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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서유럽군대
프랑스군영국군네덜란드군아일랜드군벨기에군룩셈부르크군모나코군
육군해군
공군헌병

예술의 나라답게 각 군별 로고가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그럴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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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GFP 순위5위 (2016년 4월)
상비군228,656명
예비군195,770명
육군력
3.5세대 전차[1]406대[2]
장륜형 대전차 장갑차248대[3]
장갑차(APCs/IFVs) 총합8,468대 (2015년)
견인포100문
자주포139대
MLRS60대
수송 차량13,748대
공군력
4.5세대 전투기[4][5]140기[6][7]
4세대 전투기[8][9]124기[10]
3세대 전투기[11]17기[12]
조기경보관제기(AWACS)4기
조기경보기2기[13]
전자전기(SIGINT)2기
공중급유기14기
공군기 총합약 790기
헬리콥터810기 (2011년)
항공기 총합1,757기[14] (2011년)
해군력
해군 전투함 총합289척
주력 수상함
7천톤 이상 ~ 8천톤 미만 준이지스 전투함2척[15]
6천톤 이상 ~ 7천톤 미만 준이지스 전투함2척(+5척)[16]
6천톤 이상 ~ 7천톤 미만 전투함1척[17]
4천톤 이상 ~ 5천톤 미만 전투함2척[18]
3천톤 이상 ~ 4천톤 미만 전투함5척[19]
2천5백톤 이상 ~ 3천톤 미만 전투함6척[* 경 정찰 호위함 프로레알급 2,950톤(6척)/OPV
1천5백톤 이상 ~ 2천톤 미만 전투함1척[20]
1천톤 이상 ~ 1천5백톤 미만 초계함[21]10척[22]
1천톤 미만 초계함, 고속정18척
모함, 상륙함, 수송함
7만톤 이상 ~ 8만톤 미만 항공모함(+1척)[23]
4만톤 이상 ~ 5만톤 미만 항공모함1척[24]
2만톤 이상 ~ 3만톤 미만 강습상륙함3척[25]
1만톤 이상 ~ 1만5천톤 미만 LPD1척[26]
1천톤 이상 ~ 1천5백톤 미만 LST3척[27]
1천톤 미만 상륙함24척[28]
잠수함
1만2천톤 이상 ~ 1만3천톤 미만 SSBN4척[29]
4,500톤 이상 ~ 5,000톤 미만 SSN(+6척)[30]
2,400톤 이상 ~ 2,500톤 미만 SSN6척[31]
잠수함 총합10척(+6척)
예산
국방비 총합612억 달러 (2013년)

1 개요

Forces armées françaises. 프랑스군대.

한국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저평가를 받아 이탈리아군 뺨치는 막장 군대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온갖 한심한 삽질들 덕분에 굉장히 저평가받곤 한다. 2차 세계대전 말고도 양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에서 가장 주요한 전쟁 중 하나였던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참패한 것,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알제리 전쟁에서의 만행과 베트남 전쟁의 패배 등도 프랑스군에 대한 평가를 낮추는 데 일조했다. 그러다보니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부 전선의 주력이었고 독일군의 맹공 앞에서도 전선을 그럭저럭 유지했지만, 삽질한 것처럼 오해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마지노 선 같은 경우는 군대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대충 알 정도니 이미지가 안 좋을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엘랑 비탈이나 청년학파, 1인승 전차포탑, 베아른급 같은 프랑스군의 흑역사들이 밀덕들의 주요 관심사인 근현대 시기에 몰려있는 점도 프랑스군의 저평가에 한 몫 했다. 미군이나 소련군, 독일군은 실드를 쳐줄 빠가 생길 만큼의 임팩트가 있었지만, 근현대 프랑스군은 하필이면 밀덕질의 주무대인 2차 대전에서 안 좋은 꼴을 보여줘 그런 게 생길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는 근대 이래 20세기 말까지도 항상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군사강국이었다.[32] 덧붙여 역사적으로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몇 안 되는 국가이기도 하다. 백년전쟁미국 독립 전쟁이 대표적. 본토에서 백년 동안 전쟁 질질 끌면서 나라가 망할 뻔했다던가, 전쟁에서 이기고 나서 자기네 국왕의 목을 뎅겅 잘랐다던가 같은 사소한 건 잊자.

역사적으로 유럽에서는 프랑스 외에 다른 육군 강국인 스페인, 오스트리아(또는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의 쟁쟁한 나라들과 수세기에 걸쳐 대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17, 18세기까지만 해도 일 대 일로 프랑스를 인구와 본토 경제규모 모두로 압도할 수 있는 나라는 저 멀리 러시아를 빼면 그 어떤 나라도 없었기 때문. 이 당시 프랑스는 인구 2천만을 넘어 3천만에 육박했고, 순수한 본토 생산력도 단일 국가 중 1등이었다. 그래서 이 시절 프랑스의 별명 중 하나가 유럽의 중국이었다.

물론, 루이 14세 시기 말년엔 패했지만[33] 치세 내내 최전선에서 활약한 뛰어난 장군들과 병사들의 높은 전투력, 국내에서 내정을 잘 꾸린 관료행정체계[34]에 힘입어 유럽에서의 패권을 유지했고, 해상에서도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과 경쟁해야 하는 조건 속에서도 당대 열강의 자리에서 물러난 적이 없으며,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한 영국을 상대로 17-18세기 동안 전 세계의 바다에서 충돌하며 승패를 주고 받는 저력을 보여준 군대였다. 특히 나폴레옹의 대육군 시기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온 힘을 합해 다구리를 쳐도 연승행진을 이어가는 충공깽급 전투력[35]을 보여줬으며,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로 인한 몰락 이후에야 다구리를 쳐서 간신히 프랑스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시대 이후 가장 큰 전쟁이었던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군에 궤멸당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겪으면서 프랑스군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19세기 이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육해군을 통틀어 유럽 내 주요 군사강국 지위를 계속 이어갔다.

프랑스군은 전술교리나 군사장비 기술 면에서 선도적이었으며, 지금까지도 프랑스군의 영향이 이곳 저곳에 남아 있다. 현대 군대의 많은 명사들 중 상당수가 프랑스 육군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현대의 부대 단위인 사단(division), 연대(regiment), 군단(corps)이 모두 프랑스군에서 유래한 개념들이며, 영어의 계급명인 위관(lieutenant), 영관(colonel), 장군(general), 원수(Marshal), 그리고 무기로는 수류탄을 말하는 그레네이드(grenade)도 모두 프랑스 육군에서 유래한 단어들이다. 최초의 플린트록(수발식) 소총을 개발했으며,세계 최초의 실용적 헬리콥터, 세계 최초의 현대식 야포인 M1897 75mm 야포를 개발한 것도 프랑스이며, 야드파운드법이 기본인 미국이 야포 구경을 mm로 쓰는 건 프랑스에서 도입한 155mm 중포의 영향이다. 최초의 소나 시스템도 프랑스, 최초의 회전 포탑을 장착한 현대 전차의 아버지인 르노 FT-17전차, 최초의 항공대, 총검을 뜻하는 영단어 바요넷(bayonet)이라는 말이 프랑스어 바요네뜨(baïonnette) 에서 유래되었듯이, 근대적 총검술도 일본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해군에 있어서도 영국 다음의 거대한 규모를 갖췄고, 최초의 군용 스크류 추진 증기선 나폴레옹 호의 도입[36], 최초의 항양장갑함 글루와 호의 도입[37] 등으로 해양제국 영국과 경쟁했다.

전술한 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대규모 전쟁에서 계속 패하며 약체 이미지가 쌓였지만, 육-해-공과 핵전력 모두 균형잡힌 전력을 계속 보유하고 있으며 냉전기 서유럽 방위에 한 몫을 했고, 소규모 군사 개입이나 대테러작전 등의 특수전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꾸준히 좋은 성과를 보여왔다.

현대의 프랑스군(Forces armées françaises)은 육군(Armée de terre), 해군(Marine nationale), 공군(Armée de l'air), 국가 헌병대(Gendarmerie nationale)[38]의 4군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에 한정해서 보면 그저 라팔 몇 대 팔아보려 했을 뿐인데, 몇몇 라팔리언들의 깽판과 빠돌이짓에 질린 한국 밀덕들의 터무니없는 평가 절하를 받아버린 군대다. "라팔이 좋냐? F-15기 좋냐?" 하며 치고박고 싸운 건 어쨌거나 한국 밀덕들인데, 그 싸움이 만들어낸 증오를 엉뚱하게 프랑스군이 다 뒤집어 쓴 것.[39][40]

2 수뇌부

통수권자국방/퇴역군인장관국방참모총장[41]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장이브 르 드리앙육군대장
피에르 드 빌리에르
장군
육군참모총장해군참모총장공군참모총장국가헌병사령관
육군대장
베르트랑 라마도
장군
해군대장
베르나르 로겔
제독
공군대장
드니 메르시에
장군
헌병대장
드니 파비에
장군

3 예산과 경제규모

(2000년~2014년) 프랑스명목 GDP [42], 경제성장률, 국방비 흐름[43]
종류2000년2001년2002년2003년2004년2005년2006년2007년2008년2009년2010년2011년2012년2013년2014년 추정치
전체 명목 GDP(10억달러; 약 1조원)1,4961,4851,6231,8772,2212,3242,4862,8582,7092,2172,2962,4642,4702,5232,847
경제성장률(%)4.3%2.1%2.2%3.9%3.1%3.2%2.7%3.4%-0.7%-5.1%1.6%1.1%0.2%1.7%3.2%
영어위키 국방비 자료[44]: SIPRI(10억달러; 약 1조원)33.833.236.445.953.052.954.560.566.066.861.762.758.961.2

중국 춘추시대 초기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관중(관이오)이 말하길 부국강병, 즉 경제력이 곧 군사력이라 했다. 사실상 군사력과 경제력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국가의 경제규모나 경제력이 떨어지면 군사력도 쇠락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군사력의 예산 항목을 볼 때는 해당 국가의 경제성장률, 명목 GDP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GDP 대비 국방비도 국방예산의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프랑스의 국방예산은 2009년에 정점을 찍은 후 경제위기(유로화 사태) 등의 영향으로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경제규모는 확대되고 있지만 국방비는 정체되는 형국이다.

4 역사

4.1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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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랑스 지역은 고대에는 갈리아라고 불렸고, 켈트족(골족)의 영역나와바리이었다. 골족은 전사계급을 우대하는 호전적인 야만족이었고, 가끔식 로마를 침략하기도 하였다.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골족의 침략을 뿌리뽑을 심산으로 이곳에 쳐들어가 부족 사회에 머물러 있던 골족을 정복하고 10여년만에 이곳 전체를 로마의 영지로 삼았다. 골족에서도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라서 베르킨게토릭스 같은 지도자가 나와 골족을 모두 규합하여 로마군에 대항했으나, 그 당시 로마군은 넘사벽의 레벨로 적 지휘관도 하필이면 카이사르 전쟁을 잘했기 때문에 얄짤없이 패한다. 이후 갈리아는 완전히 로마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곳의 골족은 거의 정체성을 잃고 로마화되었다. 심지어는 자기네들 언어까지 잊어버리고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를 지껄이게 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19세기 민족주의가 고양되었을 당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프랑스의 독립투사로서 영웅화되었다.

이후 게르만족이 동쪽에서 온 훈족의 침략을 받아 서부로 이동하자, 이 지역은 게르만족에게 유린되었다.[45]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이 지역을 차지했고, 그래서 이것이 현재의 프랑스의 유래가 된다. 프랑크족은 평야가 대부분이고 온후한 기후에 농사도 잘 되는, 그야말로 유럽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한 덕에 다른 부족과는 달리 안정된 국가를 건설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이슬람권의 침공을 번번히 격퇴하여 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했고, 이슬람 기병에 대응할 기병양성을 위해 전사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말을 키우게 함으로써 초기적 봉건제를 실시, 이후 기사계급을 낳는다.

4.2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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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바이킹의 일파가 현 노르망디에 정착하면서 프랑스 왕에 복종, 이들의 후손이 노르만족이 되면서 기사의 전술 변화를 초래한다. 이 노르만족 기사들은 바로 바다 건너 맞은 편의 영국을 정복해 노르만 왕조를 낳았으며 지중해까지 진출해 교황과 야합하여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과 나폴리의 비잔틴 잔당을 박살내고 아풀리아 공국과 시칠리아 백국을 건설한다. 후에 교황에 의해 시칠리아 왕국으로 승격되는 등 전 유럽에서 정복과 위세를 떨치고 십자군의 주축이 되면서 프랑스 기사=최강 신화를 낳는다. 특히 프랑스 기병은 유럽 최고를 자랑했다.

프랑스는 1214년 북프랑스의 부뱅에서 필리프 2세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영국의 존 왕과 독일의 오토 4세의 연합군을 격파했다.그리고 손자 루이 9세가 비록 실패했으나 두 차례 십자군을 주도하면서 13세기 프랑스는 서유럽의 중심 국가로 부상한다.

하지만 백년전쟁 초기 크레시, 푸아티에 전투를 비롯하여 삽질로 인해 국왕(장 2세)까지 사로잡히고 아쟁쿠르 전투 등으로 잉글랜드에 탈탈 털렸지만, 후에 국력을 회복하고 잔 다르크의 활약 등으로 영국을 프랑스 영토에서 상당 부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사실 백년전쟁 당시에는 잉글랜드가 결혼 파워로 프랑스 영토 절반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 역시 자국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입장에서는 내전이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프랑스 출신 용병들은 독일 용병들과 함께 이탈리아인들 사이에서 얘깃거리였는데 용맹성보다는 어떻게든 이길려고 미친듯이 발악해서. 교활하고 잔혹한 것으로 유명했다. 어쨌거나 1515년에만 해도 이탈리아에서 스위스군을 쳐부수는 등 백년전쟁 후 잠깐 동안은 잘 나가긴 했다.

4.3 근세

백년 전쟁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군사강국으로 떠오른다. 전쟁중의 경험과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와 경제력 강한 왕권[46]을 바탕으로 한 상비군으로 자연스레 대외 팽창 정책을 본격화하여 15세기말 샤를 8세 시기 이탈리아 원정에서 초반에 선전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후 프랑수아 1세때 결국 그 유명한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의 정예군에 제대로 궤멸당해 왕이 사로잡히는 캐굴욕을 겪었다. 그리고 이후 스페인테르시오가 유럽 최강의 지위를 차지하고 프랑스군은 군사 강국임에도 유럽에서 패권국의 위치로는 아직 떠오르지 못했다. 기병 대국답게 16세기에도 기병+포병의 체제를 고수했으나, 아무리 유럽 제일의 기병을 갖고 있어도 파이크 때문에 돌격을 못 하니 하고는 게임이 안 됐다.

이후 17세기 직전까지 위그노 전쟁으로 한동안 자기들끼리 투닥대며 구석에서 버로우하다 안정을 되찾고 30년전쟁을 기회로 군비를 증강한데다가[47] 루이 14세 때에는 사실상 서유럽 내 가장 강력한 군대로 떠오른다. 네덜란드의 마우리츠가 개혁한 방식인 머스킷 총병 중심의 선형진이 스페인의 테르치오를 압도하고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군사체제가 표준화된 상황에서는 인구나 경제력, 즉 물량빨에서 가장 강한 프랑스가 우세를 확립할 수 있었다. 루이 14세 때 상비군이 40만[48]이었다. 루이 14세의 군대는 네덜란드, 독일 등지에서 전 유럽군대를 상대로 혼자 싸웠지만 유럽 전체를 합친 병력보다 프랑스 병력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물론 이게 가능했던 건 17세기 루이 14세때 이미 프랑스 인구가 2천만을 넘기고, 훗날 18세기 말에 이르면 3천만에 달할 정도로 영국의 네다섯 배,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거의 세 배[49]에 달하는 인구수에 넓은 농경지를 바탕으로 한 본토 경제력 때문이다.[50] 그래서 역덕들 사이에서 불리는 이 시절 프랑스의 별명이 유짱, 바로 "유럽의 짱깨"다.

