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클라드니

Ernst Chladni
에른스트 클라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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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클라드니
태어난1756년 11월 30일 (1756-11-30)
죽은1827년 4월 3일 (1827-04-04) (70세)
국적독일어
로 알려져 있다.
과학 경력
필드물리학

에른스트 플로렌스 프리드리히 클라드니(영국: /ˈklædni/, 미국: /ˈklɑdni/, 독일어: [ɛʁnst ˈfloːdɛns ˈfʁdnss fkladniçs; 1756년 11월 30일 ~ 1827년 4월 3일)는 독일물리학자음악가였다. 때때로 음향학의 아버지라는 꼬리표가 붙는 그의 가장 중요한 연구에는 진동판에 대한 연구와 다른 가스음속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다.[1] 그는 또한 운석 연구에 있어서 선구적인 일을 하였고 몇몇 사람들에게 운석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다.[2]

초년기

클라드니는 작센비텐베르크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가족은 당시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고 오늘날 슬로바키아 중심부의 광산촌인 크렘니카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클라드니는 독일인,[3][4] 헝가리인[5], 슬로바키아인으로 확인되었다.[6]

에른스트 클라드니의 할아버지 마틴 클라드니

클라드니는 학문과 학식이 있는 집안 출신이다. 클라드니의 증조부인 루터교 성직자 게오르크 클라드니(1637~1692)는 1673년 반개혁 때 크렘니카를 떠났다. 클라드니의 할아버지 마틴 클라드니(1669–1725)도 루터 신학자였고, 1710년 비텐베르크 대학교신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1720–1721년에 신학부 학장을 지냈고 후에 그 대학의 교장이 되었다. 클라드니의 삼촌인 저스투스 게오르크 클라드니 (1701–1765)는 이 대학의 법학 교수였다.[citation needed] 또 다른 삼촌인 요한 마틴 클라드니(1710–1759)는 신학자, 역사학자, 에를랑겐 대학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였다.

클라드니의 클라드니 인물 생성법

클라드니의 아버지 에른스트 마틴 클라드니(1715–1782)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법학과 교수 겸 교장이었다. 그는 1746년에 그곳의 법학부에 합류했다.[citation needed] 클라드니의 어머니는 요한나 소피아였고 그는 외동딸이었다.[7]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을 못마땅하게 여겨 클라드니가 변호사가 될 것을 주장했다.[6][8][9]

경력

클라드니는 비텐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서 법과 철학을 공부했고, 178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본격적으로 물리학에 눈을 돌렸다.[8][9] 그는 1783년부터 1792년까지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법, 수학, 자연과학에 관한 강의를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음향에 대한 첫 실험을 시작했다.[6]

클라드니 숫자

기타 백플레이트의 클라드니 패턴
가운데로 지지되는 직사각형 플레이트의 클라디 형상
동일한 플레이트의 다른 모드

클라드니의 가장 잘 알려진 업적 중 하나는 다양한 모드에 의해 생성되는 다양한 모양이나 패턴으로 인해 클라드니 형상 또는 클라드니 패턴으로 알려진 단단한 표면에 다양한 진동 모드를 보여주는 기법을 고안한 것이다. 공진할 때 판이나 막은 진동이 발생하지 않는 선(노달 선)에 의해 경계를 이루며 반대 방향으로 진동하는 영역으로 나뉜다. 클라드니는 1680년 7월 8일 유리판의 진동과 관련된 결절 패턴을 관찰한 로버트 후크의 선구적인 실험을 반복했다. 후크는 밀가루로 덮인 접시 가장자리를 따라 바이올린 을 달리며 목덜미 무늬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10][8][9][11]

1787년에 그의 저서 Entdeeckungen über die Theory des Klanges ("소리의 이론에서의 발견")에서 처음 출판된 클라드니의 기술은 표면이 모래로 가볍게 덮여 있는 금속 조각 위에 활을 그리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판은 공명에 이를 때까지 절을 했는데, 이때 진동으로 인해 모래가 움직이며 표면이 정지해 있는 결절선을 따라 집중되어 결절선을 그렸다. 이 선들에 의해 형성된 무늬는 현재 클라드니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패러데이 파도에 마이크로스케일 소재를 조립해 비슷한 결절 패턴을 발견할 수도 있다.[12]

클라드니는 1808년 파리 아카데미를 방문하여 프랑스의 주요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나폴레옹도 포함된 청중들 앞에서 진동 패턴을 시연했다. 나폴레옹은 최고의 수학 설명에 상을 수여했다. 소피 제르맹의 대답은 결함으로 인해 거부되었지만 올바른 접근법을 가진 유일한 항목이었다.[13]

이 기법의 변형들은 여전히 바이올린, 기타, 첼로와 같은 음향 기구의 설계와 시공에 흔히 사용된다. 20세기 이후 전자 신호 발생기에 의해 구동되는 확성기를 플레이트 위나 아래에 배치하여 보다 정확한 조정 주파수를 달성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양자역학에서 클라드니 수치("nodal pattern")는 슈뢰딩거 방정식의 해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기술하는 수학은 에르윈 슈뢰딩거가 전자 궤도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했다.[14]

클라드니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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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설기

악기

적어도 1738년부터 맥주잔에 다양한 양의 물을 채워 만든 글래스피엘 또는 베릴론이라는 악기가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다.[15] 맥주잔에는 숟가락 모양의 나무 망아지가 부딪혀 '교회 등 엄숙한 음악'[16]을 연출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1757년 런던을 방문했을 때 베릴론 연주에 충분히 감명을 받아 1762년 자신의 악기인 유리 아르모니카를 만들었다. 프랭클린의 아르모니카는 클라드니가 만든 두 개의 악기를 포함하여 몇 개의 다른 악기에 영감을 주었다. 1791년 클라드니는 서로 다른 투구의 유리 막대로 구성된 유폰(황동 악기 유폰과 혼동하지 말 것)이라는 악기를 발명했다. 클라드니의 유폰은 크리스탈 바셰트로 알려진 현대 악기의 직접적인 조상이다.[17] 클라드니는 또한 후크의 "뮤지컬 실린더"를 개량하여 1799년에 또 다른 악기인 쇄실린더를 제작하였다.[8][9][16]

Chladni는 그의 악기를 가지고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6]

활판 악기 - 클라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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