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멕시코 전역

New Mexico campaign
뉴멕시코 전역
남북전쟁의 일부
Schlacht von Glorieta Pass.JPG
'서방의 게티스버그'로 불리는 선거운동 중 미미에타 고개 전투 묘사
날짜1862년 2월~4월
위치
결과

유니온 승리

호전성

United States 미국

미국 연방

지휘관과 지도자
에드워드 캔비
아이작 린드
헨리 홉킨스 시블리
토머스 그린
5,142 2,515[1]
사상자 및 손실
죽임을 당했고
~246명의 부상자,
~실종 또는 캡처됨
400명이 죽거나 다쳤거나
~500명 실종/실종[2]

뉴멕시코 캠페인은 1862년 2월부터 4월까지 미국 남북전쟁의 미시시피 횡단 극장의 군사작전으로, 헨리 홉킨스 시블리 남부 연합 준장콜로라도의 금밭캘리포니아 항구를 포함한 남서부를 장악하기 위해 뉴멕시코 영토를 침공했다.a. 역사학자들은 이 캠페인을 미국 서부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고 전쟁에서 추가 극장을 열기 위한 남부 연합의 가장 야심찬 시도로 간주한다. 그것은 전쟁의 미시시피 횡단 극장에서의 중요한 캠페인이었고, 남북전쟁에서 뉴멕시코 영토의 역사에 있어서 주요한 사건들 중의 하나였다.

남부 연합군은 텍사스 포트 블리스에서 리오 그란데 강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들은 발베르데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크레이그 요새를 점령하거나 이 지역에서 주 연합군의 항복을 강요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 산타페포트 유니온을 향해 북쪽으로 계속 갔고, 연합군은 뒤에 남겨졌다. 미미에타 고갯길에서 남군은 포트 유니온에서 온 또 다른 연합군을 격파했지만, 그들의 보급품 대부분을 실은 마차 열차의 파괴에 따라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실패한 캠페인에 대한 연합군의 성공은 연합군의 전쟁 노력에 필요한 금과 은의 주요 원천을 부인했을 것이고, 연합 해군은 태평양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해안선을 봉쇄하려고 시도하는 추가적인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3][4] 남부 연합군의 승리는 또한 연합군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했을 것이다. 연합군은 침공 후, 평원로키 산맥의 원주민 부족들과 싸우는 데 사용되었다.[5]

대립군

유니온

뉴멕시코 주(州)의 연합군은 포트 크레이그에 본부를 둔 에드워드 캔비 대령이 이끌었다. 그의 직속 지휘 아래 뉴멕시코 의용보병 5개 연대,[6] 콜로라도 제2보병대 소속의 회사, 임시포병부대 2개 중대, 미 제5·7·10보병 11개 중대,[7]제2·3기병대 6개 중대, 뉴멕시코 민병대 2개 연대가 있었다. 포트 유니온에는 가브리엘 폴 대령의 지휘를 받아 [citation needed]콜로라도 제2보병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대

남부 연합

뉴멕시코 연방군헨리 홉킨스 시블리 준장이 이끌었다. 그의 부대에는 제4기 텍사스 기마 소총제5기 텍사스 기마 소총( 기마 소총 모두 산악 기마 소총 배터리를 탑재한 것), 제7기 텍사스 기마 소총의 5개 회사, 포병 배터리가 부착된 제2기 텍사스 기마 소총의 6개 회사, 애리조나 연합의 여러 회사 기마 지원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1월 뉴멕시코에 도착한 시블리는 자신이 소령으로 진급한 트레바니온 테엘 대위의 지휘 아래 포병을 대대로 편성했다.[8] 제7텍사스의 5개 추가 기업은 2월 말경에 도착하여 메실라에서 포트 쏜의 수비대 역할을 했다.[citation needed]

