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A.매크리스탈
Stanley A.스탠리 매크리스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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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 미국 캔자스 주 포트 [1]레븐워스 | 1954년 8월 14일
얼리전스 | 미국 |
서비스/지점 | 미국 육군 |
근속년수 | 1976–2010[2] |
순위 | 일반 |
보유된 명령 | 국제 보안 지원군 합동특수작전사령부 미국 육군 중앙부 75 레인저 연대 제75 레인저 연대 제2 대대 제2대대, 504 낙하산 보병대 |
전투/와이어 | 사막 방패 작전 걸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
수상 | 방위공훈장(2) 육군 공로훈장 국방 우수 서비스 메달(2) 레지옹 공로 (3) 동스타 메달 |
스탠리 앨런 맥크리스탈(Stanley Allen McChrystal, 1954년 8월 14일 출생)은 2000년대 중반 합동 특수작전사령부(JSOC)를 지휘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은퇴한 미 육군 장성이다.그의 마지막 임무는 국제안보지원군(ISAF), 미군-아프가니스탄 사령관으로 있었다.[3]앞서 2008년 8월부터 2009년 6월까지 합참의장, 2003년부터 2008년까지 JSOC 총사령관을 지냈으며, 이라크 알카에다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의 사망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팻 틸만 화기 사건 은폐에 자신의 역할을 했다는 의혹도 함께 비판했다.[4]맥크리스탈은 다른 군사 지도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으로 알려져[5] 있다; 이것이 그가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군대를 이끌도록 임명한 이유 중 하나였다.[6]2009년 6월 15일부터 2010년 6월 23일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7]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은 맥크리스탈에 대해 "아마도 내가 만난 전투 중 가장 훌륭한 전사일 것"이라고 설명했다.[8]그러나 맥크리스탈은 롤링스톤 기사에서 조 바이든 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관리들에 대한[9] 거침없는 발언에 이어 워싱턴DC로 소환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아프간 사령관직을 수락했다.[10][11][12][13]그의 아프가니스탄 국제안보지원군 사령부는 니콜라스 파커 영국 육군 부총사령관이 후임 인선이 확정될 때까지 맡고 있었다.오바마 대통령은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을 맥크리스탈의 후임으로 지명했으며,[13][14] 퍼트레이어스 장군은 상원에서 인준을 받고 6월 30일 공식 지휘를 맡았다.아프가니스탄에서 직위해제된 지 며칠 후, 맥크리스탈은 은퇴를 발표했다.[15]2010년부터 예일대에서 잭슨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으로 국제관계학 과정을 강의했다.[16]
초기 경력
1954년 8월 14일 캔자스의 포트 레븐워스 미군기지에서 태어난 맥크리스탈은 세인트루이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4][17] 워싱턴 D.C.[18]에 있는 존스 칼리지 고등학교1976년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 육군의 소위로 임관했다.그가 처음 맡은 임무는 1976년 11월부터 1978년 2월까지 무기소대장으로,[19] 1978년 2월부터 1978년 7월까지 소총소대장으로, 1978년 7월부터 1978년 11월까지 C 중대, 1대대대, 504 낙하산 보병 연대, 82 공수 사단이었다.[20]
