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의 종교의 자유
Freedom of religion in Afghanistan에 대한 일련의 기사의 일부 |
아프가니스탄의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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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
아프가니스탄의 종교의 자유는 2002년 미국 주도의 침공 이후 설치되었던 이슬람 공화국에서 이전 탈레반 정부를 실각시킨 이후 바뀌었다. 2004년 1월 23일자 아프가니스탄 헌법의 초기 3개 조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공화국이며 독립적이고 단일하며 분리할 수 없는 국가여야 한다.
- 이슬람교의 신성한 종교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종교일 것이다. 다른 신앙의 추종자는 그들의 종교적 권리의 행사 및 수행에 있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 어떤 법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교의 신성한 종교의 교리와 조항을 위반하지 않을 것이다.[1]
헌법 제7조는 국가가 세계인권선언(UDHR)과 그 밖의 국가가 당사자인 국제조약 및 규약을 준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1][2] UDHR 제18조와 제19조는 함께 종교적인 산문주의에 종사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권임을 사실상 선언하고 있다.[3]
과거에는 힌두교, 시크교, 유대교, 기독교의 작은 공동체들도 이 나라에 살았다; 이 공동체의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떠났다. 심지어 절정에 달했을 때도, 이러한 비 이슬람 소수민족은 인구의 1퍼센트만을 차지했다. 한때 약 5만 명에 달했던 힌두교와 시크교 소수민족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민을 가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와 같은 비 이슬람교도들은 현재 수백 명 안에 불과하며 종종 무역업자로 일한다. 국내에 거주하는 소수의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대부분 외국 비정부기구(NGO)를 대표해 구호활동을 하기 위해 국내에 있는 외국인들이다.
역사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 해석을 내리고, 집행 목적을 위해 '덕의 증진과 악덕 예방을 위한 부처'를 설립했다. 복지부의 임무 중 하나는 복장 규정, 고용, 의료 접근, 행동, 종교적 관행, 표현에 관한 칙령을 시행하는 종교 경찰 기구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칙령을 위반한 것으로 판명된 사람들은 구타와 구금을 포함한 현장에서 처벌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탈레반은 비 이슬람교 종파뿐만 아니라 다른 이슬람 종파를 박해했다. 전통적으로 하나피 법학파의 수니파 이슬람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의 지배적인 형태였다. 이 학교는 탈레반을 추종자로 간주한다. 인도 델리 인근의 디반드 마드라사(종교)는 약 200년 동안 이들 수니파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대부분의 탈레반 지도부는 파키스탄의 디반디에서 영향력 있는 세미나리에 참석했다. 데오반드 학교는 오랫동안 이슬람교의 신앙에 대한 비이슬람적인 억양을 버리고 쿠란과 하디스에 확립된 모델을 다시 강조함으로써 이슬람교를 '정화'하려고 노력해왔다. 디반디 학자들은 종종 그들이 서양의 영향이라고 인식하는 것에 반대해왔다. 인구의 상당수는 드반디에 영향을 받은 하나피 순니즘을 고수하지만 상당수의 소수민족은 일반적으로 수피즘으로 알려진 하나피 순니즘의 보다 신비로운 버전을 고수하고 있다. 수프리즘은 카리스마적인 종교 지도자를 따르는 명령이나 형제애를 중심으로 한다.
탈레반 치하의 시아파는 이 나라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불리한 그룹에 속했다. 하자라족으로 알려진 한 민족은 대부분 이슬람 시아족이다. 중북부 지방에도 소수의 이스마일족이 살고 있다. 이스마일리스는 시아 이슬람교도들이지만 아가칸을 정신적 지도자로 여긴다.
종교적인 문제를 포함한 언론의 자유
2015년 3월 카불에서 27세의 아프간 여성이 코란 사본을 태웠다는 허위 주장으로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4] 폭도들은 파르쿤다를 때리고 발로 찬 후 그녀를 다리 위로 던져 그녀의 몸에 불을 지르고 강물에 던졌다.[5]
탈레반은 종교 문제에 관한 자유 발언이나 정통 수니파 이슬람 관점에 도전하는 토론을 금지했다. 종교 자료를 포함한 어떤 종류의 문학이든 출판과 배포는 드물었다. 1998년, 금지를 시행하기 위해 텔레비전, 비디오 테이프 레코더, 비디오 테이프, 오디오 카세트, 위성 안테나가 불법화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보고에 의하면, 전국 도시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자기기를 계속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탈레반은 종교적인 이유로 음악, 영화, 텔레비전을 계속 금지하고 있다.
종교적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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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차별
휴먼라이츠워치(HRW)에 따르면 1998년 9월 탈레반은 비무슬림인이 예배 장소를 짓는 것을 금지하되 기존 성지에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비무슬림인이 무슬림을 비난하는 것을 금지하고, 비무슬림인에게 지붕에 노란 천을 씌워 집을 확인하도록 명령하고, 비무슬림인에게는 금지령을 내렸다. 이슬람교도와 같은 거주지에 사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슬람교도가 아닌 여성들은 그들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특별한 표시가 있는 노란색 드레스를 입도록 요구하였다.
