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계 미국인

Iranian Americans
이란계 미국인
ایرانیان آمریکا
IranUnited States
총인구
1,500,000[1] (2021)

470,341 (ACS, 2011[2])
500,000–100,000(기타 추정치)
1-2백만 (일부 이란 추정, 2012년)[3][4][5][6][7]the United States is the biggest host to Iranian diaspora hosting 1,500,000 Iranian born citizens.[1]

자세한 내용은 이란어 디아스포라를 참조하십시오.
모집단이 유의한 지역
캘리포니아(로스앤젤레스, 오렌지, 샌디에이고 카운티에서 가장 많은 인구), 뉴욕, 뉴저지,[8] 텍사스, 네바다, 오리건, 메릴랜드, 버지니아, 워싱턴, D.C, 펜실베이니아, 일리노이, 미시간,[9] 북동부 [10]오하이오, 플로리다, 조지아, 테네시 주)
언어들
미국 영어, 페르시아어
(아제리, 아르메니아어, 쿠르드어이란의 다른 언어)
종교
무슬림 31%, 무신론자/현실주의자/휴머니스트 11%, 무신론자 8%, 바하위 7%, 유대인 5%, 개신교 5%, 로마 가톨릭 2%, 조로아스트리아 2%, 기타 15%,[11][a] 만대안을 포함한 무응답 15%.

^a 201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이란계 미국인 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국 전화 설문조사에서 이란계 미국 공공문제동맹(Public Affairs Alliance of American)이 의뢰하고 Zogby Research Services가 응답자들에게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다.이번 조사는 협력률이 31.2%에 달했다.

이란계 미국인미국 시민권자 또는 이란계 혈통이거나 이란 국적을 갖고 있는 국민권자다.이란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이다.[12][13]그들은 역사적으로 기업, 학계, 과학, 예술, 오락 분야에서 뛰어났다.[14]

대부분의 이란계 미국인들은 이란 혁명과 페르시아 군주제의 몰락의 결과로 1979년 이후 미국에 도착했으며, 40% 이상이 캘리포니아, 특히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들은 로스엔젤레스 테오랑겔레스 커뮤니티와 같은 많은 뚜렷한 민족 거주지를 만들었다.이란계 미국인 사회는 성공적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의사, 엔지니어, 변호사, 기술 기업가가 되었다.[15]

이란 내무부 산하 기관인 국가민원등록기구의 2012년 발표를 토대로 볼 때 미국이 이란지역에서 가장 많은 이란인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7]이란 외무부는 2021년 이란 태생 이란인 150만 명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새로운 통계를 최근 자료에 따라 발표했다.그러나 이 숫자는 어느 시점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란 태생의 인구만을 나타내며, 미국 태생의 이란인과 이란 조상이 있는 다른 집단의 수는 포함하지 않는다.[1][16]

용어.

이란계 미국인은 가끔 페르시아계 미국인들과 교류하여 쓰이기도 하는데,[17][18][19][20] 부분적으로는 서방세계에서 이란이 "페르시아"로 알려져 있었기[21] 때문이다.1935년 노루즈에서 레자 팔라비사산 제국 이후 사용된 국가의 내명이란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인 서신에서 사용해 줄 것을 외국 대표들에게 요청했다.이후 서방 국가에서는 이란이라는 말이 더 흔해졌다.이로 인해 이란 국적 용어 사용도 바뀌었고, 이란 시민들을 위한 공통 형용사도 '페르시아인'에서 '이란인'으로 바뀌었다.1959년, 레자 샤 팔라비의 아들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정부는 "페르시아"와 "이란"이 공식적으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발표했다.[22]그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23][24]

이란계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을 '이란'이 아닌 '페르시아인'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는데, 주로 1979년 혁명 이후 담당해 온 이란의 이슬람 정권과 단절하고, 이란 인구의 약 65%를 차지하는 페르시아 민족으로 구분하는 경향도 있다.[17][25]반면 Iranian-Americans의 대다수 페르시아 배경에서 나오면,non-Persian 이란 Azeris[26][27][28]와 쿠르드족 등의Iranian-American community,[25][29]이내에 라벨부터"페르시아"제외하고non-Persian 소수 민족은 상당히 많은 어떤 학자들은 라벨"이란"더 포함되어 있다고 믿을 것이다.[25][30][31일]

