[3]1969년 영화제에서 영화의 한 버전이 상영되었는데, 그곳에서 FIPRESCI 상을 받았다.[4]1971년 소련에서 검열된 버전의 영화가 개봉되었다.이 영화는 1973년 컬럼비아 픽처스를 통해 미국 개봉과 동시에 상업적인 이유로 더 삭감되었다.그 결과, 이 영화의 몇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비록 이러한 검열 문제들이 개봉 후 여러 해 동안 이 영화를 가리고 잘라냈지만, 이 영화는 곧 많은 서양 비평가들과 영화 감독들에 의해 매우 독창적이고 성취된 작품으로 인식되었다.안드레이 루블프는 원작으로 복원된 이후 더더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되었고, 종종 Sight & Sound 비평가와 감독들의 투표에서 모두 높은 순위에 올랐다.[5][6][7]

플롯

안드레이 루블프는 8회로 나뉘는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본편과 느슨하게 관련이 있을 뿐이다.주요 영화는 위대한 아이콘 화가의 삶을 7개의 에피소드로 도표화하는데, 이는 그의 삶과 평행하거나 그의 삶에서의 삽화적 전환을 나타낸다.배경은 15세기 러시아로, 경쟁 왕자들 간의 싸움과 타타르 침공으로 특징지어지는 격동의 시기였다.

프롤로그

이 영화의 프롤로그열기구를 타기 위한 준비를 보여준다.이 풍선은 강 옆에 있는 교회의 첨탑에 묶여 있는데, 예핌(니콜레이 글래즈코프)이라는 사람이 풍선 아래 로프를 두른 마구를 이용해 비행을 시도한다.

그가 시도하던 바로 그 순간 무식한 폭도들이 강에서 도착하여 비행을 무산시키려 하고, 지상에서 예핌을 보좌하는 한 사람의 얼굴에 불상사를 들이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선은 성공적으로 풀려나 예핌은 위에서 바라본 풍경과 비행의 감각에 압도되고 기뻐하지만, 곧이어 충돌 착륙을 막을 수는 없다.

그는 몇 명의 창조적인 인물 중 첫 번째 인물로서, 희망은 쉽게 꺾이는 대담한 도피자를 대표한다.충돌 후, 말 한 마리가 연못에 등을 대고 구르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영화 속 많은 말들 중 하나이다.

역사적인 다니엘 초니에 의한 프레스코 브룸 오브 아브라함 (c. 1360–1430)

I. 제스터 (1400년 여름)

안드레이(아나톨리 솔로니친), 다니일(니콜라이 그린코), 키릴(이반 라피코프)은 방황하는 수도승이자 종교적인 우상 화가로서 일거리를 찾고 있다.그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창조적인 캐릭터를 대표한다.

안드레이는 관찰자로, 사람들의 좋은 점을 찾고 영감을 주고 겁을 주지 않으려는 휴머니스트다.다니엘은 철퇴하고 체념하며, 자기실현에만 급급하지 않는다.Kirill은 화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하지만, 여전히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한다.그는 질투심이 많고 독선적이며 매우 총명하고 통찰력이 있다.

세 사람은 다년간 살아온 안드로니코프 수도원을 막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폭우가 쏟아지는 동안 그들은 헛간에서 피난처를 찾는데, 그 곳에서 한 무리의 마을 사람들이 한 제스터(롤란 바이코프)의 접대를 받고 있다.제스터(skomorokh) 또는 스코모록(skomorokh)은 비열하고 음란한 사회 논평과 보야르족을 놀림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국가와 교회의 몹시 빈정거리는 적이다.그는 스님들이 들어오면서 비웃고, 얼마 후 키릴은 눈치채지 못하게 떠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군인들이 도착하여 밖에서 데려가는 스코모록을 체포하고 의식을 잃고 두드려 빼앗으며 그의 악기도 부숴버린다.비가 그치면서 키릴이 돌아온다.키릴은 떠나고 싶어 안드레이는 쉬고 있는 다니엘을 깨운다.제스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다니엘은 마을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마련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그들이 걸어가자 다시 폭우가 시작된다.

II. 그리스어 테오파네스(Summer-Winter-Spring-Summer 1405–1406)

키릴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아이콘 작업을 하고 있는 저명한 명화가인 그리스인 테오파네스(니콜라이 세르게예프)의 작업장에 도착한다.Theophanes는 복잡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기성 예술가, 인문주의자, 그리고 그의 견해는 다소 냉소적이지만, 그의 예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환멸 속에서 공예와 잡일로 더 많이 묘사된다.

그의 어린 견습생들은 모두 마을 광장으로 도망갔는데, 그곳에서는 잘못 유죄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려고 한다.키릴은 테오파네스에게 이야기를 하고, 스님의 이해와 학식에 감명을 받은 예술가는 그를 모스크바아노베이션 성당 장식과 관련한 견습생으로 초대한다.키릴은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그 후 테오파네스가 안드로니코프 수도원에 직접 와서 키릴과 함께 모든 친목회 앞에서 함께 일하도록 초대한다는 조건 하에 그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서 아이콘 그림으로 유명한 안드레이 루블레프는 키릴과 테오파네스가 공유하는 감탄사로 유명하다.