1978년 11월, 맥크리스탈은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에 있는 특수부대학교의 특수부대 장교 과정에 학생으로 등록했다.1979년 4월 이 과정을 수료한 그는 포트 브래그에 남아 A 중대, 1 대대, 7특수전대(에어본)의 알파 714(A-team) 작전분대 사령관을 지냈다.[21]'714'가 맥크리스탈과 결부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었다.1980년 6월에는 조지아 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에서 1981년 2월까지 보병 장교 고급과정을 밟았다.[20]
1981년 2월, 맥크리스탈은 유엔군사령부 지원그룹인 공동경비구역의 정보 및 작전책임자(S-2/S-3)로 한국으로 이동했다.그는 1982년 3월 조지아 주 포트 스튜어트에게 A 회사, 본부 사령부의 계획 및 훈련 담당 이사로 근무할 것을 보고했다.1982년 11월 제3대대대, 제19보병사단, 제24보병사단(기계화)으로 이동했고, 1984년 9월 대대 작전 장교(S-3)가 되기 전 A사를 지휘했다.[20]
맥크리스탈은 1985년 9월 대대 연락관으로 제75 레인저 연대인 제3대대로 이동, 1986년 1월 A 회사의 사령관이 되었고, 1987년 5월 대대 연락관으로 다시 근무했으며, 마침내 1988년 4월 대대 작전 장교(S-3)가 된 뒤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해군전대학에 보고하였다.1989년 6월 사령부 및 일반 직원 교육과정 수료.맥크리스탈이 살베 레지나 대학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도 수료한 것은 이 시기였다.[22]1990년 6월 이 과정을 수료한 후 1993년 4월까지 육군 특수작전사령부 J-3 합동 특수작전사령부(J-3)로 발령받아 사막방패와 사막스톰 작전 수행능력을 사우디에 배치했다.[20]
1993년 4월부터 1994년 11월까지 맥크리스탈은 제2대대대, 제504 낙하산 보병 연대, 제82공수사단을 지휘했다.이어 1994년 11월부터 1996년 6월까지 제2 대대 75 레인저 연대를 지휘했다.이 기간 동안 그는 기존의 육군의 직접 전투 교육 과정을 완전히 개혁할 것을 시작했다.[23]존 F 대학 4학년 동기생으로 1년 후.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은 1997년 6월부터 1999년 8월까지 75 레인저 연대 전체를 지휘하기 위해 진격했다가 외교위원회에서 군 동료로 1년을 더 보냈다.[20]
총경
2001년 1월 1일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2000년 6월부터 2001년 6월까지 쿠웨이트 캠프 도하에서 미 육군 중부사령관('연합/공동 태스크포스 쿠웨이트')의 임무를 포함한 82공수사단 부사령관(작전)을 지냈다.2001년 6월부터 2002년 7월까지 그는 연합합동태스크포스 180의 참모장직을 포함하여,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영속적 자유 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16세 공수부대가 기부한 본부 구성을 포함하여, 16세 공수부대의 참모장으로 있었다.[20]
2003년 3월 이라크전쟁 초기에는 합참의장으로 펜타곤에서 근무하면서 2002년 7월부터 J-3 작전부차장을 맡고 있었다.[20]맥크리스탈은 이라크에서의 미군 작전과 관련해 2003년 4월 바그다드 함락 직후를 포함해 전국에 방영된 국방성 브리핑에 선정돼 "주요 전투가 끝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발표했다.[24][25]
사령관, 합동특수작전사령부
그는 5년간 합동특수작전사령부(JSOC)[19]를 지휘하며 2003년 9월부터 2006년 2월까지 합동특수작전사령부를, 이후 2006년 2월부터 2008년 8월까지 합동특수작전사령관을 지냈다.2003년 10월 6일 JSOC를 지휘하였다.[26]그가 자서전에서 태스크포스 714 사령관으로 기술한 이 직책은 JSOC 고부가가치 태스크포스(task force)로 확인된 전력이다.명목상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에 배속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프가니스탄, 카타르에 있는 미 중부군사령부 전진사령부, 이라크에서 보냈다.이라크에서 그는 개인적으로 특수 작전을 지휘했는데,[27] 이 곳에서 그의 작업은 "피보타적"이라고 여겨진다.[28]초기 성공에는 2003년 12월 사담 후세인의 JSOC군이 포로로 잡혔다.2006년 2월 16일 중장으로 진급하였다.[20][29]
