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피다 전투
Battle of Skafida좌표: 42°23′01″N 27°38′48″E / 42.38361°N 27.64667°E
스카피다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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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불가리아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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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불가리아 제국 | 비잔틴 제국 | ||||||
지휘관과 지도자 | |||||||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 | 마이클 9세 팔라이올로고스 | ||||||
힘 | |||||||
8,000 | 10,000 | ||||||
사상자 및 손실 | |||||||
500-1,000 | 5,000-6,000 |
The Battle of Skafida (Bulgarian: Битка при Скафида) was an engagement between the Second Bulgarian Empire and the Byzantine Empire which occurred in 1304 near Poros (Burgas), modern Bulgaria. 결과는 불가리아의 승리였다.[1] 그 결과 불가리아 제국은 13세기 말부터 위기를 극복하고 내적 안정을 이루었으며 트라이스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그 후 한동안은 비잔티움이 심각한 위협은 아니었다.
갈등의 기원
1300년 테오도르 스베토슬라브(Todore Svetoslves)가 불가리아의 황제로 즉위하자, 그는 지난 20년 동안 주(州)에 대한 타타르 공격의 복수를 꾀했다. 요아힘 3세 총대주교 등 반역자들이 먼저 처벌을 받았는데, 요아힘 3세는 왕실의 적을 도운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후 차르는 비잔티움으로 눈을 돌렸는데, 비잔티움은 타타르 침공에 영감을 주고, 간신히 트라이스에 있는 많은 불가리아 요새를 정복했다.[2] 1303년, 그의 군대는 남쪽으로 진군하여 많은 마을을 되찾았다. 이듬해 비잔틴군이 반격하여 양군은 스카피다 강 근처에서 만났다.
전투
비잔틴인들은 초반에 우위를 점했고 간신히 불가리아인들을 강 건너편으로 밀어냈다. 그들은 후퇴하는 병사들의 추격에 너무 열중하여 불가리아인들의 전투 전에 파괴되어 있던 다리로 몰려가 허물어졌다. 그 강은 그곳의 깊이가 매우 깊었고 많은 비잔틴 군인들은 공황상태에 빠져 익사했고, 이것은 불가리아인들이 승리를 낚는데 도움을 주었다.[3]
여파
승리 후 불가리아인들은 비잔틴 병사들을 많이 포로로 잡았고 관습에 따라 일반 백성들은 석방되고 귀족들만 몸값을 노리고 억류되었다. 불가리아군은 더 많은 병사를 모집하기 위해 비잔틴 황제가 개인 보물을 녹였지만 승전작전을 계속했고 적은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비잔틴인들은 테오도어 스베토슬라브에게 영토적 이득을 인정하도록 강요당했고 그는 마이클 9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1307년 테오도르 스베토슬라브 사후 1321년까지 지속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참조
- Andreev, Y.; M. Lalkov (1996). The Bulgarian Khans and Tsars (in Bulgarian). Veliko Tarnovo: Abagar. ISBN 954-427-216-X.
- Тренев, Александър. (2006). Великите битки и борби на Българите през Средновековието (in Bulgarian). Sofia: Световна библиотека. ISBN 954-8615-60-6.
- O’Rourke, Michael (2010). Byzantium, from recovery to ruin, a detailed chronology: AD 1220-1331. Canberra, Australia.
- Speer, Andreas (2010). 1308: Eine Topographie historischer Gleichzeitigkeit (in German). Berlin: De Gruyter. ISBN 978-3-11-0218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