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바초프
Lubaczów루바초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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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스퀘어 | |
좌표: 50°10°N 동경 23도 7도 / 50.167°N 23.117°E | |
나라 | |
무성음속 | |
카운티 | 루바초우 주 |
지미나 | 루바초프 (도시 gmina) |
정부 | |
• 시장 | 크리즈토프 슈피트 |
면적 | |
• 합계 | 26km2(10제곱 mi) |
인구 (2013[1]) | |
• 합계 | 12,517 |
• 밀도 | 480/km2(1,200/sq mi) |
시간대 | UTC+1(CET) |
• 여름(DST) | UTC+2(CEST) |
우편번호 | 37–600 |
카 플레이트 | RLU |
웹사이트 | http://www.lubaczow.pl |
Lubaczów [luˈbat͡ʂuf] (Ukrainian: Любачів Liubachiv) is a town in southeastern Poland, close to the border with Ukraine, with 12,567 inhabitants[2] Situated in the Subcarpathian Voivodeship (since 1999), it is the capital of Lubaczów County and is located 50 kilometres (31 miles) northeast of Przemyśl.
기타 이름
루바츠우(Lubaczouw)는 다음과 같이 부르기도 한다. 리바초프, 리베추이프, 류바초프, 루바초프, 루바초프, 루바초프, 루바초프, 루바초프.
역사
루바초는 1214년 레제크 1세와 헝가리의 앤드루 2세 사이의 스파이스 조약에 따라 고드름이 산도미에르스의 보이보데, 파코슬라브 라소시치의 권한에 놓이게 되면서 처음 언급되었다. 1376년까지 루바초는 루바체프 또는 류바체프라는 철자를 받았다. 마을 헌장(1376년)을 받자, 그 이름의 철자가 루바초(Lubaczow)로 바뀌었다. 1462년까지 루바초는 폴란드인 피파인 마조비아의 두케스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 해에 새롭게 탄생한 벨츠 보이보데스의 일부로서 폴란드 왕국에 직접 합병되었는데, 이 왕국은 1772년까지 남아 있었다. 폴란드-오토만 전쟁(1672–76년) 동안, 니미로 전투는 루바초 근처에서(1672년 10월 7일–8일) 일어났다.
1772년부터 1918년까지 루바초는 오스트리아 갈리시아에 속했는데, 폴란드의 첫 분할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에 의해 마을이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1868년 오스트리아 당국은 군청 좌석을 인근 시제사누프로 옮겼고, 1880년 루바초프는 야로스와프와의 철도 연결을 받았다. 1896년에 병원이 지어졌지만, 3년 후, 마을의 대부분은 큰 화재로 탔다.
1918년 폴란드는 독립국가로 선언되었다. 루바초프는 제2 폴란드 공화국의 루와 보이보데프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군대의 루박조우 회사는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1918–1919)에 참가했다. 폴란드 침공 중이던 1939년 9월 중순, 조제프 쿠스트론 장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21 산악 보병사단과 진격하는 베흐마흐트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9월 16일 루바초 근처에서 쿠스트론 장군이 살해된 올레지체 전투가 벌어졌다.
1939년 9월 7일: 루바초프는 독일 항공기에 의해 폭격을 당했고, 5일 후, 그 도시는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9월 26일, 붉은 군대는 루바초우를 점령했다. 이 마을은 1941년 6월 22일까지 소련의 점령하에 있었고, 독일의 점령은 1944년 7월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때 루바초우는 소련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루바초프는 1945년 국경이 다시 그려졌을 때 폴란드 내에 남아 있던 로마 가톨릭 대교구 루바우 대교구의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그 결과 루박조우의 옛 교구교회가 성당으로 명명되었고, 폴란드에 남아 있던 루박조우 대교구(Lwow Archiodiocese) 부분은 공산당 정부가 폴란드가 루우 시에 존재한 모든 흔적을 금지하면서 루박조우 대교구(Rubaczow Archiocese)로 명명되었다. 1984년, 그곳에 세워진 교회 기록 보관소의 대교구로부터 교구 기록의 목록이 작성되었다. 1992년 폴란드 교구 구조 내에서 루바초프 지역의 위치가 정규화되었고 자모치-루바초 교구의 일부가 되었다. 루바초에는 아직도 교회 기록 보관소가 있었다. 1999년에 루바초프는 서브카르파티안 보이스쉽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국경 변경에 따라 동부 국경지대에서 온 여러 유물들이 루박조우로 이송되었다. 그 중에는 벨츠 여사의 기적적인 사진, 베일리스 야쿠브 스트르제미의 유물, 조제프 빌체프스키 대주교의 마음을 담은 항아리 등이 있었다. 게다가 1946년부터 1980년까지 라틴 대성당에서 온 우리 복자 부인의 기적적인 그림인 Lviv는 루박조우에 보관되었다. 그것은 에우제니우스 바작 대주교가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다.