연합 전략

수년간 뉴멕시코 영토 남부 지역 주민들은 산타페의 영토 정부가 너무 멀어서 자신들의 우려를 제대로 해소할 수 없다고 불평해 왔다. 전쟁 초기 정규군 철수는 주민들에게 그들이 버림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메실라와 투싼에서 열린 분리독립 협약은 1861년 3월 연합군에 이 영토에 가입하는 투표를 했고, 민병대 기업을 결성해 자국을 방어했다.[9][10] 1861년 7월 존 베일러 중령은 텍사스 기마소총 1개 대대를 이끌고 뉴멕시코 영토 남부로 들어가 메실라 제1차 전투에서 포트 필모어의 유니온 수비대의 공격을 격퇴했다. 승리한 베일러는 34도선 남쪽에 아리조나의 남부 연합 영토를 세웠다.[citation needed]

1862년 캠페인은 시블리가 남부 연합의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제시한 계획에서 공식화한 이 전략의 연속이었다. 시블리의 전략은 로키 산맥의 동쪽을 따라 침공을 요구하여 콜로라도 준주(당시 콜로라도 골드 러시의 절정기)와 포트 라라미(오레곤 트레일을 따라 가장 중요한 미군 수비대)를 점령한 뒤 광물이 풍부한 네바다와 캘리포니아를 공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이 땅에서 떨어져 살기를 원하며 산타페 트레일에 있는 유니온 요새와 창고에서 비축된 물자를 포획할 계획이었다. 일단 이 영토들이 확보되면, 시블리는 구매를 통해서든 아니면 침략을 통해서든 멕시코 북부 치와와, 소노라, 그리고 캘리포니아를 점령할 작정이었다.[11]

산타페를 향해 행진하다

시블리의 전진

1861년 12월 20일, 시블리 장군은 뉴멕시코 육군을 지휘하여 남부 연합국의 이름으로 뉴멕시코를 점령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12] 그는 시민들에게 연방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연합군에 합류할 것을 촉구하면서 "적과 협력하는 자들은 그에 따라 대우를 받을 것이며, 운명을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13]고 경고했다. 1862년 2월, 시블리는 포트 쏜에서 리오 그란데의 계곡으로 올라가서, 산타페의 영토 수도와 포트 유니온의 유니온 창고들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했다. 도중에 시블리는 54명의 남자들을 떼어내어 투싼을 점령했다. 남부 연합군의 진격은 캔비 휘하의 3,800명의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포트 크레이그를 통해 강 서쪽 제방을 따라 나아갔다. 그가 전진할 때 그렇게 큰 유니온 부대를 두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시블리는 유리한 조건으로 유니온 부대를 전투로 유인하려 했다.

2월 19일, 시블리는 산타페와의 통신 연합선을 끊을 생각으로 요새 동쪽의 모래 언덕에 진을 쳤다. 2월 20일 연합군은 요새에서 진격했으나 중공군의 포격을 받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남부 연합군은 연합군을 압도하기 위해 요새에서 북쪽으로 6마일(9.7km) 떨어진 발베르데 포드로 진군했다. 캔비가 공격했지만, 연합군은 토마스 그린 대령 휘하의 남부 연합군에 의해 후퇴했고, 그는 시블리가 몸이 불편해지자 지휘를 맡았다(그리고 아마도 술에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14] 캔비의 군대는 크레이그 요새로 후퇴했지만 항복은 거부했다.

사흘 동안 배급량만 충분했기 때문에 시블리는 포위작전을 시도할 수도 메실라로 후퇴할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요새에서 벗어나 뉴멕시코 영토의 국경 반대편에 있는 산타페를 향해 천천히 북상하면서 그곳에 위치한 보급품들에 도달하고 또한 포트 크레이그의 보급품과 통신선을 끊어버리기를 희망했다. 발베르데에서 말을 잃었기 때문에 제4텍사스는 하차해야 했고, 나머지 말들은 이미 약화된 상태로 다른 부대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들은 또한 발베르데 전투에서 수송수단의 많은 부분을 잃었고, 이로 인해 부상자들을 수송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기둥의 이동 속도를 지금보다 더 느리게 만들었다. 한편 캔비는 자신의 군대와 포트 유니온 사이에 시블리의 군대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민병대와 대부분의 자원 부대를 해산하고 기마부대 대부분을 북쪽으로 보내 빨치산 역할을 하게 했으며, "그가 진격해야 할 경우 [시블리의] 운동을 단속하고, 그의 병력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될 소와 곡물, 기타 보급품을 사석에서 제거하여 보급품을 끊게 했다."[15]

