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 예측

Predictions of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1991년 구소련의 최종 해체 이전에 구소련이 해체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과 단체들이 있었다.[1]

Authors often credited with having predicted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include Andrei Amalrik in Will the Soviet Union Survive Until 1984? (1970), French academic Emmanuel Todd in La chute finale: Essais sur la décomposition de la sphère Soviétique (The Final Fall: An essay on the decomposition of the Soviet sphere) (1976), economist Ravi 바트라는 1978년 저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몰락과 프랑스의 역사학자 헬렌 카렌 드 엔카우세(Hélene Carrer d'Encausse)에서 이같이 밝혔다.[2] 또한 월터 라쿠르는 "공산주의 문제조사와 같은 전문지에 실린 다양한 기사들은 소련 정권의 붕괴와 붕괴 가능성을 다뤘다"[3]고 언급한다. 일부 미국인들, 특히 보수주의자들로널드 레이건전략 방위 구상이 소련 국가 해체를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야기시킨다고 보고 있다.[4][5]

소련 붕괴에 대한 다른 이유와 다른 시간적 틀을 제시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예측이 맞았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붕괴를 할인하는 통념

미국의 분석가

소련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예측은 많은 서구 학계 전문가들에 의해 무시되었고,[6] 소련 주류학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7] 예를 들어 아말릭의 저서는 "서구에서 찬란한 문학의 한 조각으로 환영받았다"면서도 "사실 어느 누구도 정치적 예측의 한 조각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없었다"고 했다. 1980년경까지, 소련의 힘은 비평가들과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널리 과대평가되었다.[3]

1983년, 프린스턴 대학교교수 스티븐 코헨은 소비에트 체계가 현저히 안정적이라고 묘사했다.

중앙정보국(CIA)도 소련의 내부 안정을 심각하게 과대평가했고, 붕괴 속도는 예상하지 못했다. 1991년 전 DCI 스탄스필드 터너 전 대통령은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Journal Foreign Affairs)에 "소련의 위기의 심각성을 예측하는 데 실패한 이 엄청난 실패를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고 썼다.그러나 CIA, 즉 국방부와 국무부의 정보부로부터 수많은 소련인들이 점점 커지고 체계화되고 있음을 인식한다는 제안을 들은 적이 없다. 경제 문제"[8]

미셸 가더의 프랑스어 저서를 검토하기 위해 시작된 심포지엄에서 루시 소비에트 연방정부(소련 러시아 정권의 죽음 투쟁) 역시 구소련의 붕괴를 예견했다. 바르호른은 가더의 책을 "공산주의 붕괴에 대한 종말론적 예측의 긴 줄의 최신판"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위대한 혁명은 가장 드물고 성공적인 정치체제는 끈질기고 적응력이 있다"고 경고한다. 게다가 이 책의 평론가 마이클 타투는 그런 예측의 '종말론적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것을 심각하게 취급한 것에 대해 거의 사과하고 있다.[9]

해체 또는 붕괴 예측

소련이 언젠가는 존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 분석가, 단체, 정치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루드비히 미제스는 1922년 저서 사회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소비에트 체제는 지속가능하지 않고 결국 붕괴될 것이라는 경제사회학적 분석. 이 책은 레닌이 농업에 부분적인 사유재산을 재도입하는 신경제정책을 시행하기 몇 달 전에 출판되었다. 미제스의 분석은 경제 계산 문제에 근거한 것으로, 중앙 계획에 대한 비평은 1920년 저널 기사에 처음 요약되었다. 그의 주장은 소련이 생산하는 재화와 용역의 정확한 가격을 정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회주의 정권이 초기 시기에 어느 정도 자본주의의 이전 시대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점점 더 변하면서 나중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1949년에 1900년의 가격은 어떤 용도로 쓰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1989년의 감독이 1949년의 가격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용도는 무엇인가?

레온 트로츠키

소련의 설립자 중 한 명인 레온 트로츠키는 훗날 조셉 스탈린에 의해 추방된 소련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망명생활의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때마침 그는 사회주의로의 첫걸음으로 노멘클라투라를 퇴위시키고 노동자 계급 통치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 1936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예측을 했다.