역사

초기 역사

이란인들이 최초로 북아메리카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된 것 중 하나는 1618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정착한 이란계 아르메니아인 담배 재배업자 마틴이다.[32][33]하지 사야로도 알려진 미르자 모하마드 알리는 1800년대에 북아메리카에 온 이란인이었다.그는 그가 읽은 민주주의적 이상과 그의 동료 이란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들로부터 어떻게 대우받았는지의 모순 때문에 세계일주를 하게 되었다.그는 지식을 찾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고, 이란의 발전을 돕기 위해 그 지식을 활용하기 위해 23세의 나이로 여행을 시작했다.그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머물렀고,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전국을 여행했다.그는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을 포함한 다양한 미국 유력 인사들을 만났는데, 그는 여러 차례 그와 만났다.[34]1875년 5월 26일 하지 사야는 미국 시민권자가 된 최초의 이란인이 되었다.그는 이란에서 생활환경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이란으로 돌아오자마자 투옥되었다.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을 바라봤지만 소용이 없었다.[34]전 세계 이민 성수기(1842–1903) 동안, 130명의 이란 국적자들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35]

이민1단계

이란이 미국으로 이주한 첫 번째 물결은 1940년대 후반에서 1977년,[35] 또는 1979년에 일어났다.[36]미국은 미국 대학들이 공학과 다른 분야에서 최고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외국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열심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목적지였다.[36]이란에서 영어를 제2외국어로 배운 경험이 있는 이란 학생들은 대부분 미국의 대학과 대학에서 신입생을 하면서 매우 바람직한 학생이었다.[36]1970년대 중반까지, 해외에서 공부한 모든 이란 학생들의 거의 절반이 미국에서 그렇게 했다.[36]1975년까지 국제교육연구소의 연간 외국인 학생 인구 조사 수치는 이란 학생들을 미국에서 가장 큰 외국인 학생 집단에 포함시켰으며, 이는 이란 전체 외국인 학생의 9%에 달한다.[36]70년대 들어 이란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면서 더 많은 이란인들이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36]결과적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이란인들의 수도 1975년 35,088명에서 1977년 98,018명으로 상당히 증가했다.[36][37]1977-78 학년 동안 약 10만 명의 이란 유학생 중 36,220명이 미국의 고등교육기관에 등록되었다.1978-79년 학창시절, 혁명 전날, 미국 학원에 등록한 이란 학생들의 수는 45,340명으로 증가했고, 1979-80년에는 그 숫자가 51,310명으로 최고조에 달했다.당시 국제교육연구소에 따르면 이란에서 온 학생들이 어느 외국보다 미국 대학에 더 많이 입학했다.[35]이 단계에서 이란이 이주하는 패턴은 보통 가족 전체가 아닌 개인들만을 포함했다.[35]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부터 이란의 교육받은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미국에 있는 이란 학생들의 대다수는 졸업 후에 일하기 위해 귀국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란 정부나 산업계로부터 재정적 원조를 받은 사람들, 특히 졸업 후 취업을 조건으로 귀국하는 것을 의도하였다.1979년 혁명의 급격한 사건들로 인해 학생들은 결국 난민으로 미국에 머물게 되었다.[35]이 수천 명의 방문객들과 학생들은 본의 아니게 몇 년 후에 대규모 이민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 경제, 사회 네트워크의 기초가 되었다.[36]