뉴스위크지가 "미군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군대"라고 칭한 것의 책임자로서, 맥크리스탈은 이라크의 알카에다 지도자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의 죽음에 그의 군대가 책임이 있는 2006년 6월까지 매우 낮은 지위를 유지했다.[24]맥크리스탈 팀이 자르카위의 위치를 성공적으로 파악하고 그를 사살한 공습을 부른 후, 맥크리스탈은 부하들과 함께 바쿠바 근처의 폭격당한 오두막으로 가서 직접 시신을 확인했다.[30]
맥크리스탈의 자르카위 부대인 태스크포스 6-26은 심문 방법으로 잘 알려졌으며, 특히 수용소 나마에서는 수감자들을 학대했다는 비난을 받았다.2004년 4월 아부그라이브 고문과 죄수학대 사건이 공론화된 뒤 전담반 34명이 징계를 받았다.[31][32]맥크리스탈은 이후 "우리는 거의 모든 최초 지하드주의자들이 아부 그라이브가 먼저 그를 공격했다고 주장한 것을 발견했다"[33]고 말했다.그는 또 "구속자를 잘못 쓰는 것은 우리를 불명예스럽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아부 그라이브의 사진은 이라크에서의 미국의 노력에 대한 후퇴를 나타냈다.미국의 운영 방식에 대한 미국의 국내 신뢰를 떨어뜨리고, 미국의 가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전세계적으로 조성하거나 강화하면서 폭력을 부추겼다.[34]
맥크리스탈은 또한 2004년 레인저와 전 프로 축구선수 팻 틸먼의 친근한 화재로 사망한 후 그의 역할로 비난을 받았다.틸먼이 죽은 지 하루 만에 맥크리스탈은 틸먼이 다정한 화재의 피해자라는 통보를 받았다.그 직후 맥크리스탈은 틸먼에게 용맹으로 사후에 은별을 수여하는 서류를 담당하게 되었다.
틸먼이 사망한 지 6일 만인 2004년 4월 28일, 매크리스탈은 훈장추천문에는 일부러 친위사격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어 있고, '적진사격의 선에서'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성추천문 최종안을 승인하여 육군장관대행에게 제출하였다.목격자의 진술이 기록되어 있다.4월 29일, 맥크리스탈은 백악관의 연설문 작성자들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쓴 어떤 성명에서도 메달을 인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긴급 메모를 보냈다. 왜냐하면 그것은 틸먼 상병의 사망 상황이 공개될 경우 대중의 당혹감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맥크리스탈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공식 성명에서 자제를 경계한 첫 번째 사람 중 한 명이었다.[35]맥크리스탈은 후속 국방부 조사로 훈육을 권고받은 8명의 장교 중 한 명이었으나 육군은 그에 대한 조치를 거부했다.[4][36][37][38]
퓰리처상 수상자인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기자에 따르면, 2007년 늦은 봄부터 JSOC와 CIA 특수활동부 팀들이 2007년 이라크전 병력 급증과 동시에 매우 효과적인 일련의 새로운 비밀 작전을 개시했다.그들은 이라크의 주요 알카에다 지도자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음으로써 이것을 했다.[39][40]우드워드는 CBS 60 Minutes 인터뷰에서 CIA와 JSOC의 합동팀이 개발한 새로운 특수작전 능력을 언급했다.여러 고위 미국 관리들은 al-Qa'ida의 이라크의 패배에 합동 참모 작전 본부와 CIA준군사 부대의``동반 성장 노력은 가장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전례 없는 민첩성의"[39][41]기자 피터 베르겐도 현대화한 거울 앞에 합동 참모 작전 본부 전환과 함께 맥 크리스탈었다고 한다"force과 lethality," 성공에 중요한 요인.JSOC의 후속 노력과 이라크 전쟁의 성공에 대한 노력의 일환이다.[42]
이사, 공동 스태프
맥크리스탈은 브라이언 D 장군의 뒤를 이을 후보로 여겨졌다. 브라운 사령관은 2007년 미 특수작전사령부 사령관으로,[43]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은 이라크, 윌리엄 팰런 제독은 2008년 미 중부군 사령관으로 4성급 직책을 이어받았다.[44][45][46]대신 맥크리스탈은 조지 W 부시로부터 월터 L 중장의 후임으로 지명되었다. 2008년 2월 합참의장으로 샤프, 또 다른 3성 직책.