2월 23일부터 남부 연합군은 3월 2일 앨버커키, 3월 13일 산타페에 도착했으나 진격이 더디기 때문에 이들 도시에 위치한 연합군의 물자 대부분을 포획하지 못했다. 느린 진격으로 존 슬러 대령의 지휘를 받은 콜로라도의 지원군도 포트 유니온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까지 폴의 지휘를 받았다. 폴이 같은 계급으로 임관하기 전에 대령으로 임관했으므로 슬로는 선임계를 주장하여 요새를 지휘하게 되었다. 캔비는 이미 폴에게 "내가 당신에게 그 경로와 연결점을 조언할 때까지 나를 만나기 위해 포트 유니언에서 움직이지 말라"[16]고 명령했었다. 지휘부의 변화를 알게 된 캔비는 슬러에게 "내가 협조할 수 있도록 너의 계획과 움직임을 조언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슬러에게 "당파적 작전으로 적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보급품을 끊으시오."[17] 슬로는 이것을 진격 허가라고 해석했는데, 그는 요새 수비대 출신 1342명과 함께 했다.

연합군과 남부군은 3월 28일 미미에타 고개 전투에서 만났다. 남부 연합군은 이 고갯길을 통해 연합군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그들의 보급품과 탄약이 거의 다 들어 있는 그들의 마차 열차의 파괴에 따라 후퇴해야 했다. 시블리는 텍사스로부터의 지원군을 기다리기 위해 앨버커키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캔비로부터 즉시 포트 유니언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은 슬러도 이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을 두려워하며 후퇴했다. 일단 요새에 도착하자 그는 임무를 사임하고 콜로라도로 돌아와 새뮤얼 태판 중령이 연대를 지휘하고 폴이 다시 한번 요새를 지휘하게 되었다.[18]

시블리의 퇴각

캔비는 처음에 연합군에게 포트 유니언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지만, 연합군의 약점을 발견한 후 그는 연합군의 집중을 명령했다; 포츠 크레이그와 유니언에 작은 방어가 남겨져 있었고, 주요 부대는 알부커키 근처에서 랑데부하게 되었다. 물자와 탄약이 한정되어 있고 수적으로 열세였던 시블리는 며칠 전에 사소한 싸움을 마치고 4월 12일 앨버커키를 떠나 텍사스로 후퇴하는 길을 택했다. 4월 14일, 캔비는 페랄타에서 남부 연합군과 맞닥뜨렸다. 페랄타에서는 모래 폭풍으로 남부 연합군이 서쪽 둑으로 철수할 수 있었던 오후 2시까지 군대가 교전을 벌였다.

연합군에 의해 동쪽 둑 아래로 후퇴하는 것을 차단당한 시블리의 군대는 식량과 물을 찾아 서쪽 둑으로 후퇴하거나 산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 동안 수백 명의 남부 연합군들이 질질 끌며 뒤쳐졌다. 퇴각, 약탈, 파괴, 식량 몰수, 그리고 필사적인 남부 연합군 병사들의 약탈은 리오 그란데 서쪽 둑을 따라 행군하는 행렬을 따라 뉴멕시코 시민들을 저항으로 몰아넣었다. 메실라에 도착한 후 퇴각은 프랭클린과 샌안토니오까지 이어졌다. 뉴멕시코의 소코로에서 4명의 부하로 구성된 작은 연합군 부대가 있다. 시몬스는 유니온 스카우트 대장 '패디' 그레이슨과 1명에게 붙잡혔다. (5명 중 1명의 연합군이 탈출하려다 사살되었다.)[19]

윌리엄 스틸 대령이 지휘하는 포트 쏜에는 제7 텍사스 기마 소총의 4개 회사와 애리조나 남부 연합의 여러 회사(Filemon Herbert 중령이 지휘하는 제1 아리조나 기마 소총 대대로 통합)의 후위대가 남았다.[20]

서쪽에서 캘리포니아 칼럼의 진격이 마무리되고, 북쪽에서 에드워드 캔비 장군의 군대가 접근하는 가운데, 메실라 지역의 게릴라들이 제7회 텍사스 기마 소총의 몰수에 반대하고, 제1회 애리조나 기마 소총은 메실라 계곡을 수비하기 위해 떠났다. 제2차 메실라 전투는 1862년 7월 1일 남부 연합 애리조나 반군과 프로 연합 뉴멕시코 민병대 사이에 메실라 인근 사막에서 벌어진 교전이었다.[21] 이번 교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더 많은 연합군의 위협으로 인해 반군들은 메실라에서 철수하여 7월 초 텍사스로 철수하게 되었다.

