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 카한
Wujie Qaghan우지 카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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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족 카간 | |
군림하다 | 841-846 |
전임자 | 카사르 카한 |
후계자 | 에니안 카한 |
태어난 | Yaoluoge Wuxi (藥羅葛烏希) |
죽은 | 846 알타이 산맥 |
집 | 에디즈 씨 출생 야글라카르 씨 공식 |
아버지 | 바오이 카한 |
우게 카한은 위구르스의 열두 번째 통치자였다. 그의 위구르 이름은 아마도 우게(올드 투르크어: 𐰇𐰏𐰀, 점등. '어드바이저')[1]일 것이다.
인생
자올리 카한의 동생이자 장신 카한의 숙부였다.[2] 그는 841년 13개 부족의 지원으로 예니세이 키르기스스탄 침공 후 카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의 첫 행동 중 하나는 타이헤 공주를 지키고 있던 키르기스스탄 호위병을 매복시키는 것이었다. 포로가 된 후 우종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우종황제가 자신을 새로운 콰한으로 인정하고 국경도시인 젠우(振wu, 현대 내몽골 호호트)를 빌려 위구르 카가나테의 재건을 계획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우종황제는 카한에게 당나라 국경 밖에 남아 있으라는 칙령을 내리고 타이허 공주가 직접 장안으로 돌아와 위구르인들의 상태를 보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3] 그의 요청 중 중국 마니체안 사원 경비, 와모시 회수, 원조를 위한 병력 등을 요구했다.[4]
카한은 우종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본격적으로 당나라의 북쪽 영토를 약탈했다. 그는 또 우종황제가 거부했던 국경도시 톈데(天田, 현대 내몽골 바얀 누르)를 빌려달라는 요청을 또 했다. 우종황제는 더 나아가 카한에게 꾸짖는 편지를 써서 결과에 대한 경고를 하였고, 다시 타이허 공주를 직접 보고하고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우종황제는 북방 국경의 회선 세력도 동원하여 위구르인에 대한 대대적인 재수전을 준비하였다. 842년 겨울에는 재상 리데유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게 하여 타이허 공주를 위해 겨울옷과 함께 위구르 잔당들에게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또한 842년 리덕의 권유로 우종황제는 톈 무우(天武) 톈 무우(天武)에게 위구르족과의 교전을 중지하고 대신 식량으로 유인하여 헤동 서킷(河東, 산시성 현대 타이위안(大元)에 본부를 두고 있다. 또한 리덕의 권유로 시옹그 장군은 티안데로 파견되어 위구르 습격으로부터 티안데를 방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3]
843년 2월, 콰한은 전우를 공격했다. 장군 시옹과 주예 치신이 지휘하는 당군은 기습 반격을 준비했다. 이어 리시중도 치비( (),), 샤투오, 투유훈 부족민들과 함께 위구르 잔당들과 싸우겠다고 자원했고, 이에 우종황제는 허칭차오(何ao)와 치비통( q tong tong) 두 현장에게 각각 6천 명의 병력으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3] 시오닝이 위구르 진영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융단이 줄지어 서 있는 특별한 마차 몇 대가 있고, 그 마차 속의 하인들이 중국인으로 보이는 빨강색과 초록색의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카이 시라는 이름의 정찰병을 보내 연락을 취하게 했고, 이것이 타이허 공주의 기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다시 정찰병을 시켜 태허공주에게 자신의 공격 계획을 알려주고 그녀와 신하들에게 공격 중에 움직이지 말고 침착하게 있으라고 부탁했다. 밤에는 카한의 천막을 기습 공격하여 843년 2월 13일 그의 군대가 무너졌다. 우지는 도망쳤고, 시호는 타이허 공주를 호위하여 당지로 돌아왔다.
죽음과 계승
처음에는 시웨이족인 헤이체지(平黑子)로 도망쳤다.[4] 그의 패배는 또한 중국에서의 마니차이즘의 금지를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키르기스스탄과 탕을 피해 다음 3년간 여전히 활동했다. 후에 그는 846년 알타이 산맥 근처에서 전투 중 사망했거나 아마 와모시의 한 사람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이다. 동생 에니안 카건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