통상 일상적인 절차인 매크리스탈의 상원 인준안은 매크리스탈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지휘하에 있는 특수작전부대에 의한 억류자 학대 의혹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찾던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들에 의해 교착상태에 빠졌다.[47]상원 군사위원회는 맥크리스탈을 비공개로 만난 뒤 2008년 5월 중장으로 재선임한 것을 확인했고, 2008년 8월 합참의장이 됐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및 ISAF군 사령관
2009년 6월 10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지휘를 하기 위한 상원의 승인과 함께, 맥크리스탈은 장군으로 진급되었다.[20][29][48]맥크리스탈이 나토 작전을 지휘한 직후 칸자르 작전이 시작되어 2001년 이후 나토군으로는 최대 규모의 공격작전이 시작되었고 나토군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전투의 달로 기록되었다.[citation needed]
아프가니스탄 평가 공개
맥크리스탈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에 아프간 주둔 병력 증원을 촉구하는 66쪽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하며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밝혔다.그것은 2009년 9월 20일에 공개되었다.[49]맥크리스탈은 더 많은 병력이 파병되지 않으면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사라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보고서는 "상황이 심각하지만 성공은 여전히 달성할 수 있다"[50]는 조심스러운 낙관론으로 끝을 맺는다.
권장 병력 증원
2009년, 맥크리스탈은 아프가니스탄에 3만에서 4만 명의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공개적으로 제안했다.그는 백악관 참모들로부터 탈레반을 패배시키기 위해 증원군을 제시하지 말고 그들을 패배시키라는 충고를 받았다.[51]
스콧 리터 전 이라크 유엔 무기사찰단장은 당시 맥크리스탈이 미국 대통령에게 비공개적으로만 말했어야 했던 정보를 공개했다는 이유로 불응해 해고돼야 한다고 말했다.[52]
뉴욕 잡지는 유출된 보고서를 "맥크리스탈 리스크"라고 말하며, 그것이 오바마를 아프가니스탄의 병력 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에 대해 궁지에 몰아넣었다.[53]
롤링 스톤 기사 및 사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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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프리랜스 언론인 마이클 헤이스팅스,("그 런 어웨이 장군", 잡지 롤링 스톤, 7월 8–22,에 출연하는 2010년 문제)[10]맥 크리스탈, 조 바이든, 국가 안보 보좌관 제임스 L. 존스 주재 미국 대사는 아프가니스탄 칼 WEikenberry에,, 스폐셜 Representa를 포함한 자신의 직원mocked 민간 정부 관리들이 쓴 편지에서.tive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리차드 홀브룩을 위해.[54]맥크리스탈은 대통령이나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직접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사에서 참모들의 여러 발언은 처음 두 번의 만남 이후 맥크리스탈이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에 대한 인식을 반영했다.[55]롤링 스톤에 따르면, 맥 크리스탈의 직원 전 기사를 풀기와 비록 그의 직원들의 고위 의원들이 갈등은 article,[56]의 타당성 부인하지 않고, 육군 타임즈에 사이의 사적인 대화의 기록 트러스트 관계를 측근들 인용한 연공 서열 과장하 헤이스팅스고 있다고 비난했다 연락을 받았어요.안녕m과 [57]보좌관들헤이스팅스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기자재 수집가로서 군인들이 자신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정도에 대해 상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58]국방부 감찰관 보고서에 따르면 "해킹스 기사에서 보고된 바와 같이 문제의 모든 사건이 발생한 것은 아니다"[59]라고 한다.
