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The Holocaust홀로코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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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위치 | 주로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유럽. |
날짜. | 1941–1945[1] |
공격유형 | 대량학살, 인종청소, 집단살해, 집단총살, 독가스, 혐오범죄 |
죽음 | 약 600만명의 유대인들 |
가해자 | 나치 독일과 그 협력자 및 동맹국들 |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럽 유대인들의 대량학살이었습니다.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나치 독일과 협력자들은 조직적으로 독일이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습니다. 이는 유럽 유대인 인구의 약 3분의 2입니다. 살인은 주로 점령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트레블린카, 벨제크, 소비보르, 체움노 등 몰살 수용소에서 대량 총격과 독가스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나치는 인종차별과 "생활 공간" 추구를 바탕으로 이념을 발전시켰고, 1933년 초에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민을 시도하는 수단과 상관없이 모든 독일 유대인을 강제하기 위한 이 정권은 1938년 11월 반유대인 법을 통과시키고 괴롭힘을 조장했으며 전국적인 포그롬을 조직했습니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점령 당국은 유대인들을 분리하기 위한 집단 거주지를 설립하기 시작했습니다. 1941년 6월 소련 침공 이후 독일군과 현지 협력자들은 150만~200만 명의 유대인을 사살했습니다.
그 후 1941년이나 1942년 초, 독일 정부의 최고위층은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살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희생자들은 철도를 타고 몰살 수용소로 추방되었는데, 만약 그들이 여행에서 살아남았다면, 대부분은 독가스로 살해당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강제 노동 수용소에 계속 고용되어 많은 이들이 기아, 학대, 탈진으로[2] 죽거나 치명적인 의학 실험의 실험 대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3] 많은 유대인들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조력자들에게 지불할 돈이 부족하고, 비난의 위험이 있는 등의 요인들로 인해 은신처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웠습니다. 살해된 유대인들의 재산, 집, 직업들은 독일 점령자들과 다른 비유대인들에게 재분배되었습니다. 비록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대다수가 1942년에 사망했지만, 그 살해는 1945년 5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더 낮은 비율로 계속되었습니다. 나치의 박해로 유사하거나 더 많은 수의 비유대인 민간인과 포로들이 사망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용어는 때때로 이러한 다른 집단들의 박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전쟁 후 많은 유대인 생존자들이 유럽 밖으로 이주했습니다. 소수의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은 형사 재판에 직면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손실에는 못 미치지만 수십억 달러의 배상금이 지불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박물관, 기념관 및 문화에서도 기념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인간 악의 상징으로서 서양 역사 의식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용어 및 범위
홀로코스트라는 용어는 "번트 제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4] 나치가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을 영어와 다른 많은 언어로 설명하는 데 가장 일반적인 단어가 되었습니다.[a] 홀로코스트라는 용어는 때때로 나치가 목표로 삼았던 다른 집단,[b] 특히 생물학적 기반으로 목표로 삼았던 집단, 특히 로마와 신티, 그리고 소련 전쟁 포로와 폴란드 및 소련 민간인에 대한 박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됩니다.[5][6][7] 그러나 이 모든 그룹은 다른 이유로 표적이 되었습니다.[8] 1970년대에 이르러 유대인이라는 형용사는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했고 현재는 자본화된 홀로코스트가 유럽 유대인 파괴의 기본 용어가 되었습니다.[9] 히브리어 단어인 쇼아("대재앙적 파괴")는 전적으로 유대인 희생자들을 가리킵니다.[10][11][5] 가해자들은 "최종 해결책"이라는 문구를 유대인 집단 학살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했습니다.[12]
배경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2천년 이상 살아왔습니다.[13]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기독교 신학을 바탕으로 예수를 죽였다는 반유대주의에 시달렸습니다.[14][15] 19세기에 많은 유럽 국가들은 유대인들이 동화되기를 바라며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16] 20세기 초까지 중부와 서부 유럽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사회에 잘 통합되었고, 반면에 해방이 도래한 동유럽에서는 여전히 많은 유대인들이 작은 마을에 거주하며 이디시어를 사용하고 정통 유대교를 실천했습니다.[17]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에서 민족주의의 대두와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경제적 갈등을 증가시킨 산업화로 인해 유대인 문제와 일반적으로 국제 유대인 음모의 존재를 주장하는 정치적 반유대주의가 나타났습니다.[18][19]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을 다른 인종으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 생사의 다툼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20] 많은 인종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유럽에 이질적인 별개의 인종 집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21][22]
