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S 격암 (AM-127)
USS Tumult (AM-127)역사 | |
---|---|
미국 | |
이름 | USS 격암 |
빌더 | 앨라배마 주 치카소 걸프조선공사 |
눕다 | 1941년 7월 21일 |
시작됨 | 1942년 4월 19일 |
커미셔닝됨 | 1943년 2월 27일 |
해체됨 | 1954년 9월 21일 |
재분류됨 | MSF-127, 1955년 2월 7일 |
스트리킨 | 1967년 5월 1일 |
명예와 상을 주다 | 전투별 5개(제2차 세계대전) |
운명 | 고철용으로 판매됨 |
일반적 특성 | |
클래스 및 유형 | 아욱급 지뢰제거원 |
변위 | 890톤(904 t) |
길이 | 221피트 3인치(67.44m) |
빔 | 32피트(9.8m) |
초안 | 10피트 9인치(3.28m) |
속도 | 18노트(33km/h; 21mph) |
보완 | 100명의 장교와 사병 |
무장을 |
|
USS 격암호(AM-127)는 선박의 통과를 막기 위해 물에 깔린 지뢰밭에서 지뢰를 제거하는 위험한 임무를 위해 미 해군이 획득한 오크급 지뢰제거원이었다.
격암은 1941년 7월 21일 걸프조선공사에 의해 앨라배마주 치카소우에서 함락되었고 1942년 4월 19일에 출범했으며, D. M. 피어스 부인의 후원을 받았으며, 1943년 2월 27일에 사령관 찰스 E.를 임명했다. USNR의 판사, 지휘관이다.
US East Coast, 1943년
테스트와적응에이어 1943년월 말 격암은 동해 프론티어에서 호위 임무를 시작했다. 지난 4월 플로리다 키웨스트에서 대잠전 훈련에 참가한 새 지뢰제거원. 지난 21일 버지니아주 요크강에서 다른 지뢰제거원과 함께 지뢰제거, 연료공급, 대공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24일 버뮤다행 비행기에 올라 침몰한 화물선 SS 산타 카탈리나호에서 생존자를 찾는 과정에서 수색에 나섰다. 격암은 지난 26일 잔해와 구명고리를 발견했지만 생존자를 찾지 못했다.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수리를 마친 지뢰제거원은 지난 5월 15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출발한 소형 연안 수송선을 호위했다. 플로리다의 키 웨스트로 가는 짧은 항해는 에스코트 절차를 연습할 여유가 있었다.
태평양 작전, 1943-1945
호송 에스코트
격암은 지난 20일 다시 진행돼 파나마 운하와 태평양으로 진로를 잡았다. 6월 초, 그녀는 멕시코 만자니요에서 잠시 멈춰 선 승무원의 응급 의료 지원을 받은 후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로 계속 갔다. 그곳의 프로비저닝, 연습, 수리는 6월의 나머지와 7월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7월 21일, 지뢰제거원은 8월 내내 그녀가 머물렀던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진행되었다. 28일 휴대용 부두 AFDB-1의 한 구간을 끄는 취약하고 느리게 움직이는 화물선 호송선을 호위하며 태평양 전쟁 지역으로 진로를 잡았다. 격암은 9월 한 달 내내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이 어색한 혐의를 벗으며 보냈다. 10월 2일, 무사히 호송차를 인도한 격암은 에스피리투 산토에 정박했다.
1943년의 나머지 기간 내내 1944년까지 격암은 솔로몬 제도와 솔로몬 제도와 뉴칼레도니아 사이에 호송차를 호위했다. 에스피리투 산토에서의 짧은 기간과 사보섬에서의 지뢰제거 훈련은 그녀가 호주 시드니에서 일주일간의 휴양과 재활을 위해 플로리다섬의 Port Purvis를 떠난 6월 하순까지 청소부의 임무를 다양화했다. 7월에 그녀는 친숙한 호송차 보호의 일상을 재개하기 위해 솔로몬스로 돌아왔다.