루바초프의 유대인
- 1498: 루바초프의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그 해 루바초프 관세 징수 임대차권을 부여받았을 때였다.
- 1532: 폴란드 왕은 루바초프의 유대인들이 주변 마을의 인구와 거래하는 것을 금했다.
- 1538: 세금 기록을 보면 루바초프에는 왕에게 세금을 낸 18명의 유대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 1565:올해의 정욕은 마을에 살고 있는 유대인 세 가족만을 언급하고 있다.
- 1621년, 1633년 & 1639년: 루바초 유대인들은 무역과 공예에 관여했고, 맥주 양조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 해 동안 시료 징수 임대는 물론, 전체 스타스토우(지방 행정 단위)로부터 왕세를 징수하기 위한 임대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다.
- 1648–1649: 보흐단 치엘니키(Bohdan Chmielnicki)가 이끄는 코삭스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폴란드 정부에 반대했다. 그들의 눈에는 유대인들이 폴란드 통치자들의 대리인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루바초프에서는 라이넥(도시 광장)과 주변 거리의 상점들이 완전히 불에 탔다.
- 1662년: 그 해의 정욕은 어떤 유대인 가정도 언급하지 않는다. 18세기 초에는 비교적 큰 공동체가 그곳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 재고에 납부된 세금 액수로 증명되었다.
- 1670: 루바초프에는 5명의 유대인 가족만이 있었다.
- 1765:그 해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마을과 주변 마을에 살고 있는 세금을 내야 하는 유대인은 687명이었다.
- 1787: 루바초프의 30여 유대인 가정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농부가 될 수 있도록 토지를 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의 간청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 19세기: 루바초프의 유대인 공동체는 더욱 강해지고 유대인들은 농산물의 상인으로 일했으며, 인근 마을에서 행상을 했다.
- 1880: 폴란드의 동부와 서부 철도 노선은 야로스와프로부터 새로운 철도가 건설된 후 연결되었고, 루바초프는 자체 철도역을 얻은 후 중요해졌다. 그해 유대인 사회는 약 1300명(전체 인구의 약 30%)이었다.
- 1891: 갈리시아를[3] 위한 비즈니스 디렉토리가 출판되었는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약 25000명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루바초프 출신의 몇몇 사람들을 포함한다.
- 1899: 1899년 루바초프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마을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 집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거의 1000명으로 구성된 220명의 유대인 가족이 있었다.
- 1906: 갈리시아의 주소록이 출판되었다. 그것은 550페이지에 달했다.
- 1914–1918: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약 500명의 유대인들이 루바초프를 떠났고 많은 유대인들은 20대 중반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 1931:대부분의 소식통에 따르면, 올해 루바초프시에는 6291명의 시민이 있었는데, 이 중 1794명이 유대인이었다. However, according to a table from the "Population of the Eastern Galicia in 1931",[4] the locality of Lubaczów had a total population of 51,885, from where 23,686 (43.7%) were Polish, 24,470 (47.2%) were Ukrainian, 3,503 (6.8%) were Yiddish (probably referring to Jews) and 226 (0.4%) were of other descent.
