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A&PA&P | |
이전에 | 길만앤컴퍼니(1859–1869) |
유형 | 공공의 |
산업 | 식료품 |
설립됨 | 1859년 2월 17일뉴욕시 | 미국
파운더스 | 조지 길먼 조지 헌팅턴 하트퍼드 |
현존하지 않는 | 2015년 11월 30일 ( |
운명 | 제11장 파산 청산 |
본부 | , 미국 |
위치수 | 피크 때 15,709(피크) 청산중 296명(2015년) |
제공되는 영역 | 미국과 캐나다 |
직원수 | 28,500 (2015) |
웹사이트 | Wayback Machine에서 aptea.com(2015년 10월 17일 발표) |
A&P로 더 잘 알려진 그레이트 애틀랜틱 & 퍼시픽 티 회사는 1859년부터 2015년까지 운영된 미국의 식료품점 체인점이었다.[1] 1915년부터 1975년까지 A&P는 미국에서 가장 큰 식료품 소매점이었다(그리고 1965년까지, 어떤 종류의 소매점에서도 가장 큰 미국 소매점이었다).[2]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A&P는 '오늘날 맥도날드나 구글처럼 잘 알려져 있다'는 미국의 아이콘으로 꼽혔고, '월마트보다 월마트'라는 평가를 받았다.[3][4] 1940년대에 절정에 달했을 때, A&P는 미국 전체 식료품 지출의 10%를 차지했다.[5] 혁신으로 잘 알려진 A&P와 그 뒤를 이은 슈퍼마켓들은 훨씬 더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종류의 식료품을 이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양학적 습관을 개선했다.[6] 1982년까지 A&P는 대형 식품 제조회사였다.[7]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1952년 저서 '미국 자본주의'에서 A&P의 제조전략을 국가 물가 통제의 반가운 대안이었던 상계력의 고전적 사례로 꼽았다.[8]
조지 길먼이 1859년 '길만앤컴퍼니'로 설립한 이 회사는 몇 년 만에 뉴욕에 작은 소매 차와 커피 전문점 체인점을 열고 전국 우편 주문 사업을 운영했다. 이 회사는 1878년 길먼이 경영권을 조지 헌팅턴 하트포드에게 넘겨주면서 70개의 점포로 성장했다. 그는 A&P를 국내 최초의 식료품 체인점으로 만들었다. 1900년에는 거의 200개의 점포를 운영하였다. 하트포드가 소유권을 취득한 후, A&P는 1912년 이코노미 스토어 개념을 도입하여 극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915년에는 1,600개 점포로 성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고기와 농산물을 제공하는 매장을 추가하면서 제조를 확대했다.
1930년 당시 세계 최대 유통업체인 A&P는 1만6000여 개의 점포를 거느리며 29억 달러(현재 449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1936년, 그것은 셀프 서비스 슈퍼마켓 개념을 채택하고 1950년까지 4,000개의 더 큰 점포를 열었다.[9]
A&P의 하락은 195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는 고객들이 요구하는 보다 현대적인 기능을 갖춘 대형 슈퍼마켓을 연 경쟁업체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1970년대까지 A&P 매장은 구시대적이었고, 높은 운영비와 싸우기 위한 노력은 고객 서비스 부진을 초래했다.
1975년에 외부 경영진을 고용하고, 오래된 가게를 폐쇄하고, 현대적인 가게를 지었다. 이러한 노력이 A&P를 회생시키지 못하자, 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하트포드 가문과 하트포드 재단의 상속인들은 독일의 텐겔만 그룹에 매각되었다.
1981년 A&P는 직원연금 잉여자산에 의한 2차 점포폐쇄 프로그램을 개시하여 법인을 1,000개 미만의 점포로 축소하였다. 커피 생산을 제외한 제조 사업도 마감했다.[10]
1982년부터 A&P는 A&P로 전환되기보다는 자체 명의로 계속 운영되던 여러 체인을 인수했다. A&P는 1980년대에 수익성을 회복한 반면, 2002년에는 특히 월마트로부터 새로운 경쟁으로 인해 사상최대의 적자를 기록했다. A&P는 더 많은 점포를 폐쇄했는데, 여기에는 대규모 캐나다 사업부의 매각이 포함되어 있었다. A&P는 마지막 제조사인 에잇오클락커피도 분사했다.[11]
2007년 A&P는 최대 라이벌 중 하나인 Pathmark를 인수했고, A&P는 다시 뉴욕 지역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 운영자가 되었다.[12] 동시에 텐겔만은 38.5%로 지분을 줄였고, 사모펀드 회사 유카이파는 패스마크 대주주로 A&P 지분 27.5%를 취득했다.