잠시 후 안드로니코프 수도원에 가면 모스크바에서 사신이 도착하여 주선된 대로 성당을 꾸미는데 도움을 청하지만, 키릴 대신 안드레이를 제안한다.다니엘과 키릴 모두 안드레이가 받는 인정에 동요하고 있다.다니엘은 안드레이와 동행하기를 거부하고 동료들을 고려하지 않고 테오파네스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을 나무라지만, 곧 그의 성질을 회개하고 어린 스님이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러 오면 안드레이가 잘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키릴은 안드레이를 질투하고 홧김에 수도원을 떠나 세속적인 세계로 떠나기로 마음먹으며 역시 그를 해임하는 동료 수도사들의 면전에서 탐욕에 대한 비난을 던진다.키릴은 수도원을 비틀거리며 눈 내리는 시골로 나와 그의 개를 따라다니지만, 화가 나서 지팡이로 사정없이 두들겨 죽도록 내버려둔다.

III. 열정(1406)

안드레이는 젊은 견습생 포마(미카일 코노노프)와 함께 모스크바로 떠난다.숲 속을 걷는 동안 안드레이와 포마는 포마의 결점, 특히 거짓말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포마는 양봉장에서 꿀을 가져갔다고 고백한다. 안드레이는 자신의 캐스가 끈적끈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벌침을 진정시키기 위해 얼굴에 진흙을 뿌린다.

포마는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그의 작품의 더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고, 그 당시 종종 섞이기에는 불안정하다고 여겨졌던 색깔인 그의 방아쇠를 완성하는 것과 같이 그 일의 실제적인 측면에 더 관심이 있다.그들은 숲에서 테오파네스를 만나게 되고, 늙은 주인은 포마를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에 감동받지 않고 돌려보낸다.그가 떠날 때, 견습생은 죽은 백조를 발견하고, 막대기로 백조의 날개를 찌른 후, 백조의 날개를 동경하고, 새의 눈을 공상한다.

숲에서 안드레이와 테오파네스는 종교에 대해 논쟁하고, 포마는 주인의 페인트 붓을 닦는다.테오파네스는 러시아 민족의 무지는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안드레이는 자신이 어떻게 화가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고 말한다.안드레이가 눈 덮인 산비탈에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사랑한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열정놀이' 즉 그리스도 십자가재현한 내용이 이 섹션에 담겨 있다.

IV. 더 홀리데이(1408)

강둑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캠핑을 하던 안드레이와 포마는 안드레이가 멀리 떨어진 상류 숲에서 축하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의 여행 파티를 위해 장작을 모으고 있다.조사하러 가다, 그는 쿠팔라의 밤을 위해 리트 토치 의식을 행하고 있는 벌거벗은 이교도들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안드레이는 이교도들의 행동에 흥미를 느끼고 흥분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부부를 염탐하다가 들켜서 오두막의 십자가에 묶인 채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힌 조롱 속에 팔을 치켜든 채 아침에 익사할 위기에 처한다.

모피 코트만 입은 마르파(넬리 스네기나)라는 여자가 안드레이에게 다가간다.편견을 가지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안드레이에게 자신의 백성들이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고 설명한 후, 그녀는 코트를 떨어뜨리고 안드레이에게 키스한 다음 그를 풀어준다.안드레이는 도망쳐 울창한 숲 속에서 얼굴을 긁으며 길을 잃는다.다음날 아침 안드레이는 그의 일행에게 돌아오는데, 다니엘이 지금 참석하고 있고, 그들이 배를 타고 떠날 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강둑에 나타나 마르파를 포함한 이교도 몇 명을 뒤쫓는다.그 투쟁에서 애인은 붙잡히지만, 그녀는 발가벗고 강으로 헤엄쳐 안드레이의 배를 바로 옆을 지나 가까스로 탈출한다.그와 그의 동료 스님들은 부끄러워서 외면한다.

V. 최후의 심판 (1408)

안드레이와 다니엘은 블라디미르에 있는 교회 장식을 하고 있다.비록 그들이 두 달 동안 그곳에 있었지만, 벽은 여전히 하얗고 헐벗었다.심부름꾼 파트리아케이(유리 니쿨린)가 성난 주교의 말을 듣고 도착하는데, 주교는 이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가을까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꽃밭 한가운데 있는 근처 도로에서 안드레이는 다니엘에게 그 일이 자신을 혐오하고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과 같은 주제를 그릴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그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필요한 마음의 여유를 잃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참을성이 없어 일을 하고 싶어하던 포마는 사임하고 안드레이의 일행을 떠나 더 작고 덜 권위 있는 교회를 그리자는 제의를 받아들인다.

안드레이 일행의 석조 캐러와 장식가들도 대공의 저택에서 일을 해오고 있었다.태자는 행한 일에 불만을 품고 있으며, 자신의 기호에 더 부합되게 재조명되기를 바라지만, 노동자들은 이미 대공의 동생의 저택을 세우는 것을 돕는 다른 일을 가지고 있으며, 대공의 동생이 h보다 훨씬 화려한 집을 갖게 될 것이라고 분개한 뒤 즉각 거절하고 떠난다.자기 자신의뢰인의 저택을 향해 가까운 숲을 지나 오솔길을 걷다가 대공이 보낸 병사들에게 장인들이 폭행을 당하고, 눈이 퉁퉁 부어 공예 연습을 할 수 없게 된다.