펠레리우 침공
8월 말, 그녀는 팔라우스에 대한 임박한 공격에 대비하여 러셀에서 전술 기동훈련과 지뢰 제거 훈련에 참가했다. 9월 8일 과달카날에서 진행중인 격암은 1944년 9월 15일 D-데이에 펠렐리우에서 도착할 때까지 역에서 그녀의 태스크 그룹을 심사했다. 그날 아침 일찍, 그녀는 앙가우르섬을 휩쓸기 시작했고, 그 후 며칠 동안, 교통 지역을 순찰하고 감시하는 지뢰 제거 임무를 번갈아 수행했다.
울리티 침공
격암은 9월 19일 펠레류에서 출발해 또 다른 섬 공격인 울리티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녀는 9월 21일에 아톨에서 도착했고, 그 다음 날까지 미국 선박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이 경품 정착구를 준비하기 위해 광산을 휩쓸었다. 9월 23일, 그녀는 21개의 기뢰를 휩쓸었다. 그녀는 접촉 광산이 장비를 손상시키기 전에 기뢰를 파괴했고, 그녀의 항구를 쓸 수 없는 기어와 다른 불가분의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기뢰 처리 구역으로 물러나게 했다. 격암은 9월 25일 네덜란드 뉴기니행 수송대대와 함께 울리티를 출발했다.
필리핀 침공
그녀는 수리를 마치고 1944년 10월 10일 TG 77.5 기동부대를 이끌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격암은 17일 강풍에 수리가오 해협을 휩쓸기 시작했고, 맥아더 장군이 레이테에 상륙하기 전날인 19일에는 26개의 연락 지뢰를 쓸며 일본 방어의 철저함을 입증했다. 지난 23일, 그녀는 레이테 만의 교통 지역에 정박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일본 항공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대공분실을 바쁘게 했고, 25일에는 격암의 포병들이 좌현 분기점에서 2마일(3km) 떨어진 곳에서 화염에 휩싸인 '발'을 성공시켰다. 다음날 격암은 일본 항공기 11대에 사격을 가했고 우현 활에서 300야드(270m) 떨어진 곳에 폭탄이 떨어지자 운에 감사할 이유가 생겼다. 그날 이후, 그녀는 포트 활에서 1마일(1.6km) 떨어진 곳에 있는 "샐리"를 튀겼다. 28일, 격암은 마누스를 위해 진행되었다.
시들러 항구에서 수리를 마치고 동쪽으로 항로를 정하고 진주만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오리건주 포틀랜드까지 찜질을 한 뒤 12월 7일 그곳에 도착했다. 격암은 미국 서부 해안에서 정밀 검사를 받고 벌거벗은 후 1945년 4월 23일 캘리포니아 롱비치를 떠났다.
오키나와 작전
그녀는 일주일간의 훈련을 위해 5월 1일 진주만에 도착한 후 마리안나스로 향하는 호송차와 랑데부했다. 5월 22일, 그녀는 괌에 도착했지만, 곧 오키나와로 향하는 느리게 움직이는 호송대와 함께 다시 진행 중이었다. 6월 4일 태풍으로 견인차와 예인선이 진로를 잡는 데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호송차량이 해산했다. 이틀이 지나서야 마지막 스트래글러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지난 9일, 격암은 호송차가 버크너 만으로 진입하면서 이를 검열했고, 이어 케라마 레토까지 나아갔다.
지난 11일 지뢰제거원이 오키나와 근해에서 순찰활동을 시작했다. 16일 저녁 역에서 찐 김에 폭발이 일어나 밤이 깊었고, 가미카제 희생자인 구축함 트위그스(DD-591)가 함락되면서 약 13km 떨어진 지평선에 불이 켜졌다. 격암은 6월 30일까지 오키나와 앞바다에서 피켓을 들고 있었으며, 이용 가능성과 제공에 대한 케라마 레토에서의 짧은 재송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후 그녀는 운동의 4일 후 동 중국해 지역"주노"에 휩쓸로 진로 설정하기 전에 참가했다. 7월 17일, 격암은 버크너 만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태풍경보가 그녀에게 항해사와 공병장교를 뒤로하고 급히 떠나라고 재촉했다. 3일 동안, 그녀는 태풍으로 인해 북쪽으로 찐 후 오키나와로 돌아와 중단되었던 물류 업무를 끝냈다.