Pathmark 인수 이후 높은 활용도를 보인 A&P는 Great Refusion으로 인해 재정난을 겪었고 2010년 뉴욕 화이트 플레인스의 미국 파산법원에 11장 보호 신청을 했다.[13][14] 신청 시점까지 A&P는 국내 최대 식료품 소매업체에서 28일까지 감소해 영업이 동북부로 제한됐다.[15]
2012년 텐겔만이 보유를 종료하면서 [16]A&P는 사기업으로 거듭나면서 파산에서 벗어나 2013년과 2014년 잠시 수익성이 다소 회복됐다.
A&P는 2013년 매물로 나왔지만 마땅한 구매자를 찾지 못했다. 2015년 4월 손실을 선언한 뒤 그해 7월 19일 2차 11장 파산 신청을 했다.[17] 2015년 11월 25일까지 모든 슈퍼마켓이 판매되거나 문을 닫았고, 그 직후에 베스트 셀러 와인과 정령 가게가 문을 닫았고, 그 가게들은 2016년 8월에 경매에 붙여졌다.[18]
역사
1859-1878: 길만 시대
A&P의 선구자는 1850년대 조지 길먼(1826~1901)이 아버지의 가죽 태닝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길먼 앤 컴퍼니로 설립했으며, 1858년 맨해튼 골드 스트리트 98번지였다. 길만의 아버지는 1859년 아들을 부자로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 해 길만앤컴퍼니는 그 가게 앞에서부터 차와 커피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 소식통은 길만이 부를 고려해 좀 더 존경할 만한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고 추측한다. 1861년 5월, 길만은 태닝 사업을 그의 형 윈드롭에게 넘겼다; 조지는 그의 차 사업을 129번가로 옮겼다. 처음에 길만앤컴퍼니는 도매상이었다. 1863년 초에 그 회사는 소매상인 그레이트 아메리칸 티 컴퍼니가 되었다. 빠르게 5개의 점포를 열었고, 사무실과 창고를 51개의 베시 가로 옮겼다.[19]
길만은 승진에서 달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 사업은 낮은 가격을 광고함으로써 빠르게 확장되었다. 그 회사는 도매상과 소매상을 겸하여 낮은 가격을 제시할 수 있었다. 길먼은 전국적인 우편 주문 사업도 세웠다. 1866년까지 그 회사는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평가되었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었다. 길먼은 테아넥터라는 이름으로 당시 새로운 개념의 포장된 차를 홍보하기 위해 평행 회사인 그레이트 애틀랜틱 & 퍼시픽 티 회사를 설립했다. 그 차 회사는 계속해서 그레이트 아메리칸 이름을 통신 주문 목적으로 사용했다. 1871년 A&P는 매장에서 커피나 차를 구입하면서 석판화, 도자기, 유리제품과 같은 프리미엄을 제시하면서 또 다른 개념을 도입했다. 이 보험료들은 이제 수집품이 되었다.[20]
1878-1951: 하트포드 시대
식료품점의 진화
조지 헌팅턴 하트포드는 아마도 1850년대 후반에 길먼 & 컴퍼니에 점원으로 입사했고, 하트포드는 1866년에 당시 출납원이었던 회계원으로 승진했다. 1871년까지 하트포드는 권위의 위치에 있었고 A&P가 큰 화재 이후 시카고로 확장하는 것을 책임졌다. A&P의 뉴욕시 외곽에 있는 첫 번째 가게는 참사 발생 며칠 만에 문을 열었다. 그 회사는 급속히 확장되었다; 1875년에 A&P는 16개 도시에 점포를 가지고 있었다.[21] 1878년 길만은 회사의 적극적인 경영을 하트포드에 맡겼다.[22] 그 때까지 이 회사는 70개의 호화로운 설비를 갖춘 점포와 연간 매출 100만 달러의 우편 주문 사업을 운영했다.[23]