이에 반해 동시기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면,

1. 바다 건너 영국은 겨우 겨우 1천만을 목전에 두고 있었거나 넘겼었고, 이쪽은 섬나라에다가 인구가 적고, 가장 가까운 지역이 프랑스라는 자국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애당초 유럽 본토 진출보다는 해외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2. 신성로마제국은 전체 영토나 인구, 경제력을 보면 프랑스와 그럭저럭 비등비등했지만 합스부르크 황실이 거느린 각각의 세습령이 처한 현실 때문에 모든 영지 중에서 최후의 한 방울까지 역량을 쥐어짜낼 수 있는 영토는 고작해야 오스트리아 지역 뿐이었다. 합스부르크 황실이 거느린 세습령을 살펴보면 오스만 제국 쪽 국경 수비에 집중해야 했던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지역, 특히 그 중에서도 직할령인 오스트리아 지역과 맞먹는 인구와 경제력을 갖고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토착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황실을 고깝게 여겼던 헝가리[51], 오스트리아, 헝가리 다음의 경제력과 인구를 갖고 있었지만 상공업과 지식의 중심지라는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반골 기질이 강했던 보헤미아[52] 등인지라 방어전처럼 이해관계가 맞는 상황이 아니면, 다시 말해 침공전 같은 상황에는 총력전을 펼칠 수 없었다.

3. 스페인이야 가격 혁명과 상업 혁명이라는 시대적 조류를 넘지 못한 데다가 네덜란드와 영국에게 제해권과 해양무역 패권을 차례대로 뺏기고, 1억 두카트[53](...)가 넘는 부채[54]에 짓눌렸으며[55] 많지도 않던 국내 인구가 아메리카로 유출[56]되면서 몰락을 거듭해 이류 열강으로 밀려난 지 오래. 군사적인 면에서도 그들이 무적이라고 자랑하던 테르시오도 병기와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머스킷-선형진 위주의 전술이 표준화되면서 구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루이 14세 때는 프랑스 2중대로 전락......곹통(!!!)의 스페인......

4. 그나마 프로이센이 병력의 질에서 프랑스와 막상막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이쪽은 프랑스와 체급 격차가 너무 심했다. 당연히 당시 1천만은 커녕 5백만도 안되며 간신히 넘길까 말까한 인구[57]에 신성로마제국 내 일개 선제후[58]에서 칭호만 왕[59]으로 바꾼 프로이센이 라이트급이었고, 그 열 배가 넘는 프랑스가 헤비급이었다.

이렇듯 프랑스의 상황과 프랑스를 견제할 만한 나라들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잘 나가는 놈은 일단 닥치고 다구리라는 유럽의 유구한 전통(...)이 아니었다면 프랑스가 유럽을 정복했을 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오히려,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올드보이의 오대수마냥 라이벌 국가들 모두를 상대로 혼자서 본토와 식민지 양쪽에서 양면전쟁을 펼친 프랑스가 대단해 보이는 건 과장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이후 루이 14세 말기 17세기말 18세기 초부터 프랑스의 국력이 휘청이기 시작하는데, 대규모 상비군의 바탕이었던 프랑스의 경제력이 계속되는 루이14세의 전쟁질로 국고가 바닥나면서 펠리페 2세의 스페인처럼 재정이 망하기 시작[60]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루이 14세부터 시작된 신교 탄압으로 프랑스 사회의 지식인, 상인, 기술자 계층이던 위그노들이 영국, 네덜란드, 독일로 모두 탈출하면서 프랑스의 경제력과 기술력이 전반적으로 무너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부잣집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프랑스는 본토 자체 생산력이 받쳐주는 유럽 최강국이었기 때문에 군사력에서도 오랜 전통과 뛰어난 장군들을 바탕으로 패권을 놓지 않았는데, 루이 14세 시대에는 네덜란드로 여러 번 레이드를 뛴 끝에 사실상 열강에서 탈락시키고[61] 스페인에게서 벨기에 일부를 빼앗았으며[62] 아메리카와 인도 식민지에서도 각각 퀘벡 지역과 콜카타 지역을 기반으로 식민지를 확장했다.

하지만 마지막 전쟁인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는 프랑스는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 전체와 대등한 수준의 병력을 양성하고 있었지만, 영국의 존 처칠[63]과 사보이의 외젠[64]의 활약에 의해 한때 큰 위기에 몰렸다. 드냉 전투에서는 영국이 빠지자마자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는 등 건재함을 과시하였지만 전쟁에서 프랑스가 기사회생한 건 연합국측이 밀던 요제프 1세의 형(레오폴트 1세)이 갑자기 죽어서 계속 밀다간 카를 5세처럼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같이 먹을까봐 틀어진 것[65]이라 프랑스가 외교적 수세에서 벗어난 거지 프랑스의 군사적 승리로 마무리된 게 아니었다.[66] 루이 14세 시절 다른 전쟁과 달리 전 유럽을 압도하지 못했고 오히려 밀리게 됐는데, 사보이의 외젠과 영국의 존 처칠에게 여러차례 패배하면서 루이 14세의 유럽 패권 장악은 물거품이 되버렸다.

이후 루이 15세 시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는 모리스 드 삭스(Maurice de Saxe)라는 걸출한 군인이 활약하며 바이에른카를 7세프로이센 편을 들면서 숙적 오스트리아를 터는 데 일조했고, 동맹의 역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총부리를 틀어 영국과 프로이센프리드리히 2세에 맞서 7년 전쟁에 뛰어들지만,역시 프랑스의 유럽 지배 야욕(?)을 분쇄하려는 영국, 영국의 유럽 본토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67]에게 패배했다. 7년전쟁에서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군대는 프로이센 군대를 연구해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몇 번 격파하기도 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한테 프랑스군은 그냥 승점 셔틀이 됐다. 한편, 영국은 7년전쟁에서 식민지 전쟁에 집중해 프랑스와 지구 방방곡곡에서 치고박고 싸웠고, 유럽 지상전은 돈줄을 대면서[68] 잘 싸우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맡긴 반면, 프랑스는 이도저도 아닌 전략으로 힘이 분산되면서 식민지에서 분투한 병력들은 영국에서 충원되는 압도적인 적군 물량[69]에 밀리면서 사실상 프랑스 식민제국들은 코딱지만큼 남기고 몰락했다.

한편, 유럽 지상전에서 졸전의 원인은 지휘관 인선이 퐁파두르 부인이랑 친하냐에 따라 결정되고 이 당시 작전 제대는 아직 연대 수준에 머물렀는데 프랑스군의 연대장들은 전부 예외없이 '귀족 나으리'[70]들이라서 어느 부대가 공격하니 보조공격을 하라거나 방어를 명하면 자신이 돋보이지 않기 때문에 쌩까는 전형적인 당나라 군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스바흐 전투의 참패 이후에도 지휘관[71]이 퐁파두르와 친해서 뇌물로도 구워삶고 처벌은 흐지부지 넘어갔다.

한편, 프로이센은 총사령관이자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부터 독약이 든 로켓[72]을 들고 다니며 '이걸 오늘 먹어야 하나, 내일 먹어야 하나'할 정도로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73] 러시아 여제 옐리자베타의 사망과 영국의 유럽 전선 재참전으로 인해 기사회생했지만, 프랑스는 이미 오래 전에 로스바흐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해서 전열에서 이탈해 있었다. 전쟁 말에 영국과 동군연합인 하노버에 찝적거리다가 영국, 하노버, 헤센-카셀, 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에 박살나면서 라인강 서쪽으로 철수한 건 덤....

7년전쟁까지의 프랑스는 유럽의 짱개라는 명성에 걸맞게 유럽에서 국력이 최강이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면에서는 양과 질에서 밸런스를 갖춘 육군대국이긴 했지만, 이후부터는 유럽에서의 육군 전력은 물량에서 러시아군이, 질적으로는 프로이센군이 각 분야 최고를 양분했다.[74] [75] 한편, 루이 15세는 7년 전쟁 때의 프랑스 육군의 한심한 전투력에 충격을 받아 귀족들의 반발에도 사관학교를 설치하고 전통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자녀들도 받아들이는데, 이 수혜자가 10여년 후 입학하는 나폴레옹.... 앞서 연대장(대령)들의 추태와 머릿수 부풀리기 스킬로 군수품 떼먹기를 감시하기 위해 중령(Lieutenant-colonel)직위가 나오게 되는 것도 이 시대이다.

10여년 후 프랑스군은 미국 독립전쟁 덕분에 미 본토에서 미국과 연합하여 대규모로 작전한 유일한 군대이다. 미국 독립은 프랑스가 완성시켰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프랑스군의 참전은 지대한 역할을 했다. 참고로 웨스프포인트도 생시르를 모방했다. 그런데 현재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보면 참 역사의 아이러니. 사실 놀랄 일은 아닌 게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을 바랐다기보다는 눈엣가시인 라이벌 영국을 골탕먹이기 위해 미국을 지원한 것이었다. 이렇듯 서로 간의 정치적 계산에 의해 지속적으로 바뀌는 게 국제 정세이기 때문에 오늘날 딱히 미국과 프랑스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76]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4.4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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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정부 초기 프랑스군은 무리한 귀족계급 장교 축출로 군이 혼란에 빠져들었고 혁명기간의 혼란으로 군수 산업이 마비되어 병사들이 군복과 군화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심지어는 총이 부족하여 창과 몽둥이를 들어야 하는 웃기지도 않는 사태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7년전쟁 이후 프랑스군은 사단의 개념을 고안하고 포병을 혁신하는 등 많은 발전을 이룬 상태였다. 나폴레옹 등장전에 1793년 라자르 카르노가 의용군을 기존상비군(30만)과 합쳐 혁명군은 75만을 징집하는데, 이러한 국민개병제 실시[77][78]를 계기로 프랑스군은 전례없는 규모로 팽창했고, 혁명이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혁명에 찬동하거나 반항하지 않는 성향의 귀족 출신 장교들 중 유능한 이들이 복직[79]되고 유능한 병사들이 장교로 승격되면서 서서히 프랑스를 노리는 유럽 각국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하기 시작했으며, 나폴레옹과 그의 유능한 원수들이 군을 지휘하면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을 지상전에서 격파, 프랑스 대 육군[80]은 사실상 무적의 군대로 변신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육군의 최강 시대는 앞서 루이 14세시기와 나폴레옹 시기를 뜻한다. 또한 이 시기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군단 규모의 작전제대를 활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빛나는 성공에는 심각한 약점이 있었다. 프랑스의 산업도 발전하기는 했지만, 산업 발전 정도에 맞춰서 군대가 팽창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된 문제들 중 하나는 바로 보급 문제였는데, 프랑스의 대육군은 보급의 상당부분을 현지에서 조달했다고 쓰고 약탈했다고 읽어야 한다. 이것은 프랑스군의 규모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불어날 수 있던 이유였기도 한데, 절대왕정 시대의 군대는 물질적 대가를 구심점으로 모인 군대인지라 약탈을 허용하면 군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되거나 심하면 와해되기 쉬웠지만, 혁명기의 프랑스군은 애국심을 구심점으로 조직된 군대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약탈을 하면서도 군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프랑스 혁명 정부와 혁명군 수뇌부는 이를 반대로 이용해서 보급이 따라오는 속도에 구애받지 않는 기동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혁명초기에 다른 나라는 상비군 전력이라 20만~30이 한계였고 국경 밖으로 싸우러 가는 병력은 그보다 한참 적었지만, 프랑스는 가뜩이나 인구도 많은데다가 전술한 대로 애국심에 기초한 징병제를 실시해 70만 이상의 병력을 보유했다. 군의 규모가 리즈시절이 지나고도 1812년 러시아, 1813년 독일에서 수십만씩 말아먹고 나폴레옹 전쟁 끝물이던 1814년에도 징집가능 연령 인구가 100만에 실제로 40만 이상을 동원, 유럽의 짱개라는 별명이 노름으로 딴 게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실제로 싸운 병력의 질이 떨어진 건 별도지만 나폴레옹이 1814년에 누가 봐도 막장테크 탄 상황에서 뭘 믿고 버텼냐를 보면 이런 병력 수가 바탕이었다.병력의 질을 자신의 재능으로 커버친 나폴레옹은 진짜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이런 대육군(Grande Armée)을 바탕으로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이 가능했지만, 다른 나라들도 프랑스에 쳐발리면서 기존 군대의 기득권을 타파하고 프랑스와 유사한 동원 체제를 확립하자 비교우위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육군이 엄청나게 팽창한 것과는 달리 해군은 기술병력과 장비 위주의 군종이라는 특성상 빠르게 불어날 수 없었다. 군함의 재료가 되는 발트산 목재는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입수할 수 없었고, 배를 건조하는 기술이나 해전에서의 기술과 같은 것은 혁명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프랑스 해군의 조선술은 영국보다 오히려 뛰어났지만, 나머지 부분, 특히 인적자원 면에서 숙련된 선원의 부족과 함께 군함과 함대를 지휘할 함장과 제독 등의 역량도 해군장교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구호기사단 출신 귀족사관들이 혁명 때문에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잔류한 일부 사관들과 고참선원들이 제대로 된 훈련과 검증과정을 밟지 않고 승진하는 바람에 영국 해군에 비해 전반적으로 모든 능력이 부족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하드웨어는 우월했지만, 이를 운영할 소프트웨어가 말짱 꽝이었다는 것.

그러나, 프랑스 해군의 사관들은 혁명 이전에도 영국의 해군사관들에 비해서 저돌적으로 적함에 접근하여 싸우는 경향이 부족해 완승할 싸움을 고전 끝에 신승하거나 무승부로 낼 싸움을 참패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 독립전쟁 중 인도양에서 자신의 함대보다 압도적인 영국 인도양 함대를 상대로 초근거리 접근전을 영국보다 먼저 강요해 대등하게 싸워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쇠퇴일로이던 인도 내 프랑스의 영향력을 회복시킨 쉬프랑 생 트로페와 같은 장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은 육군은 만렙이었지만, 해군은 그렇지 못했다.

또한 육군의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은 비교적 부유한 지역에서만 효과적이었다.[81][82] 농업 기술의 낙후[83][84]와 산지가 많은 환경 탓에 가난한 스페인 농촌은 반도 전쟁 때문에 대규모로 들어온 프랑스군을 부양하는 데 무리가 있었고, 이 때문에 소수정예의 영국군이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러시아 원정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청야작전에 동장군 크리까지 겹쳐서 같은 결과가 훨씬 대규모로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프랑스군을 부양해야 하는 '해방된' 피지배민족들의 분노는 계속 쌓여만 가고 있었다. 결국 스페인에서의 끝이 안 나는 게릴라 전쟁, 그리고 러시아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전 유럽이 다시 프랑스의 적이 되어 총공세를 시작,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4.5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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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왕정 복고를 거쳐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기에는 다시 프랑스군의 위세를 떨치기 위한 전쟁을 추진한다.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전(프랑스 식민제국)에서 자주 밀렸지만[85] 또한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함으로써 프랑스군이 유럽내에서 아직은 강국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듯이 보였다. 크림 전쟁 전쟁에서 오랜 원수지간 영국과 손잡고 러시아군을 격파한다. 단, 크림전쟁은 전쟁사적으로 유례없는 한심한 일들의 향연으로 영국과 프랑스군 모두 지휘관들이 무능했는데(단, 프랑스에선 발라클라바같은 누가봐도 정신나간 심한 바보짓은 없었다.), 영국군 25만, 프랑스군 40만, 러시아군 70만이었는데 실질적으로 승기는 전쟁 초기에 연합국이 잡았지만 영국 프랑스 지도부가 둘다 너무 무능해서 전쟁을 쉽게 끝내지 못하고 돈잡아 먹고 시간잡아먹고 병력잡아먹는 요새 포위전에 투입하면서 전쟁이 길게 끌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국, 프랑스가 승리한것은 러시아군 지휘부는 더 무능했기 때문이었다.[86] 그 외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해로를 통한 보급에 별 문제가 없었던 반면 러시아군은 마차를 이용한 보급에서 한계[87]를 드러냈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라이플의 발전으로 화력이 강화된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나폴레옹 시대처럼 종대로 돌격하는 한계를 노출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이 훈련이 부족하고 아직 라이플의 화력을 충분히 활용하는 법을 익히지 못해서 종대로 돌격한 프랑스군이 승리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의 '교훈'을 살려 화력에 의존하는 대신 종대로 돌격해서 백병전을 벌이도록 군대를 다시 훈련시키는 바람에 프로이센에게 참패했다. 뒤이어 프랑스군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군에게 패배하면서 위대한 군대의 후예의 유산은 화려한 군복과 철지난 명성임이 확인된다. 프랑스는 프로이센보다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자국 무기의 우수성을 너무 믿었는데, 몰트케가 나폴레옹처럼 교전 지역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하여 소수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다닌다. 전쟁 기간 병력 손실은 프랑스군 38만, 프로이센 위주 독일군 11만이었다.[88]

이 결과에 대해서 나폴레옹 3세의 삽질, 혹은 단지 몰트케가 너무 뛰어났다는 평가도 있다.당시 전쟁론도 전쟁술에 비하면 듣보잡 취급이었는데 이분께서 하신 한 마디에 명저 판정 그러나 이를 개인적인 역량의 차이로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프로이센은 참모본부를 구성해서 작전의 계획과 실행을 위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장교들을 통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 점만으로도 다른 나라의 군대에 비해 선진적이었지만, 이때까지는 전쟁을 지휘하는 것은 여전히 고전적인 장군들이었으며 참모부는 단지 작전을 건의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통을 살려 국왕이 직접 전쟁을 지휘한다"는 명분하에 국왕이 자신을 '보좌'하는 참모본부에 힘을 실어주는 형식으로 사실상 참모본부가 전쟁을 지휘할 권한을 부여했다. 원수 진급도 국방부 장관 론(Von Roon)보다 참모총장 몰트케가 빨랐을 정도. 육군 최고사령관은 명목상 국왕이었자먼 참모총장이 군의 실질적 통수권자로, 총리나 민간정부 국방부에도 책임을 지지 않고 오로지 국왕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덕분에 참모총장인 몰트케는 민간정부와 국방부, 그리고 심지어 국왕에게조차 일일이 허가를 받지 않고 직접 군을 지휘할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물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국왕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야 했다.)

