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종교

Religion in Korea

여러 시대에 걸쳐, 한반도에서는 다양한 대중적인 종교적 전통이 행해졌습니다.한국의 가장 오래된 토착 종교는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한국의 민속 종교(무속신앙의 일종)입니다.[1]불교는 4세기 삼국시대 때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유교가 국가 철학으로 자리잡게 된 조선시대까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2]조선 후기, 19세기에, 기독교가 한국에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3]20세기 전반 일본의 한국 점령에 대한 저항에는 기독교와 불교 모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4] 1940년에는 한국인의 약 4%만이 종교 단체의 회원이었습니다.[5]

1945년 한국이 북한과 남한의 두 주권국가로 분단된 이후, 두 나라의 종교생활은 서로 다른 정치적 구조에 의해 형성되어 왔습니다.한국의 종교는 기독교의 증가와 불교의 부활로 특징지어졌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종교적 소속이 없거나 민간 종교를 따르고 있습니다.[6][7]북한의 종교종교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 무신론을 특징으로 합니다.전문가들은[who?] 북한인격숭배를 조장하는 주체사상을 일종의 민족종교로 보고 있습니다.[8]

대한민국의 인구통계

종교 1950-1962[9] 1985 1995[10] 2005[11] 2015[12]
인원수 % 인원수 % 인원수 % 인원수 % 인원수 %
기독교 (전체) - 5-8% - 20.7% 11,390,000 26.0% 13,461,000 29.2% 13,566,000 27.6%
(개신교) - 2.8% - 16.1% 8,505,000 19.4% 8,446,000 18.3% 9,676,000 19.7%
(가톨릭 교회) - 2.2% - 4.6% 2,885,000 6.6% 5,015,000 10.9% 3,890,000 7.9%
불교 - 2.6% - 19.9% 10,154,000 23.2% 10,588,000 22.8% 7,619,000 15.5%
다른. - 92.4% - 2.1% - 1.2% - 1% - -
무교의 - - - 57.3% - 49.6% - 47,2% - 56.9%
우리나라 지역별 종교신앙 비중(2015)[13]
행정구역 한국불교 개신교 가톨릭교 무교도 기타도
서울을 10.8% 24.2% 10.7% 53.6%
부산광역시 28.5% 12.1% 5.4% 53.1%
대구광역시 23.8% 12.0% 7.7% 55.8%
인천광역시 8.8% 23.1% 9.5% 57.9%
광주광역시 9.5% 20.0% 8.6% 61.1%
대전광역시 14.0% 21.8% 7.4% 56.2%
울산광역시 29.8% 10.9% 4.2% 54.5%
경기도 10.7% 23.0% 9.0% 56.7%
강원도 16.4% 17.5% 6.7% 58.7%
충청북도 16.4% 15.8% 7.4% 60.0%
충청남도 13.8% 20.7% 6.2% 58.7%
전라북도 8.6% 26.9% 7.6% 55.0%
전라남도 10.9% 23.2% 5.6% 59.3%
경상북도 25.3% 13.3% 5.2% 55.4%
경상남도 29.4% 10.5% 4.2% 55.1%
제주특별자치도 23.4% 10.0% 7.9% 58.0%
코리아내셔널 15.5% 19.7% 7.9% 56.1%
종파별 한국사찰 (2005)[14]
불교 종파 사원 수 (%
조계종 (조계종) 735 (81%)
태고 오더(태고종) 102 (11%)
법화순서(법화종) 22 (2%)
선학원 (선학원) 16 (2%)
원효순서 (원효종) 5 (1%)
다른. 27 (3%)

역사

태고

고대 부족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자연물과 신들은 다른 것들처럼 토착민들에 의해 숭배되었습니다.

나무(樹木)는 아이를 낳기 위한 누런 나무(沙羅樹)가 됩니다.호랑이가 인간으로 변신해 한유의 지혜를 전수하고 재난으로부터 보호합니다.마늘, 아르테미시아 아르기, 깔라무스 등은 생명을 되살리거나 악령을 쫓는 주요한 힘을 가진 상서로운 약초나 진달래입니다.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산신령이나 물신령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또한 한위의 해, 달, 별(日月星辰)도 신격화했습니다.즉, 자연에 대한 숭배와 애니미즘에 대한 숭배가 있었습니다.전자에서 땅과 한울의 사물과 천체는 신앙의 대상이지만, 그 신앙의 토대는 재생산의 개념입니다.천왕 환웅은 단군이 태어난 땅의 곰족과 결혼해야 했고, 다시 단군에서 부루(부루, 夫婁)가 나왔고 부루는 금개구리 토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가격이 바뀌면 토템도 바뀝니다.