제2상

이란 이주 2기는 1979년 이란 혁명과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타도 직전과 직후에 시작되었고,[35] 1980년대 초반에 의미심장해졌다.[35]로널드 H. 바요르는 "1979년 혁명과 1980-88년 이라크와의 전쟁은 이란의 계급구조를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변화시켰다"[38]고 쓰고 있다.혁명은 이란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패턴과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고, 그 후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도 교육을 가장 잘 받고 부유한 많은 가정들을 미국 등지로 망명하게 만든 또 다른 요인이었다.한때는 기본적으로 팔라비 시대에 두뇌 유출의 문제였던 것이 지금은 상당한 부의 이동을 포함해 비교적 많은 중상류 가정의 비자발적인 이민이었다.[38]혁명 기간과 혁명 이후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란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렇게 한 학생들은 새로 설립된 이슬람 공화국에서 점차 숙청되었다.혁명 이후 해외에서 졸업한 많은 학생들도 집권 성직자들의 탄압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그 결과 혁명 이후 이란을 떠난 교육받은 엘리트들과 귀국하지 않기로 선택한 미국의 새 졸업생들은 미국에 고학력과 숙련된 이란 전문가들을 대거 배출했다.2002년까지 150만에서 250만 명의 이란인들이 이슬람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관행 때문에 주로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해외에 거주했다.[39]

이 단계에서 더 주목할 만한 점은 종교적 소수민족과 소수민족의 구성원들이 이란계 미국인 사회, 특히 바하히족,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사이에서 불균형적으로 대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40]1980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이란계 미국인은 12만3000명이었다.[41]1980년과 1990년 사이에, 미국의 이란에서 온 외국인 출생자의 수는 74퍼센트 증가했다.[12]

그 혁명은 이란 문화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이란은 더 이상 번영하는 나라가 아니었다.이것이 많은 이란 사람들이 미국으로 피신하기 시작한 이유의 일부다.[42]

당대

페르시아계 미국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막스 아미니

이란 이민의 3단계는 1995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43]2000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미국에는 283,225명의 이란 태생이 있었다.[44]같은 2000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이란계 미국인은 38만5488명이었다.[45]2011년 ACS(American Community Survey, ACS)의 추정치는 47만341명의 이란계 조상이 전부 또는 일부인 미국인을 발견했다.[2]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지난 20년 동안 이란과 미국 사이의 문제 때문에 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러한 것으로 자신을 식별하는 것을 꺼려왔다"는 점과 또한 많은 사람들이 소수 민족(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과소표현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대신에 그들은 이란인이라기 보다는 소속된 민족으로 식별한다.[46]100만 명 이상의 추정치는 많은 이란 및 비이란 단체, 언론 및 학자들에 의해 제시된다.2015년 12월 미 의회조사국 소속 중동문제 전문가인 케네스 캣츠먼은 이 숫자를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47]2012년 콜로라도 대학교샌디에이고 대학교의 폴 하비와 에드워드 블럼은 알자지라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를 100만 명으로 추정했다.[48][49]PAIA(Public Affafficials Alliance of 이란계 미국인 공공문제동맹)에 따르면,[50][51] 이 수치는 50만에서 100만까지이며, 조지아 공과대학의 로널드 H. 바요르가 뒷받침하는 수치라고 한다.[52]대서양은 2012년 미국에는 약 150만 명의 이란인들이 있었다고 밝혔다.[53]2003년 워싱턴 D.C.의 이란 이자부서는 미국 내 약 90만 명의 이란인들의 여권 정보를 보유한다고 주장했다.[46][54]

오늘날, 미국은 이란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많은 이란인들을 포함하고 있다.이란계 미국인 사회는 의학, 공학, 사업 등 여러 분야에서 눈에 띄는 개인을 배출했다.

인구통계학

미국에 거주하는 이란계 미국인 1·2세대의 상대적 인구 분포 추정치를 전체 인구의 백분율로 환산한 것이다.[55]
> 전체 이란인의 49%
전체 이란인의 6%~9%
전체 이란인의 2%~5%
< 1% 그러나 여전히 주목할 만한 인구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이란 사람들이 미국에 비교적 적은 수로 살고 있지만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많은 수의 이란계 미국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이 그룹에 대한 데이터는 미국 시민권 이민 서비스(USCIS)에 의해 잘 문서화되어 있다.2000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이란계 미국인은 38만5488명이었다.[45]2011년 ACS에서는 전체 또는 부분적인 이란계 조상의 미국인이 47만7341명에 달했다.[2]