또한 프로이센 참모본부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지휘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기 이전에도 미래의 전쟁을 대비해서 사전에 작전을 세워두고 실행할 준비를 하는 역할 또한 수행했다. 이는 현대에는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놀라운 발상이었고,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떳떳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반면 프랑스군은 (다른 대부분의 국가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경험을 중시하고 지식과 지성을 사용하는 일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제2제정의 유명한 군인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Patrice de MacMahon)은 책을 저술한 군인은 승진에서 제외시킨다고 할 정도로 제2제정의 장군들은 군사상을 무시하고 경험을 통해 배운 터프한 군인을 선호했다. 당연하게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전쟁을 지휘하거나 작전을 세우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프랑스군으로서는 불운하게도, 이 시대는 후장식 소총과 기관총이라는 새로은 무기체계가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경험만이 아닌 지성을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즉 프랑스군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던 것이다. 예컨대 이 시대에는 프로이센 이외의 국가에서는 여전히 사격을 엎드리지 않고 서서 하도록 병사들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전장식 소총은 엎드려서는 장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장식 소총과 기관총이라는 화력의 발전 앞에서 이런 방식이 어떤 참상을 불러왔을지는 명백하다. 그 외에도 유선통신망 등의 기술적 진보를 프로이센군의 장교들은 군의 지휘체계에 통합시킬 수 있었지만 프랑스군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보불전쟁은 이러한 프로이센군과 전통적인 프랑스군의 차이가 극적으로 드러난 전쟁이었다. 프랑스군은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상황을 점검하고 군대를 동원하며 작전을 세우기 위해 부산을 떠는 동안 프로이센군은 이미 신속하게 동원을 마치고 준비해 둔 작전대로 공격을 시작해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프랑스군을 압도적인 병력으로 무너뜨리고 포위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몰트케가 대군을 동원한다는 '천재적 작전'을 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은 대군을 동원하고 운용할 작전을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고 그 작전을 실행할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장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대군을 동원해서 효율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병사들은 특히 스당 요새에서 포위 당했을때 자살에 가까운 기병돌격을 하는 등의 용맹성을 보여줬으나, 그것으로는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보불전쟁 이후 프로이센군은 전 유럽의 모범이 되었고, 프랑스군도 보불전쟁 이후에는 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략전술적인 면 등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 제3공화정의 군사상가이자 1차대전의 유명한 명장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은 제2제정 시대의 경향을 벗어나 독일의 클라우제비츠로부터 배우려 노력했으며 보불전쟁의 패배를 분석하면서 프로이센군의 활약을 높게 평했다. 그에 비해 제2제정의 장군들과 그들의 보불전쟁에서의 폐착은 가루가 되도록 깠다.

즉 프랑스군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노력했다. 프로이센처럼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정립해 뛰어난 장교단을 기르려 노력했으며, 독일에 비해 뒤떨어진 동원능력을 개선하려 매우 노력했다. 1898년에 계획된 제14계획에서 악명높은 제17계획까지 모두 독불전선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짧은 기간내에 전개하는 방법을 위해 강구했다. 무기면에서도 75mm 야포같은 매우 뛰어난 무기를 개발했다.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덕분에 프랑스군은 1914년에 갑작스럽게 독일과의 전쟁을 직면하자 열흘 좀 넘어서 백만병의 병력을 독불국경에 전개할 수 있었고, 이러한 숫자빨은 프랑스군이 전술적으로 패퇴하는 도중에 프랑스군이 버틸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작용했다. 오히려 독일군은 보불전쟁의 성공을 이상하게 해석해 대몰트케의 조카 소몰트케는 사단단위의 행동의 자유가 아닌 군단위의 행동의 자유를 부여해 각군이 제대로 협동하지 못한채로 따로 놀며 서로의 의도를 추측해가며 전쟁을 펼쳐나가야하는 막장 상황을 연출했다. 1914년에 프랑스군이 패배하지 않고 독일군이 단기에 전쟁을 끝내지 못한데 있어서 보불전쟁의 치욕을 최대한 만회하고자 노력한 프랑스군의 노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노력은 노력이고 결과는 결과다. 프랑스군이 변신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은 분명하지만, 정말 체질을 개선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프랑스군이 독일처럼 사전에 전쟁계획을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그 유명한 제17계획도 이름만 작전계획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부대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진격하며 후속 부대와 보급 부대는 어떤 식으로 조직될 것인가 등의 세부 내용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 측에서 17계획이 배치계획일 뿐 공세계획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반박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프랑스군에는 제대로 된 작전계획이 없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17계획이 '제대로 된 계획'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애당초 17계획은 작전계획조차 아니라는 말로 반박하는 것은, 프랑스군에는 '제대로 된 계획'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작전계획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기관총이 발전한 시대에 병사들에게 기관총 앞으로 자살돌격을 시킨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영국군이 포격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무모한 공격을 감행한 것은 포와 포탄의 질이 생각 이상으로 떨어졌다는 이유라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프랑스군의 무기는 우수했기 때문에 그런 핑계거리도 없다.(...) 사실 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 앞으로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시키지 않은 나라는 없다시피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에 따른 엄청난 인명피해에 놀라서 공세를 중단하거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머리를 짜내곤 했다(전차, 대규모 폭약 매설, 후티어 전술 등). 그러나 프랑스군은 '엘랑 비탈' 교리에 충실하게도, 그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했다.

4.6 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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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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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에서 고용한) 티레뢰 산병 (skirmisher)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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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프랑스군 9군단, 17사단, 34여단, 125연대 소속 병사들
초기의 프랑스군

프랑스군 군복은 대혁명 이후 전통적으로 파란색이었으나 보불전쟁 이후 검은색으로 바뀌었다가 1차 대전 직전에 병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다시 파란색으로 바뀐다. 빨간바지에서 볼 수 있듯이 외모를 실속보다 더 중요시한 결과, 본격적으로 쓰이게 된 기관총과 참호전에서 수많은 인명을 손실하였다. 기병 제복을 입으면 무릎을 접기 불편해 앉아 쏴 자세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19세기에 사용되던 쥬아브 복장까지 존속 중이었다.

19세기 까지 유럽 각국은 위장 효과보다는 사기와 지휘의 편리성을 이유로 전통적인 원색군복을 대체적으로 유지해 나갔다. 보어전쟁 초기까지는 눈에 잘 띄는 붉은색 군복과 하얀색 방서모를 착용했던 영국군도 보어인들에게 시도때도 없이 저격을 당해 대량의 인명손실을 내고 나서야 저시인성 카키색을 정식 군복으로 교체하게 되었다.

문제는 독일이나 러시아 등 영국의 이러한 뼈아픈 교훈을 즉시 받아들인 나라도 많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라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나라가 프랑스였던 것. 프랑스군 수뇌부는 위장색을 받아들이자는 말에 분노하며 위대한 군대는 저런 수치스러운 군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했고, 한술 더 떠 프랑스 국방장관은 "붉은 바지는 곧 프랑스다(Le pantalon rouge c'est la France!)"라고 선언하며 위장색을 거부해버렸다. 그 결과 1차 대전 초기 수많은 보병들이 기관총 앞에 어육 신세가 되었다.이 때문에 개전 초기부터 말이 많았지만, 전통을 고집하는 일부 장군들 때문에 한동안은 이런 고채도의 군복이 존속된다. 그러나 대세를 거스를수는 없어서 결국 알록달록한 제복은 프랑스에서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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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의 프랑스군

그러나, 채도 높은 군복은 포기했으면서도, "프랑스군의 상징"이라는 파란색은 포기 할 수 없었던 탓에 채도가 낮은 지평선 청색이라는 색의 군복이 신형 군복으로 채택 된다. 초기의 채도가 높고 알록달록한 복장에 비하면 인시성이 낮아졌지만, 수풀이든 참호전의 진창이든 이미 대세가 된 영국군카키색이나 독일군회록색 군복에 비해 눈에 더 잘띄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90][91]

어쨌든 이런 삽질도 있었지만, 1차 대전 때 프랑스는 독일의 60%도 안되는 국력[92]으로 동쪽에서 도움 안되는 러시아군, 느림보로 증원되는 영국군에도 불구하고 초반기 서부전선을 지탱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대중적으로는 이 당시 프랑스군이 병력 수만 많고 정예도가 떨어지며 똥별이 지휘하는 한심한 군대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1차 대전 때 프랑스 군부는 2차 대전 때의 삽질과는 달리 나름 준비를 철저히 했다. [93] 보불전쟁의 원한을 갚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수복하기 위해 상당히 다가올 독일과의 전쟁을 나름 튼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독일군보다 병력이 많았지만 정예도가 떨어졌다는 설도 사실이 아니다. 1900년에는 양국 모두 50만 정도로 비슷했고, 1914년 개전당시 (동원직전의)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90만 정도로 거의 비슷했다. 물론 독일의 인구가 프랑스의 1.7배를 넘었기 때문에 (프랑스 3,900만, 독일 6,700만) 프랑스군의 병역기간이 길었던 것은 사실 같지만, 어차피 알보병의 정예도는 거의 비슷비슷하고, 독일이 정예도를 중시해서 보병의 수를 줄인 게 아니라 약체였던 해군증강에 돈을 뿌리고 있었기 때문에 보병을 늘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방침때문에 군 운영이나 동원이 훨씬 효율적이었고, 제국내의 반독립적인 왕국군이나 공국군이 반독립상태로 존재하며(독일제국군의 주력은 프로이센군이었지만, 이밖에도 바이에른군, 뷔르템베르크군 등등의 군소규모의 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로따로 사령부나 교육기관을 운용하던 독일군보다 훨씬 통일성이 있었다.

또한 프랑스군은 일반적으로 식민지전쟁으로 장교들의 실전경험도 독일측보다 훨씬 많았다. (식민지 전쟁 참전이 장교의 출세코스였다) 보불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전쟁이 한동안 없어졌고, 독일군 장교들은 보불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한 초고위급 빼면 실전경험이 거의 없었지만, 프랑스군 장교들, 특히 초급장교들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국(청불전쟁) 그리고 중동에서 여러가지로 실전경험을 쌓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군의 병역대체제도가 병사의 질을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나라가 마찬가지였으며, 영국은 아예 지원병제였고, 미국은 (계속 지원병제였으나) 징집이 필요할 때(특히 남북전쟁 )는 돈을 내고 병역에서 빠질 수 있었다. 기부금 면제. [94]

또한 프랑스군의 지휘부가 대부분 60대이기 때문에 노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건 독일측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신분제가 남아있던 독일측이 본인희망과 능력위주로 장교를 선발하던 프랑스보다 이런 면은 더 심했다. 독일군 총참모장을 지낸 힌덴부르크나 헬무트 폰 몰트케(아들) 각각 1847, 1848생으로 프랑스군 3원수인 포슈(1851), 조프르(1852), 페탱(1856)보다 3-9살 더 많았다. 오히려 독일군의 경우에는 신분제 때문에 고위 귀족은 정년이 없어서 군이 더욱 노쇠화되었다. 제1군, 제2군, 제3군 사령관이 모두 69세에 건강문제로 은퇴하기 전까지는 귀족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짜르지도 못하고 삽질에 불구하고 중임을 맡겨야했다. 개전당시 독일군의 현역 원수인 마켄젠이 1849년생, 뷜로우가 19846년생, 해셀러는 무려 1836년생이었다.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만)에서는 [95] 공격정신에만 집착하면서도 공세를 취할 작전능력은 매우 떨어져서 1차대전 직전 20세기 초에 독일에 대응하여 징병제를 3년으로 늘렸지만 1년에 겨우 12일만 소집하고 의회에서 좌파 계열 정당이 의회에서 "프랑스를 병영으로 만들 셈이냐!!"라는 비판 덕에 하루마다 출퇴근하며 복무할 지경이었다.1913년 프랑스 육군의 군사훈련 판단으론 공세를 위해서는 준비가 무려 1주일이 소요되며 공세는 3일이상 지속하기 어렵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원래부터 수세적인 작전계획을 짜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공세준비가 어려운 것은 아주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선전포고는 프랑스군이 예상한대로 독일군이 먼저 했다.) 게다가 프랑스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독일처럼 군국주의적으로 전쟁준비를 하다가는 당장 정권이 날아간다는 사실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96] 프랑스군이 전쟁준비를 적극적으로 못한 것은 프랑스군 지도부가 똥별이고 무능해서가 아니라 독일군처럼 문민통제를 씹어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고, 국민의 뜻으로 선출된 정부의 결정에 순응해야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국력이 독일에 뒤진 것은 독일의 효율적인 군국주의나 프랑스의 비효율적인 민주제도 탓이 아니라 프랑스의 인구증가 정체도 한몫했다. 과거의 화려한 영광과 달리 프랑스의 인구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유럽의 짱깨로 불리던 물량에서 정반대인 극악의 출산률로 19세기 이미 독일에 인구가 추월당하고 수백년 전 백년전쟁 당시 10분의 1에 불과했던 영국에도 밀리는 인구 상태에 있었다. 혁명 시기 프랑스 인구(2500만 명)는 서유럽에서 가장 많고 유럽 전체에서도 러시아 다음 가는 엄청난 인구였다. 게다가 게다가 다른나라와 비교하면 숙적 영국과 프로이센을 합친 것보다 많았다! 그러나, 120년뒤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인구는 두 배도 늘지않은 3800만 영국은 4배가 증가하여 4500만, 독일은 통일 후에 6500만에 달했다.[97]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대육군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졌다. 물론 경제력에서도 공업화에 크게 뒤떨어지면서 농업국가(?)로 불릴 지경이었다.[98] 하지만 공업생산량과는 별개로 프랑스 과학기술은 그랑제콜시스템 하에서 우수한 과학자들[99]을 대거 배출하여 딱히 독일이나 영국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1차대전 당시 무기들은 이들 나라들 보다 더 우수한것도 있고 좀 뒤떨어지는 무기도 있는 정도 수준으로 평균적으로 보면 고성능을 자랑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엘랑 비탈(Elan Vital)'이라 불리는 왕성한 공격정신을 중시하는 사기론과 해군의 '청년 학파(Jeune Ecole)' 등 독자적 군사노선을 지향했는데, 이 두 가지가 프랑스군의 흑역사로 남게 되지만, 당대만해도 프랑스 군에 대한 전반적인 평은 나쁘지 않았다. 1918년의 프랑스군에 대한 독일군의 고평가와 처칠이 1930년대에 "프랑스군 덕분에 참 다행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로 프랑스군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항공전에 있어서는 전방 기총[100]을 개발하고 에이스의 개념을 정립하였으며, 연합군 공인 최고 격추기록을 가진 르네 퐁크를 비롯한 수많은 에이스들을 배출하기도 하는 등 상당한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프랑스군의 야전포 등은 성능과 생산성이 우수해서 유럽에 파병된 미군도 초기에는 프랑스제 장비를 대량으로 운용했다.[101] 거기다 현대전차의 할아버지라 불리는 걸작 전차 르노 FT-17도 프랑스에서 개발한 것이다.

4.6.1 엘랑 비탈[102] 교리

엘랑 비탈 항목 참조.

