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일로 봉기
Uprising of Ivaylo이바일로 봉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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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불가리아 전쟁의 일부 | |||||||
13세기 후반의 불가리아.이바일로의 봉기 지역은 붉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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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이바일로 휘하의 불가리아인 | 불가리아의 귀족 비잔틴 제국 황금 군단 | ||||||
지휘관과 지도자 | |||||||
이바일로 † | 콘스탄티누스 틱 † 이반 아센 3세 미카엘 8세 노가이 칸 |
이바일로 봉기(불가리아어: исаанноооооо))))))))))))))))))는 콘스탄티누스 티크 황제와 불가리아 귀족의 무능한 통치에 대항한 불가리아 농민들의 반란이었다.반란은 주로 불가리아 북동부에서 몽골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중앙 당국의 실패에 의해 촉발되었다.몽골인들은 수십 년 동안 특히 도브루자 지역에서 불가리아 인구를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국가기관의 약점은 제2 불가리아 제국의 봉건화가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대 비잔틴의 고학자들이 돼지 사육사로 일했다는 이바이로 소작농 지도자는 성공적인 장군이자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임이 증명되었다.반란이 일어난 첫 달에는 몽골군과 황제군을 격파하여 개인적으로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틱을 살해하였다.이후 수도 타르노보에 의기양양하게 입성하여 황제의 미망인인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제네와 결혼하고 귀족들에게 그를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하도록 강요하였다.
비잔틴 황제 마이클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이 상황을 이용하려 했고 불가리아에 개입했다.그는 전 미츠오 아센 황제의 아들인 이반 아센 3세를 보내 큰 비잔틴 군대의 우두머리에 불가리아 왕위를 주장하게 했다.동시에 미카엘 8세는 몽골군을 북쪽에서 공격하도록 부추겨 이바일로가 두 전선에서 싸우게 했다.이바일로는 몽골군에게 패배하여 드라스타르의 중요한 요새에 포위되었다.그가 없는 동안 타르노보의 귀족들은 이반 아센 3세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그러나 이바일로는 포위망을 무너뜨렸고 이반 아센 3세는 다시 비잔틴 제국으로 도망쳤다.미카엘 8세는 두 개의 대군을 보냈으나 둘 다 발칸 산맥에서 불가리아 반군에 패했다.
한편 수도의 귀족들은 자신의 황제 중 하나인 거장 조지 테터 1세를 천거했다.이바일로는 적에게 포위되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지원이 줄어들자 몽골의 군벌 노가이 칸의 궁정으로 도망쳐 원조를 구했으나 결국 살해되었다.반란의 유산은 불가리아와 비잔티움에서 모두 견디어 냈다.농민 황제가 서거한 지 몇 년이 지난 후, 비잔틴 제국에 두 명의 "사도-이바일로스"가 나타나 민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배경
불가리아의 정치 상황
이반 아센 2세(재위 1218–1241)가 타계한 후, 유아 황제의 연이은과 귀족들 간의 내부 투쟁으로 인해 거대 불가리아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북쪽으로는 1242년 몽골군의 침략에 직면했고 그 후 끊임없이 습격했다.비록 이반 아센 2세가 죽기 직전에 몽고군을 격파했지만 칼리만 1세 아센(재위 1241–1246)의 섭정은 황폐화를 피하기 위해 몽골군에 매년 헌납하는 데 동의했다.[1]몽골의 침략은 유라시아 스텝의 서쪽에 느슨하게 잡혀 있던 쿠만 연방의 붕괴와 몽골 황금 호드의 기초가 되었다.이것은 불가리아에 장기적인 정치적, 전략적 결과를 가져왔다 —쿠만족은 불가리아 동맹국이었고 종종 불가리아 군대에 보조 기병대를 공급했고, 반면 골든 호드는 적대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2]남쪽으로는 불가리아가 몽골의 초기 공격에서 벗어난 니케아 제국에게 트라이스와 마케도니아 지역의 많은 부분을 빼앗겼다.[3]베오그라드, 브라니체보, 세베린 바나트 등 북서쪽 땅은 헝가리 왕국에 의해 정복되었다.[4]
