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 제국

Chola Empire
촐라 제국
848 CE–1279 CE
Imperial coin of Emperor Rajaraja I (985–1014). Uncertain Tamil Nadu mint. Legend "Chola, conqueror of the Gangas" in Tamil, seated tiger with two fish. of Chola empire
라자라자 1세 황제(985–1014)의 제국 화폐. 불확실한 타밀 나두 민트. 타밀어로 전해지는 전설 "강가스의 정복자 촐라"는 두 마리의 물고기와 함께 호랑이를 앉혔습니다.
Map showing the greatest extent of the Chola empire c. 1030 under Rajendra I: territories are shown in blue, subordinates and areas of influence are shown in pink.
라젠드라 1세 치하의 1030년 촐라 제국의 가장 큰 범위를 보여주는 지도: 영토는 파란색으로 표시되고 하위 영토는 분홍색으로 표시됩니다.
자본의파자이야라이 주, 탄자부르 주, 간가이콘다 촐라푸람
공용어
종교
힌두교
정부군주제
황제
• 848–871 CE
비자얄라야 촐라 (첫 번째)
• 1246-1279 CE
라젠드라 3세 (마지막)
역사시대중세
• 설립
848 CE
• 제국의 최대치.
1030CE
• 해체됨
1279 CE
앞에
성공자
판디야 왕조
팔라바 제국
체라 왕국
동찰루키아 주
스리비자야 제국
Tambralinga
동강아 왕조
아누라다푸라 왕국
루후나 공국
서부 찰루키아 제국
판디야 왕조
폴론나루와 왕국
카카티야 제국
동강아 왕조
멜라유 왕국
베나드
호이살라 제국

흔히 제국의 촐라라불리는 촐라 [1]제국은 서기 9세기 중반에 두각을 나타내고 그들의 통치하에 남부 인도를 통합한 촐라 왕조의 포타피 지부에 의해 설립된 중세 인도의 탈라소크라테스 제국이었습니다.

촐라가 절정에 달했을 때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의 정치 권력 사이에서 가졌던 권력과 위신은 그들의 갠지스 원정, 수마트라 섬의 스리비자야 제국의 도시들에 대한 해군의 급습, 그리고 반복되는 중국 주재 대사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2] 촐라 함대는 고대 인도 해상 능력의 정점을 나타냈습니다. 1070년경, 촐라족은 거의 모든 해외 영토를 잃기 시작했지만, 후에 촐라족(1070–1279)은 인도 남부의 일부를 계속 지배했습니다. 13세기 초 판디안 왕조의 등장으로 촐라 제국은 쇠락했고, 이는 결국 촐라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3]

촐라인들은 중앙집권적인 정부 형태와 규율된 관료제를 확립했습니다. 그들의 타밀 문학에 대한 후원과 사원 건설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타밀 문학과 건축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 중 일부를 낳았습니다.[4] 촐라 왕들은 열성적인 건축가였고, 그들의 왕국에 있는 사원들을 숭배의 장소이자 경제 활동의 장소로 여겼습니다.[5][6] 촐라 건축의 대표적인 예가 1010년 라자라자가 의뢰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탄자부르의 브리하디스바라 사원입니다. 그들은 또한 예술을 후원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힌두 신인들의 촐라 청동에 사용된 조각 기법은 유실된 밀랍 공정을 이용해 제작된 것으로 선구적이었습니다. 촐라 예술의 전통은 확산되었고, 동남아시아의 건축과 예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7][8]

건국

탄자부르 시

스리칸타 촐라의 후계자 비자얄라야는 서기 848년에 촐라 제국을 세웠습니다.[9] 비자얄라야는 고대 타밀 왕 카리칼라 촐라[10] 후손이자 팔라바 왕조봉건파일 가능성이 있는 텔루구 촐라 지파인 팟타피 촐라 가문에 속했습니다. 비자얄라야는 850년 판디야 제국과 팔라바 제국 사이의 분쟁에서 발생한 기회를 잡고 무타라야르에서 탄자부르를 점령하고 중세 촐라 왕조의 황실을 세웠습니다.[11][12] 탄자부르는 촐라 제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13]