4.6.2 청년학파

제2제정기에 대대적인 투자를 받아서 강력한 함대를 건설했으면서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서 제3공화국 시기에 해군예산이 감축일로에 이르렀던 프랑스 해군 내부에서 영국이 주도한 건함 경쟁과 전함 중심의 해군체계에서 벗어나 당시 신기술이었던 어뢰정잠수함 중심의 체계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던 해군 전략을 주장하던 장교단들의 총칭이다. 청년학파의 주장은 일종의 비대칭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전함은 넬슨 시대처럼 거대한 전함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포화를 주고받는 해전을 가정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전함의 대구경 대포는 위력은 강했지만 매우 부정확했고 사정거리도 짧았다. 더구나 이러한 대포는 주로 전장포였기 때문에 장전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렸다. 따라서 작은 어뢰정이 어뢰를 쏘고 달아나는데는 사실상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103]

그런데 소형함이라도 어뢰라면 한 발로도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소형의 어뢰정이 대형함보다 훨씬 강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고 '장갑함 1척을 만들 예산으로는 어뢰정 60척을 건조할 수 있으므로 연안방어를 위해서는 어뢰정을 만드는 것이 보다 유효하다'라는 말까지 나왔다. 당시 상황에서 영국과의 전쟁을 상정한다면 매우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전략은 지나치게 영국만을 고려한 수세적인 전략이었다는 점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연안방어 임무에 있어서는 다수의 미사일 탑재 고속정이 소수의 대형 전투함들에 비해 유리한 게 사실이지만, 대형 전투함들은 다양하고 많은 무장과 전천후 활동능력, 우월한 장거리 항행능력으로 인해 해상교통로 보호나 장거리 원정, 초계 등등 범용적으로 쓸 수 있는데 비해, 소형함 위주의 해군세력은 연안 방어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을 크게 받는 편이며 악천후 하 작전에도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무엇보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형함에 비해 딱히 확실한 우세를 유지하지도 못할뿐더러 소형함이 가진 신무기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면 군사적 가치가 뚝 떨어져버린다.[104] 결국 이와 같은 세력 편성안을 채택하는 것은 해상에서의 무력 투사를 포기하고 해안선에서의 수세전략을 편다는 것과 사실상 같은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는 전세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다른 강국보다 해군력에서 우위를 점할 능력이 있었다. 청년학파의 비대칭 전략은 이러한 해양 강국으로서의 지위(1등은 아니지만)를 스스로 버리고 수세만이 가능한 3류 해군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프랑스와 같은 대국에게 적합한 전략이 아니었다.

또 다른 문제는 프랑스의 전략이 영국 해군을 자극해서 적극적인 기술 혁신을 일으켰기 때문에 결국 영국 해군도 제대로 견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어뢰정 전략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해군은 암스트롱 후장포를 도입했고, 대포의 사거리와 정확도, 장전 시간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어 어뢰를 명중시킬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공격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결국 적당한 속사포를 갖춘 구축함[105]이 어뢰정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게 되었고, 청년학파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해군력의 약화와 건함경쟁에서의 이탈, 그리고 대형함 제조 능력의 저하만을 가져왔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타국이 3년에서 4년 사이에 12인치포 4문을 연장포탑으로 장비하는 상비배수량 1만 5천 톤 규모의 표준형 전함을 만들어 내는 것에 반해서 프랑스는 1만톤에도 못미치는 11인치포 2문 장비형 해방전함조차 7~8년에 걸쳐서 만들고 있었다. 정규의 표준전함도 마찬가지였고. 이것은 순전히 건함예산부족으로 인해 조선소에 충분한 자금을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개판 5분 전의 상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간기에 리슐리외급같은 건실한 전함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프랑스의 대형함 제조 능력은 건재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애초에 청년학파의 연안해군 사상도 예산부족의 어려움 속에서 대안으로 내놓았던 것이니. 실제로 청년학파는 어뢰정으로 구성된 연안해군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순양함을 이용한 통상파괴작전도 중요시했다.

4.6.3 서부전선의 주력을 책임지다

프랑스군은 처음부터[106] 끝까지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의 메인 탱커이자 주력이었고 나폴레옹 전쟁 이후 최고의 전투력과 인재풀을 자랑했다. 쉽게 말해서 2차대전 소련군의 역할을 1차대전에서는 프랑스군이 한 셈이다. 초반 광탈한 2차대전과는 달리 제1차 대전에서의 프랑스는 전쟁 내내 주역이었고 모든 참전국의 병림픽을 헤치고 나와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다.

이는 1차대전 종전까지 서부전선 연합군 최고사령관 역할을 포슈가 맡았던 것을 보면 된다. (독일이 힌덴부르크의 이름으로 보낸 휴전협상 제안의 수신자는 포슈였다) 1차대전 말기 서부전선에 전개한 병력은 프랑스군이 250만, 미군이 190만, 영국군이 180만으로서, 수적으로도 프랑스군이 가장 많았므며, 병력의 질 또한 대부분 징집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참전국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기존의 소수정예군에 의존해 1916년에야 대군을 투입하는 영국군[107][108], 오-헝제국은 탈탈 털어버리는데 유독 독일군에게 역대급 삽질로 털려[109] 개전 초반 승기를 빼앗긴 러시아군[110]과 전쟁 후반에야 참전한 풋사과 미군을 대신해서 독일군과 1:1 교전을 맡을 수 있는 질과 양을 가진 군대는 프랑스군밖에 없었다.

인재 면에서도 군부에는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포슈, 베르됭의 영웅 페탱, 프랑스의 구원자 갈리에니조프르, 심지어 니벨 공세를 말아먹으며 아군에게 도살자로 불린 그 유명한 니벨마저도 당대엔 생소한 개념이었던 이동탄막사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상당한 인재였다. 정계에도 제3공화국 최고의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와 프랑스의 호랑이로 유명한 조르주 클레망소 수상이 존재했다. 1차 대전에서의 삽질은 프랑스만의 것이 아니고, 시대의 한계를 모두가 깨닫지 못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프랑스의 삽질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프랑스 영토 내에서 벌어진 탓에 자기 영토에 참호 파고 앉아 있는 독일군을 빨리 쫓아내고 싶어 안달했기 때문이다.

종종 프랑스군의 전력이 1917년의 항명사태 이후로 엄청나게 약화되어 주도권을 영국군에게 빼앗겼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프랑스 장군인 포슈가 연합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것이 지상군에서 프랑스이 주력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차 대전에서 연합군 총사령관에 장제스가 임명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해보면 쉽다. 버마-중국전역에서조차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장제스가 아니라 미국의 스틸웰 대장이었다.)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백일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이 중추적 역할을 맡았으며 애초에 2차 마른 전투 이후 반격을 지시한 것도 프랑스측 포슈의 단독결정이었으며, 2차 마른 전투에서도 50개가 넘는 연합군 사단중 40개가 넘는 사단을 프랑스군이 맡았다는 것도 프랑스군이 서부전선 연합군의 중핵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당초 영국군이 맡았던 서부전선은 프랑스-벨기에의 작은 부분으로서, 그 몇배나 되는 프랑스-독일 국경은 프랑스군이 전적으로 맡았다.

애초에 한국 밀덕이 주로 참고하는 문헌은 언어의 문제상 영미권 작가가 많았으며, 이들은 영국이나 미국의 비중을 늘리는 과정에서 주력인 프랑스군이 자주 누락되었고, 영국원정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의 일기를 의심없이 참고해 이런 성향이 더욱 심해졌다. 여기에 영미권 일반의 프랑스에 대한 편견까지 작용하여, 1차대전의 프랑스군을 바보 멍청이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111] 허버트 조지 웰즈백일 전투를 묘사하면서 프랑스군을 공기 취급해서 욕먹은 적이 있다. 친프랑스파로 유명한 윈스턴 처칠도 1차대전을 회고하는 책에서 조프르를 좀 심하게 깠는데 그 이유가 갈리폴리의 삽질을 덮으려는 노력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게다가 프랑스군이 2차 대전에서 크게 말아먹는 바람에 제법 잘싸운 1차대전의 전과조차 먹칠을 했고, "나폴레옹 이후 되는 게 없는 프랑스군" 이미지를 키웠고, 그 이후 식민지에서 꾸준히 쫓겨나며 추태를 보여주는 바람에 그게 더 심화되어 버렸다.

21세기에 들어서 이전까지 거의 인용되지 않던 프랑스쪽 자료를 바탕으로 프랑스군을 재평가하는 수정주의 시각이 늘은 덕분에 참고할 서적이 좀 더 많아진 편이다. 그것들도 죄다 영문 자료지만 관련 내용으로 Elizabeth Greenhalgh 교수의 <The French Army and the First World War>나 양차대전에 대한 수정주의 시각을 담은 <Britain and France in Two World Wars: Truth, Myth and Memory>을 추천한다.

4.7 2차 세계대전

프랑스 군의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진짜 원인

1차 세계대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높으신 분들의 뻘짓 때문에 6주 만에 파리를 점령당하며 전열에서 이탈했다.

전간기에 소련, 독일 등이 앞으로의 육상전은 전차 중심의 기동전이 될 것으로 예상한데 반해, 승자였던 프랑스의 전쟁 준비는 제1차 세계대전처럼 참호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프랑스는 기동전보다 우주방어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침입해서는 독일군을 빨리 몰아내기 위해 무모한 공세를 펴다가 프랑스의 20~40대 남자 1/3이 전사-전상을 입었던데다가, 북프랑스 일대가 주전장이 되면서 피해가 컸던 상황이 트라우마가 된 것. 심지어 미국으로부터의 밀 수입이 며칠만 늦었어도 쫄쫄 굶을 뻔했던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프랑스로서는 공세보다는 수비에 집착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마지노 선만 열심히 만들어댔으면서 정작 중요한 전략, 전술 발전은 거의 없었다. 동맹인 영국과 마찬가지로 기동전과 보병전 독트린을 놓고서 지휘부가 치고 받는 바람에 실 전술 개발[112]은 지지부진했으며 더 나쁜 것은 참호전의 트라우마 탓으로 구식 보병전에 압도적으로 경도되었다는 점이다. 해군강국인 영국과는 달리 전통적 육군국인 프랑스에게 있어 이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단 독일이 마지노선을 우회할 것은 예상하고 벨기에 국경에 주력을 배치했지만, 독일군이 프랑스가 전혀 생각못한 아르덴 숲을 관통하여 진격하자 혼란에 빠졌다. 사실 이건 프랑스보다는 벨기에의 잘못으로, 프랑스는 1차대전때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로 진격하려고 한 것을 상기해, 마지노 선을 벨기에 국경까지 연장하려고 했는데, 벨기에는 이를 극구 반대했고, 그렇기 떄문에 프랑스-벨기에 국경은 무방비상태로 있었다. 여기에 황색 작전이 발발하면서, 벨기에가 제대로 버텨주었다면, 마지노 선에 포진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계획한대로 적은 희생으로 독일군을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벨기에가 항복하는 바람에, 무방비였던 프랑스 북부가 바로 노출되어버려서 마지노 선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사실 전쟁 발발 전에도 아르덴이 기존의 인식처럼 천연 요새이기는 커녕 적들 기갑 병력을 위한 고속도로 수준이라며 방어를 보강해야한다는 보고서가 여럿 제출되었지만 똥별들이 무시하는 바람에 6주 광탈의 스타트를 끊게 되었다. 게다가 공군 발전을 등한시하여[113] 제공권이 장악당해 독일 공군의 폭격에 대응하지 못하고,[114] 보유한 전차는 무전기도 없어 유기적인 전투를 전혀 치르지 못하는 등 삽질의 극에 달하는 모습만 보여주다가 결국 파리가 함락당하자 항복한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군함들이 독일군에 넘어갈 두려워한 영국해군이 프랑스 군함들을 자침시키는 등 안습스러운 상황이 이어진다.

물론 프랑스 군대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약체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군과 싸운 독일 병사 / 장교들의 평가처럼 프랑스 군대의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은 독일군에 뒤지지 않는 왕성한 투지와 우수한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40년 5월 10일 ~ 14일간의 프랑스 침공 초반부에는 짧은 4~5일만에 프랑스 2군이 대거 무너지면서 막장화된걸로 비춰지지만 이 4~5일간의 독불국경일대에서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지휘부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분투한 소부대가 상당히 많았다. 포격 등으로 유선 통신선이 두절되어 후방의 사령부와 두절된 부대일수록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항전한 경우가 잦은 걸 보면 최고 사령부의 명령이 오히려 하급 부대들을 혼란스럽게 한 걸지도 모른다. 2차 대전 초반을 다룬 프랑스군 사진을 보면 전차병은 대부분 부상당한 상태였거나 전차 자체가 여러번 피격되어 박살난 사진이 많은데 이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냥 손들고 항복했다면 전차 자체가 그렇게 집중포격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을테니. 여러모로 2차 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의 모습이 떠오를거 같지만 이탈리아는 윗대가리와 병사 모두 다 멘붕상태라

그러나 이는 단순히 몇몇 무능한 상층부 때문이 아니라 19세기부터의 프랑스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심화된 결과였다. 1차 대전 당시 17계획 정도의 작전계획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물건을 들고 전쟁을 시작했던 프랑스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도 제대로 된 작전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계획이 없는 것이 교리(!)였다. 즉 사전에 세밀한 작전을 세워 봐야 어차피 그대로 되지도 않으니 상황을 보며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작전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에 불과했다. 변하는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각 부대로부터의 정보의 신속한 취합, 상부에서 하달하는 작전을 통한 재빠른 대응, 현장에서의 상황 파악을 통한 즉흥적 대응 등이 필수적인데 프랑스군은 이러한 측면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프랑스군은 종종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문서로 된 명령문을 수령하기 전에는 행동에 나설 수 없다"며 지휘관이 직접 상급부대로 가서 명령문을 받아오느라 시간을 끌다가 상황을 망치는 모습이 거의 모든 부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계획 없이 상황에 맟춰서 대응하려면 어떤 식으로 군이 운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고려가 없었던 것이다.

됭케르크 철수 이후 프랑스군은 마른 전선에서 며칠이나마 버티며 분투했고 최후까지 벌어진 브레스트 일대의 공방전에서도 전황타개를 모색했지만 초반에 손실병력과 장비가 너무 컸고 공군력 자체가 열세한 관계로 패전을 피하지 못했다. 당시 레노 내각이 보르도까지 수도를 옮겨가며 항전을 다졌지만 항복하자는 여론이 근소하게 높아 결국은 초반 패전국의 수모를 겪게 된다.

프랑스군은 과거부터 요새 축성 등에는 상당한 기술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 프랑스군이 자신들의 특기인 요새를 지나치게 맹신해 마지노 선에 거의 올인하다가 육군의 기갑현대화나 전술개발, 공군력 정비 등에 있어서 여력이 없었다는 안습한 측면도 있다.

게다가 프랑스군독일과는 달리 유럽 제2위의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잖아도 빡빡한 살림에 해군력에도 투자해야 했고, 덕분에 프랑스군은 산하 136개 사단중 정규급 및 A급 사단이 전체 편제에서 절반 정도밖에 확보가 안된 것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군력은 1940~1944까지 별 활약 못하다가 영국에게 얻어맞고 자침하거나 이탈리아 해군에게 인양되는 수모까지 겪는 판

당시 영관급 장교였던 샤를 드 골은 1930년대 중반부터 독일군의 기계화를 예상하고 프랑스군도 기갑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가올 독불 전쟁을 예상한 몇 권의 저서를 내어 참호전을 고집하는 육군 수뇌부를 바보 멍청이라고 비난했으나[115], 당시 프랑스 정국은 개판이었고 군수뇌부는 정치권의 비위를 맞추느라 혁신적인 시도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사실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 전차들은 독일의 주력이었던 2호전차에 뒤지지 않았으며 전격전 따위는 최근에는 거의 신화로 치부되는 현실이라서 수뇌부만 개념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프랑스군은 그렇게 참패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일단 독일군이 아르덴 숲을 넘어오자 프랑스군 지휘부는 공황에 빠져서 순식간에 무너저버렸다.