여파

남부 연합군의 후퇴에 이어 제임스 칼턴 대령 휘하의 유니온 캘리포니아 칼럼 소속 부대들이 텍사스 서부의 여러 요새를 점령했다. 칸비는 준장으로 승진하여 동부 극장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는 칼튼에 의해 부서장으로 계승되었고, 그는 준장으로도 승진되었다. 뉴멕시코 자원 봉사자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키트 카슨이 지휘하는 제1 뉴멕시코 기병대에 편성되었다. 이 연대는 이 지역에서 인디언 부족들과 싸우며 나머지 전쟁을 보냈다.[citation needed]

비록 남부 연합은 계속해서 아리조나를 남부 연합의 일부로 간주하고 또 다른 침략을 위한 몇 가지 계획을 세웠지만, 그들은 결코 이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시블리의 여단은 많은 "애리조나 여단"에 의해 소집될 것이고 남은 전쟁 기간 동안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의 여러 지역에서 계속 복무할 것이다. Sibley는 결국 1863년에 보급 열차를 지휘하는 것으로 강등될 것이다.[citation needed]

오늘날의 전쟁터

미미에타 고개 전장의 약 678에이커(2.74km2)가 오늘날 페코스 국립역사공원 내에 보호되고 있으며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공원 남북전쟁 유적지에 대한 접근을 허가자와 안내 관광에 한해 허용하고 있다.[22] 미미에타 고갯길을 지나는 산타페 국립역사탐방로와 평행한 25번 국도를 비롯한 공원 주변과 인근 도로 곳곳에는 수많은 해석표지와 전시물이 있다.

발베르데 전장카미노 레알 티에라 아덴트로라고 알려진 복도의 인근 고속도로를 따라 있는 역사적 표식기에 의해 기념되었다.[23]

페랄타 전투(The Good, the Bad, and the Forgan)는 마을 북쪽 끝에 있는 주 역사[24] 표식에 의해 기념되었고, 지금은 대도시 앨버커키의 교외 개발로 둘러싸여 있다.

앨버커키 전투는 이 도시의 올드 타운 플라자에 현판과 대포와 함께 기념되었다.[25]

제1차 메실라 전투와 제2차 메실라 전투는 남북전쟁 당시 아리조나 남부 영토의 수도였지만 지금은 멀리 뉴멕시코 남부의 대도시 라스 크루스의 일부인 역사적인 메실라 광장에 해석적인 간판을 내걸고 있다.[26]

캠페인 레거시

  • 텍사스 앨버커키 마을의 이름은 선거 운동원들이 전쟁 후에 그 지역으로 귀국한 것에서 영감을 받았다.

메모들

  1. ^ 2008년 12월 10일.
  2. ^ 조제피 1991 페이지 91
  3. ^ 휘트록 2006, 페이지 60
  4. ^ 프레이저 1995, 페이지 299
  5. ^ 프레이저 1995, 페이지 300
  6. ^ 1·2연대만이 10개 전사가 참석했다. 제3연대는 8개, 제4연대는 1개, 제5연대는 2개였다. (Whitlock 2006, 페이지 100)
  7. ^ 5연대 5개 중대, 7연대, 10연대 각 3개 중대였다.
  8. ^ 프레이저 1995, 페이지 139
  9. ^ 프레이저 1995, 페이지 34
  10. ^ 조제피 1991, 페이지 40
  11. ^ 프레이저 1995, 페이지 75
  12. ^ 연합군연합군의 공식 기록, 시리즈 1, Vol. IV, 페이지 89
  13. ^ 프레이저 1995, 페이지 128
  14. ^ 2008년 12월 12일 종
  15. ^ Whitlock 2006, 페이지 142
  16. ^ 프레이저 1995, 페이지 204
  17. ^ Whitlock 2006, 페이지 166
  18. ^ 휘트록 2006, 페이지 220–22
  19. ^ "내전의 배틀스와 지도자" 제2권 106쪽]
  20. ^ 프레이저 1995, 페이지 278
  21. ^ http://azrebel.tripod.com/page16.html[bare URL]
  22. ^ "NPS". Pecos NHP.
  23. ^ "CLIO". Valverde.
  24. ^ "HMDB". Peralta.
  25. ^ "HMDB". ABQ. Retrieved 2 September 2018.
  26. ^ "HMDB". Mesilla. Retrieved 2 September 2018.