현재의 소련의 성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 미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가설을 세우자. 먼저 소비에트 관료주의는 구시대 볼셰비즘의 모든 속성을 가진 혁명 정당에 의해 전복되고, 더구나 근대의 세계 경험에 의해 풍요로워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정당은 노동조합소련 내 민주주의 회복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것은 소비에트 정당들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고 또 회복해야 할 것이다. 대중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의 머리에서, 그것은 국가 기구에 대한 무자비한 정화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계급장식, 모든 종류의 특권을 폐지하고, 노동의 지불에 있어서의 불평등을 경제와 국가 기구의 생활필수품으로 제한할 것이다. 그것은 청소년들에게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배우고, 비판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이익과 의지에 부합하는 국민 소득 분배에 심대한 변화를 도입할 것이다. 그러나 재산 관계에 관한 한, 새로운 권력은 혁명적인 조치에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계획경제의 실험을 유지하고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정치 혁명 이후, 즉 관료주의의 퇴치 후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에 매우 중요한 일련의 개혁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회 혁명은 아니다.

만약 (제2의 가설을 채택하기 위해) 부르주아 정당이 집권 소비에트 카스트를 타도한다면, 현재의 관료, 행정가, 기술자, 국장, 당 비서, 특권층 중에서 일반적으로 준비된 하인들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국가 기구의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복원은 아마도 혁명당보다 더 적은 사람들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신권력의 주요 임무는 생산수단에 있는 사유재산을 복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선 취약한 집단농장에서 강소농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강소농을 부르주아 유형의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산업의 영역에서, 변혁화는 경공업과 식품을 생산하는 산업에서 시작될 것이다. 과도기 동안 계획 원칙은 국가 권력과 잠재적 기업들, 즉 소련의 산업계 주장들 사이, 에미그레 전 사업주들과 외국 자본가들 사이에서 일련의 타협으로 전환될 것이다. 소련의 관료체제가 부르주아 복원을 준비하는 쪽으로 멀리 갔음에도 불구하고, 새 정권은 개혁이 아닌 산업의 형태와 방법의 문제에 있어서 도입해야 할 것이다.

혁명당도 반혁명당도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는 세 번째 변종을 택한다고 가정해 보자. 관료주의는 국가 주도로 계속된다. 이런 조건하에서도 사회관계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관료제가 사회주의적 평등을 위해 평화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만약 현재 그러한 운영의 너무 명백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계급과 장식들을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향후 단계에서 재산 관계에 있어서 그 자신을 위한 지원을 모색해야 한다. 누군가는 큰 관료들이 단지 필요한 수입을 보장한다면, 일반적인 형태의 재산은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주장은 관료 자신의 권리의 불안정성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의문도 무시한다. 그 가문에 대한 새로운 숭배는 아직 구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특권은 자식에게 전할 수 없다면, 그들의 절반의 가치밖에 없다. 그러나 증언권은 재산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신탁의 이사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주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결정적인 영역에서 관료주의의 승리는 새로운 소유 계급으로의 전환을 의미할 것이다. 반면 프롤레타리아가 관료주의에 대한 승리는 사회주의 혁명의 부활을 보장할 것이다. 세 번째 변종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두 가지로 돌아가게 하는데, 명확성과 단순성을 위해 우리는 그 두 가지를 출발했다.[10]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는 소련(바르바로사 작전)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6월 독일 베흐마흐트를 비롯한 축군 병력이 소련을 침공했고, 적군은 후퇴했다.

전 세계의 군사 관측자들은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독일이 승리하고 소련 체제를 파괴하며 유럽에 나치 신질서를 수립할 것을 기대하며 히틀러의 의견을 대부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citation needed] 극소수의 미국 전문가들은 소련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1] 독일의 침공은 1941년 6월 22일에 시작되었다. 그 후, 미국 전쟁부는 프랭클린 D에게 충고했다. 독일군이 1~3개월 안에 소련을 정복할 것이라는 루즈벨트.[12] 1941년 7월 미국 총참모부는 몇 주 안에 소련의 붕괴가 예상된다는 암기를 미국 언론에 발표했다.[13] 영국 분석가들은 독일이 큰 손실 없이 3주에서 6주 안에 승리할 것으로 보고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14] 소련의 예상되는 패배에 대한 예측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전쟁 중이 아닌 동안, 루스벨트는 연합군(대영제국과 소련이 주로 그 당시 대표)을 선호했고, 소련에까지 확대함으로써 소련 붕괴를 피하려고 노력하기로 결정했다.그는 (1941년 3월부터 시작된) 렌트-레스를 통한 군수물자 공급과, 구소련이 워낙 취약한 상황에서 일본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붉은 군대모스크바 외곽에서 이 노선을 유지했고 (1941년 12월) 소련 붕괴에 대한 예측은[whose?] "불확실"[11][failed verification]로 바뀌었다.