또한 신라 가족사회는 지도자가 엘리오족이 낳은 천왕랑이 되어 출생이 이질적인 토템 사회입니다.즉, 그들은 햇빛에서 태어나거나 알에서 태어납니다.그것의 탄생은 祖靈이나 신의 탄생으로 여겨집니다.그리고 천왕랑은 토착민의 여인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토착민들은 엘리오를 믿으며, 신들이 사는 곳은 '감터(감터; 神士)'입니다.고대에, 영고(영고, 迎鼓), 동맹(동맹, 東盟), 무천(무천, 舞天)과 같은 의식은 한울에게 바치는 신들에 의해 신도에서 행해졌습니다.이제 천왕랑은 사제가 되었습니다.그래서 제사는 신사였고, 신사는 정치적인 일이었습니다.그것은 토템 사회에서 부여된 신정정치였습니다.

삼국시대

한국의 전통적인 신앙의 토대 위에 세워진 통치자의 관리들에 의해 삼국시대 동안 외국의 종교가 소개되고 전파되었습니다.삼국은 각각 외국의 종교를 채택했습니다.그 결과 한국의 전통 신앙과 외국 종교가 공존했습니다.

고구려에서 토착민들은 조상의 안녕을 기원하는 묘를 세우고, 세 부처를 공경하며 정토에서 살고, 타다가 땅으로 오기를 원했습니다.

백제의 전통적인 조룡신앙에 불교의 3대 영주에 대한 믿음과 藥師如來, 약사 조지에 대한 믿음이 더해졌습니다.이것은 과거에 12대계를 행하여 현세에 있는 중생들의 병을 고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물을 멸하고 의복과 음식을 만족시키며 부처의 행위인 '보디의 완전한 착상'의 매장을 행했습니다.妙果을 이루게 하는 것은 부처님입니다.이 믿음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언에 천 명의 부처가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과 아미타 신앙이 더해졌습니다.이 부처는 여러 나라 중에서 대국을 선택하여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도록 기도하고 48개의 원을 세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성공적인 부처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차돈의 순교로 촉발불교의 기적은 신라에서 왕에게 인정받은 것입니다.이러한 기적(奇蹟)의 믿음과 더불어 미륵의 다음 생에 대한 믿음, 그리고 차크라바르티(전륜성왕; 轉輪聖王; 절륜선광)의 믿음이 신라사회의 토대가 되었습니다.미륵의 다음 생애에 대한 믿음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56억 7천만의 나이로 미륵보살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그것의 통치자는 이상적인 왕자인 차크라바르티입니다.금·은·동(金銀銅鐵)의 사윤보(輪寶)에 따르면, 이 왕은 금륜(金輪王), 동륜(銅輪王), 은륜(銀輪王)이라고 합니다.이 불교적 믿음에 의하면 신라 땅은 미륵의 후손들의 땅이고 화랑(花郞)과 미시랑(未尸郞)은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의 화신이라고 합니다.그는 변화하는 미륵의 화신이고, 난도(郎徒)는 곧 룽화샹투(龍華香徒)로 숭배되었습니다.