교회에서 돌아온 안드레이는 장인들을 공격했다는 소식에 경악하고 화가 나서 페인트를 던져 한쪽 벽에 칠해버린다.무사히 폭행을 피한 젊은 견습생 세르게이(Vladimir Titov)는 다니엘의 요청으로 여성에 관한 성경의 무작위 부분을 소리내어 읽는다.이름이 자신을 거룩한 바보, 즉 유로디비라고 밝힌 젊은 여성 듀로치카(Irma Raush)는 비를 피하려고 방황하다가 벽에 걸린 페인트를 보고 화가 난다.그녀의 빈약한 마음과 순진함이 안드레이에게 잔치를 그릴 생각을 불어넣는다.

VI. The Raid (Autumn 1408)

대공이 리투아니아에 자리를 비운 사이 권력에 굶주린 동생은 타타르 일행과 충성을 맺고 블라디미르를 급습한다.플래시백으로 대공과 그의 형제는 교회에서 종교예배에 참석하는데, 그들 사이의 경쟁과 반감이 뚜렷하다.말을 탄 그들의 부하인 연합군의 침입은 큰 대학살을 초래한다: 도시는 불타고 시민들은 살해되고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살해된다.한 장면에서는 말이 계단 위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혼돈의 한복판에 있는 포마는 러시아 군인에 의해 도시에서 살해되는 것을 가까스로 피해 인근 시골로 도망치지만 강을 건너고 있을 때 화살을 맞고 뒤쪽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타타르족은 바리케이드가 쳐진 교회 안으로 강제로 들어가는데, 지금은 대다수의 시민들이 피난한 안드레이의 그림들로 완전히 장식되어 있다.타타르인들은 자비를 보이지 않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학살하고 페인트칠을 한 나무 제단들을 모두 불태운다.역시 교회에 있는 안드레이는 두로치카를 도끼로 죽여 러시아 군인에게 강간당하는 것을 구한다.주교의 전령 파트리아케이도 참석하고 있는데, 그가 거절하는 도시의 금의 위치를 밝히도록 하기 위해 불로 고문당한다.불타는 횃불에 번번이 화상을 입은 그는 녹은 십자가에서 나온 뜨거운 액체 금속을 입에 부어 비명을 잠재웠다.그리고는 말에게 묶인 채 먼저 발을 질질 끌고 간다.

그 여파로 교회에 안드레이와 듀로치카만이 살아 남았다.안드레이는 죽은 그리스인 테오파네스와의 대화를 상상하며, 자신의 업적과 인류의 잔혹함을 한탄하는 한편, 듀로치카는 죽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다.안드레이는 그림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다른 남자를 죽인 것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침묵의 서약을 한다.

이른바 즈베니고로드 친(c. 1410; 오늘 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 갤러리에서)의 구세주 예수님 아이콘

VII. 침묵 (1412년 겨울)

주: The Passion Ath Andrei에 따르면, 이 에피소드의 제목은 "The Charity"이다.

안드레이는 기근과 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번 안드로니코프 수도원에 있다.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며, 침묵 속에서 듀로치카를 동료로 삼고 있다.

같은 수도원에서는 난민들이 각자의 고향 마을을 괴롭히는 문제들에 대해 토의하고, 나타난 한 남자는 실성한 목소리로 블라디미르로부터의 탈출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그는 젊은 승려에게 오랫동안 결석한 키릴로 인정받고 있다.그는 수도원을 떠나 있는 동안 고통을 겪었고, 그가 돌아오도록 허락해 달라고 상관에게 간청했다.그의 소원은 많은 간구와 초기의 거절 끝에 이루어지지만, 그는 성경을 15번이나 참회하여 베껴 쓰라는 지시를 받는다.

곧, 타타르족 무리가 이 지역을 여행하는 동안 수도원에 들르는데, 그들의 잔혹성을 직접 경험한 안드레이와 키릴의 염려가 컸다.그러나 듀로치카는 너무 소박해서 타타르족이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 중 한 명이 들고 있는 빛나는 가슴판에 매료된다.일행은 그녀를 희롱하고 함께 놀지만, 타타르족은 그녀의 마음에 들어하며 뿔 달린 헬멧을 머리에 쓰고 담요로 옷을 입히면서, 그녀를 여덟 번째, 그리고 유일한 러시아인 아내로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한다.

안드레이는 그녀가 떠나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타타르족의 선물에 기뻐하며 타타르족을 태우고 달아난다.키릴은 안드레이에게 다가가 수도원을 떠난 후 처음으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거룩한 바보를 해치는 것은 불운과 큰 죄악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두로치카가 어떤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를 놓아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안드레이는 키릴의 절망적인 애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을 하지 않고, 커다란 뜨거운 돌을 집게로 불에서 옮겨 수도원을 위해 물을 데우는 비열한 일을 계속하지만, 그 돌을 눈 속에 떨어뜨린다.

8세. 종 (봄-여름-겨울-1423–1424)

이 에피소드는 전문 벨메이커의 어린 아들 보리스카(니콜라이 불랴예프)에 관한 것이다.왕자가 보리스카의 아버지를 찾아 교회를 위해 동종을 주조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남자들을 보내왔다.대신 보리스카에게 들이닥친다. 보리스카는 보리스카에게 이 지역이 전염병으로 황폐해졌고, 그의 아버지는 물론 그의 가족 모두가 죽었다고 말한다.더 나아가 그는 아버지가 임종 때 전해준 양질의 청동종을 주조하는 비밀을 가진 유일한 사람임을 그들에게 말하고, 자신의 주장대로라면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임을 그들에게 말해준다.그 남자들은 처음에는 무시하지만 곧 동의하고, 보리스카가 그 프로젝트를 책임지게 된다.