그럴 수박에 없었던 게, 임기응변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전선을 뚫고 후방으로 진입해오자 상황을 파악할 수단도, 부대에 효과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단도 없었다. 지휘관이 직접 사령부로 가서 명령문을 수령해 오는 상황에서 그 중간에 독일군이 들어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손발과 눈이 한꺼번에 떨어져나간 격이다. 게다가 프랑스군 부대들 역시 그러한 상황에 대응할 작전계획 따위는 없었다.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독일군에 대한 반격은 지휘체계도, 작전계획도, 훈련도 아닌 전적으로 프랑스군 지휘관 개개인의 똑똑함에만 달린 것이 되었다. 당시 독일군 지휘관들처럼 기갑전에 대한 이해가 풍부했던 드골 대령은 200대의 전차를 가진 제4기갑사단을 이끌고 1940년 5월 14일 아르덴 숲 접경 몽코르네에서 독일군에 반격을 가하여 승리했고, 이게 프랑스 침공에서 거의 유일한 프랑스군의 승리였다. 이 공적으로 드골은 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전의를 잃은 프랑스군 지휘부는 파리가 함락당하자 항복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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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던 프랑스 외인부대[116]

영국으로 철수한 장병들이나 식민지에 있던 프랑스인들은 드골의 지휘아래 자유 프랑스를 결성하였다. 자유 프랑스군은 1944년 당시, 55만명이나 되는 비교적 대군이었고, 프랑스가 해방된 이후에는, 150만으로 병력이 급격히 늘어나서 서부전선을 담당하였다. 이런 대군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제2차대전 종전 후에 승전국의 말석에 낄 수 있었다. 자유 프랑스군은 영국과 미국의 원조로 무장하고 있었고, 특히 무장은 물론 군복마저 미군과 똑같을 정도였다.

공군의 경우는 뻘짓의 강도가 더욱 심했는데, 당시 독일의 주력 전투기였던 Bf 109E-3과 대등한 전투가 가능했던 D.520절반을 후방에 배치하고(...) 나머지 절반 조차 축차투입하며 날려먹으며 총 500여대의 D.520을 무기력하게 독일군에 헌납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 전투기들은 독일군이 41년까지 유용하게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당대 최강이었던 프랑스의 폭격기들은 덤.

세계적인 기량을 가졌으나 공군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던 수뇌부때문에 프랑스 침공 당시 아무것도 못해보고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공군 조종사들은 동서에서 주목할만한 활약을 펼쳤다. 서쪽에서는 영국공군의 제326, 327, 328 비행중대를 이루면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몰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맹활약하여 독일 아프리카군단을 패배시키는데 일조했다. 동쪽에서는 소련공군에 편입되어 유명한 노르망디-니에멘 연대로 개편, 야크기를 몰고 맹활약했다. 이들의 전과가 눈부셨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후 스탈린은 감사의 표시로 그동안 정들었던 야크기를 몰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부대(1/30 노르망디-니에멘 전투비행중대, Escadron de chasse 1/30 Normandie-Niemen)는 아직까지도 프랑스에서 현역이다.

4.8 한국전쟁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의 첫 대규모 전장은 한반도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여유전력이 없었지만, 영국이나 터키도 여단 병력을 보내는데 자기들만 뒤처질 수는 없었기에 2차대전 및 인도차이나 전선의 참전경험자를 중심으로 지원병을 모아 파병했다. 이때 지휘관도 물론 자원을 받았는데, 여기 지원한 양반이 나르빅 전투의 영웅이자 프랑스군 현역 중장몽클라르 장군. 이 부대는 규모가 대대였기 때문에 미군 23연대 휘하로 배속되었고 연대장인 대령중장을 지휘해야 하는 괴상한 모양새(…)가 되자 스스로 대대장을 자처해 중령계급으로 부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그를 장군으로 대우해줬다.

사실 프랑스군은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연합군 수뇌부는 물론이고 일반 장교들 및 언론기자 전원이 가진 '프랑스군'에 대한 이미지는 1940년의 패배한 군대의 이미지였던 탓에 어느 지휘관도 이 1천 명의 프랑스군 보병들을 자기 지휘하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들을 배속받은 미 23연대장도 명령을 받았으니 받아들인 것 뿐이지, 받아놓고서도 과연 프랑스군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프랑스군의 실제 전과로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중에 본대의 측면을 방어하던 1개 소대, 단 25명의 프랑스병이 총검돌격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쫓아버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 이런 짓을 하고도 프랑스군의 피해는 부상자 단 2명이었다. 전투종족이냐?(...)[117][118]

돌격을 지휘한 소대장은 그 공으로 미군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고 은성훈장까지 수상했는데, 이에 대한 프랑스 대대 장병들의 평가는 간단했다고 한다. 다음은 대대장 몽클라르 중장중령의 발언.

"뭐라고! 우리 병사들이 한 총검돌격은 보병전술의 기초 중의 기초잖아! 그런데 저 양키놈들은 그걸 가지고 왜 난리인 거지?!"

태평양 전선의 경험 때문이다.
몽클라르 중령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미군은 감명을 받았고, 8군 사령부는 예하 전 미군에게 총사령관 리지웨이 장군 명의의 이런 명령서를 내려서 경악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총검은 아마도 연합군의 최후의 비밀무기는 아닐지라도, 귀관들이 무시할 수 없는 전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총검이 단지 통조림 깡통을 따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장병들은 유의해 주길 바란다. - 리지웨이 -

이후 1951년 9월에 가진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는 중공군에게 패배하여 100여명 사상자를 내기도 했지만 프랑스군은 10월에 전열을 가다듬고 재공격하여 2개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이 점령전에서 중공군에게 4,000여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안겨주며 수십배 설욕에 성공하는 맹활약을 했다. 이렇게 프랑스군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치열하게 계속해서 싸워 연인원 3,421명이 참전, 전사 262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의 손해를 냈다. 참전병력은 적었지만 워낙 치열한 전투에 많이 투입되었던 터라, 한국전쟁 참전 외국군 사상율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 병력들은 베트남전이 격화하면서 한국에서 철수, 베트남으로 간다.

미군 부대의 카투사처럼 프랑스군에도 일부 한국인 장병이 배속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프랑스군이 베트남으로 가기 직전까지 프랑스군과 함께 복무했다.

5 현대

세계대전 이후 국력저하로 식민지 유지를 못하게 된 실정에도 식민지의 독립 요구를 깔아 뭉개려다가 베트남 전쟁에서 얻어 터지고 알제리 전쟁으로 쪼인트 까이는 한심한 꼴을 보이며 자존심을 구기고, 전통적인 유럽의 육군강국이라는 이미지를 잃어버리기에 이른다. 사실 이것은 프랑스군의 문제라기보다는 프랑스 정치가들의 문제로, 독립을 시켜줘야했을 때 안 들어줬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수습하느라 능력 밖의 전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런 이미지와는 별개로 냉전기 프랑스군은 실제로는 다방면으로 고른 능력을 갖춘 강한 군대였으나... 비교대상이 슈퍼파워 미국, 이길 싸움만 골라가며 하는 영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강국 이미지가 남아있는데다 때깔나는 지상장비 잘 뽑아내는 독일인데다, 2차 대전 후에는 북한군, 중국군과는 어느 정도 싸웠다지만 베트남군에게 패전하고 알제리군에게 백기를 들며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털리던 바람에 깎아먹은 그 놈의 이미지를 회복할 기회가 없었다.

냉전시대에 미/영과의 마찰로 나토를 탈퇴한 바 있다. 다만 이 사건은 탈퇴는 프랑스만의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1956년에 있었던 제2차 중동전쟁 당시, 소련은 이집트군을 제압한 영/프 연합군에 대해 핵공격 위협을 한다. 아직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던 영/프 연합군은 다 이긴 전쟁에서 굴욕적인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양국의 핵개발 드라이브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여기까지는 딱히 문제가 없었으나, 핵실험에 성공한 영국은 자국을 배신했던[119] 미국편에 곧바로 붙어 프랑스의 핵개발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동맹군으로서 함께 싸웠고 함께 핵공격위협을 받았던 영국이 적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프랑스의 국내여론은 좌파/우파, 보수/진보, 여당/야당 할 것 없이 단결하여 '조국의 핵무장'을 지지했고, 이러한 범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은 프랑스 정부는 국방비의 무려 25%를 핵개발에 쏟아넣는 강경드라이브 끝에, 1960년 핵개발에 성공한다. 이 와중에 영국에 느낀 배신감, 미국이 소련과 손잡고 프랑스의 핵개발을 저지하려고 나섰던데서 깨닫게 된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 등은 프랑스가 나토를 탈퇴하는 초강수를 두도록 만든 원동력이 된다.

이후 프랑스는 미국이나 소련과는 좀 다른 독자 노선을 걸으며 중동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 무기를 팔아먹었다. 이스라엘이 중동전쟁에서 미라지로 재미를 보자 아랍 각국이 소련제 무기 대신 미라지를 사들이기도 했다. 게다가 미제 무기보다는 싸고 러시아제 무기보다는 신뢰도가 있다는 이미지 때문에 틈새시장에서 의외로 많이 팔아먹었다. 걸프전 직후 걸프전에 투입된 미제 무기의 압도적인 성능 및 냉전의 종료로 미제 및 러제, 독일제 등의 무기들을 구하기가 쉬워진 덕분에 틈새시장도 많이 넘아가 판매량이 상당히 감소했지만, 2000-2010년 10년간의 무기 수출량은 미국, 러시아,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의 무기 판매국이었다.

어쨌든 냉전 기간 동안에는 비록 나토에서 탈퇴하긴 했지만 집단안보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냉전기간 중에는 징병제를 통해서 60만의 대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 프랑스군은 전쟁 발발시 나토의 지휘 체계 내에 편입되어 영국군/서독연방군과 함께 나토 지상군의 중핵을 맡을 예정이었으며, 규모 역시 6개 기갑사단/3개 경기갑사단/3개 기계화보병사단, 거기에 각 1개의 공수사단/공중기동사단/해병사단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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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에서 ISAF의 일원으로 작전중인 프랑스군 보병. 여단 규모급으로 파견되어 있다.)

물론 다 옛날 이야기고 냉전 종식 이후 대대적인 군개편에 들어가서 1997년 징병제를 폐지하였고 현재는 총 병력 22만으로 거의 3분의 1로 줄었다. 또한 M1A1과 챌런저가 굴러다니던 걸프전 시점에 AMX-30을 파견하는 등 이미 90년대 초부터 전력증강이 늦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육군 병력은 12만에 전차는 200여대 수준이다. 냉전의 종결과 함께 상당한 규모로 감축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서, 과거의 육군 대국의 모습을 연상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특수부대 위주로 옛 세력권인 아프리카 지역에 제한적으로 개입하거나 미군을 보조하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미국이나 러시아같은 대규모 독자작전 능력은 상실했다. 2013년 기준 NATO 전체 방위비의 66% 이상을 미국이 부담하는지라 사실 미군하고 비교하긴 민망하다.

샤를 드 골급 항공모함으로 상징되는 해군 역시 상당한 경험과 규모를 갖추고 있다. 예산이 부족해 드 골의 후속함 건조 사업이 휘청이고 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와 합작으로 FREMM 프로젝트호라이즌 프로젝트를 통해 대잠/방공 호위함 도입 사업을 성공리에 이어가고 있고, 신형 공격원잠 바라쿠다급의 취역 역시 착착 맞춰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거기다 러시아에 수출까지 된 강습상륙함 건조 노하우를 갖춘 데다[120] 신형함도 취역 중이라는 점까지 봤을 때 프랑스 해군의 전력은 상당히 탄탄하다. 게다가 전략 원잠도 갖추고 있으니 핵 억지력의 한축으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의 전력증강이 지지부진해 지고 영국이 파리 테러 이래 국방비를 증대시키고, 해군력을 늘릴 예정이라, 프랑스 해군이 영국을 넘어서기 힘들것이라는 게 현재 전망. [121]

공군은 현재 약 200여기 안팎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리비아 내전때 유럽공군 중에선 공습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편이긴 한데 파리테러 이후에 공군 전폭기가 부족해 영국에 도움을 부탁한거 보면 이쪽도 상황이 심각해 보인다.

5.1 육군

현대의 프랑스군 보병장비
개인화기소총돌격소총FA-MAS F1/G2, G36E, SG551, M16A2, HK416, HK417, CZ 브렌2
저격소총FR-F2, PGM 에카트 II/울티마 라시오, TRG-42, MSG-90
기관단총MP5A5/MP5SD3, MP7A1, FN P90
권총PA-MAS G1, 글록 17, USP
지원화기기관총AAT-52, FN MAG, FN 미니미, M2 중기관총
유탄발사기AG36, M203
대전차화기APILAS, AT4 CS, MILAN, ERYX, FGM-148 재블린, LRAC F1
박격포LGI Mle F1, LLR 81mm, MO 120 RT
맨패즈미스트랄
현대 프랑스군 기갑차량
기타전차AMX-13R, ARL-44R
MBT1세대M46 패튼R, M47 패튼R
2세대AMX-30R
3.5세대AMX 르클레르
장갑차장륜장갑차AMX-10 RCR, VBCI, VAB, ERC-90 사가이
궤도장갑차AMX-10P IFVR, AMX-VCI, VHM
차량오토바이폴라리스 스포츠맨 400 4륜 ATV, 야마하 XTZ660 Ténéré, Cagiva T4
소형VBL, PVP, 푸조 P4, 랜드로버 디펜더, 포드 레인저, 포드 에베레스트, 르노 캉구, 르노 트래픽 III
트럭르노 GBC 180, ACMAT, VLRA
자주포AU-F1, CAESAR
자주 대공포 / 대공미사일크로탈 R-440, AMX-30 롤랑
다연장로켓LRU (M270 MLRS)
페이퍼 플랜 및 프로토타입바티뇰-샤티옹 25t, 로렌 40t, AMX-50, AMX-40,
AMX-10, AMX ELC bis, 소뮤아 SM, AMX CDC, AMX M4
※ 윗첨자R : 퇴역 차량

프랑스 육군은 2개의 사단으로 이루어진다.

  • 1사단
    • 7 기갑여단
    • 9 해병기갑여단
    • 27 산악보병여단
    • 독불여단
  • 3사단
    • 2 기갑여단
    • 6 경기갑여단
    • 11 공수여단
  • 특수전사령부
    • 특수전여단
  • 경항공대
    • 4 항공전투여단

장비로는 3.5세대 주력전차인 AMX-56, 불펍식 소총 FAMAS등이 있다. 추가바람.

5.2 프랑스 해군

5.3 공군

프랑스 공군은 현재 영국과 유럽에서 1위를 다투고 있다. 라팔 99대, 미라지 2000 124대를 운용하며, 보잉제 KC-135를 14대를 운용중이다. 조기경보기로는 E-3 4대를 운용중에 있다. 프랑스는 해외 파견을 하여 작전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세네갈, 레위니옹, 지부티,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마르티니크, 프랑스령 기아나, 뉴칼레도니아, 아랍에미리트(...) 등에 공군기지를 두고 있기도 하다.

5.4 현대 프랑스군의 이미지

현재 프랑스군의 이미지는 한국의 밀덕후 사이에서는 강군도 아니고 약군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군대[122][123] 취급이지만 소련 붕괴 이전까지만 해도 나토에서 공군/해군만 집중적으로 키운 영국이나 육군만 비대해진 독일에 비해 육해공 삼군이 가장 균형을 이뤘다고 평가받았다. 물론 지금은 육해공 삼군이 사이좋게 약해져서 전력 균형이 맞는다만.

핵무기항공모함도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에야 비할 수 없지만, 아프리카의 소국 정도는 충분히 위협할 수 있는 규모. 그래서 예전 식민지에서 정변이 일어났다고 하면 프랑스군이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많은 사상자가 생겨도 정치적으로 문제될 것 없는 외인부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국외 파병에도 나름 공을 들이고 있다. 알제리와 베트남에서의 실패 사례가 눈에 띄지만, 아프리카의 프랑스권에서 프랑스군의 개입은 상당히 효과적인 사례도 많았다.

외인부대가 가장 언론에 자주 노출되고 국외에 투입되기 때문에 이들이 프랑스군의 정예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인부대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정규군의 정예도도 높다. 특이하게 국외에 자주 출동하는 해병대(Troupes de Marines)는 해군 소속이 아닌 육군 소속이다.  