또한 밀교관세음보살의 다라니(陀羅尼)가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어 상식이 되었습니다.이러한 민화적 불교신앙과 더불어 불교는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되어 일본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그러나 도입된 유교는 삼국의 서민들을 신앙으로 이끌지 못했습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종교적 신념이 특히 절도에 가까웠고, 민간 종교로서 성황신에 빠졌습니다.전자의 신념으로 국가를 연기하려 했고, 후자로 민정을 해결하려 했습니다.성황당은 기자(祈子), 촉(招福), 제사(除厄)의 장소가 되었습니다.그러나 고려시대의 국시는 국시 제6조 산수의 유교적 정치이념이었습니다.예식을 통해 군대와 신들의 평화와 조화를 누릴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마련했습니다.종교 체계를 살펴보면, 유교적 과거(科擧)와 함께 승과가 성립되었고, 승과에는 교종선(敎宗選)과 선종선(禪宗選)이 설치되었습니다.승려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승려의 자격을 부여하고 법 제도를 확립하도록 했습니다.유종은 대선부터 성통까지, 선종은 대선부터 대사까지 법체계를 갖췄습니다.승통과 대사는 왕이나 국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었고, 왕과 국가의 조언자로 여겨졌습니다.[16]한편 고려 초기 유학과 관련해서는 고려 성종(成宗), 즉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공업학.정종(靖宗)은 불교계를 전국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중앙에 승록을 설치했습니다.대관(僧官)은 본감, 부승록(副僧錄), 승정(僧正), 승합(僧雜) 등 궁궐에 배치되었습니다.이것은 신라 진흥왕(한국어: 진흥왕, 한자: 眞興王)이 세운 것으로,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들의 배치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전성기에 불교는 5개의 종교와 2개의 종파로 통합되었습니다.선종 때문에 9개의 산이 조계종에 통합되었기 때문입니다.이들 교단 외에 도장(道場)과 향도(香徒) 조직이 있었고, 경행·사경·연등·팔관 등의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일원화 정책과 달리 고려 말에 천태종은 분열되었고, 다시 총지종을 포함한 10여 종으로 세분화되었습니다.또한 경주(仁宗)의 경우 중앙에 6개 학교를 배치하고 각 도에서 학교제도를 시행하는 한편 입학자격을 제한하고 있었습니다.문종(治世) 때는 학원(九齋)과 하과(夏課)가 9곳 있었습니다.또한 선생님의 전수로 인해 경학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고려의 역대 왕들은 불교와 유교뿐만 아니라 무속(巫俗)에 대해서도 그들의 감독권을 행사하거나 억압했습니다.조선왕조(朝鮮)에 들어선 이후, 정부는 도무(都巫)와 종무(從巫)로 나뉘어졌습니다.또한 도의 동서에는 병든 자와 가난한 자(貧者)를 수용하기 위하여 트웨인-서(活人署)를 두었고, 무격(巫覡)은 그들을 낫게 하거나 가난한 자를 돌보게 하였습니다.이것은 고구려 시대부터 국가가 무격을 국가 기관에서 일하게 한 경우입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명과학(觀象監, 命課學)을 전문으로 하는 두 사람이 점을 보는 천문대인 광상감(관상감, 명과학)을 운영했습니다.

조선왕조는 처음에는 불교를 종교로 유교를 정치로 받아들였으나 점차 국정에서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적 원칙으로 대체하는 숭유억불(숭유억불) 정책으로 나아갔습니다.불교는 도첩제 (度牒制, 도첩제)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조선 전기에 혜정 스님(휴정, 休靜)은 유교, 불교, 도교의 세 종교가 삼교와 유사한 근본적인 측면에서 서로 일치한다고 주장했습니다.또한 매월당(매월당 김시습, 每月堂)과 같은 유학자들이 불교의 개념을 유교적 원리를 통해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고구려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도교는 개성에 대청관이 있었고 한성 이전 이후 소격전이 성립되고 도류가 계절로 배치되어 삼청과 성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또한 세자빈(關王)에 대한 숭배가 백성들에게 전해졌습니다.점술, 암행, 감록 등이 민간인들에게 퍼지면서 은둔, 최후의 날, 반란 혁명, 운명 등의 사상이 민중들에게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가톨릭교

조선은 상대적으로 국가를 고립시킨 채 근대로 접어들면서 곧 서양으로부터 종교를 전수받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가톨릭(천주교) 또는 때로는 서교(서교, 西敎)라고도 불리는 것은 18세기 후반 서양의 사상과 학문(서학, 西學, 침지)의 일부로서 도입되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금지되었습니다.

  • 소금과 물로 죄를 씻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내려오시고 돌아가시고 다시 승천하셔서 하나님이 되셨으며 만물과 백성의 삶의 대부모라고 합니다.
  • 천주교에서는 부모를 물리적 부모라고 부르고 조상의 영혼을 악마라고 부르며 제사를 악마적인 행사로 거부함으로써 효행을 무시합니다.
  • 음양이 있으면 반드시 부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원칙입니다.그들은 남녀가 결혼하지도 결혼하지도 않는 것을 미덕이라 하고, 그것이 거짓이며, 그보다 어린 사람들은 남녀를 섞어 도덕을 문란하게 합니다.전자에 의하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고 후자에 의하면 인류는 흐려질 것입니다.아버지도 없고 왕도 없는 것부터 결혼한 부부까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성모, 신부, 영세(領洗), 확인(堅振) 등 다양한 이름이 등장할 때 등장할수록 도깨비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천주교는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비밀리에 전파되었고, 19세기 동안 조정에 의한 다수의 박해로 이어졌습니다.이러한 박해는 조정의 종교 정책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교 이념과 정책에 어긋나는 행동에 의해서도 발생했습니다.예컨대 가톨릭 신자들이 종교적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일으킨 황사영백서 사건은 1801년 신유박해(신유박해)의 악화로 이어졌습니다.