20세기의 전환기에는 해외에서 독일 식민지 제국을 세우려는 큰 노력이 있었고, 이는 헤레로와 나마의 대량학살과 그에 따른 남서부 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23][24]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은 독일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정서를 강화시켰습니다.[25]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광범위한 포그롬의 표적이 되었습니다.[26] 독일은 2백만 명의 전몰자가 발생했고 상당한 영토를 상실했습니다.[25] 전후 해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치 영역을 넘어 독일인들을 단결시켰습니다.[27][28] 군대는 독일이 전쟁터에서 패배하기는커녕 사회주의자와 유대인들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은 아니지만 설득력 있는 발상을 내놓았습니다.[27][29]
나치당은 전쟁을 계기로 창당되었으며,[30] 나치당의 이념은 홀로코스트를 설명하는 주요 요인으로 종종 인용됩니다.[31] 처음부터 나치는 유럽의 다른 민족국가들과 달리 유대인이 없는 세계를 꿈꿨고, 그들은 "현대성이 잘못된 모든 것의 구체화"라고 평가했습니다.[8] 나치는 독일 국가를 독일의 물리적 국경에[32] 구애받지 않는 인종 공동체로 규정하고, 인종적으로 이질적이고 사회적으로 부족한 요소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27][33] 나치당과 그 당수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영토적 손실을 역전시키고, 동유럽의 레벤스라움(생활공간)을 추가로 획득해 식민지화하는 데도 집착했습니다.[34][35] 이 아이디어들은 많은 독일인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36] 나치는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유럽 문명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37]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소련은 물론이고 서구 열강을 지배한다고 믿었고, 독일을 무너뜨릴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38][39][40]
나치 독일의 부상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와 정치적 분열 속에서 나치당은 반공과 경제 회복 등의 문제를 놓고 선거운동을 [41][42]벌이면서 지지율을 급격히 높여 1932년 중반 선거에서 37%로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43][44] 1933년 1월 히틀러는 우익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는 밀실 협상에서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41] 몇 달 만에 다른 모든 정당들이 금지되었고, 정권은 언론을 장악했고,[45] 수만 명의 정적들,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사법 외 수감을 위한 수용소 시스템이 마련되었습니다.[46] 나치 정권은 강제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다양한 조치를 통해 로마와 신티, 동성애 남성, 노동자로 인식되는 사람들과 같은 범죄와 사회적 외부인들을 단속했습니다.[47] 나치는 40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로 살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 또는 유전병으로 추정되는 강제 낙태를 시켰습니다.[48][49][50]
나치는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모든 측면을 통제하려고 노력했지만,[51] 나치의 억압은 거의 전적으로 국가 공동체 밖으로 인식되는 집단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새 정권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52][53] 새 정권은 부분적으로 재무장과 같은 국가 주도의 조치를 통해 발생한 경제 성장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구축했습니다.[45] 오스트리아(1938년), 수데텐란트(1938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1939년)의 합병도 나치의 대중적 지지를 높였습니다.[54] 독일인들은 나치의 표적이 된 유대인들과[45] 다른 집단들을 상대로 한 선전물들로 넘쳐났습니다.[49]
유대인 박해
1933년 약 50만 명의 독일계 유대인은 독일 인구의 1% 미만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독일인들보다 평균적으로 부유했고, 대부분 동화되었지만, 소수는 최근 동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었습니다.[55][56][57] 다양한 독일 정부 기관, 나치당 조직, 지역 당국은 약 1,500개의 반유대인 법률을 제정했습니다.[58] 1933년, 유대인들은 몇몇 직업과 공무원들로부터 금지되거나 제한되었습니다.[54] 1934년 말까지 독일 유대인들을 공공 생활에서 쫓아낸 후, 그 정권은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을 통과시켰습니다.[59] 이 법은 "독일인 또는 이와 관련된 혈통"을 가진 사람들의 완전한 시민권을 보유하고, 유대인의 경제 활동을 제한하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독일인 사이의 새로운 결혼과 성 관계를 범죄화했습니다.[60][61] 유대인은 서너 명의 유대인 조부모를 둔 사람들로 정의되었고, 부분적인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들 중 다수는 다양한 권리를 가진 미슐링으로 분류되었습니다.[62] 그 정권은 또한 유대인들이 궁극적으로 그 나라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분리하려고 했습니다.[59] 유대인 학생들은 점차 학교 체제에서 쫓겨났습니다. 일부 지방 자치 단체들은 유대인들이 살거나 사업을 하는 것이 허용되는 곳에 대한 제한을 제정했습니다.[63] 1938년과 1939년, 유대인들은 추가적인 직업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그들의 사업체들은 경제에서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수용되었습니다.[61]