아디티야 1세 치하에서 팔라바 왕조는 885년 마두라이의 판디야 왕조를 물리치고 칸나다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서간가 왕조와 결혼 관계를 맺었습니다. 925년 아디티야의 아들 파란타카 1세가 당시 일란가이로 알려진 스리랑카를 정복했습니다. 파란타카 1세는 또한 발랄라 전투에서 크리슈나 2세 휘하의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물리쳤습니다.[14] 후에, 파란타카 1세는 크리슈나 3세의 휘하에서 라슈트라쿠타스에게 패배했고, 촐라의 후계자로 보이는 라자디티야 촐라는 타콜람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 전투에서 촐라는 톤다이만달람 지역을 라슈트라쿠타스에게 빼앗겼습니다.[citation needed]

촐라족은 파란타카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의 권력을 회복했습니다. 세자 아디타 카리칼란이 지휘하는 촐라 군대는 판디아인들을 물리치고 톤다이만달람으로 왕국을 확장했습니다. 아디타 카리칼란은 정치적 음모로 암살당했습니다. 파란타카 2세 이후, 우타마 촐라는 촐라 황제가 되었고, 가장 위대한 촐라 군주인 라자 라자 촐라 1세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citation needed]

제국 시대

촐라 왕자 아디타 카리칼란아룰모지 바르만이 그들의 구루를 만납니다.
시바샤크티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 라젠드라 1세

라자라자 1세라젠드라 1세 아래에서 촐라 제국은 제국 국가에 도달합니다.[15] 절정에 달했을 때, 제국은 북쪽으로 스리랑카 북부에서 고다바리-크리슈나 강 유역까지 뻗어 있었고, 바트칼의 콘칸 해안, 락샤드위프와 몰디브 섬들 외에도 말라바르 해안 전체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라자라자 촐라 1세는 전쟁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열정으로 통치의 임무에 자신을 바친 활기찬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을 왕실의 통제하에 있는 촘촘한 행정망으로 통합하고 지방 자치를 강화했습니다. 1000년 라자라자는 제국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토지 조사를 실시했습니다.[16] 그는 1010년에 브리하데스와르 사원을 지었습니다.[17]

라젠드라는 오디샤를 정복했고 그의 군대는 북쪽으로 계속되어 벵골팔라 왕조의 군대를 물리치고 인도 북부의 갠지스 강에 이르렀습니다.[18] 라젠드라는 북부 인도에서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수도를 지었습니다.[19] 라젠드라 1세는 동남아시아의 스리비자야 왕국을 성공적으로 침공하여 그곳의 제국을 쇠퇴시켰습니다.[20] 이 원정은 중세의 말레이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이 말레이 연대기 세자라 멜라유에 라자 촐란으로 타락한 형태로 언급되어 인상을 남겼습니다.[21][22][23] 라젠드라는 또한 스리랑카 라자라타 왕국의 정복을 완료하고 신할라 왕 마힌다 바를 포로로 잡았고, 그는 또한 라슈트라쿠타스의 영토인 라타파디(Rattapadi), 찰루키아 국가, 탈라크카드, 콜라람마 사원이 남아있는 칸나다 국가를 정복했습니다.[24][full citation needed] 라젠드라의 영토는 갠지스를 포함했습니다.스리랑카와 몰디브의 라자라타뿐만 아니라 후글리-다모다르 분지.[25][11] 갠지스 강까지 인도 동쪽 해안을 따라 있는 왕국들은 촐라의 종주권을 인정했습니다.[26] 1016년, 1033년, 1077년에 중국에 공관이 파견되었습니다.[11]

