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이프 솔탄
Khalifeh Soltan칼라이프 솔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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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드 제국의 그랜드 비지어 | |
재직중 1623/4–1632 | |
모나크 | 아바스 1세 사피 |
선행자 | 살만 칸 우스타줄루 |
성공자 | 미르자 탈리브 칸 |
사파비드 제국의 그랜드 비지어 | |
재직중 1645–1654 | |
모나크 | 아바스 2세 |
선행자 | 타치 사루 |
성공자 | 모하마드 베그 |
개인내역 | |
태어난 | 1592/3 이스파한 |
죽은 | 1654년 3월 5일 아슈라프, 마잔다란 |
배우자 | 칸아그하 베굼 |
부모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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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비)아바스,(r. 1588–1629)후자의 손자 사피(r. 1629–1642), 그리고 아브는 사파비 왕의 웅장한 고관으로 근무했다 Sayyed Ala 알딘 Hoseyn(페르시아:سید علاء الدین حسین)(c.1592 – 53월 1654년)더 잘 Khalifeh Soltan[를](خلیفه سلطان)로 알려진, 그리고 또한 술탄 al-Ulama(سلطانالعلماء)로 알려진, 이란 정치가이자 성직자,.bas II (r. 1642–16666)
칼라이프 솔탄은 마잔다란 왕가의 마라시 가문 출신으로 문인 교육을 잘 받은 사람으로 이란 성직자 문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사파비드 정권에서도 1623/4년 그랜드 비지어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632년 무자비한 신관 샤 사피에게 망신을 당하고 유배되었다. 이후 1645년 칼라이프 솔탄은 후자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바스 2세에 의해 그랜드 비지어로 재선임되어 상당한 영향력을 얻었다. 칼라이프 솔탄은 이후 1654년 3월 5일 조상의 고향인 마잔다란에서 병으로 사망하였고, 모하마드 베크가 뒤를 이었다.
오리진스
칼라이프 솔탄은 1592/3년 그가 자란 이스파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르자 라피 알-딘 무함마드는 사파비드 제국의 고위 관직을 점령한 저명한 귀족이었으며, 니마툴라히 질서의 창시자인 샤 니마툴라의 후손인 "샤리스타니 사이이드"에 속했다. 칼라이프 솔탄의 어머니는 마라시 가문의 가문인 '칼라이프 사이이드'로 알려진 가문에 속했고, 그의 조상 아미르 네잠 알딘은 15세기 이스파한의 골바르 구역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1][2][3] 칼라이프 솔탄은 이와 같이 샤 압바스 1세와 친척 관계였는데, 그의 어머니는 사파비드 궁정으로 도망쳐 이전의 사파비드 샤 모하마드 호다반다(재위 1578–1587)와 결혼한 마라시 공주인 카이르 알 니사 베굼이었다.[4]
칼라이프 세이유드 가문은 유명한 마라시 통치자 미르이 부주르그(재위 1359–1362)의 후손들로 유명했지만, 그들은 아직 이스파한의 선도적인 가문들 중 하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부유했고 지역의 유명한 가족들과 결혼하기에 충분히 유명했다.[5] 사파비드 법정의 역사학자 이스칸다르 문시에 따르면 "칼리페 일가는 대대로 이스파한 지역에 땅을 갖고 있었다"[2]고 한다.
칼라이프 솔탄에게는 미르자 카밤 알-딘 모하마드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나중에 자신과 그들의 아버지처럼 고위직을 차지하게 된다.[6]
전기
그랜드 비지어(Grand Vizier, 1623/4-1632) 첫 임기
1607년 11월 28일 칼라이프 솔탄은 샤 압바스 1세의 셋째 딸 칸-아그하 베굼과 결혼했다. 결혼 후 칼라이프 솔탄은 쾌활한 상황의 결과로 타브리즈 주지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것은 칼라이프 솔탄의 초기 열정이 국가 관료 조직에서 역할을 맡았음을 보여준다.[7]
칼라이프 솔탄은 1623/4년에 샤에 의해 그의 웅장한 비지어로 임명되었다.[3] 칼라이프 솔탄이 그랜드 비지어가 되었을 때, 바그다드는 최근에 잡혔고, 사파비드 군대는 그것을 잡기 위해 바스라를 향해 행진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압바스 1세의 박해로 고통받았다. 1624년 말, 노루즈를 축하한 후 압바스 1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루지야로 떠났고, 이에 따라 이스파한에 있는 젊은 칼라이프 솔탄을 떠나 사파비드 정사를 돌보게 되었다.