초기 냉전

조지 오웰

동물농장1984년 저자인 조지 오웰은 1946년 "러시아 정권이 민주화를 하거나 아니면 멸망할 것"[15]이라고 썼다. 그는 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정복에 의해 그러한 예측을 한 최초의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1969년 발간된 '정복' 기사에 따르면, "시기에 공산주의 세계는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그것이 스스로를 민주화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징후는, 오웰이 말했듯이, 민주화가 되든지 아니면 소멸하든지...그러나 우리는 또한 대격변의 변화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더 후진적인 기구의 죽음의 고통은 파괴적이고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16]

조지 케넌

미국 외교관 조지 F. 케넌은 1946~47년 소련이 팽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곧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유명한 봉쇄 이론을 제시했다. X 기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T]소련에 대한 미국의 모든 정책의 주요 요소는 장기적이고 인내심이 있지만 러시아 팽창적 경향에 대한 확고하고 경계심이 강한 봉쇄임에 틀림없다... 서구의 자유 제도에 대한 소련의 압력은 소련 정책의 이동과 기동에 해당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리적, 정치적 요충지에 대한 대응력의 교묘하고 경계하는 적용에 의해 제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17]

미국은 혼자 그리고 일방적으로 이 봉쇄를 감행해야 하겠지만, 만일 미국이 자국의 경제적 건강과 정치적 안정을 훼손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소련 당구조는 결국 "소련의 붕괴나 점진적인 완숙"[17]을 초래하는 엄청난 긴장의 시기를 겪을 것이다.

케넌은 나중에 자신의 이론이 받아들여지고 실행된 방식을 후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구 소련을 중심으로 일련의 군사동맹을 구축하는 것으로 구성된 미국 전략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18]

윈스턴 처칠

윈스턴 처칠은 정치 경력 내내 소련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1920년 1월, 그는 볼셰비즘을 "미친 허영심과 자만심에 사로잡혀 국민이 혐오하고 혐오하는 정부에 정권을 줄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규칙"이라고 비난했다. 그런 무모한 이론을 실천하려는 시도는 보편적인 혼란과 부패, 무질서와 내전만이 수반될 수 있다"고 말했고, 이후 그는 1931년 저널 기사에서 이와 비슷한 예측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그는 동유럽에 최근에 세워진 소련 위성국가들에 대해 1954년에 "그 나라들에 살아 있는 인간 정신과 국민성의 힘은 인구의 대규모 이동과 아이들의 대중교육으로도 빠르게 소멸될 수 없다"고 말했다. 처칠은 1957년에 출간된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 1권 분량의 에필로그에서 "자연적인 힘은 더 큰 자유와 더 큰 기회를 가지고 일하고 있다"고 썼다. 그들은 거대한 제국의 구조에 있어서 마르크스가 그의 오두막에서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유연하다... 인간 사회는 파티 기계에 의해 이해되지 않는 많은 형태로 성장할 것이다."[19]

즈비그뉴 브르제진스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여러 차례 소련 해체를 예고했다. 브르제진스키는 2006년 인터뷰에서 1950년 석사학위 논문(발표되지 않은 논문)에서 "소련은 단일 국가인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민족주의 시대의 다국적 제국이었다"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소련은 해체될 것이다."[20]

브르제진스키는 컬럼비아 대학교학자로서 소비에트 정치에서 변화의 딜레마(1969년)와 두 시대 사이: 테크네트로닉 시대에 미국의 역할 (1970년)[21]

소비에트 정치의 변화의 딜레마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미래를 다루는 14개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중 브레진스키 본인이 직접 로버트 정복, 멀레 파인소드, 유진 라이온스, 조르지오 갈리, 아이작 레빈 등 6명은 "당장은 아니지만 심각한 가능성으로 붕괴"[22]를 고려했다.

한편 1976년 브르제진스키는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는 사실상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중심적인 문제는 그러한 사회적 변화[근대화]가 소비에트 정치의 기본적 성격인 현저한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 혹은 실제로 이미 변화해 왔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 성격은 필자가 주장했듯이 주로 러시아/소련 역사의 구체성에서 파생된 정치적 전통에 의해 형성되어 왔으며, 기존 소련 체제의 운영 방식과 제도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그 체계가 탈석탄화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은 소련의 문맥에서 지배적인 정치 양식의 일부에 상당한 탄력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사회변화를 통해 정치적 변화가 매우 느리게 만들어지고, 사회변화가 정치권에 현저하게 반영되기 시작하기 전에 적어도 몇 세대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23]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전역에 소련 권력이 붕괴되기 직전인 1989년 브레진스키는 <대실패: 20세기 공산주의의 탄생과 쇠퇴. 그 작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제국주의 세력이 지배하는 민족에 문화적으로 혐오감을 주는 이 지역에 강요한 외계인의 교리다. 이에 따라 인체가 이식된 장기거부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인 동유럽 사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유기적 거부 절차가 진행 중이다."[24]

브레진스키는 이어 공산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고려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소련에 다섯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1. 성공적인 복수화,
  2. 장기화된 위기,
  3. 정체상태의 갱생,
  4. 쿠데타(KGB, 군사) 및
  5. 공산정권의 노골적인 붕괴.