현장에서 보리스카는 구덩이의 위치 선택, 적절한 진흙의 선택, 곰팡이의 건축, 용광로의 발사, 종을 들어올리는 일꾼들의 본능에 반박하고 도전한다.노동자들은 곧 그의 아버지가 그들을 다르게 대했다고 불평하고 그의 명령을 거부하는 한 노동자는 벌을 받는다.종을 만드는 과정은 수백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거대하고 값비싼 노력으로 성장하며 보리스카는 그의 본능에 의해서만 인도된 몇 가지 위험한 결정을 내린다; 곧, 심지어 그는 이 프로젝트의 잠재적인 성공을 의심한다.현장에 도착한 안드레이는 캐스팅 도중 묵묵히 보리스카를 지켜보며, 젊은 남자도 그를 알아본다.

종을 만드는 동안, 첫 번째 순서부터 스코모록(제스터)이 종을 올리는 것을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 사이에서 다시 나타나고, 안드레이를 보고, 그는 그를 수년 전의 자신의 폄하자인 키릴로 착각하여 죽이겠다고 위협한다.Kirill이 그 남자를 암시하는 바람에 그는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했다.키릴은 곧 도착하여 침묵하는 안드레이를 대신하여 개입하고 나중에 안드레이에게 안드레이가 그림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재능에 대한 죄 많은 부러움이 사라졌고, 스코모로를 비난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고 사적으로 고백한다.그러자 키릴은 신이 내린 그림의 재능을 헛되이 보내게 한 안드레이를 비판하고 예술성을 재개하기 위해 안드레이에게 잔소리를 하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한다.

안드레이 루블프의 유명한 삼위일체 아이콘 (c. 1410; 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 갤러리)

종을 만드는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보리스카의 자신감은 서서히 자신이 겉으로 보기에 그 일에 성공한 것 같다는 망연자실한 불신으로 변한다.용광로가 열리고 용해된 금속이 주형에 쏟아질 때, 그는 개인적으로 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보리스카가 여러 차례 활동 배경으로 퇴색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작업팀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완성이 끝나면 종은 탑에 게양되고 종은 제사장의 축복을 받아 대공과 그의 수행원들이 취임식을 위해 도착한다.종을 울릴 준비가 되어 있는 가운데, 왕실 수행원의 일부 이탈리아 대사들은 종을 울릴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벨이 울리지 않으면 대공이 모두 참수한다는 것을 보리스카와 작업반원들이 알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또한 대공이 이미 블라디미르를 급습한 동생을 참수했다는 이야기도 엿듣는다.)

전무가 천천히 벨의 딱지를 앞뒤로 구슬려 각 스윙으로 벨의 입술에 더 가깝게 밀어 넣으면서 군중들 사이에서는 조용하고 괴로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집회장 건너편 팬에 흰 옷을 입은 듀로치카가 나타나며, 말을 끌고 가다가 아마도 그녀의 아이로 추정되는 아이가 군중 속을 걸어가고 있다.결정적인 순간에 종소리가 완벽하게 울리고,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식이 끝난 후 안드레이는 보리스카가 땅바닥에 쓰러져 흐느끼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그는 아버지가 실제로 종소리를 치는 비밀을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안드레이는 그 성공적인 울림이 기뻐하는 군중들에게 끼친 효과에 감명을 받아 자신의 예술이 가져다 줄지도 모르는 기쁨을 깨닫는다.그는 자신의 침묵의 맹세를 깨고 소년에게 "너희는 종을 던질 것이다.아이콘은 내가 칠하겠어."안드레이는 그리고 나서 듀로치카와 소년과 말이 먼 곳의 진흙밭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것을 본다.영화의 8부는 이 장면으로 끝나고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에필로그

에필로그는 색상으로 영화의 유일한 부분이며, 안드레이 루블프의 실제 아이콘 중 몇 가지에 대한 시간적, 그러나 여전히 생생한 디테일을 보여준다.아이콘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표시된다.엔트론드 그리스도, 열두 사도, 고음, 열두 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예수님, 그리스도의 탄생, 엔트론드 그리스도의 탄생, 변형, 레자로스의 부활, 나사로스의 부활, 그리스도의 탄생, 트리니티, 대천사 마이클, 사도 바울, 구원자.마지막 장면은 아이콘으로부터 엇갈리고, 네 마리의 말이 천둥과 비를 맞으며 강가에 서 있는 것을 보여준다.

캐스트

대공의 아이들의 목소리는 클라라 루미야노바에 의해 제공되었다.