1256년 불가리아는 불가리아 남동부에 정착한 이반 아센 2세의 친척인 미츠오 아센(재위 1256–1257)과 타르노보에서 귀족들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 스코프제 콘스탄티누스 티크(재위 1257–1277)의 볼랴르 사이에 내전으로 전락했다.동시에, 루스의 왕자 출신 헝가리 귀족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는 불가리아 황제라는 칭호의 또 다른 청구인으로서 비딘에 자리를 잡았고 헝가리 왕국에서 그렇게 인정받았다.[5][6]1261년까지 콘스탄티누스 틱이 승리자로 부상했지만 그의 20년 집권으로 불가리아에 안정을 가져오지는 못했다.비딘은 타르노보의 중앙당국과 분리되어 있었고 몽골인들은 정기적으로 불가리아 북동부에서 캠페인을 벌이며 농촌을 약탈하고 경제를 마비시켰다.[7][8]같은 해 마이클 8세 팔라이올로고스(재위 1259–1282)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불가리아의 주요 적국으로 비잔틴 제국을 복원했다.1260년대에 콘스탄티누스 틱은 사냥 사건으로 다리가 부러져 허리 아래부터 마비되었다.[9]이 장애는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켰고 그는 비잔틴 궁정에서 그녀의 친척들과 끊임없이 호기심을 일으키는 일에 관여했던 두카이나 라스카리나 두 번째 부인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후에 그는 세 번째 부인인 마리아 팔라이올로기나 칸타쿠젠에게 국정을 맡겼는데, 이것은 그녀의 아들의 후계 확보를 위한 행동이 귀족들을 소외시킨 수치스러운 호기심 많은 사람이다.[9][10][11]
내부 상황과 이바일로 상승
13세기 불가리아의 내부 정치 발전과 봉건화는 농노의 증가와 더불어 지주 귀족의 권력 증대를 초래했다.이로 인해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들 사이에 더 많은 자치를 바라는 염원이 생겨났다.이들 중 상당수는 타르노보에 명목상 황제를 인정하는 반독립적 피신처를 설립하고 외부 위협에 대처하는 중앙당국의 역량을 크게 줄였다.[12]13세기 후반 농민들은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봉건 영주들의 이익을 위해 개인적인 특권을 상실하고 있었고, 이는 결국 농민들의 수입과 기회를 감소시켜 그들의 삶을 악화시켰다.[13][14]이와 병행하여 콘스탄티누스 틱이 나라의 북동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몽골의 침략을 종식시키지 못한 것은 도브루자 주(州)의 국가기관의 기둥을 산산조각 내고, 봉기의 발단과 신속한 성공에 기여하였다.[13]몽고군의 습격은 반독립적인 노가이 칸이 감행한 것으로, 그는 황금 호르드의 합법적인 통치자 멩구-티무르(재위 1266–1280)보다 더 강력했으며, 현대 몰도바와 우크라이나의 스텝을 지배했다.[9]
프로바디아 인근 지역일 가능성이 높은 북동 불가리아 태생인 이바일로가 민중들의 반란을 선동하기 시작했다.[15]그는 현대 비잔틴의 고질적인 사람들에 의해 바르도크바(레투스) 또는 라카나스(채식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의 본명은 스바릭 복음서에 첨부된 노트에서만 알려져 있다.[13][16][17][18]비잔틴 역사학자 조지 파키메레스는 자신이 돈 때문에 돼지를 돌보는 돼지 사육사라고 진술했다.[19]그러나 역사학자 존 파인 씨는 돼지는 당시 주요 축산물이었고 큰 무리를 소유하는 소유자는 지역 사회의 엘리트 중 일부였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9]이바일로는 백성을 이끌 수 있는 하나님의 비전이 있었고, 하늘과 성도들과 접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사실, 그의 신비주의는 종교적인 마을 사람들의 지지와 추종자들을 신속하게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용되었다.[15][20]그는 많은 불가리아인들에게 신이 내린 구세주로 보여지게 되었다.[9]
반란 과정
초기의 승리
라카나스는 몽고 팔랑가를 결탁하여 자신이 이끄는 병사들과 함께 몽고 팔랑가를 공격하여 철저히 격파하고 다시 다른 부대를 공격했다.그리하여 며칠 만에 그는 영광으로 뒤덮였다.[21]
— George Pachymeres on the victory of Ivaylo over the Mongols.