옵션 #5는 사실 3년 후에 일어났지만, 당시 그는 붕괴가 대안 #3보다 "현 단계에서 훨씬 더 먼 가능성"이라고 썼다: 새로운 정체. 그는 또한 2017년 소련에 어떤 형태의 공산주의가 존재할 가능성이 50%를 약간 넘는다고 예측했다. 브르제진스키는 마침내 몇 십 년 후에 종말이 왔을 때 "가장 혼란스러울 것 같다"고 썼다.[24]

페렌크 파르카스 데 키스바르나크

망명중인 헝가리 장군이자 반 볼셰비키 국가연합(ABN)의 지도자 페렌크 파르카스 키스바르낙민족주의 압력에 의한 소련 해체를 예견했다. 195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스코틀랜드에든버러에서 유럽 자유 연맹의 주최로 ABN 협약이 열렸다. 이 회의에서 파르카스는 '볼셰비즘과의 전쟁과 예속된 국가들로 대표되는 군사요인'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소련이 종국적으로는 유럽 러시아를 고립시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발트해 국가, 투르크에스탄, 이델우랄 공화국, 시베리아 등의 궁극적인 독립을 예견했다. ABN 협약의 세 번째 결의안은 또한 "러시아 제국주의의 파괴와 소련을 분열시키고 민족원리를 재정립함으로써 세계평화를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강제 추방당했으며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25]

샤를 드골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부터 소련의 반체제 인사인 안드레이 아말릭에 이르기까지 소수의 사상가만이 소련의 궁극적인 해체를 예언했고, 심지어 그들은 중국과의 비참한 전쟁이나 중앙아시아이슬람 소비에트 국가들의 압력으로 인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26]

1959년 11월 23일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연설에서 드골은 유럽에 대한 그의 비전을 발표했다. ,c'est l'Europe, depuis l'Atlantique jusqu'àl'Oural,c'est toute l'Europe,qui décidera(destin(monde.("네, 그것은 유럽, 대서양 우랄 산맥은 유럽에서, 이것은 유럽의 전체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27]이 구절이 해석에 다양한 ways—on 한편으로는 내놓은 국제 간의 긴장 완화에 미국레이더 초계 잠수함반면에, 동유럽 전역의 공산주의의 붕괴를 예측하는 것과 같다.[28][29][30]

콘라트 아데나워

콘라트 아데나워는 빠르면 1950년대에 독일[3] 통일을 예견했다고 언급되어 왔지만,[31] 한스-피터 슈바르츠에 따르면, 아데나워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소련 권력은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32]

1966년, 기독민주당의 당 회의에서 아데나워는 언젠가 소련이 독일의 통일을 허락할 것이라는 희망을 밝혔다. 일부 분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예측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 소련은 독일의 분단, 그리고 그것과 함께 유럽의 분단도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이 올 때를 조심해야 한다... 미개척으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31]

휘태커 챔버스

1964년 사후에 출판된 '콜드 프라이데이'라는 책에서, 공산주의 망명자 휘태커 체임버스는 동유럽에서 "위성 혁명"으로 시작되는 궁극적인 소련 붕괴를 예견했다. 그러면 이 혁명은 소련 독재정권의 변혁을 초래할 것이다.[33]

로버트 A. 먼델

1960년대 후반, 경제학자 로버트 A. 먼델은 구소련의 붕괴를 예견했다.[34]

미셸 가더

미셸 가더(Michel Garder)는 프랑스의 저자로, 책 《라곤이 두 정권》(L'Agonie du Russie Russianique)(1965)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해산을 예언한 작가였다. 그는 붕괴 날짜를 1970년으로 정했다.[9]

데탕테

랜드 주식회사

1968년 랜드 코퍼레이션의 에곤 뉴버거는 "급변하는 세계에서 경제를 현대화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비효과적인 성장이 두드러지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중앙에서 계획한 경제는 결국 소멸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35]

로버트 정복

로버트 정복(Robert Cuption)은 Zbigniew Brzzinski가 편집한 저자들의 모음집인 '소련정치 변화의 딜레마'에서 "구소련은 정치체제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위험하게 사회경제적 역학관계에 부적절한 나라"라고 보았다. 이것은 급변하고 재앙적인 변화를 위한 공식이다."[22]