반유대인 폭력은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주로 나치당 조직원들에 의해 지역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주로 치명적이지 않은 형태를 취했습니다.[64] 특히 시골 지역의 유대인 가게들은 종종 불매운동이나 파손을 당했습니다.[65] 지역적이고 대중적인 압력의 결과로, 많은 작은 마을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고, 유대인 사업체들의 3분의 1 정도가 문을 닫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66] 반유대인 폭력은 나치 독일이 합병한 지역에서 더욱 심했습니다.[67] 1938년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나치는 전국적인 포그롬인 크리스털나흐트(Kristallnacht, 깨진 유리의 밤)를 조직했습니다. 7,5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9,000개 중)이 약탈되었고, 1,000개가 넘는 유대교 회당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으며,[68] 최소 9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으며,[69][70][71] 많은 유대인들이 몇 주 안에 풀려났지만 3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남성들이 체포되었습니다.[72] 독일 유대인들은 10억 라이히스마르크(RM) 이상을 모금하는 특별세를 부과받았습니다.[73][c]
나치 정부는 모든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나도록 강요하고 싶었습니다.[76] 1939년 말까지 이민을 갈 수 있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미 이민을 갔고, 뒤에 남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거나 가난하거나 여성이어서 비자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77] 약 11만 명에 달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떠났고, 소수의 사람들은 남미, 상하이, 의무 팔레스타인,[78] 남아프리카로 이주했습니다. 독일은 대부분 유대인들로부터 10억 RM에 가까운 이민세를 징수했습니다.[c][79] 강제 이주 정책은 1940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80]
독일 외에도 상당수의 다른 유럽 국가들은 어떤 종류의 권위주의적이거나 파시스트적인 통치를 위해 민주주의를 포기했습니다.[37]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반유대주의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81] 1938년 10월, 독일은 해외에 거주하는 폴란드 유대인들의 시민권 취소를 가능하게 한 폴란드 법에 따라 많은 폴란드 유대인들을 추방했습니다.[82][83]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가 촉발되었습니다.[84] 5주간의 전투 기간 동안 무려 16,000명의 민간인과 인질, 포로들이 독일군의 총에 맞았을지도 모릅니다.[85] 또한 많은 약탈이 있었습니다.[86] 아인사츠그루펜으로 알려진 특수부대들은 저항을 없애기 위해 군대를 따라갔습니다.[87] 약 5만 명의 폴란드와 폴란드의 유대인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이 체포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88][89]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폴란드 지식인들이 숙청에서 사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90]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약 40만 명의 폴란드인들이 폴란드 서부의 바르셀란드에서 총독부 점령 지역으로 추방되었고, 동유럽 출신의 독일계에 의해 그 지역이 재정착되었습니다.[91]
9월 17일 독일-소련 조약에 따라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이 폴란드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92] 소련은 폴란드 시민 수십만 명을 소련 내부로 추방했고, 그 중에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도 26만 명이나 포함되어 있습니다.[93][94] 비록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일부는 소련 정부의 입장을 받아들였고, 많은 비유대인들 사이에서 소련의 통치가 유대인의 음모라는 기존 인식에 기여했습니다.[95] 1940년, 독일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포함한 서유럽의 많은 지역을 침략했습니다.[84] 1941년 독일은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했습니다.[84] 이러한 새로운 보유물 중 일부는 독일에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합병되었고, 다른 일부는 민간 또는 군사 통치하에 놓였습니다.[85]
이 전쟁은 독가스를 사용하는 전문 살상 센터에서 정신적 또는 신체적 장애를 가진 약 7만 명의 기관화된 독일인들을 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91][96][97] 희생자 중에는 제도화된 유대인 4,000~5,000명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98] 비밀 유지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인에 대한 지식이 새어나갔고 히틀러는 1941년 8월 중앙 집중 살해 프로그램의 중단을 명령했습니다.[99][100][101] 의료 거부, 기아, 독극물 중독 등을 통한 탈중앙화된 살인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12만 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습니다.[100][102] 나중에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 데에도 같은 인력과 기술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103][104]