촐라-찰루키아 전쟁

라자라자 시대부터 촐라인들은 서부 찰루키아인들과 일련의 갈등을 겪었습니다. 옛 찰루키아 왕조는 형제 왕조인 서부 찰루키아와 동부 찰루키아로 나뉘었습니다. 라자라자의 딸 쿤다바이는 동부 찰루키아 왕자 비말라디티야와 결혼하여 벵기를 다스렸습니다. 서부 찰루키아인들은 벵기 왕국이 그들의 자연적인 영향권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촐라스는 서부 찰루키아에 여러 번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변경지역은 대부분 두 왕국 모두 퉁가바드라 강에 남아 있었고 라자드히라자 왕의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라젠드라의 치세는 그의 세 아들인 라자드히라자 1세, 라젠드라 2세, 비라라젠드라의 치세가 연달아 이어졌습니다. 라자디라자 1세(Rajadhiraja I, 1042–1052)는 1044–1045년에 벵기에 대한 촐라 패권을 이전의 절대 국가로 회복하려는 열망으로 벵기 국가로 원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단나다에서 전투를 벌였고, 서부 찰루키아 군대와 비자야디티야 7세를 혼란스럽게 퇴각시켰습니다. 그 후 라젠드라는 서부 찰루키아 영토로 들어가 칼랴니와 벵기 영토 사이의 국경에 있는 콜리파카 요새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로써 라자라자 나렌드라(Rajaraja Narendra)는 현재 벵기(Vengi)에서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던 라자라자 나렌드라(Rajaraja Narendra)에게 안도감을 안겨주었는데, 라자다이라자 1세는 찰루크얀 왕 소메쉬바라 1세를 쫓아내고, 만야케타(Manyakhetta)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전장에서 도망친 패배한 왕으로부터 공물을 모았습니다. 찰루키아인들이 비자야디티야 7세를 통해 계속 문제를 일으키는 동안, 벵기는 촐라인들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1054년에는 다시 베기와 촐라족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Rajadhiraja가 죽은 후, Rajendra 2세는 전장에서 자신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는 촐라 군대에 힘을 불어넣어 소메쉬바라 1세 휘하의 찰루키아를 물리쳤습니다. 찰루키야 왕은 승리한 촐라 군대의 소유권에 자신의 왕비와 부를 남기고 다시 전장에서 도망쳤습니다. 촐라인들은 벵기와 칼링가에 대한 그들의 보유를 공고히 했습니다. 찰루키아인들과 가끔 교전이 있었지만, 촐라 제국에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공언한 촐라와 벵기 왕자들에게 번번이 패배했습니다. 1061년 라자라야 나렌드라가 사망한 이후 칼랴니 궁정이 벵기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생겼습니다. 비자야디티야 7세는 벵이를 점령하고 칼랴니 궁정의 동의를 얻어 왕국에 영구적으로 정착했습니다. 한편, 촐라 공주 암망가이를 통해 라자라자 나렌드라의 아들인 라젠드라 찰루키아 왕자는 촐라 하렘에서 자랐습니다. 라젠드라 찰루키야는 라젠드라의 딸 마두란타키데비와 결혼했습니다.2. 그를 벵기 왕좌에 앉히기 위해, 라젠드라그의 아들 라자마헨드라와 형 비라 라젠드라를 보내 서부 찰루키아와 비자야디야 7세를 상대로 맞섰습니다. 촐라군은 강가바디를 향해 진군하여 찰루키아군을 격퇴했습니다. 그 후 비라라옌드라는 벵기를 상대로 진군했고 아마도 비자야디티야 7세의 아들인 삭티바르만 2세를 살해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1063년 라젠드라 2세가 사망했는데, 그의 아들 라자마헨드라가 자신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비라라젠드라는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으로 돌아와 촐라왕(1063–1070)으로 즉위했습니다. 비라라젠드라는 찰루키야 왕자 비크라마디티야 4세를 설득하여 자신의 사위가 되어 칼랴니의 왕위를 스스로 차지하도록 함으로써 서부 찰루키야 왕국을 분열시켰습니다. 1070년 비라라옌드라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아드히라옌드라가 암살당했고, 촐라 왕조는 비자얄라야 촐라 계통의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후일 촐라스

쿨로퉁가 1세 조각상
라자라자 2세가 지은 에어바츠바라 사원.