정복은 또한 그의 저서 "The Nation Killers: 소련의 국적의 추방(1970년).[citation needed]

선명문

통일교회의 창립자인 선명문은 공산주의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어 1980년대 후반쯤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거듭 예측했다. 1972년 4월 파리에서 열린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7년에 시작된 공산주의는 대략 60년을 유지하며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그래서 1978년은 국경선이고 그 이후에는 공산주의가 쇠퇴할 것이다; 70년이 되면 공산주의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공산주의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버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36]

안드레이 아말리크

1969년, 저명한 반체제 인사 안드레이 아말리크는 그의 저서 1984년까지 소련이 살아남을 것인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떤 종류의 평화적인 재건의 기회에 반하는 또 다른 강력한 요인이 있고 이것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 똑같이 부정적인 것이다: 이것은 정권이 사회와 그 자신 모두를 배치한 극도의 고립이다. 이러한 고립은 정권을 사회로부터, 그리고 사회의 모든 부문이 서로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를 나머지 세계로부터 극도의 고립에 빠뜨렸다. 이러한 고립은 관료 엘리트에서 최저 수준의 사회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거의 초현실적인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그들의 위치에 대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현상유지에 더 오래 도움이 될수록 현실과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될 때 그것의 붕괴는 더욱 빠르고 결정적일 것이다.

아말리크는 1980년과 1985년 사이에 정권의 붕괴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37][38] 제목에 나오는 해는 동명의 소설 다음 해였다.

소련 당국은 회의적이었다. 나탄 샤란스키는 아말릭의 예측이 언급되자 "1984년 KGB 관계자들, 감옥에서 나에게 온 것"이라며 "이런 예측에 화가 났다"고 설명했다. 아말리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매우 많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39]

마리안 카밀 지에바노프스키

역사학자 마리안 카밀 지에바노프스키(Marian Kamil Dziewanowski)는 하버드대 러시아연구센터에서 '소련 정권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했다. 1971년과 1979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같은 강연이 이뤄졌다. 강의의 본문('소련 정권의 죽음: 미국 소비에트 학문의 연구, 역사가에 의한 연구')은 소비에트 사상에 게재되었다. 1980년에 그는 "이 연구를 업데이트하여 '소련의 미래'라는 제목의 Garmisch에서 열린 국제 슬라브 회의에서 논문으로 제출했으며, 이 논문은 공존에 게재되었다. 국제 저널 (Glasgow 1982년)."[40]

에마뉘엘 토드

에마뉘엘 토드는 1976년 자신의 작품 '라 슈트 피날레: Essais sur la décomposition de la spherer Soviétique(최종 가을: 소비에트 구체의 해체에 관한 에세이)'에서 유아 사망률 증가, 대외 무역 데이터 등의 지표를 바탕으로 소련의 붕괴를 예측해 주목을 받았다. 토드는 소련이 1970년대에 정체되어 서구는 물론 자국 동유럽 위성국가들에 경제적으로 뒤처지고 있다고 추론했다. 여기에 저출산, 자살률 증가, 근로자 불만 등이 모두 경제 생산성이 갈수록 떨어지는 요인이었다. 토드는 또 정치경제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비러시아 공화국과의 소련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41][42]

베르나르 레빈

베르나르 레빈은 1977년 9월 타임즈에 처음 실렸던 예언적 기사로 1992년 주목을 끌었는데, 이 기사에서 정치국에서의 새로운 인물의 출현에 대한 기막히게 정확한 예측이 이루어져 급진적이지만 평화로운 정치교체를 초래했다.[3][43]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 미 상원의원은 1975년부터 이어진 기사와 인터뷰에서 소련제국이 붕괴될 가능성에 대해 사실상의 가능성을 논의했다. 그러나 모이니한은 자유민주주의 역시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했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3] 그는 1975년 1월 소련이 경제적으로 너무 약하고 인종적으로 너무 분열되어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민족이 그것을 깨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4년까지 그는 "소련의 생각은 소모된다"고 주장했다. 역사는 놀라운 속도로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44] 그의 에세이 중 일부는 비밀주의로 출판되었다. 1999년의 미국 경험.