세입 증대를 위해 의회는 차와 커피에 대한 관세를 인상했다. 1880년경 A&P는 매장에서 설탕을 팔기 시작했다. 그 회사는 공격적인 성장을 계속했고 1884년까지 캔자스시티 서쪽, 애틀랜타 남쪽까지 매장을 운영했다. 이 회사는 또한 시골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마차 노선을 운영했다. 이 무렵 하트포드의 아들 조지(1864~1957)와 존(1872~1951) 두 사람이 회사에 입사했다. A&P의 전설은 조지가 아버지에게 A&P 브랜드 베이킹 파우더를 포함하도록 제품 라인을 확장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9] 그 후 10년 동안, 그 회사는 연유, 향신료, 버터와 같은 다른 A&P 브랜드 제품을 추가했다. 그 차 회사가 상품을 확장하면서, 그 차 회사는 점차 최초의 식료품 체인점을 만들고 있었다. 1900년까지 이 회사는 198개 점포에서 5백만 달러의 매출과 우편 주문과 마차 노선 운영 등을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식료품 체인점들은 훨씬 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는 동안, 더욱 빠르게 확장되어 각각의 영역을 뒤덮고 있었다. A&P는 곧 불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9]
1901년 조지 길먼은 유언 없이 세상을 떠나 수많은 상속자들 사이에서 법적 다툼을 시작했다. 선임하트포드는 1878년 길먼이 불문명한 파트너십 협정으로 회사의 절반을 줬다고 주장하면서 전투에 나섰다. 법원에 제공된 증거는 하트포드가 1878년부터 A&P 수익의 절반을 받았고, 회사의 임대가 그의 명의로 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상속인들은 하트포드가 없으면 그 회사는 곧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1902년 그들은 자산 210만 달러로 A&P가 편입될 합의안에 합의했다.[10]
이번 협약에 따라 길먼 상속인은 6%의 이자로 125만 달러의 우선주를 받았고, 하트포드는 보통주와 나머지 우선주를 각각 70만 달러씩 받았다. 이로써 하트포드는 투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몇 년에 걸쳐 하트포드는 길먼 상속자들로부터 우선주를 매입할 수 있었다.[10] A&P는 매 3주마다 평균 1개의 매장을 열었다. 9층짜리 본사와 창고가 저지 시에 세워졌다; 그것은 나중에 제조 공장과 제과점으로 확장되었다.[10]
1908년까지 조지 하트포드 시니어는 경영 책임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조지 주니어는 존이 영업과 운영을 지휘하며 금융을 통제했다. 그 아들들은 40년 넘게 A&P를 운영했다. 젊은 하트포드는 A&P 브랜드를 홍보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움직이며 제품군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A&P는 새로운 아이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매장 내 프리미엄을 S&H 그린 스탬프로 대체했다. 1912년까지 그 회사는 400개의 점포를 운영했고 평균 22%의 총 마진을 기록하여 2%의 이익을 냈다.[9]
A&P의 행상인들 역시 특색 있는 적흑색 마차로 5000여개의 시골 노선을 운영하고 있었다.[24]
이코노미 스토어 개발
식량 가격은 10년 만에 35%나 오른 뒤 1912년 대선에서 정치적 이슈였다.[24] 이러한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체인들은 무차단 형식으로 실험을 했다.[9]
오랜 논쟁 끝에, 하트포드 부부는 총 마진 12%로 운영되도록 설계된 이코노미 스토어를 실험하자는 존의 제안에 동의했다. 초기 재고를 포함해 단돈 3,000달러에 자본화된 이 시제품 경제 상점은 관리인만 운영하며 화려한 비품 없이 운영되었다. 두 달 만에 주간 매출이 800달러까지 늘었고 매장은 연간 30%의 투자 수익률을 달성했다. A&P는 그 개념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1915년까지 그 체인은 1,600개의 점포를 운영했다.