생산

1961년, 타르코프스키는 첫 장편 영화 이반의 유년기를 작업하던 중 모스필름에게 러시아 최고의 아이콘 화가 안드레이 루블프의 삶에 관한 영화를 제안하였다.1962년 계약이 체결됐고 1963년 12월 첫 치료가 승인됐다.타르코프스키와 그의 공동 시나리오 작가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는 중세의 글과 연대기와 중세 역사와 예술에 관한 책을 연구하면서 대본에 2년 넘게 일했다.1964년 4월에 대본이 승인되었고 타르코프스키는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3]동시에 이 대본은 영향력 있는 영화 잡지 이스쿠스스트보 키노에 실렸고, 역사학자, 영화 평론가,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널리 논의되었다.안드레이 루블레프에 대한 논의는 영화의 예술적 측면이 아닌 사회정치적, 역사적 측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타르코프스키에 따르면, 안드레이 루블프의 삶에 대한 영화의 원래 생각은 영화배우 바실리 리바노프 때문이었다.리바노프는 모스크바 외곽의 숲을 거닐다가 타르코프스키, 콘찰로프스키와 함께 각본을 쓰자고 제안했다.그는 또한 안드레이 루블프를 연기하고 싶다고 언급했다.[8]타르코프스키는 이 영화가 안드레이 루블레프에 관한 역사 영화나 전기 영화라고 의도하지 않았다.대신 창의적인 인물의 성격과 그가 살아가는 시대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에 동기부여가 되었다.그는 예술가의 성숙함과 그의 재능의 발전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러시아 문화의 역사에서 그의 중요성에 대해 안드레이 루블프를 선택했다.[9]

캐스팅

타르코프스키는 아나톨리 솔로니친을 안드레이 루블레프 역으로 캐스팅했다.이때 솔로니친은 스베르들롭스크의 한 극장에서 무명의 배우였다.타르코프스키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안드레이 루블프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시청자들에게 다른 역할을 상기시키지 않을 무명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이 그가 선호하는 접근법이었다고 한다.영화잡지 이스쿠스스트보 키노에서 영화 대본을 읽었던 솔로니친은 이 역할에 매우 열성적이어서 타르코프스키를 만나기 위해 자비로 모스크바를 여행했고 심지어 이 역할을 자신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10]타르코프스키는 "솔로니친과 나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하며 같은 기분을 느꼈다.안드레이 루블레프 역을 위해 그는 "악마적인 단심성을 볼 수 있는 뛰어난 표현력을 가진 얼굴"을 요구했다.타르코프스키에게 솔로니친은 올바른 신체적 외모와 복잡한 심리 과정을 보여주는 재능을 제공했다.[11]솔로니친은 감독과의 작업을 계속하면서 솔라리스, 미러, 스토커에 출연했고, 타르코프스키가 1976년 모스크바 렌콤 극장에서 햄릿을 무대 연출한 주연을 맡았다.솔로니친은 1982년 암으로 사망하기 전 타르코프스키의 1983년 이탈리아-러시아 공동제작 '그리움기아'에서 주인공 안드레이 고르차코프 역을 맡았고,[12] 타르코프스키가 최종작인 ' 희생'으로 크게 변모할 '마녀'라는 제목의 프로젝트에 출연할 예정이기도 했다.[13]

촬영

존슨에 따르면 J. Hoberman은 영화 <기준집> 개봉을 위한 자신의 영화 에세이에서 1964년 9월 촬영 개시일을 조금 앞당긴 것으로 보고하면서 대본 승인 후 1년이 지난 1965년 4월이 되어서야 촬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14][15]초기 예산은 160만 루블스였으나 100만 루블스로 여러 차례 삭감되었다(비교적으로 세르게이 본다르쿠크의 전쟁과 평화는 800만 루블스의 예산이 있었다).예산 제한으로 인해, 쿨리코보 전투를 보여주는 오프닝 장면을 포함하여, 각본의 몇 장면이 삭감되었다.대본에서 오려낸 다른 장면으로는 대공의 동생이 백조를 사냥하는 사냥 장면과 두로치카를 도와 러시아-타타르 아이를 낳는 농민들의 모습이 나온다.[14]결국 이 영화는 130만 루블의 제작비가 들었고, 폭설로 인해 제작비가 초과되어 1965년 11월부터 1966년 4월까지 촬영에 차질을 빚었다.이 영화는 네를 강블라디미르/수즈달, 프스코프, 이즈보르스크, 페초리의 역사적 장소와 장소에서 촬영되었다.[16]

타르코프스키는 루블프의 아이콘 중 일부를 컬러로 보여주면서 흑백으로 메인 필름과 에필로그 촬영을 선택했다.인터뷰에서 그는 일상생활에서 의식적으로 색깔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주장으로 그의 선택에 동기를 부여했다.[17]결과적으로, 루블브의 삶은 흑백인 반면, 그의 예술은 컬러로 되어 있다.따라서 이 영화는 예술가의 예술과 그의 사생활의 공동의존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타르코프스키는 1969년 인터뷰에서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비행사는 "창조가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제물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대담한 것의 상징"이라고 말했다.어떤 사람이 그것이 가능해지기 전에 날기를 원하든, 어떻게 하는지 배우지 못한 채 종을 던지거나, 아이콘을 그리기를 원하든 간에, 이 모든 행동들은 그의 창조물의 대가를 위해 인간은 죽어야 하고, 자신의 작품에 자신을 녹여야 하고, 자신을 완전히 바쳐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18]