핼렌 카르에르 앙카우세

In her 1978 book L'Empire éclaté, historian (and later member of the Académie française and the European Parliament) Hélène Carrère d'Encausse predicted that the Soviet Union's political legitimacy would be fatally strained by diverging fertility between its culturally Russian/Eastern European parts (dominant in government and industry but with plummeting 출생률)과 그 문화적인 아시아 및/또는 무슬림 부분(출생률은 증가하지만 확립된 "게론토크라시"에서는 거의 대표성이 없다.[45] L'Empire éclaté는 1978년 Free Aujourd′hui에서 우승하면서 당시 상당한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46]

사미즈다트

1970년대 초 사미즈다트(samizdat)에서 출판된 다양한 에세이는 비슷한 선상에 있었는데, 어떤 에세이는 소련의 종말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예견하고 있었다.[3][47]

힐렐 틱틴/비평가

1973년 마르크스주의자인 힐렐 H. 틱틴은 소련의 "체제가 더 깊은 위기로 가라앉고 있다"[48]고 썼다. 1976년에 그는 "구소련: 종말의 시작?"[49]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1978년 그는 소련이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로 분열되고 발전될 것"이라고 예측했다.[50] 그리고 1983년에 그는 "시스템이 종말을 고하고 있다"[51]고 썼다. (틱틴의 접근법에 대한 요약은 위키피디아의 스탈린주의 항목을 참조하십시오.)

후기 냉전

레이먼드 아론

데이비드 프롬킨은 레이먼드 아론의 예언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자유주의적반공주의자 레이먼드 아론이라는 단 한 사람만을 알고 있다. 1980년대 런던 국제전략문제연구소에서 그가 내놓는 소련의 위협에 관한 강연에서 그는 '모든 무장한 예언자들이 정복했고,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들은 모두 실패했다'는 마키아벨리의 <프린스> 관찰을 청중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러나 아론은 만약 예언자가 정복하고 무기의 힘으로 다스린다면 자신의 예언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아론은 소련의 미래를 이해하는 열쇠를 놓자고 제안했다.[26]

라비 바트라

경제학자 라비 바트라는 1978년 저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몰락에서 구소련의 붕괴를 예견했다.

랜들 콜린스

1980년 사회학자 랜달 콜린스사우스 플로리다 대학컬럼비아 대학에서 자신의 논문 '러시아 제국의 미래 쇠퇴'를 발표하고 그의 예측을 '베베리안 사회학 이론'(1986)에 발표했다.

로버트 M. 커틀러

1980년, 정치학자 로버트 M. 커틀러는 다음과 같은 행사:엘리트들의 세대 간의 회전에 후에 브레즈네프(그는 1982년 사망하기 시작했다) 죽(1), 소련 제도 공공 참여를 늘릴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기사"소비에트 초 흐루시초프에"[52]을 발표했다(에는 1985년에 glasnost을 통해 두개 최고 gerontocra 이후부터 시작되었다.이익 사망) (2); (2) 중앙아시아에서 공산당의 통치가 도전받을 것이라는 것 (1986년 발트 공화국이 폭발하기 전 카자흐스탄에서 일어난 폭동 사건); (3) 만일 당이 모스크바 센터에 충성할 이유를 주지 않는다면 (모든 공화국에서 일어났던 일) 지역 수준의 당 지도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길을 갈 것이라는 것. 1980년대 후반에, 그러나 1990-1991년에 새로운 RCP와 RSFSR이 CPU와 USSR의 힘을 일부 약화시켰을 때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제임스 데일 데이비슨과 윌리엄 리스-모그

제임스 데일 데이비슨윌리엄 리스 모그는 1980년대 초 저서 '위대한 계산'에서 소련의 붕괴를 예견했다.

밀턴 프리드먼과 로즈 프리드먼

밀턴 프리드먼과 그의 아내 로즈는 저서 프리초이스(1980년)에서 "공산주의의 붕괴와 시장체제에 의한 대체는 비록 우리가 불치의 낙관론자로서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고 짧게 언급했다.

로버트 게이츠

스튜어트 브랜드필립 테틀록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브랜드 파트너는 1980년대에 중앙정보국 최고위층에게 소련의 미래에 대해 강연을 했다고 밝혔다. 그가 제기한 한 가지 시나리오는 소비에트 블록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징조는 당직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부상하는 것이다. 중앙정보국(CIA) 분석가는 발표는 괜찮았지만 소련이 그의 생전이나 자녀들의 생전에 헤어질 리는 없다고 말했다. 그 분석가의 이름은 로버트 게이츠였다.[53]

한편 1986년 3월 19일 미 상원 청문회에 참석한 게이츠(당시 중앙정보국 정보국장)는 정보공동체가 소련의 변화에 따른 결과에 대해 정책 입안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솔직히 그런 근본적 c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답변했다."항지는 계속 진행중이고, 내 자원은 다른 종류의 소련이 어떻게 생겼을지 추측만 하고 있는 일종의 사치를 허락하지 않는다."[54]

아나톨리 골리친

1984년, 중요한 KGB 탈북자인 아나톨리 골리친은 '노인을 위한 새로운 거짓말들'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55] 거기서 그는 위에서 조정된 공산주의 블록의 붕괴를 예견했다.