맥크리스탈과 그의 참모진들의 진술은 맥크리스탈이 바이든 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할 때 백악관의 관심을 끌었다.[60]맥크리스탈은 서면 성명을 발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프로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그것은 잘못된 판단을 반영한 실수였고,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내 경력을 통해, 나는 개인의 명예와 직업적 성실성의 원칙에 따라 살아왔다.이 글에 반영된 것은 그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나는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국가안보팀에 대해 엄청난 존경과 찬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민간 지도자들과 군대에 대해 그리고 나는 그것의 성공적인 결과를 보장하는데 전념하고 있다.[61]
바이든 전 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사과 전화를 걸어온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프로필 사본을 요청한 뒤 보안 화상회의 대신 백악관에서 열리는 대통령 월례 경호팀 회의에 직접 참석할 매크리스탈을 소환하는 계기가 됐다.맥크리스탈은 기사가 신문 가판대에 발표되기 이틀 전인 6월 23일 오바마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사임을 제출했고, 매크리스탈은 이를 받아들였다.[11]그 직후,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맥크리스탈의 후임으로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을 지명했다.[62]
오바마의 이 주제에 대한 성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오늘 나는 장군을 받아들였다.스탠리 맥크리스탈의 아프가니스탄 국제안보지원군 사령관직 사퇴나는 상당한 유감의 뜻을 가지고 그렇게 했지만, 또한 그것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우리의 임무와 우리 군대와 국가를 위한 옳은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했다."[63]
그날 늦게 맥크리스탈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오늘 아침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의 미군과 나토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나의 사임을 받아들였다.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대통령의 전략을 강력히 지지하며 우리의 연합군, 우리의 파트너 국가들, 그리고 아프간 국민들에게 깊이 헌신하고 있다.내가 사직서를 제출한 것은 이러한 헌신과 그 임무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우리나라의 최고들을 이끌어낸 것은 나의 특권과 명예였다.[12][64]
은퇴
아프가니스탄에서 지휘권을 박탈당한 직후, 맥크리스탈은 육군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5]일반적으로 법적으로는 4성급 장교가 퇴임 후 3년간 직위를 유지하도록 하고 있지만, 발표 다음 날 백악관은 4성급 장교가 퇴임 후 4성급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65][66][67]그의 은퇴식은 2010년 7월 23일 워싱턴 D.C.의 포트 맥네어에서 열렸다.이 기념식에서 맥크리스탈은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조지 케이시와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수여하는 국방명예훈장.[68][69]
펜타곤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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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스톤의 헤이스팅스와 에릭 베이츠 편집장은 헤이스팅스의 기사의 정확성을 거듭 옹호했다.국방부 감찰관실의 조사는 맥크리스탈이나 그의 군과 민간 동료들의 위법행위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70][71]미 국방부 보고서도 헤이스팅스의 기사에 담긴 주요 사건이나 논평을 반박하며 정확성에 도전했다.[71]이 조사의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일부 경우, 우리는 보도된 바와 같이 의견을 진술하거나 들은 것을 시인한 증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또 다른 사례에서는 문제의 사건의 일반적 실체가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기사에 기술된 정확한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롤링 스톤은 "국방부 감찰관의 보고서는 우리 이야기에서 보도된 사실들과 대조되는 신뢰할 만한 출처 또는 사실상의 어떤 명명된 출처도 제공하지 않는다"[71]고 말했다.
이 보고서가 공개된 후, 백악관은 맥크리스탈을 군 가족 지원을 위한 새로운 자문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영부인 미셸 오바마와 부통령 부인 질 바이든이 주도한 발의안이다.맥크리스탈의 선정은 감찰총장의 보고가 끝난 지 나흘 만인 4월 12일 발표됐다.[72]
전역 후 경력
2010년, 제대 후, 맥크리스탈은 예일 대학교에 잭슨 국제문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입사했다.그는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강좌를 가르친다. "리더십"은 학부생들을 위한 몇몇 장소가 있는 대학원 수준의 세미나다.이 과정은 2011년 20명 모집에 250명이 지원받아 2013년 세 번째로 강의됐다.[73][74][75]
2010년 11월 JetBlue Airways는 맥크리스탈이 이사회에 합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76]2011년 2월 16일, 나비스타 인터내셔널은 맥크리스탈이 이사회에 합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77]
맥크리스탈은 지멘스 테크놀로지 이사회 의장으로, 모회사인 EAI가 아랍에미리트 정부와 '매우 가까운' 사업인 무기판매업자인 지식 인터내셔널의 전략적 자문위원에 속해 있다.[78]그는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본사를 둔 컨설팅 회사인 맥크리스탈 그룹의 파트너로 공동 설립했다.[79][80]그의 리더십과 더 강한 조직을 만드는 철학은 대니얼 레비틴 더 컴퍼니 마인드의 베스트셀러에 인용되어 있다.