A&P의 엄청난 성장은 공급자들에게 문제를 일으켰다. 최대 조식 식품 제조업체인 크림오브웨이트는 모든 소매업체들이 시리얼의 박스당 가격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A&P는 이 제품을 박스당 11센트(3센트) 싼 도매가로 구입해 1센트 가격 인상이 이코노미 스토어 포맷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크림 오브 휘트(Cream of Wheat)는 물자를 끊었고 A&P는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지방법원 찰스 허우 판사는 제조업체는 소매가격을 정할 수 있다며 A&P에 대해 판결했다. 이에 따라 A&P 등 대형 체인점은 개인 브랜드 제조를 확대했다.[25]
하트포드 시니어는 1917년에 세상을 떠났다. 회사의 지배권은 그의 아들 조지, 에드워드, 존과 함께 신탁통치자로서 신탁통치되었다.[26]
식료품, 고기, 농산물, 유제품이 포함된 상점 추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A&P는 급속도로 확장되었고, 1925년에는 13,961개의 점포를 운영하였다.[27] 새로운 조합 매장은 전통적인 식료품뿐만 아니라 고기, 농산물, 유제품을 위한 공간을 포함했다. 매출은 4억 달러, 이익은 1천만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하트포드 형제는 총 마진이 22%에 달해 더 높은 비용을 감당하고 체인이 저비용 규율에서 벗어났다고 우려했다. 1926년 초 형제는 사단 경영진과 상황을 논의하여 가격을 낮추고 원가관리를 개선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해 A&P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과 인접한 새 그레이바 빌딩으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매출이 32% 증가했다.[10]
1927년에 A&P는 캐나다 사업부를 설립했고 1929년까지 온타리오와 퀘벡에 200개의 점포를 운영했다.[28] 1930년, 그 회사의 1만 6천 개의 점포는 29억 달러에 달해,[27] 그 결과 영업 구역에서 식료품점 점유율이 25%에 달했고, 전국적으로 약 10%를 차지했다. 어떤 소매업체도 이런 성과를 거둔 적이 없었다. A&P는 차세대 유통업체인 시어스의 2배, 식료품점 크뢰거의 4배였다. 대부분의 경쟁사와는 달리 A&P는 대공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훌륭한 위치에 있었다. 하트포드 가족은 빌리지 않고 체인을 구축했다; 그들의 저가형태는 훨씬 더 높은 매출로 이어졌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A&P는 하트포드 아동 한 명당 연간 500만 달러 이상의 배당금과 자본을 벌어들인 세후 수익으로 1억 1천만 달러를 기록했다고 보고했다.[10]
A&P의 성공은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역풍을 일으켰다. 수천 개의 모·팝 식료품점들은 A&P의 가격과 맞지 않았다. 소규모 사업자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었지만, 수천 개의 도매 유통업자들에게 공급되어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20년대에는 체인점 반대 움직임이 인기를 끌었지만, 대공황 때는 더욱 강해졌다. 1935년 텍사스 주 하원의원 라이트 패트먼은 체인점에 연방세를 부과할 수 있는 법안을 도입했다. 만약 채택되었다면, 이 법안은 A&P를 끝냈을 것이다.[9]
이 법률이 의회에서 움직이지 않는 동안, 1936년에 Patman은 유사한 고객들에게 다른 가격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는 로빈슨-패트맨 법을 후원했다; 이 법은 통과되었다. 그리고 나서 Patman은 그의 첫 번째 법안을 다시 소개했다. A&P는 로비스트를 유지했고 정치적으로 강력한 미국노동자연맹의 노조 활동에 대한 반대를 철회했다. 조지와 존 하트포드도 이 법안이 식품 가격을 인상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공개 서한을 발행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여론의 흐름은 그 법안에 반기를 들었고, 그 법안은 부결되었다.[9]
슈퍼마켓으로 전환하기