그는 이번 붕괴가 서방세계를 그릇된 안보의식으로 잠재우고 모든 봉쇄정책을 폐지하며 마침내 경제적으로 무력화되고 미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고안된 장기적 속임수 전략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그 중에서도 골리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소련에서] '자유화'는 화려하고 인상적일 것이다. 공식적인 선언은 공산당의 역할 축소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공산당의 독점은 분명히 축소될 것이다."
  • "만약 [자유화]가 동독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면 베를린 장벽의 철거까지도 고려될지도 모른다."
  • "유럽의회는 소련과 동유럽의 대표들로 전 유럽 사회주의 의회가 될 수도 있다. '대서양에서 우랄족으로 가는 유럽'은 중립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유럽으로 판명될 것이다.

공동의견은 탈북한 블라디미르 부코프스키가 수집한 기밀문서 보관함에서도 찾을 수 있다.[56]

존 르 카레

존 르 카레(John Le Carré)는 소설 작가지만 그의 '스파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동서 관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특히 서구와 소련 정보기관의 갈등으로 유명하다. 1989년 5월 22일에 출판된 <러시아의 집>에는 "소련의 기사가 갑옷 안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명언이 있다.

베르너 아지트

1985년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아우르트는 '더 로테 스턴 베르그뤼트'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Moskaus Obstieg - Deutschlands Chance (붉은 별이 사라지고 있다) 모스크바의 쇠퇴 - 독일의 찬스), 뮌헨: 위츠하프트스베라크 랑겐 뮐러/허빅 1987년 제3판, 경제 통계와 동향 분석을 토대로 약 1990년 동안 소련권의 붕괴와 가까운 미래 내 독일의 통일을 예측했다.

로널드 레이건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0년 선거 운동과 첫 임기 내내 소련이 미국과 비교해서 권력을 키워왔다는 대중적 견해를 제시했다. 1981년 그는 "소련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군사력 증강에 관여했다"[57]고 밝혔고, 이듬해에는 미군과 비교했을 때 "소련은 확실히 우위에 있다"고 밝혔다.[58]

레이건 행정부는 데이비드 아르벨과 란 에델리스트에 따르면 소련이 인지한 힘을 이용해 군사비 지출의 대폭적인 확대를 정당화했다. 그들의 연구에서 그들은 미국 정보기관들이 구소련의 종말을 예측하지 못하게 한 것은 레이건 행정부의 이런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아르벨과 에델리스트는 더 나아가 CIA 분석가들이 소련의 위협을 과장하고 군사력 증강을 정당화하는 어떤 정보도 제시하도록 유도된 반면, 소련의 약점에 대한 반대 증거는 무시되고 그것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외면당했다고 주장했다.[59]

동시에 레이건은 소련이 결국 패배할 수 있다는 원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1983년 3월 3일, 레이건 대통령은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열린 미국 복음주의 협회에서 "나는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의 또 다른 슬프고 기괴한 한 장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60]

1982년 6월 영국 의회 연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민들에게 인간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은 소련이다. 그것은 또한 깊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다. 국민제품의 성장률은 50년대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으며, 당시와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이 실패의 규모는 놀랍다: 농업에 인구의 5분의 1을 고용하고 있는 나라는 자국민을 먹여 살릴 수 없다. 민간 부문, 소련의 농업에서 용인되는 아주 작은 민간 부문만 아니라면, 그 나라는 아마 기근 직전일 것이다.... 인센티브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이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된 소련 체제는 매년 파괴의 도구 제작에 최선의 자원을 쏟아 붓는다. 경제 성장의 지속적인 위축과 군사 생산의 성장이 맞물려 소련 국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더 이상 그것의 경제 기반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 구조, 생산력이 정치적 힘에 의해 방해받는 사회다…….공산주의 세계에서도 자유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자기 결정권이 몇 번이고 표면화된다. 확실히, 경찰이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에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81년 폴란드에서 자치를 위한 탐구를 얼마나 잔인하게 시도하는지 암울하게 상기시켜준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소련 자체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내가 지금 묘사하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떠나게 될 자유와 민주주의의 행진인 계획과 장기적인 희망이다.-역사의 잿더미 위에서 레닌주의는 자유를 억압하고 민중의 자기표현을 입막음하는 다른 전제정치를 남겼다. 그리고 중거리 전력 협상과 전략 탄도미사일 탄두의 3분의 1 감축 제안에서 제로옵션 구상으로 나아가더라도 NATO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다.[61]