반란은 몽골의 황폐화가 가장 심한 불가리아 북동부에서 1277년 봄이나 여름에 일어났다.[22]1277년 여름, 이바일로가 약탈당한 몽골 부대와 대치하여 격파했다.곧 또 다른 승리가 뒤따랐고 가을이 되자 모든 몽골인들은 불가리아 영토에서 쫓겨났다.[23][24]수십 년 동안 불가리아의 팔을 피해온 것을 이룬 그의 인기와 명성은 빠르게 상승했다.그의 추종자들 중에는 마리아 황후의 호기심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늘어나고 있었다.[9]이바일로는 백성들에게 황제라는 칭송을 받았고 많은 지역이 그의 지배를 받았다.[23]
1277년 말에 콘스탄티누스 틱은 마침내 반란군에 맞서는 조치를 취했다.그는 부상 때문에 전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므로 작은 군대를 모아 천천히 전진했다.이바일로가 이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여 황제의 측근들을 많이 죽였고, 나머지 군대는 반란군에 가담하였다.이바일로는 개인적으로 콘스탄티누스 틱을 약탈하고,[25][26] 황제가 전투에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승리 후 이바일로는 국가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는데, 그 도시들은 항복하고 그를 황제로 하나씩 인정하였다.1278년 봄까지 수도 타르노보만이 마리아 황후의 지배하에 남아 있었다.[27]
비잔틴의 개입과 이바이로의 인정
한편 비잔틴 황제 마이클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사건을 감시하고 불가리아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비잔틴-불가리아 국경에 가까운 아드리아노플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25][27]콘스탄티누스 티크의 죽음은 비잔틴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처음에 마이클 8세는 그의 딸을 이바일로와 결혼시키는 것을 고려했지만, 결국 자신의 원생을 설치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결정했다.[20]그의 후보는 비잔티움으로 망명을 요청하고 아시아 마이너리티에 땅을 갖고 있던 퇴위한 미츠소 아센의 아들 이반 아센 3세였다.이반은 즉시 마이클 8세의 딸 아이린과 결혼하여 마이클 8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불가리아의 황제로 선포되었다.[28][29]비잔틴인들은 불가리아 귀족들에게 선물을 보내 이반 아센 3세를 지지하도록 선동했고 사절들은 타르노보에 파견되어 그의 인정과 마리아 황후의 항복을 주선했다.[27]한편 이바이로가 타르노보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이반 아센 3세는 비잔틴 군대의 선두에 서서 북쪽으로 진군했다.[29]
두 적대국에 직면한 마리아는 처음에는 아들 미카엘 아센 2세의 후계자 마이클 8세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비잔틴 황제는 무조건 항복을 주장했다.[27]그 후 비잔틴인들의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바일로와 협상에 들어갔고, 유일한 후계자로서 마이클 아센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그녀의 손과 불가리아 왕관을 제공했다.[30]동시대의 고학자인 조지 파키메레스는 마리아가 "고인이 된 남편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무시한다"[31]고 비난하지만, 사실 그녀의 결정은 그녀가[a] 이단자로 여겼던 삼촌 마이클 8세에 대한 증오와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구에 의해 추진되었다.[30]처음에 이바일로는 마리아가 무력으로[30]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을 제공한다고 주장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꺼렸지만 결국 "평화 때문에 내전에서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인정했다.[32]그러나 이바일로는 그것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관대함을 주는 사람임을 분명히 했다.[33]
1278년 봄에 이바일로가 승리하여 타르노보에 입성하여 마리아와 결혼하고 황제로 선포되었다.[33][34][35]그러나 이바일로는 국정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의 귀족들에 대한 권위를 공고히 하지 못했으며, 그들 자신의 영향력에 신경을 쓰고 있었으며, 마리아와 자주 다투기도 했다.[33][36]그는 여전히 압도적인 도전에 대처해야 했다 —비잔틴인들은 이반 아센 3세를 지지하기 위해 마이클 글라바스의 지휘 아래 많은 군대를 파견했고, 몽골인들을 북쪽에서 공격하도록 부추겨 두 전선에서 전쟁을 일으켰다.그러나 이바일로는 역적들에 대항하기 위해 그의 군대를 힘차게 준비했고, 많은 귀족들 사이에서 간신히 지지를 얻었다.[32]
비잔틴과 몽골에 대항한 캠페인