1930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최초의 슈퍼마켓이 문을 열었다. 동부 해안에서는 당시 A&P 직원이었던 마이클 J. 컬렌이 퀸즈주 자메이카에 첫 킹컬런 슈퍼마켓을 열었다. 2년 후, 빅베어는 뉴저지 주 엘리자베스에 문을 열었고, 재빨리 100 A&P의 판매량을 동일시했다. 1933년 A&P의 매출은 경쟁으로 인해 19% 감소한 8억 2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상당한 논쟁 끝에 하트포드 형제는 100개의 슈퍼마켓을 열기로 결정했는데, 그 중 첫 번째 슈퍼마켓은 펜실베니아 주 브래독에 있었다. 새로운 가게들은 매우 성공적임이 증명되었다; 1938년에 그것은 1,100개의 슈퍼마켓을 운영했다. 이 체인점은 계속해서 슈퍼마켓을 건설하고 도시화가 심한 지역을 제외한 소규모 점포들을 서서히 축소해 나갔으며, 1950년에 A&P는 4,000개의 슈퍼마켓과 500개의 소규모 점포를 운영했다. 매출은 32억 달러에 세후이익이 3200만 달러에 달했다.[10]
A&P의 성공은 프랭클린 D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다. 패트먼 의원으로부터 A&P 조사를 촉구받은 루즈벨트의 반독점 책임자 서먼 아놀드. 1941년 말 진주만에 이어 군 당국은 많은 대기업을 방산 우선순위 때문에 반독점 부서에 출입을 금지시켰고, 식료품점을 선택지로 남겨두었다. 이듬해, A&P와 하트포드 형제들을 포함한 그 고위 임원들은 댈러스 연방법원에서 무역을 제한한 혐의로 형사 고발되었다. 그러나 1944년 댈러스 연방판사가 이 사건이 미약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검찰은 고소장을 철회했다.[29]
같은 날 일리노이주 댄빌에서도 고발장이 접수돼 월터 린들리 연방판사에게 배당됐다. 검찰은 A&P가 제조·입고·소매 등 수직적 통합으로 가격을 낮출 수 있어 부당한 경쟁우위가 있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검찰은 또 A&P가 브로커를 통해 판매를 고집하거나 A&P 광고수당을 주지 않는 식품판매점으로부터 구매를 거부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판사들은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A&P가 독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A&P는 자사의 식료품점 점유율이 약 15%에 불과해 다른 업종의 선두주자들보다 훨씬 적다고 반박했다. 린들리 판사는 각 피고에게 1만 달러를 지불하면서 정부의 의견에 동의했다.[29]
1949년 미국 항소법원은 린들리의 결정을 지지했다; A&P는 더 이상 항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난 9월 반독점 부문은 법원에 A&P의 제조영업 분리와 A&P의 소매영업 분리를 7개 독립기업으로 명령해달라고 요청했다.[30] A&P를 지지하는 수천 통의 편지가 법무부에 쏟아졌다; 하트포드 형제는 타임지와 광범위한 인터뷰를 했고, 타임지는 1950년 11월 13일 자 신문 표지를 장식했다.[27] 타임은 제너럴모터스(GM) 다음으로 A&P가 전 세계 어느 유통업체보다 많은 상품을 팔았다고 썼다. 존은 "나는 소규모로 지내고 싶어하는 식료품점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떤 기업인도 성장을 제한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27] 이 사건은 기업 친화적인 아이젠하워 행정부로 이어졌다. 1953년 말 정부는 경쟁업체도 공급한 생산자 중개업소를 폐쇄할 경우 A&P를 해체하라는 요구를 철회하기로 합의했다.[30]
A&P는 반독점 소송과 싸우면서 자신의 활동이 조지 하트포드 시니어(George Hartford Sr.)와 그의 아들들의 유산으로 인정받았던 공공복리에 미치는 상당한 영향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트포드와 그들의 경쟁자들이 개척하고 완성한 개념들은 대중들이 더 저렴한 비용으로 더 건강한 식사를 즐길 수 있게 했다. 1950년, 평균적인 미국인들은 1930년보다 10퍼센트 더 많은 음식을 소비했고, 빈곤한 가정들은 특히 그들이 소비한 음식의 질에서 중요한 향상을 누렸다.[31]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1952년 저서 '미국 자본주의'에서 상계 권력의 예로 A&P를 들며 이 논쟁을 지지했다. 그의 논문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옥수수 플레이크를 제조하기 위한 공장 개설의 타당성에 대한 1937년 A&P 연구를 논의하였다. A&P가 옥수수 플레이크를 생산할 가능성만으로도 기존 옥수수 플레이크 제조업체들은 가격을 10% [32]낮출 수밖에 없었다.
1951-1974: 포스트 하르트포드 시대
1951년 존 하트포드는 크라이슬러 빌딩에서 자동차 회사 이사회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후 사망했다. 조지는 A&P의 회장 겸 재무관으로 남아 회사의 오랜 비서 랄프 버거를 신임 사장으로 임명했다.[10] 버거가 1910년 뉴욕 글렌스폴스(Glens Falls)의 점원으로 A&P로 시작한 반면, 존 하트포드의 전략적 마케팅 능력이 부족한 스태프였다.[33] 버거에서는 A&P가 기록적인 매출을 계속 신고해 업계 평균이 15%일 때 매출의 12.6%의 비용으로 운영했다.