루블레브 아이콘의 색상 순서는 루블레프의 가장 유명한 아이콘인 트리니티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며 선택된 디테일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타르코프스키에 따르면 이 컬러 피날레를 포함시킨 한 가지 이유는 시청자에게 휴식을 주고 루블레프의 삶에서 벗어나 반성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이 영화는 마침내 빗속에서 강물에 떠 있는 말의 이미지로 막을 내린다.타르코프스키에게 말은 생명을 상징했고, 마지막 장면에 (그리고 영화의 많은 다른 장면에) 말을 포함시키는 것은 삶이 루블레프의 모든 예술의 근원이라는 것을 의미했다.[10]

편집

이 영화의 첫 컷은 안드레이 패션(러시아어: с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арорира ,, Strasti안드류, "안드레이, "안드레이에 따른 열정"))))))으로 알려졌지만, 이 영화의 첫 컷은 이 제목이 안드레이이 영화의 첫 컷은 195분이 넘었고 개봉한 길이로 편집되었다.1차 컷팅은 1966년 7월에 완료되었다.고스키노는 이 영화의 길이, 부정성, 폭력성, 나체성을 이유로 컷을 요구했다.[1][19]타르코프스키가 이 첫 번째 버전을 완성한 후, 이 영화가 소련에서 널리 개봉되기까지는 5년이 걸릴 것이다.국방부의 삭감 요구는 우선 190분짜리 판으로 귀결되었다.고스키노 회장 알렉세이 로마노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타르코프스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무부는 추가 삭감을 요구했고 타르코프스키는 그 길이를 186분으로 줄였다.[20]

로버트 버드는 편집된 영화의 최종 타르코프스키 컷과 영화의 첫 컷을 비교한 분석에서 다음과 같이 편집 과정을 요약했다.

"가장 눈에 띄는 상처는 석공들의 퉁겨진 눈, 불타는 소, 그리고 (끔찍한 추락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을 채찍질하는 가장 생생한 사진들이었다.플래시백이나 환상의 4가지 임베디드 장면도 완전히 잘라냈다.2화에서 비행에 대한 포마의 환상, 4화에서는 비에 젖은 참나무 아래 세 승려의 추억, 5화에서는 대공을 굴욕하는 어린 왕자의 환상, 7화에서는 보리스카의 벨 파운딩에 대한 추억.전체적으로 안드레이 루블레프 185분 버전에서 완전히 삭제된 36개의 샷과 상당히 단축된 85개의 샷을 세어 보았는데, 각각 2개 이상의 부분으로 나누어진 9개의 매우 긴 촬영을 포함했다.총 사격 횟수는 403회에서 390회로, 평균 사격 길이는 31"에서 28"로 감소했다.불가침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수열은 색으로 된 에필로그뿐이었다."[21]

폭력 묘사

개봉 당시 논란을 일으켰던 동물에 대한 폭력, 고문, 잔혹함이 영화 속 여러 장면에 담겨 있다.이러한 장면들은 대부분 블라디미르 공습 중에 일어났는데, 그 중에는 맹목적인 장면과 승려의 고문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었다.동물에 대한 잔인함과 관련된 장면들은 대부분 시뮬레이션 되었다.예를 들어, 블라디미르에 대한 타타르 공습 중에 소 한 마리가 불을 지른다.실제로 그 소는 석면으로 덮인 외투를 입고 있었고 신체적으로 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한 장면은 말의 실제 죽음을 묘사한다.말은 계단 위에서 떨어진 다음 창으로 찔린다.이런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타르코프스키는 말의 목덜미를 쏘는 등 부상을 입힌 뒤 계단에서 밀어내면서 동물이 주춤거리다가 계단 아래로 떨어졌다.거기서부터 카메라는 말에서 떨어진 일부 군인들에게 왼쪽을 향해 부채질한 다음 바로 말 위에 다시 올라타는데, 우리는 그 말이 창살에 찔리기 전에 등에 걸려 넘어지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본다.그 후 그 동물은 카메라에서 떨어져서 머리에 총을 맞았다.이것은 덜 소모적이고 높이 평가되는 스턴트 말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해칠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행해졌다.그 말은 도살장에서 들여와 세트장에서 살해된 후 상업적 소비를 위해 아바토르로 돌아왔다.인터뷰 진행자인 알렉산드르 립코프는 1967년 리터투르노 오보즈레니와의 인터뷰에서 타르코프스키에게 "영화의 잔인성은 관객들에게 충격과 충격을 주기 위해 정확하게 보여진다"고 제안했다.그리고 이것은 그들을 밀어낼 수도 있다."타르코프스키는 잔인함을 과소평가하기 위한 시도로 "아니,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이것은 시청자의 인식을 방해하지 않는다.게다가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상당히 민감하게 했다.나는 훨씬 더 잔인한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들의 이름을 댈 수 있는데, 이 영화들은 우리의 영화들이 꽤 겸손해 보인다."[16]

석방 및 검열

이 영화는 1966년 모스크바의 돔 키노에서 단 한 번의 상영으로 초연되었다.이 영화의 자연주의적인 폭력 묘사에 대한 일부 비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3]그러나 이 영화는 소련 검열관들로부터 개봉 승인을 얻는 데 실패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리뷰에서 "이 영화의 이념적 오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썼다.안드레이 루블레프는 자신의 영웅적 삶의 맥락인 대도시의 급속한 발전과 몽골족과의 투쟁 등을 그려내지 못해 '반역사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22]1967년 2월 타르코프스키와 알렉세이 로마노프는 이 영화가 아직 폭넓은 개봉을 승인받지 못했다고 불평했지만, 이 영화의 추가 장면을 잘라내지는 않았다.[20]