1626년 3월 24일, "비극적인 것을 과시하고 희극적인 것으로 돌변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도 웅장한 비지어 자리에 아직 생소한 칼라이프 솔탄은 200명의 군인을 카멜리테스 수녀원에 보냈다. 병사들은 수녀원을 시찰하고 나서 수도사들을 두들겨 칼라이프 솔탄에게 데려갔다. 스님들은 자신들이 살해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마도 순교할 것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8]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칼라이프 솔탄은 그의 군인들이 수도사들을 대하는 것에 격분하여, 군인들을 이끄는 장교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스님들은 칼라이프 솔탄에게 살려달라고 권했고, 그는 그렇게 했다. 칼라이프 솔탄과 그의 관리들은 그 후 승려들에게 기독교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그 수도사들이 시라즈로 옮기라는 충고를 받았던 아우구스티니아 수도사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페르시아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바스라의 포르투갈어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카르멜 사람들을 놓아주었다.[8]
면직 및 망명
아바스 1세는 1629년 사망하고 손자 사피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그는 1632년에 할아버지를 섬겼던 대부분의 장교들을 처형하고 유배시켰는데, 여기에는 2월 14일 해임된 뒤 쿰으로 유배된 칼라이프 솔탄도 포함되어 있었고, 어머니를 통해 사파비드 왕실에 속해 있던 그의 네 아들은 눈이 멀었다.[3][9] 쿰으로 망명하는 동안, 그는 전문지식에 집중하고 몇몇 귀중한 문헌에 대해 관찰했다. 다스르 알 우자라를 편집한 사람에 따르면, 칼라이프 솔탄은 1645년에서 1654년 사이에 쓰여진 그 작품의 작곡가였다. 1638/9년에 칼리페 솔탄은 이스파한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645년경에는 메카 순례를 마치고 이 도시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순례 도중 메카의 샤이크인 오타키 에펜디를 만났는데, 오타키 에펜디는 그를 "훌륭한 학식과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묘사했고, 그와 함께 "여러 가지 즐거운 학습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3]고 설명했다.
그랜드 비지어(Grand Vizier, 1645–1654)로 두 번째 임기
1645년 10월 11일, 그랜드 비지어 사루 타키는 아바스 2세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는데, 아바스 2세는 10월 14일 칼리페 솔탄을 그의 그랜드 비지어로 임명하였다. 칼라이프 솔탄은 처음에는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곧 수락했다.[3] 비록 압바스 2세가 전임자 시절 종교인들에게 주어진 지위의 부족에 대한 불만을 압축하려는 목적으로 부분적으로 그를 직무에 복귀시킨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의 확립된 관료적 숙련도와 과거 지식이 이번 재임용에서 분명히 결정적인 요소였다.[3] 당시 왕실과의 거래를 위해 이스파한에 있던 네덜란드 무역업자 위닌스는 "그는 너무 늙었고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직책을 처음 거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가 그 기능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했다. 칼라이프 솔탄은 보편적으로 호감을 갖고 직립한 사람으로 여겨졌소."[10]
두 번째 임기 동안 그랜드 비지어로써의 칼라이프 솔탄의 행동은 훨씬 더 잘 묘사되어 있고 복잡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헌신적인 남성과 성직자로서의 악명을 걸고, 그는 커피숍과 선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박, 매춘, 와인 마시는 행위를 목표로 하는 "죄악 행위"에 대항하는 수술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이 작전은 주로 잘 알려진 형태의 수피즘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칼라이프 솔탄은 (더 도덕적인) 신비주의적 성향을 보이거나, 1649년/50년 샤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후 아바스 2세의 측근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당대의 페르시아 역사학자 나스라바디는 칼리페 솔탄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술을 마시도록 강요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럴 가능성이 크다.[3] 1년 전(1648년) 칼리페 솔탄은 무할스와의 원정 때 아바스 2세와 동행한 적이 있었는데,[6] 이는 보스트와 칸다하르를 가까스로 사로잡은 사파비드족의 승리로 끝났다.