- 1933년: 루바초프의 유대인 묘지는 폴란드 당국에 의해 폐쇄되었고, 오랜 대중의 투쟁을 거쳐 다시 문을 열었다.
- 1939: "우리가 한번 걸었던 곳"에 따르면, 유대인 대학살 이전 루바초에는 1,715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2300여 명이었다.
- 1939년 9월 1일과 9월 17일: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한다. 루박조우는 1941년 6월까지 소비에트 연방에 의해 점령당한다.
- 1942년 4월: 루바초에는 227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 1942년 5월: 2000명의 유대인이 독일인에 의해 주변 마을로부터 루바추프로 끌려왔다.
- 1942년 10월: 나치는 루바초프에서 유대인 게토를 세워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48시간 이내에 유대인들은 빈민가 내에서 초만원이었다. 그 직후 유대인의 첫 수송선이 루바추프에서 벨제크로 보내졌다. 니에미루프와 포틸리츠에서 온 유대인들은 루바초프로 끌려왔다. 절정에 달했을 때 게토에는 7000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각 아파트에는 5~6가구가 살았다.
- 1942년 11월: 2000년경 올레지체에서 온 유대인 대부분은 루바초프로 끌려왔다.
- 1942년 12월: 독일인들은 루바초프에서 유대인을 더 이상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이유는 아직도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예 노동자로서 독일인들을 위해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는 이미 2500명의 유대인을 벨제크의 말살 캠프로 보냈다.
- 1943년 1월 5일: 큰 눈보라가 몰아쳐 큰 추위가 찾아왔다. 독일인들은 유대인 미행자들과 제화공들로부터 완성되고 미완성된 모든 물건들을 수집했다. 독일군이 유대인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가능성이 있는 자는 그날 밤 게토에서 도망쳤다.
- 1943년 1월 6일: 오전 8시경 루바초프에서 유대인들의 마지막 집단 처형이 시작되었다. 독일인과 그들의 우크라이나 보조국들은 수백명을 살해했다. 살인은 1월 14일까지 계속되었다. 몇몇은 지하의 비밀 벙커에서 발견되어 죽었다. 다른 사람들은 1200명으로 추정되는 유대인들이 집단 무덤에 묻힌 유대인 공동묘지로 끌려갔다. 일부는 벨제크 박멸 캠프로 보내졌다. 살아남은 극소수의 유대인들은 숲으로 도망치고 빨치산들과 합류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약 20명의 루바초 유대인들만이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 1944년 7월 21일: 독일군은 마침내 철수했고 소련 적군은 루바초프를 다시 점령했다. 폴란드는 소련과 제휴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볼거리
저명인사
- 알렉산더 반드로스키(1860~1913), 가수
- 1939년 9월 폴란드 해안 방어를 지휘한 폴란드 육군 대령 스타니스와프 디베크(1892~1939)
- 스타니스와프 데비키(1866–1924), 화가
- 로버트 코르제니오스키(b. 1968년), 올림픽 골든메달리스트 경주보행자
- Franciszek Misztal(1901–1981) 엔지니어, PZL.23 Karas 및 PZL.38 Wilk와 같은 비행기의 공동 제작자
- 조제피나 스자와스카 (b. 1951년), 여배우
- 브와디스와프 위트위키(1878–1948), 심리학자, 철학자, 번역가, 예술가
갤러리
국제 관계
트윈 타운 – 자매 도시
Lubaczouw는 다음과 쌍둥이다.
도시 | 나라 |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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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테트 | 1993 | |
야베리브 | 1997 | |
에르드 | 2003 | |
수브레 | 2009 | |
레긴 | 2014 |
참조
- ^ 2014년 폴란드 인구통계연보
- ^ "Population in Poland. Size and Structure by Territorial Division" (PDF). Central Statistical Office. 2012-06-30. Retrieved 2013-05-26.
- ^ "The Galicia 1891 Business Directory Database". Jewishgen.org. 2003-05-30. Retrieved 2009-05-05.
- ^ [1] 2005년 12월 16일 웨이백머신에 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