안드레이 루블레프10월 혁명 50주년을 맞아 소련 영화를 회고하는 계획적인 소련의 일환으로 1967년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다.공식 답변은 영화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영화제에서도 상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1969년 칸 영화제 주최 측이 두 번째 초청을 했다.소련 관계자들은 이 초대를 받아들였지만 경쟁 속에서 영화제 상영만 허용했고, 영화제 마지막 날 새벽 4시에 단 한 차례만 상영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이 영화는 FIPRESCI 상을 받았다.소련 관계자들은 프랑스 등지에서 이 영화의 정식 개봉을 막으려 했으나 1969년 프랑스 배급사가 합법적으로 판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19]

소련에서는 영화 감독 그리고리 코진체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이스쿠슈트보 키노[14] 편집장 예브게니 수르코프 등 타르코프스키 작품의 영향력 있는 추종자들이 안드레이 루블프의 석방을 압박하고 있다.타르코프스키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라리사 타르코프스카야는 이 영화의 개봉을 지지하는 다른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 편지를 썼고, 라리사 타르코프스카야는 당시 소련 총리였던 알렉세이 코시긴에게도 이 영화를 함께 갔다.

타르코프스키의 추가 감축 거부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이 루블프는 마침내 1971년 12월 24일, 186분짜리 1966년 판으로 발매되었다.이 영화는 277장의 인화판으로 개봉되어 298만 장의 티켓이 팔렸다.[23]이 영화가 개봉되자 타르코프스키는 일기장에서 이 영화의 포스터는 한 장도 볼 수 없지만 모든 극장은 매진되었다고 말했다.[24]

타르코프스키 최종 컷

고스키노의 요구로 인한 삭감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는 결국 원작 205분에서 186분 컷을 승인했다.

아무도 안드레이 루블브에게서 아무것도 잘라본 적이 없다.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내가 직접 몇 군데 베었어.첫 번째 버전에서 그 영화는 3시간 20분이었다.두 번째 — 3시간 15분.나는 최종본을 3시간 6분으로 줄였다.나는 최신 버전이 가장 좋고, 가장 성공적이라고 확신한다.그리고 너무 긴 장면만 잘라냈어시청자는 그들의 결석도 눈치채지 못한다.그 컷들은 영화의 주제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바꾸지 않았다.의미가 없는 지나치게 긴 장면을 없앤 셈이다.우리는 시청자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기 위해, 단지 우리의 의도를 파괴할 뿐인 불쾌한 인상과는 반대로, 어떤 잔혹성의 장면들을 줄였다.긴 토론을 하는 동안 나에게 그 삭감 조치들을 제대로 하라고 충고했던 내 친구들과 동료들은 결국 모두 옳게 되었다.그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처음에 나는 그들이 나의 창조적인 개성을 압박하려는 인상을 받았다.나중에 나는 이 영화의 최종 버전이 내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이해했다.그리고 나는 그 영화가 현재의 길이로 짧아진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10]

1966년 '안드레이에 따른 열정'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의 원작은 2018년 The Criteria Collection에서 출판되어 DVD와 블루레이 형식으로 모두 발매되었다.[25]

허가되지 않은 소비에트 텔레비전 버전

1973년 이 영화는 타르코프스키가 허가하지 않은 101분 버전으로 소비에트 텔레비전에서 상영되었다.이 버전에서 잘라낸 주목할 만한 장면은 타타르족의 습격과 벌거벗은 이교도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안드레이 루블레프의 아이콘들을 자세히 보여주는 에필로그는 소련이 아직 컬러 TV로 완전히 전환하지 못했기 때문에 흑백으로 되어 있었다.1987년 안드레이 루블프가 다시 소련 TV에 방영되면서 소련이 컬러 TV로 완전히 전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에필로그는 다시 흑백으로 바뀌었다.이 영화의 원작과 또 다른 차이점은 안드레이 루블프의 생애와 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기술한 짧은 해설 노트가 영화 초반에 포함되었다는 점이다.[26]1973년 미국 등에서 이 영화가 개봉되자 배급사 컬럼비아픽처스가 20분 더 단축해 많은 평론가의 눈에 이 영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난장판으로 만들어지며 악평이 이어졌다.[1]

첫 번째 컷 버전의 스콜세지 사용

1990년대 중반 기준 컬렉션레이져Disc에 대한 안드레이 루블프의 첫 컷 205분 버전을 공개했는데, 이 버전은 1999년 기준시가 DVD로 재발매했다(기준 컬렉션은 타르코프스키가 명시한 186분 버전에 대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이 버전을 "디렉터 컷"으로 광고한다).타르코프스키의 여동생에 따르면, 이 영화의 편집자 중 한 명인 마리나 타르코프스카야는 침대 밑에 205분 컷팅된 사진을 비밀리에 보관했다.[27]이 프로젝트의 제작자는 이 비디오 전송은 영화 제작자인 마틴 스콜세지가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얻은 필름 인쇄물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15]2016년 타르코프스키가 선호하는 186분 버전을 이용해 영국에서 블루레이 버전이 출시됐다.[28]스탠더드는 2018년 9월 이 영화의 첫 컷과 마지막 컷을 모두 DVD와 블루레이로 출시했다.[29]

리셉션

안드레이 루블프는 여러 개의 상을 받았다.1969년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소련 관계자들의 압력 때문에 이 영화는 경쟁 속에서만 상영될 수 있었고, 따라서 황금종려상이나 그랑프리에는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국제 영화 평론가인 FIPRESCI의 상을 받았다.1971년 안드레이 루블프프랑스 영화 비평가 신디케이트의 비평가상을, 1973년에는 주시상(Jussi Award for Best Foreign Film)을 수상했다.