동부 찰루키아인들 사이의 결혼과 정치적 동맹은 라자라자의 통치 기간 동안 그의 벵기 침공 이후 시작되었습니다. 라자라자 촐라의 딸은 찰루키아 왕자 비말라디티야와 결혼했고,[27] 라젠드라 촐라의 딸 암망가 데비는 동부 찰루키아 왕자 라자라자 나렌드라와 결혼했습니다.[28] 1070년, 비라라젠드라 촐라의 아들 아티라젠드라 촐라가 시민들의 소요로 암살당했고, 암망가 데비와 라자라자 나렌드라의 아들 쿨로퉁가 촐라 1세가 촐라 왕위에 올라 후 촐라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29]

후대의 촐라 왕조는 칼링가, 일람, 카타하를 정복한 쿨로퉁가 1세, 그의 아들 비크라마 촐라 그리고 다른 후계자 라자라자 2세, 라자디히라자 2세, 쿨로퉁가 3세와 같은 유능한 통치자들에 의해 이끌어졌습니다. 라자라자 3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황제 라젠드라 3세까지 1218년 사이 후기 촐라의 통치는 850년에서 1215년 사이 황제들의 통치만큼 강력하지 않았습니다. 1118년경, 촐라인들은 뱅기의 지배권을 서부 찰루키아와 남부 마이소르 지역에 빼앗겼습니다. 쿨로퉁가 촐라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비크라마 촐라가 즉위한 직후, 촐라들은 찰루키야 소메쉬바라 3세를 물리치고 벵이 지방을 회복했고, 촐라들은 호이살라에서 강가바디를 회복했습니다. 촐라 제국은 850년에서 1150년 사이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라자라자 2세 (1146–1175) 치하에서는 여전히 영토적으로 온전했습니다. 이 사실은 현대 쿰바코남 외곽의 다라수람에 세 번째 웅장한 전차 모양의 에어라바타 사원을 건설함으로써 입증되었습니다. 1215년까지 쿨로퉁가 촐라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촐라의 행정과 영토 보전은 안정적이고 매우 번창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촐라의 권력은 1215년부터 1216년까지 마라바르만 순다라 판디얀 2세에 의해 패배한 후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30] 그 후, 촐라인들은 스리랑카 섬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신할라 세력의 부활에 의해 쫓겨났습니다.[31]

또한 판디아 왕조가 남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로 부활한 것도 촐라족의 쇠퇴를 특징으로 합니다. 판디야의 영토인 판디야에 지배적인 중앙 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판디야 왕위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내전을 일으켰고, 이 내전에서 신할라스와 촐라스가 대리적으로 개입했습니다. 판디안 내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촐라와 신할라가 수행한 역할은 마하밤사와 팔라바라얀페타이 비문에 나와 있습니다.[32][33]

동 찰루키아 제후들은 3대에 걸쳐 황실 촐라 가문과 결혼하여 동 찰루키아 왕조 못지않게 그 가문에 속한다고 여겼습니다. 벵기의 찰루키아 왕자 라젠드라 찰루키아는 "강가이콘다 촐라푸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왕자들과 촐라 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총애를 받았다"고 그를 찬양하는 서사시인 칼링가투파라니(Kalingathuparani)는 말합니다. 아드히라젠드라가 사망한 후, 라젠드라 찰루키야는 쿨로퉁가 1세(1070–1122)라는 이름으로 촐라 왕위에 올라 후기 촐라 또는 찰루키야-촐라 시대를 시작했습니다.[34]

쿨로퉁가 1세는 그의 삼촌 비자야디티야 7세와 화해하고 그가 평생 벵기를 통치하도록 허락했습니다. 1075년 비자야디티야가 사망하면서 동부 찰루키야 선은 끝이 났고 벵이는 촐라 제국의 속주가 되었습니다.[citation needed] 쿨로퉁가 촐라 1세는 그의 아들들을 통해 지방을 관리했고, 그는 그곳에 부왕으로 보냈습니다. 쿨로퉁가 촐라 1세와 비크라마디티야 6세 사이에 싸움이 장기화되었습니다.[citation needed] 쿨로툰가의 오랜 통치 기간은 비교할 수 없는 성공과 번영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그는 불필요한 전쟁을 피하고 신하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쿨로퉁가의 성공은 다음 100년 동안 제국의 안녕을 가져다 주었지만, 쿨로퉁가는 스리랑카 섬의 영토를 잃고 판디아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citation needed]

축소 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