이바일로는 1278년 여름 타르노보를 떠나 북쪽으로 진군하여 몽고군을 격파하여 다뉴브 강을 건너게 하였다.[37][38]남쪽의 상황은 더 위험했다.비잔틴인들은 시프카 고개에서 흑해로 가는 발칸산맥을 따라 넓은 전선에 공격을 개시했다.그들은 몽골군이 패배하고 강화가 파견될 때까지 수비수들이 버티면서 산을 넘지 못했다.[38]엄청난 노력과 수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인들은 매우 높은 비용으로 거의 이득을 보지 못했다.[34]예를 들어 크테니아의 요새는 많은 공격 끝에 점령당했고 크란과 마글리즈의 성은 침략자들에게 많은 사상자와 함께 무너졌다.[38]불가리아 사령관 스탠은 보루이를 방어하는 동안 용감하게 쓰러졌고 이바일로의 동료들 중 많은 수가 전쟁에서 뛰어난 - 맘칠, 쿠만, 다미얀,[37][38] 칸초.개인적으로 이바일로가 이끄는 모든 전투는 성공적이었고 - 그는 스터데나와 피르기차에서[38] 싸웠으며 - 1278년 가을쯤에는 불가리아인들이 우위를 점하여 비잔티움인들이 캠페인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37][38]이바일로가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잔틴의 사기는 매우 낮았다.조지 파키메레스는 "라카나스[이바일로]의 손에 넘어간 것은 죽음에 준하는 것"이라고 썼다.[39]
남쪽의 상황이 통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바일로는 북쪽의 두 번째 몽골 공격에 맞닥뜨려야 했다.이번에는 불가리아인들이 노가이 칸의 정예부대와 맞섰다.몽고군이 우세했고 이바일로는 다뉴브 남쪽 둑의 중요한 도시 드라스타르에 포위되어 3개월간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37][40]대부분의 반란군이 북쪽에서 교전하고 있는 동안, 마이클 8세는 타르노보에서 귀족들과 협상을 시작했으며, 지역 고관들에게 이반 아센 3세의 주장을 인정하도록 설득했다.[40]1279년 초, 미카엘 글라바스 휘하의 비잔틴 군대가 바르나 근처에 상륙하여 수도로 출발하여 카심 구호가 지휘하는 몽골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36]타르노보의 엘리트들은 이바일로가 몽고와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비잔틴과 그들의 원생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이반 아센 3세는 황제로 선포되었고, 당시 이바일로의 아이를 낳았던 마리아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유배되었다.[34][35][37]귀족들의 지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새 군주는 여동생 키라 마리아를 불가리아의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봉건 영주 중 한 명인 조지 테터와 결혼시켰고, 그의 재산은 체르벤에 집중되었다.[41]고등법원 타이틀 원동기상을 받은 카심 구키는 조지 테터의 부상이 자신의 부담이라고 느꼈고, 이반 아센 3세를 버리고 이바이로의 대의에 가담했다.[42]
한편 반군과 비잔티움 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불가리아군은 비잔틴이 바르나에 상륙한 뒤 두 동강이 났지만, 특히 코텔 고개와 바르비타 고갯길 주변에서 새로운 활기로 동부 발칸 산맥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40]그곳의 불가리아 진지는 북쪽과 남쪽 모두에서 포위되어 있었다.비잔틴인들은 요새를 포위하고 하나씩 점령해야 했고, 이로 인해 시간과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많은 요새들이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비잔틴의 대형 세력들과 영구적으로 교전했다.[42]
1279년 봄, 이바일로는 드라스타르의 몽골 봉쇄를 가까스로 뚫고 타르노보를 포위했다.이 전진은 이반 아센 3세와 그의 지지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42][43]미카엘 8세는 그의 원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고 1279년 여름, 원생자리오스 무린의 지휘 아래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이바일로는 타르노보에 머물지 않고 1279년 6월 17일 코텔 고갯길에서 침략 숙주와 교전했다.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데비나 요새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불가리아인들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비잔틴의 일부는 그들의 지휘관과 함께 전투에서 전사했고, 나머지는 이바일로의 명령에 의해 붙잡혀 죽었다.[34][44][45]한 달 후, 비잔틴군은 원발자리오스 아핀이 이끄는 5,000명의 군대를 다시 파견했다.이바일로는 1279년 8월 15일 발칸 산맥 동부에서 이들을 약혼시켰고 오랜 전투 끝에 비잔틴인들을 물리치고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아프리닌을 살해했다.[44][45]이바일로는 두 전투 모두에서 "분노와 싸우며 많은 위업을 달성했다"[46]고 한다.