동학

내외적인 상황 때문에 1896년, 궁중은 서양 종교에 대해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이것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이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동학은 서양 종교의 역경 속에서 민족 종교로 탄생했습니다.동학의 목적은 서학을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동학이 발생한 지 2년 만에 각지에 소속과 선교사(접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교단의 조직을 강화할 정도로 발전했습니다.결국 천도교가 되었고, 이돈화(이돈화, 李敦化)에 의해 사상적으로 새로운 사람의 철학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불교에 수도원조례(사찰령)와 혼묵수도원법(본말사법)을 적용했습니다.유림에는 조선총독부령이, 기독교에는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기초법이 적용되었고, 한민족 고유의 종교단체는 종교 외에도 유사한 종교단체로 임명되었습니다.총독부는 신도불교, 기독교를 종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유교의 성균관은 경제학파로 간주되고 사회교육법이 적용되어 사회교육기관으로 간주됩니다.유교 사원은 동아리 임원 화폐가 되고, 학교( 향교)는 지방공공단체 또는 지방교육기관으로 간주됩니다.

이 규칙에 따라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집단은 움츠러들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또한 정부는 모든 시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몇몇 개신교도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신사참배 문제는 강제로 한국을 방문하기 전 일본 기후현 오가키시의 한 한인교회 목사 가족들이 발단이 돼 당시 사회에 충격을 줬습니다.당시 신사참배에는 황제와 예수님이 우르르 몰려드는 모습이 함께 했습니다.

현대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방 당시 북한의 종교인은 약 150만 명, 불교는 37만 5천 명, 개신교는 20만 명, 천주교는 5만 7천 명 정도였습니다.2백만 명 이상의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구의 22.2%).[20]하지만 종교를 억압하는 북한 정권의 정책으로 인해 북한의 종교 인구는 크게 감소했습니다. 2001년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북한 정권은 천도교 15,000명, 불교 10,000명, 개신교 12,000명, 가톨릭 800명 등 총 37,800명의 종교인을 기록했습니다.[21]종교별 시설 수는 800개, 사찰 60개, 교회 2개, 교회 1개입니다.[22]하지만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종교활동 단속 외에는 종교활동이 불가능하다며 종교활동으로 처벌하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2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범수용소에서 많은 종교인들이 인권탄압을 당하고 있다고 국제사회는 지적했습니다.

한국의 무속신앙

죽은 자의 성난 영혼을 달래는 의식을 행하는 무당

무속 또는 민속 종교 (한국어: 무속신앙, 무속, 민간신앙, 한자: 巫敎, 民間信仰, 무속시낭, 음악 또는 민간시낭)는 고대 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전통입니다.샤머니즘이 아직도 행해지는 동안, 고대의 기원을 감안할 때, 그것은 오늘날 오히려 이단적이고 미신적이라고 여겨집니다.무당은 일반적으로 무당(한국어: 무당; 한자: 巫-)이라고 불리는 여성을 말합니다.

한국의 샤머니즘을 둘러싼 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있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은 대부분 조언을 구하거나, 날짜와 징조의 중요성을 해석하거나, 두 사람 사이의 궁합을 결정하거나,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풀루 (한국어: 符籍; 한자: 부적) 혹은 부적을 구하러 갑니다.

즉, 무당들은 굿(신이나 조상들에게 기도를 드리는 의식적인 춤과 노래, 정화 의식)을 할 수 있습니다.[25]

한국불교

부산 삼광사(三光寺
전라북도 부안군 개암사(개암사)
경주 분황사 분황사

불교는 한국의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신라고려의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고 이 두 왕조의 주요 종교가 되었습니다.불교는 한국의 영남지역, 강원도, 제주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조계종은 한국 불교의 주요 종파로 불국사, 해인사, 화엄사 등 유명한 불교 사찰을 포함해 대부분의 한국 불교 사찰이 조계종에 속해 있습니다.한국의 다른 전통적인 불교 학교로는 태고종과 천태종이 있습니다.

원불교

원불교(원불교)는 한국 불교의 현대적인 종파입니다.원불교는 불교의 경전과 의식을 간소화합니다.그들은 현명한 사람이든 무지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고귀한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누구나 불교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26]