인구

2010년 미국 인구조사에서 이란계 미국인에 대한 연방 데이터는 인종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상에 따른 것으로, 이는 매년 미국 공동체 조사(ACS)에 의해 수집된다.연간 ACS로부터의 이란 조상에 대한 데이터는 인구조사국의 American Factfinder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56][57]인종적으로, 인구조사에서 이란계 미국인들은 백인 미국인으로 분류되어 왔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지난 20년 동안 이란과 미국 사이의 문제 때문에 많은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그들 자신을 그렇게 식별하는 것을 꺼려왔다"[46]는 사실 때문에 ACS에서 이란계 미국인들의 표현 부족이 문제라고 보고 있다.100만 명 이상의 추정치는 이란 및 비이란 단체, 언론, 학자들이 많이 제시한다.미국 의회조사국 소속 중동문제 전문가인 케네스 캣츠먼은 2015년 12월 발간된 보고서에서 이들의 수를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47]역사학자 폴 하비와 에드워드 블럼은 알자지라뿐만 아니라 2012년 1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48][49]PAIA(Public Affafficials Alliance of 이란계 미국인 공공문제동맹)에 따르면,[50] 이 수치는 50만100만 명으로 조지아 공과대학의 로널드 H. 바요르가 뒷받침하고 있다.[52]2012년 대서양은 미국에 약 150만 명의 이란인들이 있다고 말했다.[53]2003년 워싱턴 D.C.의 이란 이자부서는 미국 내 약 90만 명의 이란인들의 여권 정보를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46][54]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독립 학술단체인 이란연구그룹의 연구에 따르면, 인구조사 자료에서 알 수 있는 것보다 이란계 미국인이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58]이 단체는 이란계 미국인의 수가 2004년에 69만1천명을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2000년 미국 인구조사에서 인용된 33만8천명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은 수치다.[12][59]

우리나라 이란 인구의 약 절반이 캘리포니아 주에만 거주하고 있다.[60]다른 대형 커뮤니티로는 미국 이란 인구의 9.1%를 차지하는 뉴욕·뉴저지주가 그 뒤를 이었고, 워싱턴·DC·마리랜드·비르기니아(8.3%), 텍사스(6.7%)[9][61] 등이 뒤를 이었다.

약 6,000–1만 명의 이란계 미국인이 시카고 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최대 3만 명이 시카고 대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이 인구 중 일부는 이란계 아시리아인이다.[62]

뉴욕 그레이트넥에 있는 마을인 뉴욕 킹스포인트는 미국 내 이란인 밀집도가 30%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63]그러나 로스앤젤레스의 인구와 달리 그레이트 넥 인구는 거의 독점적으로 유태인이다.[64]

테네시주 내슈빌은 미국에서 쿠르드인구가 가장 많고, 이들 중 상당수가 이란에서 왔다.

페르시아의 주요 인구 중심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대도시 지역은 이란계 미국인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다.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우드 대로변에 있는 한 지역이 시에 의해 공식적으로 페르시아 광장으로 지정되었다.

미국의 대부분의 이란계 미국인들은 캘리포니아의 대도시, 즉 그레이터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샌디에이고, 새크라멘토, 프레즈노에 모여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2009년 이란계 미국인들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추정된 미국 인구조사 자료와 기타 독립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는 약 100만 명의 이란계 미국인이 살고 있었으며,[65] 가장 많은 인구(약 30만 명)가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살고 있었다.[65][66]이 때문에 이란계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는 LA 지역은 이란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테흐랑겔레스', '이란젤레스', '리틀페르시아'라고 부르기도 한다.[67][68]

1985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20만 명의 이란계 미국인이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고 추정했고 1991년에는 80만 명으로 추산되었지만, 이 수치들의 정확성은 자료 부족으로 인해 논의될 수 있었다.[69][67]1990년, 로스앤젤레스는 이란의 종교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들보다 종교적인 소수민족의 수가 더 많았다.[67]

Regarding Iranian-Americans of Armenian origin, the 1980 US Census put the number of Armenians living in Los Angeles at 52,400, of whom 71.9% were foreign born: 14.7% in Iran, 14.3% in the USSR, 11.5% in Lebanon, 9.7% in Turkey, 11.7% in other Middle Eastern countries (Egypt, Iraq, Israel, etc.), and the rest in other parts of the world.[70]베벌리힐스, 어바인, 글렌데일 등은 모두 이란계 미국인의 대규모 커뮤니티(글렌데일 이란 인구의 상당수는 아르메니아계 혈통)를 갖고 있으며, 베벌리힐스 전체 인구의 26%가 이란계 유대인으로 이 도시의 최대 종교 커뮤니티가 된다.[9][71][72]