이바일로의 반란과 죽음
비잔틴이 패배하면서 이반 아센 3세의 권위가 흔들렸다.그와 아이린은 1190년 트라이아브나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승리한 이후 국고에 보관되어 있던 비잔틴 제국 휘장을 들고 타르노보에서 은밀히 도망쳤다.[47][b]마이클 8세는 그 커플의 비겁함에 격분하여 며칠 동안 그들에게 청중을 허락하지 않았다.[45]타르노보에서는 귀족들이 이바일로의 성문을 여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조지 테터 황제를 선출하여 반란군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주었다.[44]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위협은 다루지 않았고, 이바일로는 불가리아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몽골과 비잔틴의 압도적인 세력에 맞서 나라를 통일할 수 없었다.그 결과 평화에 대한 전망이 없는 끝없는 전쟁에 환멸을 느낀 이바일로의 추종자들은 그의 명분을 저버리기 시작했다.지지도가 떨어지자 1280년 이바일로는 카심 구걸을 비롯한 몇 명의 충직한 동료들과 함께 다뉴브 강을 건너 노가이 칸에게 원조를 구했다.[34][45][48]
처음에는 이바일로가 노가이 칸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그의 행방이 콘스탄티노플에 전해지자 마이클 8세는 이반 아센 3세에게 풍부한 선물을 몽고 궁정에 보내 도움을 청했다.[45][48][49]노가이 칸은 이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고 몇 달 동안 두 명의 연기자들에게 계속 도움을 약속했다.결국 이 몽골 지도자가 마이클 8세의 사생아인 유프로시네 팔라이올로기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비잔틴의 영향력이 우세했다.[49]이바일로와 이반 아센 3세가 노가이 칸의 양옆에 앉는 잔치에서 "아버지인 황제[마이클 8세]의 원수로서 살 자격이 없다"[50]는 말과 함께 이바일로를 가리키며 사형을 명했다.이바일로는 카심 구걸과 함께 그 자리에서 정당하게 살해되었다.[34][45][49]이반 아센 3세는 유프로시네의 옹호 때문에 그 운명을 피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고, 결국 아시아 마이너스의 그의 영지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1303년에 사망했다.[48][51]
여파
...농민들은 자기들의 땅과 농노동을 떠나 자기들의 의지 아래 군인이 되어 [...], 라카나스의 깃발 아래 줄을 서서 그와 함께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52]
— George Pachymeres on Pseudo-Ivaylo.
이바일로의 유산은 그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후 불가리아 국경을 넘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비잔틴 제국에는 적어도 두 개의 "Pseudo-Ivaylos"가 나타났다.[53]1284년 이바일로라고 주장하는 불가리아인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 팔라이올로고스 황제에게 투르크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의 공로를 바쳤다.[54]안드로니코스 2세는 마리아 전 대사에게 그 남자가 그녀의 남편인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녀는 그를 사기꾼으로 폭로했다.사이비-이바일로는 구금되었지만, 터키인들이 "이바일로"[52]를 좋아했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비잔틴 황제는 잃을 것이 없다고 계산하고 터키군을 상대로 행군을 허용했다."이바일로"는 반란이나 쿠데타를 두려워한 비잔틴 귀족들의 우려에 크게 기여하여 거대한 농민군을 집결시켰다.그러자 황제는 무슨 핑계로 사이비-이바일로를 소환하여 그를 투옥시켰다.[54]몇 년 후 비잔틴 제국에 또 다른 불가리아인(본명은 이반)이 나타나 그가 이바이로라고 주장했다.그는 터키인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받았으나 몇 번의 승리 후에 붙잡혀 죽었다.[54]
불가리아에서는 반란이 종식된 후 20년이 제2제국의 가장 낮은 지점이었다.[54]조지 테르터 1세(재위 1280–1292)와 그의 후계자 스마일츠(재위 1292–1298)는 국가 내정에 대한 몽골의 끊임없는 간섭과 봉건적 거물들을 옹호하는 제국 권위의 점진적인 해체로 특징지어졌다.[55]불가리아는 발칸 산맥의 남쪽에 있는 거의 모든 땅을 비잔틴에 빼앗겼으며 이러한 지역을 되찾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56]이 나라의 운명은 조지 테르터 1세의 아들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재위 1300–1321) 밑에서 더 좋게 바뀌었는데, 불가리아가 몽골에서 베사라비아를 인수하고 비잔틴에서 북부 트라세스를 다시 정복함으로써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57]
레거시