버거는 또한 John A의 대통령이었습니다. 하트포드 재단은 1929년 아들 존과 조지가 1957년 조지가 사망했을 때 버거가 A&P를 통제할 수 있도록 보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지의 신뢰는 사라졌고, 주식은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주당 59달러에 팔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A&P는 6명의 사외이사를 이사회에 선출했다. 1961년 말, A&P 주식은 70달러로 정점을 찍었다.[10]
A&P가 35년간 국내 최대 식료품점에서 파산(이후 청산)으로 추락한 데 대한 씨앗은 1950년대에 심어졌다.
- A&P는 자본에 굶주려 있었다. A&P가 공개적으로 거래되는 동안, 지배력은 회사와 하트포드 신탁을 모두 이끌고 있는 버거와 함께 휴식을 취했다. A&P의 이익의 대부분은 신탁과 그 상속인의 소득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배당금으로 선언되었다. A&P는 또한 채무 재정에 반대했다. 자본의 유일한 원천은 감가상각 계좌였다. 경쟁사들이 더 크고 현대적인 슈퍼마켓에 투자하는 동안, A&P는 그것의 소매 자본 공장을 업데이트하는 데 느렸다. 1970년까지 A&P 매장은 경쟁업체보다 상당히 작고 대부분 오래되었다.[10]
- A&P는 개인 라벨 제품에 너무 많은 중점을 두었다. 1951년, 대법원은 소매업자가 약정에 동의하지 않는 한 제조업체들이 최저 가격을 책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 결정은 국가 브랜드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 텔레비전 광고의 급속한 증가로 인해 할인 소매업에[9] 혁명을 일으켰다. 이와는 반대로 A&P는 희소 자본의 상당량을 제조업 확대에 투자했는데,[10] 여기에는 2,500만 달러 등 세계 최대 규모의 식품 공장을 뉴욕 호스헤드에 건설하는 데 투자했다.[34][35][36] A&P 매장이 더 작았기 때문에 A&P 매장의 선반은 개인 라벨 제품들이 주를 이루었고, 고객들은 국가 브랜드가 품절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0]
- A&P의 인건비는 대부분의 경쟁사보다 높았다. A&P가 성장을 멈췄기 때문에 직원들 중 연공서열 때문에 임금을 올리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는 A&P의 경쟁사 대부분이 급속히 팽창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연공서열이 높은 노동자가 적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높은 인건비를 상쇄하기 위해 A&P는 적은 인원으로 점포를 운영하려 했고, 이로 인해 체크아웃과 빈 선반에 긴 줄이 생기게 되었다.[10]
랠프 버거는 A&P의 플라이드 스탬프를 만들면서 트레이드 스탬프를 재도입함으로써 톤수 하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1962년 후반에 이르러 초기의 매출이익은 증발했고 6명의 사외이사는 버거가 은퇴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1963년 5월 버거가 떠났을 때 그 주식은 30달러대에 거래되고 있었다.[10] 버거는 내리막길을 막지 못한 대통령들이 줄줄이 교체됐다. 1971년 이사회는 1934년 A&P에 상근 점원으로 입사한 윌리엄 J. 케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케인은 청결도, 제품 가용성, 고객 서비스, 예우 등 기본적인 매장 운영에 초점을 맞춰 A&P가 돌아설 수 있다고 봤다.
