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스의 군주
Lordship of Chios지오스의 군주 Χίο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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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영토의 제노즈 영주권 | |||||||||
1304–1329 | |||||||||
깃발 | |||||||||
자본 | 키오스 | ||||||||
면적 | |||||||||
• 좌표 | 40°38′N 22°57°E / 40.633°N 22.950°E좌표: 40°38′N 22°57′E / 40.633°N 22.950°E/ | ||||||||
역사 | |||||||||
정부 | |||||||||
• 유형 | 봉건 군주국 | ||||||||
주님 | |||||||||
• 1304–1307 | 베네데토 1세 자카리아 | ||||||||
• 1314–1329 | 마르티노 자카리아 | ||||||||
역사시대 | 중세 | ||||||||
• 확립됨 | 1304 | ||||||||
• 비잔틴의 재구성 | 1329 | ||||||||
• 제노스에 의한 키오스 포획 | 13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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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부 | 그리스 |
치오스의 영주(Lordship of Chios)는 제노이스 자카리아 가문이 운영하는 단명의 자치 영주였다. 그것의 중심은 동쪽 에게 섬인 치오스 섬이었고, 그 높이에서 그것은 아시아 마이너 해안에서 떨어진 많은 다른 섬들을 포괄했다. 이론적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속국이지만, 자카리아는 1304년 포획된 섬에서 1329년 그리스-바이잔틴이 현지 그리스 인구의 지원을 받아 섬을 되찾을 때까지 사실상 독립된 영토로 다스렸다.
역사
영주는 1304년 제노의 귀족 베네데토 1세 자카리아가 비잔틴 섬 키오스를 점령하면서 창설되었다. 이미 아시아 마이너 해안에서 포카이아의 영주였던 베네데토는 이 섬이 터키 해적들에게 붙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비잔틴 궁정에 대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비잔틴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팔라이올로고스는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로 그 기정사실을 받아들이고, 처음에는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 섬을 부조로서 그에게 허가했지만, 그 후 5년 주기로 갱신되었다.[1][2] 베네데토는 1307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팔레올로고 자카리아에 의해 치오스에 계승되었다. 1314년 아이가 없이 죽자 섬은 마르티노와 그의 동생 베네데토 2세에게 넘어갔다.[2] 치오스는 작지만 부유한 영역이었고, 연간 12만 개의 금 하이퍼피라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마르티노는 사모스와 코스를 포함한 아시아 마이너 해안에서 떨어진 여러 섬을 아우르는 작은 영역의 핵심으로 삼았다.[3] 마르티노는 작은 군대와 함대를 거느리고 터키 해적들을 상대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132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황제 필립 2세로부터 "아시아의 왕과 데스포트"라는 칭호를 얻은 라틴 동시대 동시대인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황제 필립 2세의 찬사를 받았다.[4][5]
마르티노가 라틴 황제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1324년 치오스의 임대가 갱신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르티노의 행동은 점점 더 단호해졌고, ca. 1325년에는 치오스의 공동 뢰러로서 동생을 내쫓았다.[6] 1328년 젊고 정력적인 안드로니코스 3세 팔라이올로고스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비잔틴 왕좌에 올랐다. 치안의 대표적인 귀족 중 한 사람인 레오 칼로테토스는 치안 인구를 대신하여 새 황제와 그의 수석 장관인 존 칸타쿠제노스를 만나 섬의 재조정을 제안하였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흔쾌히 승낙했고, 마르티노가 무단으로 요새를 건설한 데서 구실을 찾아 대함대를 이끌고 항해를 했다.[7] 마르티노는 자신의 성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지만 그리스 토착민의 망명, 형의 항복을 목격한 후 자신도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베네데토 2세는 처음에는 황제 명의로 섬을 통치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동생과 같은 자치권과 권리를 받으라는 그의 요구는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칼로테토스가 지명되었다.[3][8]
키오스는 1341–1347년의 비잔틴 내전을 틈타 1346년 제노이스 시몬 비그노세(Genoes Simone Vignose)가 점령할 때까지 남아 있던 비잔틴 지배로 돌아왔다. 이 섬은 마오나 디 치오 에 디 포체아 회사의 소재지가 되었고, 기우스티니아니 가문의 지배를 받아 1566년까지 유지하다가 마침내 오스만 제국에 항복했다.
영주들
- 1304–1307 베네데토 1세 자카리아
- 1307–1314 팔레올로고 자카리아
- 1314–1329 마르티노 자카리아(Martino Zaccaria),
- 1314 – ca. 1325 베네데토 2세 자카리아
참조
원천
- Miller, William (1921). "The Zaccaria of Phocaea and Chios (1275-1329)". Essays on the Latin Ori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283–298. OCLC 457893641.
- Nicol, Donald M. (1993).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 1261–1453 (Second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439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