칼라이프 솔탄은 또한 그의 후임자들 밑에서 취소된 일상인 호소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지속적인 공개 집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외국 해군 회사 대표들과 함께 통찰력 있는 외교관이 되는 것을 증명했다.[3] 칼라이프 솔탄은 부유하고 순수한 혈통을 가진 이란의 사무엘리트의 대표로 뽑혔다. 이스파한과 야즈드를 잇는 도로의 골나바드 마을을 소유하고 있었고, 카즈빈에 중요한 마드라사를 건설하였다.[3]
40일간 앓아온 칼리페 솔탄은 1654년 3월 5일 조상의 고향 마잔다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이라크의 나자프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그는 묻혔다.[6] 그는 아르메니아 태생의 무슬림인 모하마드 베그가 계승했다.
자손
1632년 사피에 의해 모두 실명된 칼라이프 솔탄의 네 아들은 이 때문에 아무런 직책을 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명해졌다. 이 아들들 중 한 명인 미르자 사예드 하산은 당대 가장 우세한 울라마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후기 샤 술레이만 1세(재위 1666년–1694년)의 딸이자 샤 솔탄 호세인(재위 1694년–1722년)의 누이였던 사파비드 공주 조베데 칸과 결혼했다.[11] 그녀는 그의 사촌인 솔탄 호세인 밑에서 사드리-아이-카세와 사드리-이-이-이-마말릭을 함께 지낸 미르자 모하마드 바커와 미르 사예드 모테자를 낳았다.[12]
칼라이프 솔탄도 여러 딸을 낳았다. 1651년/2년, 그의 딸 중 한 명이 미르자 모하마드 카라키 종교장관의 아들과 결혼했다.[3] 또 다른 딸은 미르자 모센 라자비와 결혼했고, 세 번째 딸은 쿠르치바시 모테자 콜리 칸 샴루와 결혼했다.[13][14]
메모들
^a: 칼리파 술탄과 칼리페 술탄도 철자로 썼다.
참조
- ^ 뉴먼 2008 페이지 54.
- ^ a b 플로어 2005, 페이지 448.
- ^ a b c d e f g h i j 매튜 2010, 페이지 383–384.
- ^ 나샤트 & 벡 2003 페이지 158.
- ^ 2005층, 페이지 447–448.
- ^ a b c 매튜 2011, 페이지 45.
- ^ 플로어 2005, 페이지 450.
- ^ a b 플로어 2005, 페이지 451.
- ^ 바바이 2004, 페이지 41.
- ^ 플로어 2005, 페이지 455.
- ^ 2005층, 페이지 466–467.
- ^ 플로어 2005, 페이지 467.
- ^ 플로어 2005, 페이지 463.
- ^ 2004년, 페이지 143.
원천
- Blow, David (2009). Shah Abbas: The Ruthless King Who became an Iranian Legend. London, UK: I. B. Tauris & Co. Ltd. ISBN 978-1-84511-989-8. LCCN 2009464064.
- Matthee, Rudi (2011). Persia in Crisis: Safavid Decline and the Fall of Isfahan. I.B.Tauris. pp. 1–371. ISBN 978-0857731814.
- Babaie, Sussan (2004). Slaves of the Shah: New Elites of Safavid Iran. I.B.Tauris. pp. 1–218. ISBN 9781860647215.
- Matthee, Rudi (2010). "ḴALIFA SOLṬĀN". Encyclopædia Iranica. Vol. XV, Fasc. 4. pp. 382–384.
- Newman, Andrew J. (2008). Safavid Iran: Rebirth of a Persian Empire. I.B.Tauris. pp. 1–281. ISBN 9780857716613.
- Savory, Roger (2007). Iran under the Safavi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288. ISBN 978-0521042512.
- Roemer, H.R. (1986). "The Safavid period".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Volume 5: The Timurid and Safavid period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89–351. ISBN 9780521200943.
- Floor, Willem (2005), "A Note on The Grand Vizierate in Seventeenth Century Persia", Zeitschrift der Deutschen Morgenländischen Gesellschaft, Harrassowitz Verlag, 155 (2): 435–481, JSTOR 43382107
- Nashat, Guity; Beck, Lois (2003). Women in Iran from the Rise of Islam to 1800.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pp. 1–253. ISBN 978-0-252-07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