이란계 미국인들은 로스앤젤레스의 대도시 지역에 있는 부유한 많은 이웃에 민족 거주지를 형성해 왔다.로스앤젤레스에서는 타르자나, 웨스트힐스, 히든힐스, 우드랜드힐스, 비벌리힐스, 칼라바사스, 브렌트우드, 란초팔로스베르데스에 이란인들이 집중되었다.[73]2000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타르자나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서 이란인의 농도가 가장 높다.[74]

이들 집중도시 외곽에 위치한 2세대 이란인들은 비이란인과 결혼하는 비율이 높았고 페르시아어에서는 문맹률이 낮았다.[75]

페르시안 농도가 가장 높은 로스앤젤레스의 지역(2015년)
순위 도시들 페르시아 계통의[76] 인구 비율
1 비벌리힐스 20.8%
2 웨스트 로스엔젤레스 12.2%
3 웨스트우드 10.3%
4 타르자나, 로스앤젤레스 10.3%
5 로스앤젤레스 우드랜드 힐스 8.8%
6 로스앤젤레스 벨 에어 8.8%
7 센츄리 시티 8.1%
8 란초 팔로스 베르데스 3.7%

샌디에이고 카운티에서는 라 졸라가 페르시아의 거주지로 간주된다.[77]웨스트레이크 마을도 이란 인구가 많았으며 이란계 미국인 시장 Iraj Bramand가 있는 최초의 미국 도시였다.[78]

텍사스

텍사스에도 이란계 인구가 많다.[79]그리고 캘리포니아와 마찬가지로, 텍사스의 이란 사람들도 주의 더 큰 주요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휴스턴은 이란인과 이란계 외국인 인구가 가장 많은데, 주로 텍사스 메디컬 센터와 대형 에너지 기업의 존재에 힘입어 7만 명(1994년[80] 5만 명)으로 추산된다.휴스턴에는 휴스턴 프레스에서 "리틀 페르시아"로 불린 상점들과 식당들을 포함한 페르시아 상권이 있다.[81][82]그곳에는 많은 이란 조로아스터인들과[83] 바하히들이 살고 있다.[84][85]

과거 또는 현재 휴스턴 지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주민으로는 자스민 모그벨리, 수잔 로샨, 숀 다이바리, 파리나즈 쿠샨파, 카본 하킴자데(해리 트루먼 해군 항공모함 함장[86]) 등이 있다.이브라힘 야즈디는 베일러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카말 카라지 역시 휴스턴 대학의 동문이다.적극적인 자선가 후샹 안사리는 휴스턴 미술관의 '창의 은인'으로 활동해 왔다.[87][88]조지 부시 대통령 도서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갤러리가 있다.[89][90]휴스턴의 이란인들은 특히 2012년 휴스턴에서 이란의 학생이자 활동가인 겔라레 바게르자데가 살해되었을 때 주목을 받았다.[91]가해자인 알리 이르산은 나중에 유죄판결을 받고 그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바게르자데가 이슬람교를 떠나 기독교 남성과 결혼하라고 이산의 딸을 격려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명예살인이었다.[92][93][94]최근 몇 년간 텍사스 주에서 주목받은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이란인은 UT 오스틴의 오미드 코코비였다. 그는 이란에서 정치적 이유로 수감되었다.

댈러스-포트워스 대도시 지역에는 3만 명이 넘는 이란계 미국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이란 최초의 우주비행사 아누셰 안사리는 여러 해 동안 달라스-포트 워스 교외인 텍사스 플라노에 거주하고 있었다.[95]댈러스의 이란 커뮤니티는 2019년 4월 마이크 폼페오 미국 국무장관을 비공개로 초청할 정도로 크고 영향력이 컸다.[96][97]그리고 샌안토니오와 오스틴은 각각 3000~5000명의 이란계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사우스텍사스 메디컬 센터와 UT 오스틴 등 우수한 대형 학술센터나 남부 이란 자그로스 산맥 지역과 비슷하지 않은 텍사스컨트리 지역의 기후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중동 외곽의 쿠제스탄에서 가장 많은 수의 만대족이 샌안토니오 지역에 정착하고 있다.[98][99]이란의 샤는 라클랜드 공군기지에 있는 샌안토니오의 윌포드 보행기 외과 센터에 마지막 입원도 했다.[100]1979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란 왕립공군의 많은 조종사들을 훈련시켰던 바로 그 기지다.