반란은 반군이 비잔틴과 몽골인들뿐만 아니라 불가리아 귀족들의 많은 압도적인 적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34][45]비록 궁극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바일로의 봉기는 중세 유럽의 다른 모든 대중적인 반란들이 실패한 목표인 황제로서의 지도자의 인정을 획득했다.사회주의 불가리아에서 반란은 봉건제도와 외적의 죄악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으로 그려졌다.[29]현대 불가리아에서 이바일로는 여전히 자유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사로 존경받고 있다.[53]그러나 이바일로와 그의 추종자들이 사회 개혁을 단행할 의도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29]반란이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고 이바일로가 미움받는 마리아 황후와 결혼했다는 점도 콘스탄티누스 틱 황제의 무능한 지배가 주효했음을 보여준다.[29]불가리아 역사학자들은 반군의 영웅주의를 찬양하고 봉기를 불가리아 사람들의 밝은 애국적 업적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바일로가 불가리아의 모든 사회 계층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모아 외부의 적들로부터 그 당시 분쟁을 겪은 나라를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4][49]이바일로는 영웅적인 통치자와 '좋은 차르'[58]의 이상을 대변한 비극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이바일로의 반란은 불가리아 역사 사건 중 가장 대중적이고 인정받는 사건 중 하나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여기에 헌정되어 있다.도브리 흐리스토프의 동명 서곡을 원작으로 작곡가 마린 골레미노프의 1959년 오페라 '이바일로'는 '시대의 혁명적인 파토스와 비극'[59]에서 영감을 얻었다.봉기에 바쳐진 작품으로는 에브게니 콘스탄티노프의 소설 스몰더링 엠버를 원작으로 한 니콜라 발체프 감독의 1964년작 컬러 장편 영화 '이바일로'[60]와 1921년작 불가리아의 저명한 시인이자 작가인 이반 바조프의 드라마 '왕좌'도 있다.[61]현대 불가리아 남부의 이바이로브그라드 마을과 파자르지크 시 부근의 이바일로 마을은 반란군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그를 기리는 여러 도시에는 동상이 있고, 코텔 마을의 남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비나 전투에서 비잔틴을 물리친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도 있다."석탑 경비대"라고 이름 붙여진 이 기념비는 불가리아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10대 기념비에 이름을 올렸다.[62][63]
타임라인
- 1277년 여름 — 몽고인들이 패배했다.
- 1277년 가을 — 몽고인들은 불가리아에서 쫓겨났다.
- 1277년 말 — 콘스탄티누스 틱의 군대가 패배하고, 황제는 이바일로에 의해 살해된다.
- 1278년 봄 — 이바일로가 수도 타르노보에 입성; 콘스탄틴 티크의 아내 마리아와 결혼; 불가리아의 황제로 즉위.
- 1278년 여름과 가을 — 비잔틴과 몽골에 대한 전쟁, 비잔틴에 대한 승리, 몽골에 대한 패배;이바일로는 드라스타에 포위되었다.
- 1279년 시작 — 타르노보의 귀족들은 비잔틴이 지지하는 프리스트 이반 아센 3세에게 문을 열어준다.
- 1279년 봄 — 이바일로가 드라스타에 대한 몽골의 봉쇄를 어기고, 타르노보를 포위하고, 이반 아센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한다.
- 1279년 6월 17일 — 1만 명의 비잔틴 군대가 데비나 전투에서 패배한다.
- 1279년 8월 15일 — 5000명의 비잔틴 군대가 발칸 동부에서 패배하다.
- 1280년 시작 — George Terter 1세는 귀족들에 의해 황제로 선출된다.
- 1280 — 이바일로가 노가이 칸으로 도주하여 결국 살해됨
참고 항목
각주
메모들
^a: 불가리아 정교회는 마이클 8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후원하는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를 통일하려는 시도에 강력히 반대했다.불가리아 총대주교 이그나티우스와 황후 마리아가 1272–1274년 제2차 리옹 평의회에서 양보를 하려는 명백한 의지에 대해 비판하였다.[64]
^b: 1190년 트라이아브나 전투에서 불가리아인들은 비잔틴 황제들의 황금 투구, 왕관, 황십자를 포함한 비잔틴 황실의 보물을 사로잡았는데, 비잔틴 통치자들의 가장 귀중한 소유물로 여겨졌던 왕관, 제국 십자가는 참십자사의 한 조각을 담고 있는 고체 금으로 된 사리품이었다.이 트로피들은 불가리아 국고의 일부가 되었고 1279년까지 공식적인 행사 동안 타르노보 주변에서 운반되었는데, 이때 이반 아센 3세는 수도에서 비행하는 동안 트로피를 가져갔다.[65]
인용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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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페이지 154-155
- ^ 맑음 1987, 페이지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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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