참조

추가 읽기

  • 알버트, 돈 미리에타 전투: 서부에서의 유니온 승리. 텍사스 A&M 대학 출판부, 1996. ISBN 0-89096-825-X.
  • 알버트, 돈, 편집자 리오 그란데의 반란군: A.B. 남북 전쟁 저널 페티콜라. 1994년, 주 의회 출판부. ISBN 0-9636915-0-3
  • 콜튼, 레이 서부영토에서의 남북전쟁: 애리조나, 콜로라도, 뉴멕시코, 유타. 1984년 오클라호마 프레스 대학교 ISBN 0-8061-1902-0.
  • 코트렐, 스티브 텍사스와 뉴멕시코 영토에서의 내전. 1998년 펠리컨 출판사 ISBN 1-56554-253-3.
  • 에드링턴, 토마스 1862년 3월 26~28일 서부의 게티스버그 전투. 뉴멕시코 대학 출판부, 1998. ISBN 0-8263-1896-7
  • 지제, 데일, 편집자 "서방에서 군대와 함께한 나의 삶: 제임스 E의 회고록. 농부." 산타페: 스테이지코치 프레스, 1993.
  • 홀, 마틴 "시블리의 뉴멕시코 캠페인." 뉴 멕시코 대학 출판부, 2000년 ISBN 0-8263-2277-8
  • 힐리, 도널드 "미미에타로 가는 길: 남부 연합군이 뉴 멕시코를 행진한다." 헤리티지 북스 주식회사, 2003. ISBN 0-7884-2378-9
  • 홀리스터, 오반도 제임스 1862년 뉴멕시코의 콜로라도 자원봉사자 R.R.도넬리, 1962년
  • 커비, 로버트 리 "1861년-1862년 뉴멕시코와 아리조나 침공 확인" 웨스턴로어 출판사, 1980. ISBN 978-0-87026-055-1
  • Nagle, P.G. "Glorieta Pass." [소설] Forge. ISBN 0-312-86548-1.
  • Nagle, P.G. "발베르데의 총들." [소설] Forge, 2000년. ISBN 0-312-86549-X.
  • 스콧, 로버트 "글리, 글로리, 미미에타: "서부의 게티스버그" 존슨 북스,1992년 ISBN 1-55566-098-3.
  • 시블리, 헨리 홉킨스 "서 텍사스와 뉴멕시코에서의 남북전쟁: 헨리 홉킨스 시블리 준장의 잃어버린 편지." 텍사스 웨스턴 프레스, 2001. ISBN 0-87404-283-6
  • 시몬스, 마크 "밸리 목장에서의 전투: 1862년 서부의 게티스버그 제1계정."산 페드로 프레스, 1987년 ISBN 0-943369-00-2.
  • 톰슨, 제리. "남서부의 남북전쟁: 시블리 여단의 회상." 텍사스 A&M 대학 출판부, 2001. ISBN 1-58544-131-7
  • 톰슨, 제리. "서방의 장군: 헨리 홉킨스 시블리." 텍사스 A&M 대학 출판부, 1996. ISBN 0-89096-705-9
  • 휘트포드, 윌리엄 "미리에타 고개 전투: 남북전쟁의 콜로라도 자원봉사자들." 리오 그란데 프레스, 1990. ISBN 0-87380-171-7
  • 윌슨, 존. "텍사스인들이 왔을 때: 남서부의 남북전쟁에서 사라진 기록들, 1861년-1862년." 뉴멕시코 대학교 출판부, 2001. ISBN 0-8263-22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