종교

많은 이란계 미국인들은 이란의 종교적 소수민족의 불균형한 몫을 포함한 이란혁명을 탈출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구성과 그에 따른 전 이슬람 망명 신청자들 그리고 이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다른 변화들로 인해 비 이슬람교도들이다.많은 이란계 미국인들은 비종교인이나 시아파라고 밝히고 있지만 전체 5분의 1은 기독교인, 유대인, 바하시인, 또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이다.[101]게다가, 일부 이란 만대인도 있지만, 그들은 수가 매우 적다.퓨 리서치에 따르면 미국에서 이슬람교를 떠난 사람들의 약 22%가 이란계 미국인이다.[102]

2012년 이란계 미국인 공공문제동맹(Public Affairs Alliance of Telean American)이 의뢰하고 Zogby Research Services가 실시한 이란계 미국인 400명 표본에 대한 전국 전화 조사는 응답자들에게 그들의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다.반응은 다음과 같이 분해되었다.무슬림 31%, 무신론자/현실주의자/인본주의자 11%, 불가지론자 8%, 바하위 7%, 유대인 5%, 개신교 5%, 로마 가톨릭 2%, 조로아스트리아 2%, '기타' 15%, '무응답' 15%[11] 순이었다.이번 조사는 협력률이 31.2%[11]에 달했다.결과의 오차범위는 +/- 5% 포인트로 하위 그룹의 오차범위가 높았다.[11]특히 무슬림 수는 2008년 42%에서 2012년 31%로 줄었다.[11][103]

하버드 대학로버트 D에 따르면. Putnam, 평균적인 이란인은 평균적인 미국인보다 약간 덜 종교적이다.[104]20세기 이란의 사회 운동: 문화, 이념, 그리고 동원 체계에서 저자인 스티븐 C.Poulson은 서양의 사상이 이란 사람들을 비종교적으로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105]

무슬림, 유대인, 바하르지, 조로아스터리안, 기독교,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쿠르드인, 아시리아인 그룹들 사이에는 종교적, 민족적 차이가 있다.[106]기독교계 이란계 미국인의 비율을 계산하는 것은 대부분의 이란계 기독교인들이 아르메니아계 또는 아시리아계 출신이기 때문에 어렵다. 그리고 이란인으로 식별하는 것 외에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란인으로서가 아니라 아르메니아인이나 아시리아인으로 강하게 자칭하고 있다.[36][107]

민족성

이란계 미국인의 대다수는 페르시아계인데, 상당한 소수 민족은 이란계 아제르바이잔인, 이란계 아르메니아인, 이란계 유대인, 이란계 쿠르드인, 이란계 아시리아인, 이란계 만대인, 이란계 투르크멘인, 이란계 발록, 이란계 아랍인 등이다.[108]

2006년 하킴자데와 딕슨에 따르면 바하히족,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과 같은 종교적 소수민족의 구성원들은 1978-1979년 혁명의 초기 망명자들 사이에서 불균형하게 대표되었다.[40]

시민권

DHS에 따르면 2015년 이란 출생자는 1만3114명, 2016년 1만3298명이 그린카드를 발급받았다.2015년에는 1만344명의 이란인이 귀화했으며 2016년에는 9507명이 추가로 귀화했다.[109]미국에 거주하는 이란인은 거의 모두 미국 시민(81%)이나 영주권자(15%), 미국(2008년 조사)이다.[110]이란계 미국인들은 그들의 문화와 유산을 그들의 일상 생활과 미국 내에서의 전반적인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111]