전후 작전, 1945-1954년
일본해에서
전쟁이 끝나자 격암은 일본 규슈 연안의 '스카그웨이' 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며칠 후, 그녀는 미 3함대가 북상하면서 랑데뷰를 했다. 8월 28일, 격암을 비롯한 3명의 지뢰제거원들이 도쿄만의 헤드랜드를 지나 항구로 들어왔다. 한때 분주했던 일본 항구는 황량하고 불안할 정도로 조용한 모습을 보였다. 단 한 척의 전함과 나가토, 그리고 몇 척의 작은 배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승리한 미국 배들이 항구로 들어오자, 그 장면의 황량함을 더했다.
격암은 즉시 정박지를 쓸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이면 항구 입구에 있는 지뢰밭을 제거하는 것을 도왔다. 9월 대부분 동안 혼슈의 동쪽 해안을 휩쓸어 사가미 완과 이시노마키 완을 치웠다. 지난 27일 지뢰제거원이 도쿄항에 정박 중인 가운데 모터고래선 한 척이 인근 해상에서 전복됐다. 격암은 자신의 고래배를 띄워 폭풍우가 몰아치는 만물에서 생존자 20명을 구출했다. 10월 초 지뢰제거원은 도쿄만에서 태풍에 접근한 뒤 사세보 행으로 이동하다가 황해 '클론다이크' 지역을 휩쓸기 위해 일본을 출발했다.
10월 30일, 실수로 엔진룸이 범람하면서 격암의 주요 추진 모터 중 하나가 작동 불능 상태가 되어 격암의 포트 샤프트가 정지되었다. 11월 첫째 날 일본으로 향하여 연말까지 사세보에서 수리를 받았다. 1946년 1월, 그녀는 에니웨톡과 진주만을 거쳐 캘리포니아의 산 페드로까지 쪄서 2월 15일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3월 3일 서해안을 출발해 파나마 운하를 거쳐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으로 향했다.
애틀랜틱
In June, she made a training cruise out of Jacksonville, Florida, and spent the rest of 1946 and most of 1947 operating along the east coast. 말년 11월, 그녀는 뉴펀들랜드의 해군기지 아르헨티나에서 지뢰를 뿜으며 평시의 임무를 변경했다.
1948년 1월부터 1952년 7월까지 격암은 대서양 항구에서 계속 운항하여 카리브해 유람선 3척을 만들었다. 1952년 8월 25일, 격암은 영국 섬으로 진로를 정하면서 지뢰 찾기 부서 82로 찰스턴을 떠났다. 그 후 수개월 동안, 이 노련한 지뢰제거원은 나토 훈련에 참가했고 많은 지중해 항구를 방문했다. 그녀는 1953년 2월 7일 찰스턴으로 돌아와 동해안항구에서 업무를 재개했으며, 1954년 7월 21일 텍사스 주 오렌지에 도착하여 불활성화를 위해 계속 근무했다.
해체 및 판매
두 달 후인 1954년 9월 21일, 격암은 제명되었다. 1955년 2월 7일, 그녀는 강철로 된 비행대 지뢰제거기로 재설계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1967년 5월 1일 해군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그녀의 헐크는 나중에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Southern Scrap Metal사에 의해 구입되었다.
수상
격암은 제2차 세계대전을 위해 5명의 전투별을 받았다.
참조
- 이 글에는 공용 도메인에서 온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미국 해군 전투함 사전이 항목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외부 링크
- 미 해군의 함정, 1940-1945년 AM-127 USS 격암호
- 격암 AM-127
- NavSource 해군 역사에서 격암의 사진 갤러리
- USS 격암 (AM-127)
- 전복된 모터보트(모터고래선)를 USS 격암호(AM-127)로 이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