친미적인 니콜라 사르코지가 집권 이후 수십년 만에 나토에 복귀했다. 나토에 복귀한 이유는 사르코지의 성향도 성향이지만, 현재 프랑스 경제상황이 나빠서 자주 국방을 수행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국 혼자 떠받드는 나토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파리 테러 이후 올랑드 대통령이 보복을 천명했지만, 공습 이상의 실질적인 보복이 가능하리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본인들도 그걸 아는지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국가 헌병대와 그 소속의 대테러부대GIGN은 상당한 실력을 자랑한다. 1950년대부터 70년까지는 독립을 요구하는 바스크인이나 알제리 독립단체의 테러를 겪고, 70년대부터는 프랑스에 몰려 사는 각국의 망명자들을 노리는 암살 및 테러 등에 시달려온 탓에, 그동안 축적된 대테러전 노하우는 세계 최고의 경지에 달해 있다. 1994년에 테러범에 납치된 에어 프랑스기 납치사건도 인질 전원 무사, 테러범 전원 사살로 깔끔히 해결하여 프랑스군의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5.5 외인부대

프랑스가 보유한 군대 중 프랑스인이 아닌 사람들로 구성된 외인부대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도 제법 알려져 있다. 자세한 것은 외인부대 문서의 1번 항목 참조.

6 군별

7 프랑스군의 무기개발사

자주국방이라는 이름 하에 무기체계 국산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유럽 내에서의 패권 추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데, 독자적인 군사적 역량이 없이는 동서의 초강대국-미국/러시아와의 유럽 내 패권 경쟁에서 적극성을 유지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위해 무기의 국산화에 많은 역량을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밀덕후사이에서는 이런 프랑스의 국산화 추구가 상당히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밀덕후가 자주국방을 우습게 보다니 사실 한국 밀덕후들 사이에서는 자주국방에 대해서 일본의 국산화 삽질 때문에 무기 국산화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예전에 있었긴 하지만, 일본의 국산화가 워낙 특이한 케이스라서 그꼴이 난다는게 알려지고 한국군이 계속해서 K-2 흑표 전차와 FA-50 공격기를 개발하는 등 무기 국산화를 하려는 의지가 보이자 현재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해도 좋은 상태이다. 물론 국산 무기가 국방부에서 선전한것보다는 훨씬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계속 만들어봐야 결국은 좋은 무기가 나올게 아닌가. 오히려 국방부ADD의 발표를 곧이 곧대로 믿고 국산무기가 타국무기보다 무조건 좋다는 국뽕이 설쳐서 문제될 판.

나토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무기체계 구축을 목표로 했으나 가용가능한 예산의 제한되지만 투자해야하는 분야는 다양하기 때문에 무기체계의 신규 구축에 적은 예산이 투입되고-적은 예산으로 개발기간이 길어지고-개발기간이 길어져서 소요 예산이 증가하고-예산이 없어 개발이 지연되고-그러는 사이 신기술이 개발돼서 개발목표가 변경되고-그러다 보니 다시 개발기간과 소요예산이 늘어나는 식으로 비효율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124][125] 또 이를 위해 독자구격을 사용하다보니 총기류와 같이 민간 시장의 파이가 큰 분야의 경우 범용성 부족으로 세계시장에서 퇴출당하다시피 하게 되기도 했다. 또한 지나치게 프랑스 우선주의를 채택하는 바람에 다른국가들간의 공동개발사업을 여러번 파토내기도 했다.[126]

미스트랄, 미라지, 엑조세 시리즈 등은 호평을 받으며 오랜시간을 지내왔지만 냉전이 끝난 현재는 더이상의 틈새시장 개척 및 가용가능 예산이 한계에 부딪혀 미제와 러제,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오른 중국제가 무기시장을 지배하는 요즘에는 더이상 수출길을 뚫기가 힘들어진 탓에[127] 다시 나토 및 공동개발 쪽으로 돌아가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도 나토 쪽으로 치우치는것을 우려했는지 러시아와도 상당한 협력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평균 이상-세계 수위권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독일, 영국이 자국의 자연조건에 특화된 특정 분야에서만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한 것에 비하면, 다소 비효율적이지만 전 분야에서 세계수준을 달성하고 있는 프랑스의 역량이 과소평가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님을 기억하자. 실전사례의 미국, 스펙의 러시아, 가격의 중국에 치여 미래가 안 보인다는 점은 똑같지만

7.1 전투기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으로 활약한 미라지 전투기, 그리고 그 후계기종인 미라주 2000, 엑조세 공대함 미사일 등이 장기간 호평을 받아 왔다. 인도군의 미라지 2000의 운용은 매우 만족스러워서 인도군은 Su-27이나 MiG-21 같은 러시아제 전투기와 함께 프랑스제 전투기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라팔은 카길 전쟁 때 미라지 2000의 성능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한 인도왕창 팔려다 물량이 팍 깎이긴 했지만 어쨌든 팔렸으며, 그 뒤로 이집트카타르에도 파는 데 성공했다.

7.2 헬리콥터

가젤 무장헬기도 괜찮은 무기로 꼽힌다.

7.3 미사일

프랑스가 만든 엑조세 공대함 미사일은 포클랜드에서는 아르헨티나군이 발사하여 영국군 구축함 하나를 침몰시켰고, 이란-이라크 전쟁 중이었던 1987년에는 이라크군이 당시 이라크 우방이었던 미 해군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 스타크호를 적인 이란의 군함으로 오인해 발사, 대파시키기도 했다.

미스트랄 휴대용 대공미사일은 성능을 인정받아 25개국에 수출되었으며, 크로탈 지대공 미사일은 한국의 천마 지대공 미사일의 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7.4 개인화기

서유럽 국가 모두가 나토 표준인 7.62mm탄을 쓰고 있는데 유일하게 7.5mm탄 사용을 고집하며 30년을 버틴 근성(?)을 자랑한다. 사실은 대전 후의 경제적 혼란과 이어서 벌어진 베트남과 알제리에서의 막대한 자금소모 및 핵개발에의 우선적인 국방예산 배정으로 인해 나토 규격으로 소총탄약을 교체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토 탈퇴로 탄종을 통일할 이유도 없었고...결국 이것은 프랑스제 총기가 세계시장에서 퇴출되는 결과만을 불러왔다. 그래도 핵개발이 일단 마무리된 1970년대 이후에 채용된 돌격소총이나 다른 화기들은 나토 규격의 탄약을 사용하는 화기로 통일시켰다.[128]

기관총 역사의 데스크림존쇼샤기관총[129]을 제외하고서라도 1차 대전시 주력 소총인 Fusil Mle 1886 레벨 소총은 볼트액션 + 튜브식 탄창이라는 골룸한 결합으로 재장전에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 것으로 유명하고,[130] 2차 세계대전 중 쓰던 주력 소총 MAS-36안전 장치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며(덤으로 '예술의 나라'라는 선입견을 한참 부수는 못생긴 외관으로도 유명하다.), 냉전기간의 MAS 49/56는 20, 30발 탄창 시대에 10발 탄창을 끝까지 고집한[131]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도 냉전을 기점으로 이런 안습한 상황에선 어느정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후 전군을 최대한 빨리 무장시키기 위해 '급조한' MAT-49는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국의 스텐 기관단총보다 높은 생산성과 신뢰성을 가지고 있어서 만족할만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고, 베트남 전쟁 및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을 통해 공산권으로 유입되면서 만족스러운 평가를 얻고 또 공산권에선 이걸 7.62X25mm 토가레프 탄을 사용하는 버전으로 마개조해서 써먹었는데 역시 만족스러웠다고.

현재 쓰고 있는 제식 소총인 FA-MASAUG와 함께 실전배치된 대표적인 불펍소총으로 알려져 있다. SA80 못지 않은 똥총이라는 평가와 쓸만한 불펍 소총이라는 평이 공존하는데, 불펍형의 일반적 문제인 탄피배출을 FAMAS의 특유의 문제로 오인되는 경우도 있다. 일단은 결함투성이였던 영국의 SA80보다는 훨씬 낫고 SA80보다 못하면 그건 총이 아니라 구멍난 막대기겠지만 안정성으로도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세한건 FA-MAS해당항목으로...

권총은 옛날부터 유독 약했다. 과거 식민지겸 이웃인 벨기에가 총기류로 유럽과 미국을 쥐었다폈다 하는 것을 비교하면 미묘한 부분. 현재도 주력 권총으로는 이탈리아베레타를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되지 않는 국산 권총들도 대부분 해외제품의 모방 수준. 그래도 제2차 세계대전때 사용된 Mle. 1935 권총은 후에 SIG P210계열의 조상에 해당하는 우수한 설계였다...탄이 약해서 문제였지만.

7.5 공동개발 관련 에피소드

"항상 일관적으로 독자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만사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할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설이 한국 밀덕 사이에서 주장되기는 하지만, 이는 모든 것을 미국(또는 나토)의 전략의 합치여부로만 판단하는 한국 친미밀덕의 시야의 협소함에 의한 오해. 실제로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에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남북 아메리카나 남태평양에 산재하고 있는 해외영토-영해 떄문에 미국이 맹주로 있는 나토체제에서 제역할만 하면 되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과는 전략적 위치가 전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자국의 국가전략에 맞는 무기를 개발해야 했고, 당연히 합작사업에서 타협이 불가능할 때는 독자노선을 걷는 게 합리적.

7.5.1 유로파이터 프로젝트

유로파이터 개발시 프랑스산 엔진 사용과 함재기형의 개발, 그리고 최종 조립공장을 프랑스에 둘 것을 주장했다가 제뜻대로 안되자 탈퇴했다고 한국의 밀덕후들에게 왜곡되어 알려져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고 실제로는 설계 컨셉에 영국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132]
이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와 가까운지라 공대공/공대지 모두를 커버할 수 있는 기체'를 원하는 프랑스의 컨셉과, '대륙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북해를 건너 날아드는 소련 폭격기의 요격에 중점을 둔 기체'를 원하던 영국의 컨셉이 너무나도 달랐기에 벌어진 일로, 이를 프랑스의 이기주의 때문이라 모는 것은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이기주의라면 자국의 지정학적 특성에 맞추었기는 마찬가지인 영국의 주장 역시 이기주의의 극치이기 때문.
그리고 결과적으로 유로파이터는 공동개발국들이 자국이익만 우선시한 결과 유지비가 극도로 치솟았으며, 개발국들조차 어떻게든 내다 버리려고 애쓰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반면 라팔은 리비아 내전등에서 준수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인도와 이집트에 팔리는 등 상승세를 타고 있다. 심지어 유로파이터 측은 인도에 어떻게든 팔아보기 위해 프랑스가 과거 제안했던 함재기형 유로파이터까지 '돈만 내면 만들어 드릴게요' 라고 내밀고 있다. 이럴거면 프랑스가 함상형 만들자고 할때 같이 만들었어야지

7.5.2 토네이도 프로젝트

토네이도 역시 프랑스 입장에서는 애매해 보일 만도 한 것이, 프랑스는 이미 토네이도와 유사한 쌍발/가변익/대형기체인 미라지G 시리즈를 만들어 본 바가 있었으며, 너무나도 비싼 획득비용 및 유지비에 놀라[133] 시제기까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접고 주머니 사정에 맞고 대량운용이 가능한 단발 소형전투기인 미라지2000을 만들었던 선례가 있었다.

7.5.3 라파예트급 호위함

국내 밀덕계에서는 미완성된 전투체계 때문에 급하게 땜빵격으로 만들어져서 제 성능을 못낸다, 또는 플랫폼의 가능성에 비해 턱없는 수준의 무장이라고 조롱당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건 자국의 천톤짜리 호위함에도 함포 서너문에 하푼을 탑재하는 모습을 보던 한국 밀덕들이 프랑스가 해외영토 초계임무를 위한 경무장 원양초계함을 운용해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히는 원양초계함의 존재 그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원인이 컸다.

프랑스의 해외영토는 비교적 가까운 북아메리카생 피에르도 4,000km 이상, 남태평양누메아16,000km 이상 떨어져 있기에 이런 곳에 정기적으로 초계임무를 보내기 위해서 내파성이 우수한 대형선체와 낮은 유지비를 갖출 필요가 있었고 라파예트급도 이런 목적에 맞도록 설계되었다. 라파예트급이 체급에 비해 경무장을 갖춘 것은 평시에는 적은 유지비[134]를 바탕으로 해외순방용, 초계용 등으로 쓸 수 있도록 한 컨셉인 것이다.

7.5.4 차기 호위함 사업: FREMM급

영국, 이탈리아와 공동으로 차기 호위함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자국산 방공체계, 자국산 방공미사일, 자국산 선체로 건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느라 사업을 질질 끌다가 결국 참다 못한 영국이 나가버림으로써 사업이 반쯤 박살나 버렸다.
허나 초도함이 건조되기로 예정되었던 시기보다 22개월이나 늦긴 했으나, 어차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은 무기개발이 예산부족으로 인해 지지부진한 것이 일반적이다. 22개월 지연 정도면 어찌보면 준수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유로파이터 프로젝트의 경우엔 프랑스 탈퇴 후에도 독일(어휴 바르샤바조약군 지상군 막아야 하거든요? 지상공격능력&인해전술 가야해요!)과 영국(안돼 폭격기 막아야돼!)이 컨셉안을 놓고 다투느라 컨셉 확정에만 10년 가까이 걸렸으며 2013년 현재도 개량안에 대한 공동개발국의 생각이 전부 달라... 업그레이드형의 개발이 난항을 겪고 있다.

그리고 프로젝트에서 탈퇴하고 독자노선을 걸으려던 영국군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직격탄을 맞고 그만...

7.5.5 에어버스 A400M

A400M프로젝트 역시 프랑스가 부당하게 까이는 경향이 있는 사업이다.

라팔의 엔진인 M88을 베이스로 하는 터보프롭 엔진을 프랑스가 주장했던 것을 예로 들며, 조루엔진 M88을 쓰는 바람에 A400M도 막장이 됐어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웹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M88 베이스의 엔진은 A400M계획 초기에만 주장되었고 실제로는 채택되지 않았으며, 검토착수 후 오래지 않아 포기되었으므로 A400M 개발지연의 주역이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는 최대도입예정국이었던 독일이 물량을 줄이고, 영국이 C-130을 구입하면서 도입수량을 줄이는 과정에도 자국물량을 줄이지 않고 사업축소의 충격을 흡수한 바 있다.

그리고 M88은 한국에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조루가 아니며, 컴팩트하면서도 크기에 비해 강력한 출력을 내기 때문에 라팔의 성능에는 별 이상이 없다. [135] 그리고 사실 M88 ECO엔진의 출력은 20,000lb다. 다만 무게가 늘어나 기체 균형 문제가 생겨 못 달 뿐.

7.5.6 기타

현재는 최신전차인 AMX-56 르클레르와 신형 전투기 라팔의 도입으로 위세를 떨치지만, 신무기 도입에 군예산이 거덜나서 병사들의 복지 비용이나 장비 가동 비용에 빵구가 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8 프랑스의 역대 사기 행각 전설?

2002년경부터 인터넷에 굴러다니는 글로서, 한국에서 프랑스군의 이미지를 상당히 갉아먹은 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글은 전부 거짓말이고, 프랑스가 작성자를 고소해도 할 말이 없다. 항목 참조바람.