그의 프로그램이 중단되자, 케인은 A&P를 W.E.O. Warehouse Economy 아울렛(또는 Where Economy Outpoint)으로 알려진 창고형 상점 개념으로 전환하여 가격을 대폭 인하하는 전략을 실행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A&P가 프로그램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손실이 빠르게 증가했다. 1973년 초에는 주가가 17달러까지 떨어졌고 걸프+웨스턴의 찰스 블루돈은 주당 20달러에 입찰 제안을 했다. 일부 주주들은 A&P의 계속되는 어려움을 고려할 때 이 제안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케인은 거절했다.[10] A&P는 1971년과 1974년 각각 캘리포니아주와 워싱턴주를 떠나 미주리주를 가장 서쪽 지역으로 만들었다.[37] 1974년 이 회사는 또한 그레이바 빌딩에 있는 오랜 본사를 떠나 뉴저지 주 몬트베일로 이사했다.[10]
1975-2001: 스콧/우드 시대
1975년 2월 A&P는 부즈 앨런 해밀턴이 자사 점포 3468개 중 36%를 폐쇄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케인은 사임하기로 동의했고 알버트슨 사의 44세의 조나단 스콧 사장으로 교체되었다. 스콧 감독 아래 A&P는 3년 만에 1500개 점포를 폐쇄해 1,978개로 줄었다. 스콧은 외부로부터 수많은 임원들을 고용하고 권위를 지역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그의 첫 3년 동안, A&P는 2만 3천 평방피트(2,100m2)에서 3만 2천 평방피트2(3,700m)에 이르는 300개의 슈퍼마켓과 함께 A&P 패밀리마트라는 이름으로 4만 평방피트(3,700m2)의 최초의 복합 식료품점을 만들었다. 최초의 패밀리마트는 1977년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린빌에서 패밀리마트로 문을 열었다.[7]
패밀리마트 체인은 대부분 3,700–5,100m의2 상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풀서비스 슈퍼마켓과 약국을 결합한 최초의 A&P 상점에 속한다.[7] 스콧은 대규모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기본 매장 운영(청결 및 고객 서비스 포함)을 개선하기 위한 케인의 노력을 계속했다. 점포당 주간 매출은 1974년 3만7000달러에서 1976년 7만 달러 이상으로 늘었고, 폐점에도 불구하고 총 매출은 64억 달러에서 72억 달러로 늘었다. 제조업도 재편됐다.[7] 초기 결과가 유망한 반면, 1978년에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상황 때문에 A&P 수익이 하락하기 시작했다.[10]
주가가 7달러까지 내려간 상황에서 존 A. 하트포드 재단은 마침내 더 이상 반전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 텐겔만 그룹의 오너인 에리반 하우브가 관심을 나타냈다. 1930년에 태어난 하우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소매업을 공부했고, 가족의 식료품 사업을 연매출 20억 달러에 해당하는 2,000개 점포로 만들었다. 아직 독일에 집이 있지만 그의 아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났다.[10]
하우브는 A&P 주식의 42%에 대해 주당 7.375달러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하우브도 1981년 2월 50.3%를 보유할 때까지 조용히 다른 주식을 사들였다. 스콧은 5년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하우브는 제임스 우드를 회장으로 고용했다. 하우브와 동갑인 영국인인 우드는 이전에 미국 그랜드 유니온 슈퍼마켓 체인을 운영했다. 스콧이 영입한 많은 중역들은 A&P를 떠났다. 그들은 그랜드 유니온의 우드의 동료들로 대체되었다.[10]
독일에서 텐겔만은 플러스 매장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들은 제한된 종류의 고기와 생산품과 함께 저렴한 가격의 개인 라벨 제품을 특징으로 하는 작은 단위였다. A&P는 A&P의 제조 공장과 수많은 소규모 점포를 활용하기 위해 미국에 여러 개의 플러스 매장을 열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국가 브랜드에 낮은 가격을 제공하는 다른 체인점들에 끌리는 미국 고객들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했다.[10]
제임스 우드는 A&P를 돌리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대규모 점포 폐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81년 10월, 1,000개 미만의 점포로 축소하고 시카고 사업부를 폐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A&P는 커피창고 4곳을 제외한 대형 제조그룹도 문을 닫았다. 이 프로그램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A&P는 2억 달러의 흑자를 이용하여 비조합 연금 계획을 해지할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의무는 당시 높은 이자율 때문에 약 1억 3천만 달러 밖에 들지 않은 연금으로 충당되었다. A&P의 비조합원은 확정기여금 401(k)으로 충당되었다.[10]