헌법은 아프가니스탄 비무슬림인들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고, 오직 이슬람교도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허용된다.[6]
시크교도 차별
2001년 5월, 뉴스 보도에 따르면, 탈레반은 시크교도들에게 그들의 옷에 식별된 배지를 달도록 요구하는 칙령을 고려했다. 2001년 5월 23일, 탈레반 라디오는 이 칙령이 종교 관계자들의 승인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물라 오마르는 이 칙령에 서명하지 않았고 탈레반에 의해 이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의 주장은 제안된 칙령이 종교 경찰의 괴롭힘으로부터 시크 시민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국제 관측통들은 제안된 이 칙령이 비 이슬람 시민들을 분리하고 격리시키고 더 많은 시크교도 이민을 장려하기 위한 탈레반의 노력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시크교 시민들의 반응은 무관심에서부터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하자라 시아 무슬림 차별
특히 시아파 회교도들이 대부분인 하사라족 탈레반에 의한 탄압이 심했다. 비록 하자라족과 탈레반의 갈등은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충돌이었고, 탈레반이 단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시아족에 대항하여 캠페인을 벌였다고 확실하게 진술할 수는 없지만, 하자라족의 종교적 제휴가 그들을 이끌어낸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억압
탈레반은 특히 북쪽의 하자라족을 대량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1998년 8월 마자르-이-샤리프 체포 당시와 그 이후 탈레반이 수천 명의 민간인과 죄수들을 학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으며, 이 학살은 하사라스 민족을 겨냥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9월, 탈레반이 바미얀 도시를 장악하면서 약 500명이 사망했다. 하사라스인들은 게릴라식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1999년 4월 바미얀의 지배권을 되찾았지만 탈레반은 1999년 5월 바미얀을 탈환해 다수의 시아파 주민을 살해했다고 한다.
2001년 1월, 몇몇 NGO는 탈레반이 중앙의 야카오랑에서 수백 명의 시아파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보고했다. 이번 학살은 탈레반이 반대 세력으로부터 이 지역을 탈환한 후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HRW와 인터뷰한 목격자들에 따르면 탈레반이 이 지역을 탈환한 뒤 주변 마을에서 희생자들을 검거해 마을 회관에서 총검으로 쏘거나 찔렀다.
대량학살 주장 외에도, 탈레반에 의해 통제되거나 정복된 지역에서 하하라족과 타지크족이 강제로 추방되고, 탈레반이 지배하는 지역 전체에 걸쳐 이러한 소수민족들을 괴롭혔다는 주장이 있다.
산문할 자유
소수의 외국 기독교 단체들이 인도주의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탈레반은 그들을 산문화하는 것을 금지했다. 2001년 6월 법령은 비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산문화는 외국인의 경우 사형이나 추방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탈레반 관리들은 그 후 이 포고령은 단지 지침일 뿐이라고 말했다.
2001년 8월 3일, 데이나 커리와 헤더 머서는 독일에 본부를 둔 기독교 원조 단체인 '쉼터 나우'에서 활동한 혐의로 22명과 함께 탈레반에 의해 체포되었다. 탈레반은 또한 비블과 비디오, 오디오 테이프도 압수했다. 노동자들은 산문작성에 대한 탈레반의 금지령을 위반하여 재판을 받았다. 2001년 11월 15일, 다이나 커리와 헤더 머서는 탈레반이 카불을 탈출한 후 영속적인 자유 작전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종교를 행할 자유
기도는 모두에게 의무였고,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하지 않거나 기도에 늦게 참석한 사람들은 종종 심한 구타에 의해 벌을 받았다. 1998년 카불의 내무부 구성원들이 종교적 지식의 범위를 결정하기 위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막고 다양한 코란 기도문을 암송할 것을 요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불상 파괴
2001년 3월, 탈레반은 바미얀 지방의 절벽에 조각된 이슬람 이전의 거대한 불상 두 개를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파괴했다.[7] 탈레반은 2천년 된 동상을 보존하라는 유엔과 국제 NGO, 그리고 많은 이슬람 국가들을 포함한 세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동상을 파괴했다.
참고 항목
참조
- ^ a b "The Constitution of Afghanistan" (PDF). Joint Electoral management Body (JEMB). 2004-01-23. Archived from the original (PDF) on 2006-04-25. Retrieved 2006-11-09.
- ^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Report 2006 - Afghanistan".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Retrieved 2006-11-08.
- ^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U.N.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6-11-08. Retrieved 2006-11-09.
- ^ Rasmussen, Sune Engel (23 March 2015). "Farkhunda's family take comfort from tide of outrage in wake of her death". The Guardian. Retrieved 23 March 2015.
- ^ Whiteman, Hilary (23 March 2015). "26 arrests after mob beats, burns Afghan woman". CNN. Retrieved 23 March 2015.
- ^ "The Constitution of the Islamic Republic of Afghanistan". Government of Afghanista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5 March 2009. Retrieved 5 February 2013.
- ^ Behzad, Nasir (2015). "The man who helped blow up the Bamiyan Buddhas". BBC News. Retrieved 23 December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