9 프랑스군의 장비

9.1 1, 2차 대전 당시

9.2 현대

9.2.1 육군

9.2.2 해군

9.2.3 공군

  1. 전차를 세대별로 구분하는 기준
  2. 프랑스군의 전차 보유 수량, 프랑스 육군AMX-56 르클레르 전차3세대 전차와는 별도로 3.5세대로도 분류한다. 주력 전차 항목을 참고 바람.
  3. AMX 10 RC는 장갑차이나 105mm 주포를 탑재해 화력전차급이다. 이러한 종류의 병기는 준전차급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물론 객관적인 수치에서는 수평적인 비교를 위해 전차로 포함시키면 안된다. (AMX 10 RC 관련 데이터)
  4. 4.5세대 전투기 분류법 참고.
  5. 4.5세대 분류법 (2)
  6. 프랑스 공군 전투기 보유 수량
  7. 프랑스 해군 항공대 전투기 보유 수량
  8. 4세대 전투기 분류법 참고.
  9. 4세대 전투기 분류법(2)
  10. 4세대 전투기인 미라지 2000을 9대 추가로 보유하고 있으나 훈련기이다.
  11. 3세대 전투기 분류법 참고.
  12. 프랑스 해군 항공기 보유 수량
  13. 프랑스 해군 소속
  14. 이 항목에 기재된 항공기 총합은 유사시 동원 가능한 헬기나 경찰급의 헬기도 모두 포함하는 수치다. 공군기 총합과는 틀리니 사소한 오해로 삭제하거나 수정하지 말기 바람.프랑스군의 항공기 총합 출처
  15. 만재 7,050 톤 호라이즌급 (2척)
  16. FREMM급
  17. 투르비유급 만재 6,100톤.
  18. 방공 호위함 카사드급 만재 4,950 톤(2척)/대잠 호위함 조르쥬 레그급 만재 4,500 ~ 4,830 톤(2척)
  19. 경 스텔스 호위함 라파예트급 3,600톤(5척)
  20. OPV 고윈드급 1,500 톤 (1척)
  21. 1천 5백톤 미만 초계함이나 고속정은 대부분 대규모 함대전에서 유효한 전력이 아니다. 이것들은 특작부대를 막을 때 한정적으로 유효하다.
  22. 초계함 데스티엔도르브급 1,250 톤(9척)/OPV 르 말린급 1,100 톤(1척)
  23. 항공모함 PA2 75,000톤
  24. 항공모함 샤를 드 골급 42,000톤
  25. LPH 미스트랄급 만재 21,300톤(3척)
  26. LPD 푸드로급 12,000톤(1척)
  27. BATRAL급 1,330톤(3척)
  28. LCU CDIC급 750톤(1척)/LC CDIC급 300톤(4척)/LCM CTM급 150톤(19척)
  29. 자세한 내용과 출처는 SSBN 항목을 참고하기 바람. 르 트리옹팡급, 수상배수량 12,640 톤
  30. 수상배수량 4,765톤 바라쿠다급
  31. 수상배수량 2,400톤, 루비급
  32. 현재는 중국과 인도의 약진으로 순위에 따라서는 5위 밖으로 나갈 때도 많다. 현재 1, 2, 3, 4위는 미국-러시아-중국-인도로 사실상 고정된 것이나 다름없으며, 5위 자리를 놓고 프랑스와 영국이 다투고 있다.
  33. 사실 패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루이 14세 말년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반에는 영국과 오스트리아를 위시한 유럽 동맹군에게 처발리긴 했지만, 말플라케 전투에서 영국군과 오스트리아군에게 피로스의 승리를 안겨주고 난 이후 여러 전투에서 승리, 전쟁이 끝나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34. 이 당시 재무총감이었던 콜베르의 성과가 워낙에 혁혁했던 덕분에 콜베르티즘(Colbertism)이라는 명사가 중상주의의 다른 명칭으로 당당하게 사용되고 있다.
  35. 그 산물 중 하나가 프랑스 제국 근위대인간흉기 최고봉인선임근위대였다. 이들의 행진곡이 들리면 주변에 있던 적군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고 한다.
  36. 스크류 추진 증기선은 이전까지 쓰이던 외륜 추진 증기선에 비해 포격에 의한 손상 가능성이 없고, 특히 속도면에서 압도적인 고성능을 발휘했다.
  37. 프랑스가 도입한 글루와 호는 기존의 목재 선체에 장갑을 증설한 형태로, 지금과 같은 철제 선체에 장갑을 두른 형태는 글루와에 대항하여 건조된 영국의 워리어 호가 최초다.
  38. 대한민국 국군의 헌병과는 달리 인구가 적은 시골이나 정부기관에 대한 경찰 업무도 담당한다. 옛 일본 육군 헌병대와 비슷하다.
  39. 지금이야 곧잘 개그 소재로 쓰이지만 그 당시엔 소수인 밀덕 중에서도 또 소수인 항공 매니아들이 맘 편하게 대화하고 놀 수 있었던 공간을 뒤집어 엎고 흔들어버린 라팔 떡밥을 진심으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에 대한 분노가 엉뚱하게 프랑스와 프랑스군에게로 날아간 것.
  40. 대체로 이전까지 한국군의 대규모 군수입찰에서는 고위층에 대한 뇌물과 로비가 중요했는데, 닷소측은 라팔을 팔기 위해서 일반 대중들에게 라팔을 적극 홍보하며 언론플레이를 했고, 이 때문에 보잉도 적극적으로 홍보전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나 닷소의 홍보전은 극렬 라팔리언들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한국 밀덕들이 닷소와 보잉 양 사로부터 수많은 홍보자료나 기념품을 챙길 수 있게 되는 등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한국에 손해를 준 건 없다. 어쨌든 잘못은 극렬 라팔리안들의 것이고, 닷소나 프랑스가 한국에 사기를 치거나 한국을 직접 디스한 적은 없다.
  41. Chef d'État-Major des armées
  42. (2000년~2014년)프랑스의 명목 GDP, 경제성장률 흐름
  43.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SIPRI)-군비자료
  44. List of countries by past and projected military expenditure (current US$)
  45. 이때 게르만족은 현대 독일민족이 아니고 잡다한 민족들을 통틀어 로마 시대에 붙인 것이다. 다만 로마 시대에 현대의 독일 땅은 게르마니아라고 불렸다. 대충 오랑캐들 사는 땅 정도..
  46. 백년 전쟁 이후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진 영주 휘하의 병력들을 왕이 거둬들이고 이들을 앞세워 영주들로부터 영지를 몰수하거나 제압하는 식으로 중앙집권화를 꾀했다. 물론 귀족의 권한은 여전히 강하다보니 국왕은 항상 귀족들을 경계해야 했다.
  47. 이 당시 전쟁사적으로의 의미지만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는 영국도, 프랑스도, 독일도 아닌 바로 스웨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군대였다. 그가 남긴 유산은 칼 12세때까지 스웨덴이 군사강국으로 군림하게 하는 발판을 다졌다.
  48. '프랑스의 절대왕정' -서정복(충남대 명예교수)-
  49. 여기도 오스트리아 외에 합스부르크 왕실이 거느린 속령들을 닥닥 긁어모으면 프랑스와 그럭저럭 인구수를 맞출 수 있었지만 각종 산재한 문제들이 있었다. 자세한 건 하술된 부분 참고.
  50. 단, 이 시기의 병력은 농사꾼들을 징병시킨 게 아니라 세금을 바탕으로 고용한 용병이었다. 여담이지만 최초의 국민개병제는 전술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치하의 스웨덴 바사 왕조였다.
  51. 사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가 스위스 산골 왕초를 벗어나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지역에 자리잡기 전까지만 해도 동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강국이었다. 그런 헝가리의 귀족들이었으니 자긍심+자존감이 엄청나서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건 당연한 사실. 그나마 헝가리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입김이 센 지역이라 나름 대우받아서 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이중제국이 세워질 때 오스트리아와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52. 후스 전쟁의 원인이었던 얀 후스가 프라하 대학의 교수였고, 30년 전쟁의 발단이 같은 곳에서 터졌던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었다. 그리고 먼 훗날, 냉전 때도 반골 기질이 드러났으니 바로 프라하의 봄이 그것이었다.
  53. 1두카트=순금 3.5그램 짜리 금화. 1억 두카트는 녹여서 금괴로 만들면 순금 350t이었다. 당시 스페인 GNP의 170%였다고.
  54. 루이 14세의 전쟁덕질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카를 5세가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과 플랑드르, 나폴리 왕국, 유럽 외 지역 식민지를 상속할 때 같이 상속한 부채가 3천만 두카트였는데, 펠리페 2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 로비 자금 살포라던가, 네덜란드 80년 전쟁이라던가, 영국 침공으로 아르마다를 거하게 말아먹었다건가 등등오만가지 삽질 때문에 펠리페 3세가 제위에 오를 즈음에는 부채가 1억 두카트에 달해 사실상 변제가 불가능했다.
  55. 실제로 이 부채 문제 때문에 펠리페 2세는 치세 동안 무려 4번이나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56. 스페인이 중남미에 확보한 대규모 식민지가 화근이었다. '신대륙으로 건너가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이 스페인 본토 젊은이들 사이에서 만연해진 바람에 본토에서 식민지로 인구가 자꾸 유출됐다.
  57. 18세기 중반에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 지역을 병합하기 전에 2백만밖에 안되었고, 병합 후에도 고작 3백만이 늘어났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로 영토를 프리드리히 2세 초기의 배 이상으로 늘렸지만, 그래도 인구가 1천만을 밑돌았다.
  58. 물론,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는 제국 시종장 같은 칭호와 갖가지 특권을 누렸지만, 상대가 그 신성로마제국과 맞먹는 면적에 생산력과 인구는 곱을 뛰어넘는 프랑스라는 게 함정.....
  59. 그나마 그 이라는 칭호도 영어식으로 쓰면 King of Prussia가 아니라 King in Prussia였는데, 전자는 프로이센 왕이 프로이센 밖에서도 왕이라는 거고, 후자는 프로이센에서만 왕이라는 것으로, 동양식 표현으로 치자면 외왕내제였다는 것.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겸 프로이센 공작이었고, 브란덴부르크 대신 프로이센의 왕이라 칭한 것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사실상 세습하던 합스부르크 황실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그런 거였다. 물론, 이 당시의 프로이센은 인구 대비, 절대 숫자, 질적 수준에서 유럽 내 순위권의 막강한 육군을 갖춘 데다 이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맹위를 떨치면서 대외적으로도 사실상 왕국으로 인정받았고, 결국 전자로 칭호를 바꾼 건 1772년이었다.
  60. 그래도 프랑스는 본토 생산력이 워낙에 튼실해서 충격이 덜했지만, 본토가 부실했던 스페인은 펠리페 2세 사후 잡을 수 없는 망하는 길로 가기 시작했다.
  61. 1678년 영국의 찰스 2세와 손잡고 네덜란드를 쳤지만 패배했다 그러나 승자였던 네덜란드의 국력도 기울었다. 네덜란드의 국력은 17세기 중엽 한때 대서양 밖으로 나가는 무역선의 4척 중 3척이 네덜란드 배였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인해전술(?)을 막아 내느라 국력이 기울었다. 가장 심각했을 때는 간척지를 만들기 위해 세웠던 제방을 터뜨려 적들을 수장시키는 고육지계까지 썼다고 한다.
  62. 루이 14세의 아내(스페인 공주)가 지참금을 챙겨오는 대신, 스페인 상속권을 포기한다는 결혼이었는데 스페인의 국력이 기울어서 지참금을 덜 챙겨온 걸 빌미로 상속권 드립을 치며 벨기에를 뺏으러 갔다. 애초에 마자랭이 스페인이 재정이 어려워 결국 지참금을 미납할 것을 내다보고 결혼을 추진했다고 한다.
  63. 20세기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9대 조상이다. 초대 말버러 공작
  64. 현재 프랑스 영토인 사보이 출신의 대공으로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자랐으나 출세를 못하자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맹활약을 펼친 불세출의 명장. 혈통상으로는 이탈리아인, 교육은 프랑스식으로 받았지만 활동지 오스트리아의 독일식 발음인 프린츠 오이겐(Prinz Eugen)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참고로 이 사람의 위상은 천하의 나폴레옹조차 "내 승리의 비결은 별 게 없다. 알렉산더, 한니발, 카이사르, 프린츠 오이겐(의 전쟁기록)을 읽고 또 읽는 것 뿐."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그 정도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국가적 영웅이었던 덕분에 비엔나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을 남길 수 있었다.
  65.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도팽(왕세자)의 둘째 아들 필리프(펠리페 5세)를 밀었는데, 당연히 왕세손 (프티 도팽)은 따로 프랑스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도 루이 14세가 사실상 위성국화되는 것을 저지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반대편 오스트리아를 밀다가는 오스트리아 스페인이 아예 통합되어 동군연합이 되기 때문에 프랑스와의 전쟁명분이 완전히 퇴색돼버렸다.
  66. 유럽 각국들로서는 반드시 막아야 했다. 두 나라가 하나로 합쳐졌다면 프랑스-스페인 연합에 의해 유럽 각국이 고사했을 공산이 컸기 때문. 게다가 가공할 본토 인구와 생산력을 자랑하는 프랑스광활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가진 스페인은 상호보완적인 부분이 있어서 1+1이 단순히 2가 아니라 그 이상의 상승효과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불-서 연합은 반드시 막아야 할 문제였다.
  67. 사실, 이 당시 영국 왕실이었던 하노버 왕가와 프로이센은 혈연적으로도 친척이었다.
  68. 영국이 유럽에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당시 총리였던 윌리엄 피트의 식민지 우선정책과 달리 조지 2세는 열렬한 유럽파였다.
  69. 물론, 프랑스가 식민지에 전력과 물자를 충원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더러운 영국 해군의 노략질과 공격에 바다 밑 정모 행을 면치 못했다.
  70. 루이 14세 때와 달리 궁정귀족 세력이 강해진 것으로 실력보다 가문빨로 뽑힌다. 이러한 부류의 귀족들을 '대검귀족'이라고 하는데, 장남들이 베르사유에서 띵가띵가하는 동안, 나머지 차남, 삼남 등은 군대에서 열심히 굴러야 했다고 한다(...)
  71. 샤를 드 로앙(Charles de Rohan, Prince of Soubise, 1715-1787)이라는 인간으로 방탕하고 놀기 좋아하는 똥별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름 보면 알겠지만 다이아몬드 사기 사건의 로앙 추기경의 아저씨뻘이다.
  72. rocket이 아니다. locket이라고 조그만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갈 수 있는 목걸이다.
  73. 아닌 게 아니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 지역의 수도였던 베를린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게 짓밟혔고, 전 국토가 전쟁에 휩쓸리면서 프로이센으로서는 7년전쟁이 이겨도 이긴 전쟁이 아니게 됐다.
  74. 영국은 지리적, 정치적, 인구적 여건 상 해상력으로 특화됐지만, 육군은 <전쟁의 역사>의 저술자 몽고메리 장군 평가로는 존 처칠 이후 암흑기라고 본다.
  75. 특히 러시아군은 18세기 후반쯤엔 카프카스와 크림미아 지역을 터키에서 빼았고 인구와 국력이 급신장해 지금의 미래 패권 국가로 예약된 걸로 취급받는 현재의 중국 취급이었다. 이미 이 시기 프랑스의 인구 수를 훌쩍 뛰어 넘은 건 덤.
  76. 이는 한 번도 유럽 정치의 중심에서 밀려난 적이 없었기에 그 확장판인 세계 정치, 최소한 유럽과 이를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에서 패권을 놓지 않으려는 프랑스가 세계 경찰을 자처하고 실제로도 그러고 있는 미국에게 밀리지 않으려는 데서 기인한 결과다. 오죽하면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자국을 '라 그랑드 나시옹'(La Grande Nation. 불어로 위대한 국가라는 뜻.)이라 부르겠는가.
  77. 프로이센의 상비군은 20만 오스트리아는 상비군이 30만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유럽서 저그 취급받던 러시아는 프랑스처럼 징병제 안해도 머릿수는 무한대급...
  78. 그리고 이 국민개병제가 안그래도 왕당파와 가톨릭 교회에 옹호적이고 혁명에 부정적인 방데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사 반란이 일어났고 프랑스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무고한 민간인들까지도 대량 학살하는 참혹하고 부끄러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자세한 내용은 방데 학살 참조.
  79. 그 중 한 명이 나폴레옹의 26원수 중 강철원수라고 불렸던 루이 니콜라 다부였다.
  80. La Grande Armee, '위대한 군대'라는 뜻이지만, 단순히 대규모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81. 화려한 프랑스 요리들이 보여주듯이 프랑스의 농업생산력은 굉장히 우수하다. 일단 배부터 채운 다음에 맛을 따질 것 아닌가? 실제로도 프랑스는 지금도 서유럽 제일의 농업생산력을 자랑하는데도 농산품 가격 유지를 위해서 전체 경작지의 일정 부분을 놀리고 있다. 그런데도 식량자급률이 독일과 더불어 15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미국의 원형
  82. 앞선 각주에 취소선이 된 게 마냥 농담이 아니다. 미국은 이보다 더해서 식량자급률 300%(!!!)에 수확량이 예상보다 많으면 아예 밭을 갈아엎고, 태워버린다(!!!)천조국의 기상
  83. 레콩키스타 완성 뒤에 발표한 알람브라 칙령이 직격탄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수준급의 생산력을 유지하게 했던 관개 기술을 도입한 무어 인들이 쫓겨났기 때문이었다.