안드레이 루블프는 42개 리뷰를 바탕으로 리뷰 집계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95%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평균 8.92/10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이 웹사이트의 비판적인 합의는 "안드레이 루블프는 예술, 신앙, 역사의 싹쓸이 등에 관한 감동적인 논문을 형성하는 대담한 대서사시"라고 말한다.[30]

더 빌리지 보이스의 영화평론가 J. 호버만은 이 영화의 기준 DVD 발매에 포함된 필름 노트에 "2년 후 (1973년) 루블레프가 뉴욕 영화제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며 미국 배급사인 컬럼비아 픽처스가 20분을 더 단축했다"고 말했다.타임(매거진)은 영화를 닥터 지바고에 불리하게 비교했는데, 이 영화를 주목한 다른 뉴욕 평론가들은 루블프의 명백한 토막글을 이유로 탐사를 중단하라고 애원했다.[15]

레거시

이 영화는 2010년 엠파이어 매거진 '세계 영화 100대'에서 87위에 올랐다.[31]

이 영화는 이 영화에 이어 타르코프스키의 두 영화에 언급되어 있다.주인공의 방에 안드레이 루블프의 아이콘이 배치되어 1972년에 만들어진 솔라리스에서 처음 언급된다.[32]그것은 1975년에 만들어진 미러의 벽에 이 영화가 걸려있는 포스터를 다음에 참조한다.[33]

1995년, 바티칸안드레이 루블프45편의 "위대한 영화" 목록에 올렸다.The Village Voice는 비평가들의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1999년에 이 영화를 "세기의 가장 훌륭한 영화" 250개 목록에서 112위로 선정했다.[34]

이 영화는 2008년 프랑스의 저명한 잡지 Cahiers du cinéma에 의해 "100개의 가장 위대한 영화" 목록에 77위로 선정되었다.[35]2010년 안드레이 루블프영국 신문 시리즈 "역대 최고의 영화"에서 가디언옵서버의 비평가들이 투표한 공동 2위를 차지했다.[36]또한 2010년에 이 영화는 가디언의 역대 최고의 25편의 절지동물 영화 중 1위를 차지했다.[37]

또한 2010년 토론토 국제 영화제안드레이 루블레프가 87위를 차지한 "필수 영화 100" 목록을 발표했다.[38]

2011년 조안나 호그 감독은 이 영화를 자신의 삶을 바꾼 영화로 꼽았다.[39]2012년 Sight & Sound 여론 조사에서는 평론가 여론조사에서 역대 26위, 감독 여론조사에서는 13위에 올랐다.2002년 초판 목록에서 이 영화는 평론가들[40][41] 사이에서 35위, 감독들 사이에서 24위를 차지했다.[42][43]같은 잡지의 비평가 여론조사에서 1982년과 1992년 각각 11위와 24위를 기록했다.[44]2018년에 이 영화는 43개국에서 209명의 영화 평론가들이 투표한 BBC의 100대 외국어 영화 목록에서 40위를 차지했다.[45]

참고 항목

참조

각주
A 소련에서는 생산자의 역할이 서양 국가들과는 달랐고 라인 생산자단위 생산 관리자의 역할과 더 유사했다.[46]
메모들
  1. ^ a b c d Hoberman, Jim. "Andrei Rublev: An Icon Emerges". The Criterion Collection. Retrieved 18 April 2019.
  2. ^ "ANDREI RUBLEV (15)". British Board of Film Classification. 22 February 2016. Retrieved 22 February 2016.
  3. ^ a b c Turovskaya, Maya (1989). Tarkovsky: Cinema as Poetry. London: Faber and Faber. ISBN 0-571-14709-7.
  4. ^ "Festival de Cannes: Andrei Rublev". festival-cannes.com.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1 October 2012. Retrieved 2009-04-10.
  5. ^ "Andrei Rublev (1966)". British Film Institut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3 March 2015. Retrieved 2 March 2015.
  6. ^ "Critics' top 100". bfi.org.uk.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6 October 2013. Retrieved 13 March 2016.
  7. ^ "Directors' top 100". bfi.org.uk.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8 April 2014. Retrieved 13 March 2016.
  8. ^ Ciwilko, Artur (1965). "Interview Andrzej Tarkowski — o filmie "Rublow"". Ekran. 12: 11.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December 2007. Retrieved 9 December 2007.
  9. ^ Bachman, Gideon (1962). "Begegnung mit Andrej Tarkowskij". Filmkritik. 12: 548–552.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1 December 2007. Retrieved 9 December 2007.
  10. ^ a b c Ciment, Michel; Schnitzer, Luda & Jean (October 1969). "Interview L'artiste dans l'ancienne Russe et dans l'URSS nouvelle (Entretien avec Andrei Tarkovsky)". Positif. 109: 1–13. Archived fr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