2011년, 맥크리스탈은 해외에서 복무하는 미국인과 그들이 돕고자 하는 현지인 및 파트너의 안전과 성공을 지원하는 501(c)(3) 조직인 스피릿 오브 아메리카에 자문위원으로 가입했다.[81]
2011년, 맥크리스탈은 미국에 국가적인 서비스 프로그램을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그는 "서비스 회원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미국은 교육, 과학, 정치, 환경, 그리고 리더십을 배양하는 어떤 전쟁터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노력에 있어 부족하다.우리 사회의 이러한 토대들에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미국의 장기적인 안보와 번영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82][83]
펭귄그룹의 포트폴리오가 펴낸 맥크리스탈의 회고록 'My Share of the Task'는 2013년 1월 7일 출간됐다.[84]자서전은 2012년 11월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국방부로부터 보안취급인가가 요구돼 출시가 연기됐다.포트폴리오 출판사들은 "맥크리스탈 장군의 책 '내 몫의 과제'는 국방부의 보안 검토를 계속 받고 있어 출판 시기를 늦추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맥크리스탈 장군은 22개월 동안 군 관계자들과 긴밀히 협조해 특수작전을 포함한 군 관련 집필 규정을 모두 준수했는지 확인했다고 말했다.[85]
2013년 1월 8일, 맥크리스탈은 MSNBC의 모닝조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MSNBC의 모닝조 프로그램에서 그는 공격용 무기는 학교나 거리가 아니라 전쟁터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미국의 더 강력한 총기 규제법을 지지했다.[86]
그는 2011년 '전장에서 보드룸으로 교훈 가져오기'[87]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컨설팅 회사인 맥크리스탈 그룹을 설립했다.여기에는 연구원, 실무자, 전직 군 장교 등이 포함된다.[88]
2014년 맥크리스탈은 매사추세츠주 민주당 하원의원 후보인 세스 몰튼을 지지해 존 F 하원의원을 낙선시키려 했다. 민주당 경선의 티어니.한 번도 지지해 본 적이 없는 맥크리스탈은 미 의회가 그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해병대 참전용사인 물튼을 지지했다고 말했다.[89]2015년 맥크리스탈의 두 번째 책 '팀 오브 팀(Team of Teams)'이 출간돼 경제단체와 그 리더들을 겨냥했다.맥크리스탈은 그의 공동저자인 탄툼 콜린스, 데이비드 실버먼, 크리스 푸셀과 함께 자신과 그의 직원들이 어떻게 새로운 종류의 분산적이고 기술에 정통한 적과 싸우기 위해 중동의 특수작전 합동 태스크 포스를 리메이크했는지 묘사하고 있다.
2014년 가을,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맥크리스탈의 타운하우스는 마이클 플린이 그의 새로운 회사 컨설팅과 정보 사업인 플린 인텔 그룹을 등록한 곳이었다.[90]
2016년 1월, McCrystal은 서비스 국가, Aspen Institute의 프랭클린 프로젝트, 서비스 연도 거래소에서 합병된 조직인 서비스 연도 연합 이사회의 의장이 되었다.Service Year Alliance는 모든 배경의 미국 젊은이들에게 공통된 기대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91]맥크리스탈은 2016년 대선 후보들에게 "미국의 젊은 미국인들을 1년 이상 국가 봉사에 참여시키는 것과 같은" 미국의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그는 또한 "젊은 미국인에게 시민권의 습관과 신뢰를 쌓기 위해 팀으로 일하는 힘을 가르치는 봉사년은 이 세대가 정치적, 시민적 책임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이며, 그 과정에서 부상당한 국가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92]고 말했다.