한국기독교

성 베드로 대성전울산의 디오니시오스
경기도 수원의 한 교회 야경

한국의 기독교는 주로 개신교가톨릭 신자입니다; 2015년 인구 조사에서, 970만 명의 개신교 신자와 390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습니다.한국에는 서구 교회 외에도 19세기에 러시아에서 들여온 정교회 교인들과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교인들이 있습니다.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한국 외교관 이승훈(이승훈)이 한국으로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1794년에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1880년 조선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그들과 천주교 선교사들은 많은 수의 한국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습니다.감리교장로교는 한국에 학교, 병원, 고아원을 설립하고 한국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기독교인들은 독립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개신교의 급속한 성장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한국 불교의 부패 상태, 지식인 엘리트들의 지지, 한국 교회 구성원들의 자립과 자치의 장려, 한국 민족주의의 고취 등이 있습니다.남북분단 이전에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기독교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고, 유교의 영향력도 한반도 남부 지역에 비해 강하지 않았습니다.1948년 이전까지 평양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한반도 북쪽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북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피신한 남한 기독교인은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기독교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그것을 공언하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증가했습니다.1990년대에도 성장은 계속되었지만, 21세기 초부터 그 수가 감소하는 등 느린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기독교는 서울, 인천, 경기, 그리고 호남을 포함한 지역에서 중요한 종교입니다.한국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천주교의 네 가지 주요 교단이 있습니다.여의도순복음교회한국에서 가장 큰 오순절교회입니다.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여전히 중국의 가톨릭 신자들처럼 조상을 숭배하는 전통 의식을 지킬 수 있고, 반대로 개신교 신자들은 조상을 숭배하는 의식을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이슬람교

한국에는 약 4만 명의 이슬람 신도가 있고, 한국의 이슬람교도들은 대부분 남아시아, 서아시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에서 일하기 위해 온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며, 현지 한국인 이슬람교도들은 3만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한국에서 가장 큰 모스크는 서울 중앙 모스크이고, 다른 도시들에도 더 작은 모스크가 있습니다.

유대교

1950년 한국전쟁 때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유대인들이 한국에 왔고, 많은 유대계 미국인 군인들이 한반도에 왔습니다.한국의 유대인 공동체는 서울 지역에서만 아주 작습니다.유대교(유태교)를 믿는 한국인은 거의 없습니다.

힌두교의

한국의 힌두교 신자들은 주로 한국에 살고 있는 인도인과 네팔인 이민자들입니다.하지만, 요가베단타와 같은 힌두 전통은 인도 문화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을 유발시켰습니다.서울 지역에는 두 개의 힌두교 사원이 있습니다.

한국유교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예로부터 한반도에 유교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정확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유교는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에 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27]심지어 3, 4세기의 역사학자들은 유교의 계율이 귀족들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유교 사상이 한반도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28]유교사상은 14세기를 기점으로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16세기로 접어들면서 한반도에서 지배적인 사상과 철학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유교의 발달은 불교의 급격한 쇠퇴를 이끌었습니다.15세기 동안 태종은 수도원과 사찰의 수를 줄이는 것을 포함한 반불교 정책을 시행했습니다.[29]16세기에 유교가 지배적인 철학이 되기 시작했을 때, 불교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과 시골 사람들의 종교가 되었습니다.한국 유교의 황금기는 조선시대였습니다.[30]

현대 한국에서는, 유교 사원과 교육 기관이 여전히 존재하고 현대적인 관습을 보여주지만,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교가 학교 교육 과정에서 사라졌습니다.[29]1990년대 후반 유교의 부흥이 있었고, 지금도 상례(기독교와 유교가 혼합된)와 효사상과 같은 몇몇 관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한국인들은 그들이 유교를 믿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유교의 영향력을 볼 수 있습니다.이러한 관찰들 중에는 연장자들에 대한 숭배, 교육에 대한 강한 헌신, 그리고 죽은 자들에게 바치는 의식과 제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30]

참고문헌

  1. ^ Yu (2012), p. 41.
  2. ^ 세계종교 백과사전 (2008), 페이지 162.
  3. ^ Kim & Kim (2014).
  4. ^ Yu (2012), p. xv.
  5. ^ Baker, Don (2013). "Korea's Path of Secularisation". In Ghosh, Ranjan (ed.). Making Sense of the Secular: Critical Perspectives from Europe to Asia. Routledge. pp. 182–193. ISBN 978-1136277214.
  6. ^ Baker, Donald L. (2008). Korean Spirituality. University of Hawaii Press. pp. 3–4. ISBN 978-0824832339.
  7. ^ "성, 연령 및 종교별 인구 - 시군구" [Population by Gender, Age, and Religion – City/Country]. Korean Statistical Information Service (in Korean). 2015. Retrieved 17 March 2018.
  8. ^ Annual Report of the United State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PDF). United State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Religious Freedom. 2017. p. 56.
  9. ^ "한국의 개신교 발전: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 [Development of Protestantism in South Korea: Positive and Negative Elements]. AATF (in Korean). 31 October 2014. Retrieved 9 Octobe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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