  84. 같은 맥락에서 국내 금융의 중심축이었던 유태인들이 포르투갈을 거쳐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네덜란드나 영국에 금융시장을 잠식당했다.
  85. 말이야 '쟁탈전'이라고 하긴 하지만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문제로 총탄을 주고받은 적은 없다. 두 나라는 19세기에는 대체로 같은 편이었다. 유명한 '파쇼다 사건' 때마저도 두 군대는 그냥 대치하기만 했다.
  86. 버나드 로 몽고메리著 <전쟁의 역사> 무능과 별도로 시대상이 변했는데 각국의 전쟁수행방식 자체가 뒤떨어것도 큰 요인이다.
  87. 장거리 운송에서 마초를 출발지에서 모두 싣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길가의 풀을 소모하게 되었는데, 풀은 일단 먹어치우고 나면 다시 자라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88. 사망자만이 아닌 실종 포로등의 전투 손실이다. 당시 국력을 보면 프로이센은 인구가 1800만 프랑스는 3000만이었다.
  89. 산병이란 밀집대형의 측면이나 전면에 약간 떨어져 배치된 소규모 부대이다. 현대로 치면 정찰조 정도로 보면 될듯하다.
  90. 그런데 독일측도 이런 면이 없는 건 아니었으며, 1차 대전 중반까지 프로이센군 전통의 피켈하우베 (스파이크 철모)를 고집하다가 엄폐가 중요한 참호전에서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던 것을 알 수 있다.
  91. 현대 군대에도 사기 증진을 위한 이런류의 뽀대중시는 상당히 많으며, 대표적으로 미군이 사기증진을 위해 2001년부터 모든 부대에 베레모 착용을 지시했다가 이라크나 아프간 같이 그늘이 거의 없는 곳에서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다시 전통적인 군모를 보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92. 프랑스가 기술력이 부족해서 공업생산이 뒤졌다는 식으로 오해될 수 있지만, 프랑스의 가장 큰 문제는 지하자원, 특히 산업발달에 필수적인 석탄과 철광석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처럼 대규모 공업화를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있는 자원도 대부분 동부 독일접경에서 났는데(석탄의 경우 프랑스 산출량의 90%), 보불전쟁으로 알자스-로렌을 뺐기면서 석탄 생산량이 상당히 감소했다. 프랑스가 원자력발전을 에너지원으로 몰빵하는 이유도 원래부터 프랑스에는 석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자 핵개발 때문에 우라늄을 미친 듯이 찾아헤매다가 프랑스 남부 중앙 고지대에서 대규모의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면서 본토에서 안정적인 수급이 가능해진 건 덤.
  93. 얼마나 프랑스인들이 이를 갈았냐면, 프로이센에게 전쟁배상금으로 내야할 50억 프랑은 원래 5년 만에 갚아야 했으나(이것도 엄청나게 부담되는 액수였다.) 전국민의 전쟁배상금 갚기 운동이 벌어져, 2년만인 1873년에 갚아버렸다. 이 정도면 기한 내에 갚기 힘들 거라 이를 빌미로 프랑스를 옭아매려 했던 비스마르크조차 놀랐을 정도라니 흠좀무. 프랑스가 1차대전 이후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끝까지 받아내려고 했던 것은 일부 불까 밀덕들 주장대로 프랑스가 옹졸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먼저 독일이 저런 짓을 했기 때문이다.돌고 도는 복수의 역사
  94. 이 때문에 1차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징집할 때는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어 반전여론에 불을 붙일까봐 이런 제도를 상당히 보완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없애버렸다.
  95. 정확한 페이지 출처바람.
  96. 그리하여 페탱같은 경우, 이런 민주제도에 프랑스가 약체화된 책임을 돌리며 전체주의적인 독일 괴뢰정권을 이끌었다.
  97. 다른 나라에 비해 프랑스의 인구증가저조는 유럽사의 미스테리라 학자들 연구 대상이다. 영국과 독일은 신대륙으로 인구 유출이 있는데도 몇 배씩 늘었는데 프랑스는 이민자도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구증가의 필수조건인 경작지는 독일이나 영국보다도 훨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는 매우 미미했다. 나폴레옹 시절 상속법 변경으로 인한 저출산 여파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와서 다산적인 이슬람권-아프리카권의 이민 유입과 함께, 결혼 아닌 동거문화의 활성화로 21세기 말이 되면 프랑스가 독일-영국을 제치고 유럽 1위의 인구국으로 등극할 것은 확실히되고 있다.
  98. 철강 생산이 독일의 4분의 1, 영국의 절반 이하일 정도. 프랑스의 산업생산 정체는 여러 서적에서 다루고 있다. 니얼 퍼거슨의 <증오의 세기> 폴 존슨의 <모던 타임즈> 등을 참조하기 바람. 둘 다 영국인이라 의심(?)할지 모르지만 위키백과 프랑스어 판에서조차도 존 키건 등 영미학자들 출전이 수두룩하다.
  99. 특히 프랑스판 MIT나 KAIST라고 할 수 있는 에콜 폴리테크닉 출신들은 대부분 군수기업이나 기술장교로 갔다.
  100. 극초기에는 총알이 프로펠러를 날려버리지 않도록 프로펠러에 금속 판을 덧대어 총알을 튕겨내게 하는 것이었다(초기 비행기 재질이 그렇듯이 프로펠러도 나무였다). 문제는 이것도 도탄 때문에 비행기에 손상이 가고 프로펠러는 주기적으로 교체해야만 했다. 이후 독일군이 전방 기총이 달린 프랑스 전투기를 입수한 다음에는 캠축을 활용해 프로펠러가 기관총 앞에 오면 아예 발사가 되지 않도록 하는 싱크로나이즈드 기어를 만들게 되는데(물론 연합군도 금세 따라서 만들었다), 이렇게 양군에 모두 전방 기총이 장착되면서 비로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도그파이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01. 야드파운드법 일색인 미군에서 인치가 아닌 155mm 구경 포탄을 쓰는 이유가 바로 프랑스의 영향이다.
  102.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쓰인 단어인데 오용되었다.
  103. 사실 당시 영국에도 장전시간도 짧고 사정거리도 길고 정확한 강철 후장포가 있었다. 문제는 이들 대포는 민간업자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국영 조병창에서는 이런 후장포를 만들 값비싼 시설을 도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국 해군은 민간업자들이 만든 대포를 채택할 것을 거부했으며, 이런 자세는 프랑스 청년학파의 전략이 심대한 위협으로 다가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104. 청년학파 시대의 어뢰정은 영국 해군이 암스트롱포를 장비하게 되면서 몰락했고, 현대 시대의 미사일 고속정은 대형함이 헬기를 장비하게 되면서 몰락했다. 둘 다 신무기로 무장하고 나올 당시에는 위력적인 무기체계로 평가받았으며 얼마 못가서 대책이 나와버려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05. 구축함(destroyer)이라는 이름 자체가 어뢰정 구축함(torpedo boat destroyer)를 줄인 말이다.
  106. 1차대전 초기에는 서부전선의 군대 그 자체에 가까웠고 1916년에 영국군이 대거 투입된 이후에도 여전히 주력이었으며 막판의 1918년의 백일전투에서도 주력이었다.
  107. 그러나 전초에 소수"정예"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게 숙련된 영국군은 매우 뛰어난 분전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정예병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그래서 1916년까지 전선에 숙련된 영국군이 적었고 피터 심킨스의 경우에는 독일군이 상대적으로 영국군이 약체화된 1915년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하지 않고 만만한 동부전선에서 전과를 올린게 결과적으론 마지막으로 1차대전을 독일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것이라 평가할 정도였다.
  108. 1915년 이후엔 서부전선에선 프랑스, 영국, 독일 가릴 것 없이 충원율 100%가 넘는 부대가 속출했다. 사망, 부상, 실종, 포로 등으로 손실된 병력이 편제의 100%를 넘어 일부 운빨 쩌는 베테랑을 빼고는 싹 물갈이가 되었다.
  109. 탄넨베르크 전투 자체는 1개군이 전멸할 정도의 개삽질이었지만 마른 전투 시기에 독일군 일부를 동부전선으로 이동시켜서 프랑스엔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110. 러시아군의 장비 교육훈련과 장교 수준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매우 떨어졌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도는 박살냈다(...). 독일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갈리치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는 1914년에 붕괴되었을 정도(...). 이때문에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해야 했고 서부전선에서 압력이 줄어들었기에 프랑스군에 도움이 된게 사실이다. 프랑스 : 그걸 노리고 동맹한겁니다 애초에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병력을 투입한 것도 러시아군 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니콜라이 2세가 투입을 지시한 것. 이는 동맹국 프랑스와의 '으리'의리 때문이었다.
  111. 영국이야 말로 중세부터 천년간 프랑스의 진정한 라이벌이었으며, 19세기 말 이래 영불 양국은 서방세계의 양대 동맹국이었지만, 뿌리깊은 디스질은 현대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영미가 주도한 이라크 전쟁을 프랑스언론이 조롱하고, 이에 발끈해 미국에서 프렌치 프라이를 프리덤 프라이로 개명 운운한 것을 상기해보라.
  112. 독일군은 프랑스에게도 KV쇼크 비슷한 상황을 겪어야 했다. 프랑스군의 경전차라는 놈은 1, 2호 전차를 아득히 뛰어넘었고 Char 시리즈에 오면 1:13의 전설까지 자랑했다. 문제는 역시 전술과 무전기 장비 여부.
  113. 포슈가 "비행기는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발언한 것 때문에 종종 욕먹는데, 사실 이 발언은 1911년에 한 것이다. 이후 포슈는 1915년부터 항공 정찰에 적극적이었고, 1916년에는 항공정찰을 토대로 한 포병지원을 강조했던 바 있다. 따라서 프랑스가 2차 대전 때 공군 발전을 등한시한 것을 포슈의 책임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114. 전투기 실 보유수에서는 프랑스가 독일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공군을 통합적으로 운용한 반면 프랑스군은 축차적인 항공기 투입으로 자멸해버렸다.
  115. 오히려 독일군 총참모부가 이 책을 가져다가 프랑스군의 대응방안을 연구했다고 한다(...).
  116. 북아프리카 전역 중 가잘라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빼앗긴 벙커를 재탈환하기 위해 돌격하는 모습이다. 이들의 분전으로 독일군은 유리한 위치에서 공세를 가하면서도 큰 손실을 입었고, 이들은 포위당한 상태에서도 한계까지 버티다가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격전지였던 비르하케임은 지금도 외인부대에서 전설로 언급되는 성지이다.
  117. 사실 저런 소수 정예부대가 상대적으로 기량 및 훈련도는 낮고 수적으로 절대 우세한 적을 상대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총검돌격밖에 없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저런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총검돌격은 생각보다 성공율이 높다. 물론 상대 나름이지만 말이다. 북한군이 한국군에게 총검 돌격을 한다 생각해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날까?
  118. 지평리 전투 당시 중공군의 의표를 효과적으로 찌른 측면도 컸는데, 당시 꽹과리 등의 악기로 한국 및 UN군을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어내는 게 중공군의 기본 전술이었고, 재미를 많이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똑같이 중공군이 쳐들어오자, 프랑스군은 사이렌을 울려 꽹과리보다 더 큰 소음으로 중공군을 역으로 놀라게 했고, 이는 적 전열 붕괴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
  119. 미국은 영국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맺었던 핵기술공유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영국의 핵개발에 도움을 주지 않은 전과가 있다. 당연히 영국은 이에 격분했다.
  120. 그러나 러시아 수출 예정이던 미스트랄급 강습상륙함은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프랑스가 인도를 취소하고 러시아쪽에 보상금을 지불하였다. 완성된 함정은 이집트군이 사갔다.자세한 내용은 미스트랄급 항목 참조.
  121. 영국은 2030년까지 중형항모 2척과 초대형 호위함 (8,000t급, 26형 호위함) 8척, 그리고 신형 호위함 (만재 6,000t) 13척을 추가할 예정이다.
  122. 사실 21세기 들어서 소련이 무너지자 대책 없이 군축하고 방위비 부담 약속을 무시하는 바람에, 유럽 군대는 대부분 평범 혹은 그 이하의 군대로 전락했다. 프랑스는 그나마 나은 축이고 독일은 자기네 안방도 못지킬 수준이다.
  123. 비슷한 처지에 놓인 영국 같은 경우는 유지할 능력이 안 되는 식민지들은 쿨하게 놓아주되 엉겨붙는 녀석만큼은 귀싸대기를 맛깔나게 날리며 나름의 품위유지에 성공했지만,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광탈하고 전후 식민지들의 독립 과정에서도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끊임없이 털리는 모습만 보여준 탓에 그저 그런 군대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물론 식민지에서 영 좋지 않은 일을 겪은 것은 전술한 대로 정치권의 잘못된 결정과 핵무기 덕질로 돈도 없고 상황도 나쁜 프랑스군이 독박을 쓴 것이지만, 일반인들과 딜레당트들이 그런 사정까지 고려하지는 않는다.
  124. 가령 라팔의 경우 이런식으로 개발되다보니 30년 이상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또 다른 예로 라파예트급은 전투체계 개발에 시간이 걸려 임시로 운용되고 있고, 예산부족으로 루비급 같은 반쪽짜리 소형 공격원잠을 만들기도 했다.
  125. 그러나 유로파이터도 라팔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어 비슷한 시기에 시제기가 나온것을 보면 프랑스만이 삽질했다고 보는것도 좀 무리가 있다. 세계경찰노릇을 하는 미국과는 달리 유럽국가들은 냉전이 해소되자 군비 확장에 큰 정치적 부담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문에 사업이 지지부진해진 것이지, 프랑스 혹은 다른 나라들이 전차 하나 만드는데 30년을 잡아먹고도 제대로 못한 모국가처럼 막장이라서 전투기 하나 만드는데 30년이 걸렸던 것은 아니다.
  126. 토네이도 계획에서 떨어져나가 덕분에 여전히 주력 공격기로 재규어가 사용되고 있다.
  127. 현재의 경우 지금까지 판 무기들에 대한 유지 보수 및 보충이 대부분.
  128. 일부 저격총들은 전용 탄약을 사용하지만 프랑스군의 특수부대용 화기나 하다못해 기관총 경우에는 FN 미니미FN MAG를 사용한다.
  129. 총열이 앞뒤로 길게 움직이는 괴이악한 구조에, 잔탄 세기 쉬우라고 20연발 탄창의 옆면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놨다!
  130. 그래도 프로이센이 Gew88을 만드는 데 이놈을 베껴가기도 했고(물론 실패했지만.), 8mm 무연화약 채택으로 몇몇 구석에서는 나름대로 선진적이었던 녀석이긴 하다. 문제는 타국보다 먼저 채용하는 바람에 상당한 기술적 모험을 하느라고...
  131. 반자동 소총인 49식의 경우는 10발 탄창도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49식에 자동발사 장치만 추가한 56식에게 10발 탄창은 분명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외인부대 같은 실전을 많이 치르는 부대에서 대용량 탄창 도입을 끈질기게 주장했으나 30여년을 씹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 탄창과 같은 소모품도 의외로 조달비용이 만만찮은데다 궁핍한 재정속에서 치룬 알제리 전쟁과 연이은 핵개발 속에서 과연 대용량 탄창으로 교체하자는 주장이 국방예산의 배정순위에서 얼마나 우선적으로 정해질 것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32. 아무리 프랑스가 자국이익을 내세워도 단순히 이런 문제로 탈퇴한다면 궁극적으로는 프랑스에게 더 해가된다. 한국 밀덕후들이 잘못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독일과 함께 유럽연합의 지도국인 프랑스는 자국보다 훨씬 경제사정이 안좋은 이탈리아나 스페인등의 합작국을 앞에 두고 이런식으로 행동할 수가 없다.
  133. 유로파이터의 위엄에 눌려서 그렇지, 토네이도의 운용비 역시 절대 저렴하지 않다.
  134. 무장이든 뭐든 일단 함선에 설치된 것은 유지비를 증가시키기 마련이다.
  135. 일부 밀덕들이 먼저 나온 GE F414와 비교하며 프랑스의 M88은 늦게 만들고도 출력이 더 작다고 주장하는데, 출력이 작은 건 사실이지만 (각각 58kN, 50kN), 무게(약 1,100kg, 900kg)와 부피도 작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투기의 기동력에 기여하는 수준은 F414나 M88이나 거기서 거기다.
  136. 항목에도 씌여있지만 2030년까지의 독일군과의 공동도입을 목표로 KMW와 넥스터가 공동개발중이다.또 유럽표준전차 꼴 나면 막장이지만...
  137. 구식화한 AMX-10P를세대교체를 하기 위해 후속모델인 "VBCI"에게 바톤 터치하고 2008년 이후 퇴역하기 시작하였다
  138. 출처(프랑스어 위키)
  139. 139.0 139.1 전략 수송기
  140. 대통령 전용기
  141. 141.0 141.1 141.2 정부소속 비지니스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