2016년, FinancialNote는 맥크리스탈이 이 회사의 이사회에 합류했다고 발표했다.[93]
2016년 5월 맥크리스탈은 시타델의 졸업식 연사로 명예 군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94]
매크리스탈은 2016년 대선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고려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자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어떤 역할이든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95]2016년 11월 16일, 맥크리스탈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첫 국방장관 발탁 제안을 거절하면서 '나는 캠페인을 지켜봤고 ...팀에 잘 맞을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또한, 당신이 행복할지는 잘 모르겠지만...'[96]
워싱턴포스트는 2020년 5월 "퇴역한 육군 장성이 조언한 새로운 민주동맹 정치행동위원회"라고 보도했다.스탠리 매크리스탈은 트럼프 대통령의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 사태 처리를 홍보하기 위한 온라인 노력과 싸우기 위해 기술을 배치할 계획이다.디스트 어네포라는 단체는 소셜 미디어에서 대통령의 주장에 대한 토론을 지도할 것이다.340만 명 이상의 인플루언서 네트워크를 통해 개입하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97]
2020년 10월 1일 모닝조 프로그램에서 맥크리스탈은 그해 선거에서 바이든 민주당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두 사람의 철학적인 차이와 2010년 롤링스톤 기사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맥크리스탈은 바이든과 오바마가 그의 군복무 중 공개적으로 그의 발언을 경청했으며, 기능적인 민주주의에서는 의견 불일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맥크리스탈은 "결국 지휘관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조 바이든을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98]
McCrystal은 Tim Periss의 책 Tools of Titans에서 조언을 해주는 장을 가지고 있다.
사생활
맥크리스탈은 허버트 J. 맥크리스탈 소령(1924–2013)과 그의 아내 메리 가드너 브라이트(1971년 1월 2일 사망)[8]의 아들이다.그의 할아버지는 미국 육군 대령 허버트 J. 맥크리스탈 시니어였다.그는 5남 1녀 중 넷째 아이로 모두 군 복무를 하거나 군 배우자가 됐다.그의 형인 스콧 맥크리스탈 대령은 은퇴한 육군 목사로, 신의회 지지 대리인이다.[99]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서 사망한 찰스 에드워드 맥크리스탈 상병, 미군 상병, 퍼플 하트 수상자와 먼 친척이다.
맥크리스탈은 1977년 군가 출신인 애니 코코란과 결혼했다.그 부부는 아들이 하나 있다.[7][10]맥크리스탈은 매일 7~8마일(11~13km)을 달리고, 하루 한 끼를 먹고, 4시간씩 잠을 자는 것으로 알려졌다.[10][100]
묘사
넷플릭스는 2017년 5월 브래드 피트가 맥마흔이라는 이름의 얄팍한 베일을 쓴 버전의 맥크리스탈을 연기하는 영화 워머신을 출시했다.[101]애니멀 킹덤의 데이비드 미치드가 감독을 맡았으며 마이클 헤이스팅스의 저서 '오퍼레이터스'를 각색한 작품이다.헤이스팅스는 맥크리스탈의 참모진과 오바마의 마찰을 폭로한 롤링스톤 기사를 썼고, 결국 맥크리스탈의 실직으로 이어졌다.
휘장 | 순위 | 날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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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LT | 1976년 6월 2일 | |
1LT | 1978년 6월 3일 | |
CPT | 1980년 8월 1일 | |
MAZ | 1987년 7월 1일 | |
LTC | 1992년 9월 1일 | |
COL | 1996년 9월 1일 | |
BG | 2001년 1월 1일 | |
MG | 2003년 5월 1일 | |
LTG | 2006년 2월 16일 | |
젠 | 2009년 6월 15일 |
시상 및 장식
외교 관계 위원회(Coun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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