통합

동화를 측정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네 가지 벤치마크를 사용한다: 언어 능력, 결혼 간, 공간 집중력, 사회 경제적 지위.[citation needed]이러한 기준에 따라 이란계 미국 사회가 새로운 문화와 생활 방식에 성공적으로 동화되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상당 부분 자신 있게 판단할 수 있다.[36]2008년 이란공보연맹(PAIA)이 의뢰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란계 미국인의 21%만이 직장 밖 다른 이란계 미국인과 주로 교류하고 있다고 보고해 이들 대부분이 미국 사회로 성공적으로 통합되었음을 입증했다.[36]

이란계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결혼 간 비율이 매우 높다.[36]1995년에서 2007년 사이에 결혼한 이란계 미국인 중 거의 50%가 이란계 미국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했다고 추정된다.[36]연구 결과, 이슬람교도인 이란계 미국인들은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인과 같은 종교적 또는 소수 민족에 속하는 사람들보다 결혼에 더 개방적인 것으로 나타났다.[36]PAAIA에 따르면 이란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집단 밖에서 혼동하거나 결혼하는 경우가 적으며, 이는 집단으로서 가족에 의해 승인되고 이란 문화 규범 내에 있는 결혼을 하는 등 전통적인 이란 가치관을 고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36]이민자 집단 중 미국에서의 언어능력과 관련하여, 1세대는 주로 모국어를 말하고, 2세대는 영어와 부모님의 언어를 말하고, 3세대는 일반적으로 영어만 말하고, 일부 고립된 단어와 구절에 대한 지식은 그들의 보조에서 유지한다.언동[36]이란계 미국인 사회는 이런 패턴을 따르고 있다.[36]

커뮤니티 아웃리치

이란 국경을 넘는 동맹(IAAB)이 매년 후원하는 캠프 아옌데는 샤 함락 이후 대규모 이주에 이어 이란 청소년들을 단결시킬 목적으로 여러 나라의 이란 디아스포라 어린이들을 끌어들였다.[112][113]

교육

바이요르에 따르면, 처음부터 이란 이민자들은 높은 교육적, 전문적인 업적에서 다른 입국자들과 차이를 보였다고 한다.[114]인구조사 2000에 따르면, 이란 이민자의 50.9퍼센트가 학사학위 이상을 취득한 반면, 전국 평균은 28.0퍼센트였다.[12]최근 이용 가능한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란계 미국인 4명 중 1명 이상이 석사 또는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으며 이는 조사 대상 67개 민족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13]

1990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로스앤젤레스 연구는 이란 태생의 원주민과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이 "사회경제적 지위가 가장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터키 출신자가 가장 낮은 반면, 터키계 아르메니아인은 자영업 비율이 가장 높다.[115]1988년 뉴욕타임스 기사는 이란 출신 아르메니아인이 포함된 중동 아르메니아인들이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에 정착하는 것을 선호했고, 소련 출신 아르메니아 이민자들은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 매력을 느꼈다고 주장했다.[116]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에 대한 연구는 이란에서 온 아르메니아인(이란-아르메니아인)이 미국 사회에 빠르게 통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17] 예를 들어, 이란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미국인 중 31%만이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반면,[118] 다른 나라에서 온 아르메니아인들은 통합에 덜 성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 및 소득

중소기업청(SBA)이 기업 소유율이 가장 높은 20대 이민자 집단 가운데 이란계 이민자를 찾아 미국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내 활동적이고 기여도가 높은 이란계 미국인 사업주는 3만3570명으로 사업 소유율이 21.5%에 달했다.이 연구는 또한 이란계 미국인들이 창출한 총 순사업소득이 25억 6천만 달러라는 것을 발견했다.[119]이란계 미국인 가구 3곳 중 1곳꼴로 연소득이 10만 달러(미국 전체 인구 5명 중 1곳과 비교)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120]이란 연구그룹의 창립 멤버인 알리 모스타사히리는 이란계 미국인들이 다른 이민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공한 이유를 제시한다.그는 다른 많은 이민자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국을 떠난 것과 달리 이란인들은 1979년 혁명과 같은 사회적 또는 종교적 이유로 인해 떠났다고 믿는다.[59]전체 일하는 이란계 미국인의 약 50%가 전문직과 경영직 종사자로 미국의 다른 어떤 그룹보다 높은 비율이다(Bayor, 2011).[114]