분석가인 제프리 W. Knopf는 레이건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부분적으로 소련이 패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대부분의 냉전 기간 동안, 공화당민주당 행정부는 소련이 가까운 장래에 내구성이 있다고 가정했었다. 초당적인 봉쇄정책은 소련이 핵전쟁을 피하려고 애쓰면서 견제를 계속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소련은 소련제국의 해산을 강요하려 하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 경제가 너무 약해서 압력이 증가하면 소련이 실패할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주기적으로 민주주의의 힘이 마르크스주의를 떠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역사의 잿더미 위에 레닌주의'.[4]

P.R. 사르카르

P.R. 사르카르 서벵골의 아난다 마르가 이교도의 지도자는 1980년대에 소련 공산주의가 "망치에서 몇 방 얻어맞는다"고 예견했다. 그는 공산주의의 주요 약점으로 "내부 및 외적 안정"을 꼽았다.[citation needed]

루홀라 호메이니

1989년 1월 7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이란 최고지도자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총서기에게 서한을 보냈다.[62] 이 편지는 호메이니가 외국 지도자에게 보낸 유일한 서면 메시지였다.[63] 호메이니의 친서는 이란 정치인 압둘라 자바디-아모리, 모하마드-자바드 라리자니, 마르지에 하디치가 전달했다.[64] 호메이니는 이 편지에서 공산주의가 소련 내에서 해체되고 있다고 선언하고 고르바초프를 초청해 이슬람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대안으로 고려하도록 했다.[65][64]

안데르스 오슬룬드

안데르스 sl슬룬드는 1989년 저서 고르바초프의 경제개혁 투쟁에서 소련의 붕괴를 예견했다.[66]

왜 소련학자들이 틀렸을까?

케빈 브레넌에 따르면:

소련학은 실패를 부추기는 환경에서 운영되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모든 정치적 줄무늬가 있는 소련인들은 특정한 사실을 무시하고 다른 분야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았다. 나는 그 일에 거대한 음모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다만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있어서는 가질 만한 경력이 없을 뿐이었다…….다른 종류의 제도적 편향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B팀" 보고서."[67]

시모어 마틴 립셋교르지 빈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과 언론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소련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판단을 고려할 때, 문제는 그들이 왜 옳았는가 하는 것과 우리의 소련의 많은 동료들이 틀렸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은 부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어야 한다. 레이건과 레빈은 우파 출신이고 모이니한은 AFL-CIO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좌익 성향의 반스탈린주의 사회민주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참여자들이 최악이라고 믿게 만드는 환경이었다. 반면에 소련 학자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정치에서 좌파적 자유주의로, 경제통계주의, 계획주의, 사회주의 인센티브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수용하는 그들의 역량을 훼손한 지향점이었다. 그들은 또한 빈곤한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기본적인 마르크스주의 공식에 대해 대부분 무지했거나 무시했다. 브레진스키가 1969년 발표한 '소련정치 변화의 딜레마'는 14명의 기여자들 중 이 점을 보여준다.심각한 붕괴 가능성을 예견한 사람들 중 3분의 2(6명 중 4명)는 비학사 레빈모이니한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시스템 연속성을 넘어 볼 수 없는 이들의 4분의 3(8명 중 6명)이 학자였다.[22]

리처드 파이프는 소련의 직업의 실패를 사회과학의 실패라는 더 큰 맥락에 놓으며 약간 다른 견해를 취했다.

궁극적으로 전문가들이 소련의 곤경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인적 요인에 대한 무관심 때문일 것 같다. 판단이 "가치 없는" 자연과학자들의 성공을 본받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정치학(sic)과 사회학은 점진적으로 탈인간화되고 모델을 구축하며 통계에 의존하고 있으며(그들 중 상당수는 허위로 꾸며져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질의 대상인 지저분하고 모순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주제와의 접촉이 끊기게 되었다. 호모 [68]사피엔스

참고 항목

메모들

  1. ^ 역사학자들은 1989년 폴란드 라운드 테이블 협정으로 부터 해산을 지적한다.
  2. ^ Flora Lewis (1987). Europe: A Tapestry of Nations. USA: Simon and Schuster. p. 364. ISBN 0-671-44018-7.
  3. ^ a b c d e f Laqueur, Walter (1996). The Dream that Failed : Reflections on the Soviet Union. USA: Oxford University Press. pp. 187–191. ISBN 0-19-510282-7.
  4. ^ a b Knopf, Jeffrey W. (August 2004). "Did Reagan Win the Cold War?". Strategic Insights, Volume III, Issue 8. Center for Contemporary Conflict at the Naval Postgraduate School.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March 1,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