당시 최근에 은퇴한 간부였던 윌리엄 월시는 연금액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궁극적으로 해결된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A&P는 여전히 2억 달러 이상을 실현했고 이전 마감 프로그램에서 이월된 세금 손실 때문에 세금을 납부할 필요가 없었다.[10] 필라델피아 사단도 노조가 양보를 계약하기로 합의하지 않으면 문을 닫을 예정이었다. 노조가 거부하자 A&P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노조는 점포 매입을 제안했지만 필요한 자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대안으로 노조는 A&P가 새로운 자회사를 설립해 다른 이름으로 운영하면 이익분배약정에 합의했다. 새로운 현수막인 "슈퍼 프레시"는 수익성이 입증되었다.[38] A&P는 자신의 이름이 자산이 아님을 깨달았다.[10]
A&P는 다른 체인점으로부터 점포를 인수하기 시작했다. 1982년 Stop & Shop은 뉴저지를 떠나 거의 20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A&P는 이들 점포의 대부분을 낡은 점포들을 대체하기 위해 구입했다. 1983년 A&P는 위스콘신 소재 콜스푸드스토어(콜스 백화점 체인의 일부였던)를 BATUS로부터 인수해 위스콘신주와 일리노이주에 재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84년 A&P는 버지니아 주 팬트리 프라이드의 리치몬드를 인수했다.[24] 이듬해 A&P는 퀘벡에 매장을 닫고 온타리오 도미니언 스토어를 인수하는 등 수익성이 높은 캐나다 사업부를 강화했다.[28] 미국에서는 A&P 퓨처 스토어로 알려진 4만 평방피트(4,000m2) 크기의 대형 슈퍼마켓을 짓기 시작했다.[39][40]
1986년 A&P는 월바움(뉴욕 남부와 뉴잉글랜드 남부에 매장을 두고 있음)과 푸드엠포리움을 매입했고, 후자는 뉴욕시에 기반을 둔 고급 체인점이다.[41] 1989년에 A&P는 미시간주에 본사를 둔 Farmer Jack을 인수했고, 또한 A&P는 2000년대까지 운영했던 네덜란드에 가게를 열었지만, Gateway Corporation(당시 영국 3위의 식료품 체인)에 입찰에 실패함으로써 유럽으로의 확장을 시도했다.[24] 10년 말, A&P는 110억 달러의 매출에 대해 1.3%(업계 평균 1.04%)의 이익을 보고했다.[42]
1990년대 초 A&P는 경제와 새로운 경쟁, 특히 월마트 때문에 다시 고전하기 시작했다. 1992년에 A&P의 매출은 11억 달러로 감소했고, 1억 8천 9백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A&P는 사설 라벨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나머지 미국 유닛을 정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4,000 평방 피트(4,0002 m) 미만의 대부분의 상점은 5,000 평방 피트(5,000 m2)에서 8,000 평방 피트(7,000 m2)까지 확장, 폐쇄 또는 단위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가게에는 약국, 더 큰 빵집, 그리고 더 많은 일반 상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24]
A&P는 남부에서 계속 어려움을 겪었고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켄터키, 캐롤리나스, 테네시, 버지니아에서 철수함으로써 이 지역의 대부분을 포기했다. 이들 가게의 대부분은 크로거에게 팔렸다. 이에 따라 A&P는 동북부, 중서부(미치건과 위스콘신), 뉴올리언스, 온타리오 등 4개 지역으로 축소됐다. 뉴올리언스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A&P는 6개의 슈베그만 슈퍼마켓을 구입했지만, 현재 A&P는 600개의 점포로 축소되었다.[24] 크리스티안 W.E. 에리반의 막내아들 하우브는 1994년 공동대표가 됐고 우드가 그 자리에서 물러난 1997년 CEO가 됐다. 2001년 우드도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하우브도 그 직함을 맡았다.[42]
2001~2015년: 슈퍼마켓 체인으로서의 마지막 해
전국적으로, 월마트는 식료품 산업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비록 A&P의 핵심 북동부 지역에서 월마트는 여전히 주요 식료품 경쟁자가 되지 못했으나, 경쟁의 상당 부분을 축소하도록 강요했다. 2003년 A&P는 최대 적자를 선언한 뒤 버몬트와 뉴햄프셔에 있는 콜의 푸드 스토어와 A&P의 잔여 매장을 폐쇄해 500여 개 점포로 축소했다.[43][24] 또한 2003년에는 A&P가 8시 커피 사업부(마지막 제조 사업부)를 그리폰 인베스터즈로 1억700만 달러에 매각했다.[11] (2006년 그리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