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하마드 5세

Muhammad V an-Nasir
무하마드 5세
Naceur Bey - 2.jpg
튀니지의 비
군림하다1906 – 1922
전임자무하마드 4세
후계자무하마드 6세
태어난(1855-07-14)14 1855년 7월
마르사, 튀니지의 베일리크
죽은1922년 7월 8일 (1922-07-08) (66)
튀니지의 프랑스 보호령 라 마르사
배우자랄라 칼마르 비야(1908–d. 1922년)
이슈무하마드 7세
왕조후사인이드
종교이슬람교

Muhammad V an-Nasir (Arabic: محمد الناصر بن محمد باي), commonly known Naceur Bey (La Marsa, 14 July 1855 – La Marsa, 8 July 1922)[1] was the son of Muhammad II ibn al-Husayn and the fifteenth Husainid Bey of Tunis, ruling from 1906 until his death.[2] 1902년 6월 11일 비야마할라(Heir Oflook)가 되면서 비성경군의 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1906년 5월 11일 무함마드 4세의 뒤를 이어 마샬의 계급을 맡았다.[3]

나체르 비예의 치세는 프랑스 보호국 당국과 튀니지 국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베이가 성공하기 직전 탈라-카세린 소요사태가 발생했고[4] 몇 년 뒤 젤라즈 사건, 튀니지 트램 보이콧 같은 대형 사건들로 불만이 커졌다. 프랑스인들은 1912년 3월 튀니지 민족운동지도자인 알리 바흐 함바, 하산 겔라티, 모하메드 노마네, 압델라지즈 탈라비 등을 추방하는 포고령을 그로부터 가까스로 얻어냈다.[5]

당국이 데스투르를 대하는 방식에 점점 불만을 품게 된 그는 1922년 4월 프랑스 귀화에 관한 법률의 폐지를 포함한 프랑스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퇴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프랑스 레지던트 뤼시앵 생은 비예 궁전을 부대로 포위하여 비예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압력을 가했다.[6][7] 그는 강제로 손을 써서 프랑스인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8] 이 경험으로 인해 굴욕감을 느낀 그는 7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1]

그는 튀니지의 메디나에 있는 투르베트비이의 묘지에 묻혔다. 사촌 무함마드 6세하빕이 계승했고 장남 몬체프 비이가 1942년 비이가 됐다.

참고 항목

튀니지의 역사

메모들

  1. ^ a b Akram Ellias et Benjamin Stora, Les 100 portes du Maghreb : L'Algérie, Le Maroc, la 튀니지. Trois voice singuliérs pour allier disam et modernité, ed. 1999년 파리의 아틀리에, 페이지 236
  2. ^ 장 프랑수아 마틴, 튀니지 동시대인 히스토이어. 데 페리 아 부르기바. 1881-1956, ed. L'Harmattan, 2003, 페이지 255
  3. ^ 모하메드 살라 레리, 레볼루션 전국 튀니지: des of origines ar la Deuxiem Guere mondiale, ed. 메이슨 튀니지, 1975년 튀니지, 페이지 323
  4. ^ 아마존닷컴 2017년 4월 29일 접속
  5. ^ '콜론스 프랑수아 쥬네스-투니센스 (1882-1912)'는 2016년 29/12/12를 회수했다.
  6. ^ 압델라지즈 바라우히, « AA l'écoute de son peuple », Jeune Afrique, 2006년 13 aoht.
  7. ^ 케네스 J. 퍼킨스, 현대 튀니지의 역사, ecd.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2004, 페이지 82
  8. ^ 바이오그래피나체르2008-12-11 웨이백 머신보관
선행자 튀니지의 비
1906–1922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