의사

미국에서 가장 초창기 이란인들은 대부분 의료 인턴이나 레지던트로 일했던 젊은 연수생들이었다.레지던트 단계를 넘어 연습을 계속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이들도 있었다.그들이 미국에 체류하는 기간을 연장하려는 동기는 경제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직업적인 이유 때문이었다.1974년 존스홉킨스대 연구진은 1971년 미국의학협회 저널에 미국의 이란 내과의사가 1625명이라고 보고했다.저자들은 미국의 모든 이란 MD들에게 설문지를 보내 이민의 원인을 더욱 연구했다.660명의 응답자들에 따르면, 이주 이유의 주요 원인은 2년간의 병역 의무화, 미국에 비해 낮은 급여, 비싼 주택, 그리고 사회 정치적인 이유였다.[121]

2013년에는 이란의학술기록보관소(AIM)에 미국의 이란 의대 졸업생이 5045명으로 늘었다는 또 다른 보고서가 발표되기도 했다.1979년 혁명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온 경험 많은 의사들이었고 영구히 머무르려는 의도였다.2013년 현재, 미국에는 5,050명의 이란 의대 졸업생이 있다.[122]

혁명 이전까지 미국으로 이주한 1626명의 의사는 전체 이란 의대 졸업생의 15%인 반면 이슬람 혁명 이후 이주한 5,045명의 의대 졸업생은 전체 이란 의대 졸업생의 5%에 불과하다.이는 미국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란계 미국인 대부분이 밀집해 있는 지역만을 가리킨다.[123]

정치

Stephanie Bice공화당 출신의 첫 이란계 미국인이다.
이란-미국 사회에 가장 중요한 문제

이란계 미국인들은 역사적으로 기업, 학계, 과학계에 뛰어났지만, 전통적으로 미국 정치나 다른 시민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왔다.[65]이란계 미국인들은 2004년 선거에서 10퍼센트만이 투표했다는 대도시들의 조사 결과에서 증명되었듯이 미국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124]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란계 미국인들은 405번 고속도로에서 수천 명의 여행객들에게 이란 정권이 어떻게 1만 명의 정치범을 살해했는지 알리는 광고판을 구입했다.[125]

2008년 8월 이란계 미국인 공공문제연합(Public Affairs Alliance)이 의뢰한 Zogby International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란계 미국인의 약 2분의 1이 스스로를 민주당원으로 등록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8명 중 1명은 공화당원, 4명 중 1명은 무소속 의원으로 밝혀졌다.[110]PAAIA가 의뢰한 2019년 조그비 인터내셔널 조사 결과 2016년 대선에서 이란계 미국인 응답자의 56%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이 조사는 또한 이란계 미국인 응답자의 69%가 2020년 선거에서 이 민주적인 후보에게 투표할 계획이었다고 말한다.[126]

같은 2008년 PAAIA 여론조사는 이란계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이란계 미국인만의 문제가 아닌 국내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것으로 나타났다.반면 이란계 미국인의 4분의 1은 이란-미국 관계와 관련된 외교정책 이슈를 꼽고 있으며 10분의 1도 안 되는 이란 내정을 가장 중요하게 꼽고 있다.[110]

더 최근에는 이란계 미국인 공공문제동맹(Public Affairs Alliance)이 의뢰한 2019 Zogby International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란계 미국인 응답자 중 2분의 1이 투표할 때 외교정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27]이는 2008년 이란-미국 관계 등 대외정책 이슈를 중요하게 보도한 이란계 미국인의 4분의 1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2019년 조사에서도 이란계 미국인 응답자의 75%가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외교정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답했다.[128]트럼프 행정부는 2017년 이란 등 여러 나라의 미국 여행에 엄격한 여행 제한을 뒀다.[129]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제정한 이번 출국금지 조치는 응답자의 76%가 반대한 것으로 조사됐다.이와는 대조적으로, 응답자의 16%만이 금지를 지지했다.조사 결과 응답자의 70%가 개인적으로 여행 금지의 영향을 받았거나 가족과 친구가 여행 금지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128]

1980년부터 2004년까지 이란 이민자 4명 중 1명 이상이 난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