게토화 및 재정착
독일은 폴란드에서 170만 명의 유대인들을 지배했습니다.[57][105] 나치는 유대인들을 총독부 루블린 구역에 집중시키려 했습니다. 4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11월까지 추방되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떠났고, 이로 인해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106] 추방은 1940년 초 자신의 영지가 원치 않는 유대인들의 쓰레기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총독부의 지도자 한스 프랑크의 반대로 중단되었습니다.[107][108] 프랑스 정복 후 나치는 유대인을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로 추방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109][110] 나치는 이 지역의 가혹한 환경이 많은 유대인을 죽일 것이라고 계획했습니다.[109][108]
침략 기간 동안, 유대교 회당들은 불에 탔고,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소련 점령 지역으로 도망치거나 추방당했습니다.[111] 다양한 반유대인 규정이 곧 발표되었습니다. 1939년 10월, 총독부의 성인 유대인들은 강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112] 1939년 11월에 그들은 흰색 완장을 착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113] 법률은 대부분의 유대인 재산을 압류하고 유대인 소유의 사업체를 인수하는 것을 명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강제로 집단 거주지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집과 소유물을 잃었습니다.[112]
최초의 나치 게토는 1939년과 1940년에 지역 독일 행정가들의 주도로 바르셀란트와 총독부에 설립되었습니다.[114][115] 바르샤바와 우드 ź와 같은 가장 큰 집단 거주지는 기존의 주거 지역에 세워졌으며 울타리나 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많은 작은 마을에서 유대인들은 가난한 동네로 내몰렸지만 울타리는 없었습니다.[116] 강제 노동 프로그램은 많은 거주민들에게 생계를 제공했고, 어떤 경우에는 추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어떤 게토 안에서는 공방과 공장이 운영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유대인들이 게토 밖에서 일하기 위해 게토를 떠났습니다.[117] 게토들이 성별에 따라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가정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118] 유대인 공동체 지도부(Judenrat)는 독일의 요구를 따르면서 어느 정도의 권한을 행사하고 유대인 공동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생존 전략으로, 많은 사람들이 노동력 보호구역으로서 거주자들에게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119][120] 서유럽의 유대인들은 강제로 집단 거주를 당하지 않고 차별적인 법과 재산 몰수에 직면했습니다.[121][122][123]
동유럽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성 착취는 흔했습니다.[124]
소련 침공
독일과 동맹국인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이탈리아는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공했습니다.[125][108] 비록 이 전쟁이 이념적인 이유보다는 전략적인 이유로 시작되었지만,[126] 히틀러가 유대인 볼셰비즘[127] 세력에 대한 종말론적인 전투로 본 것은 전쟁의 법과 관습을 철저히 무시한 채 말살전으로 진행될 것이었습니다.[128][129] 빠른 승리가 예상되었고[130] 3,100만 명의 인구를 제거하고 독일 정착민으로 대체하기 위한 대규모 인구 공학 프로젝트가 뒤따를 계획이었습니다.[131] 독일인들은 정복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약탈을 통해 군대를 먹여 살리고, 추가 식량을 독일에 수출하며, 지역 주민들을 예방적 살육으로 공포에 떨게 할 계획이었습니다.[132][133] 독일인들은 이 침략이 식량 부족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소련의 도시와 일부 농촌 지역의 대량 기아를 계획했습니다.[134][135][136] 비록 기아 정책이 계획자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덜 성공적이었지만,[137] 특히 우크라이나와 레닌그라드에 포위된 일부 도시의 주민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한 인간이 만든 기근을 견뎌냈습니다.[138][139]
독일군이 억류하고 있는 소련군 포로들은 대량으로 죽음을 맞이할 예정이었습니다. 60%인 33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해 [140][141]유럽 유대인 다음으로 나치 집단살해 희생자 중 두 번째로 큰 집단이 됐습니다.[142][143] 유대인 포로들과 위원장들은 조직적으로 처형되었습니다.[144][145] 벨라루스에서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을 포함해 반당파 전쟁 중 나치에 의해 약 10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146][147] 1942년부터 독일과 동맹국들은 빨치산들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되는 마을들을 표적으로 삼아 그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이거나 추방했습니다.[148] 이 작전 동안, 근처의 작은 집단 거주지는 청산되었고 그들의 주민들은 총에 맞았습니다.[149] 1943년까지 반당파 작전은 벨라루스의 넓은 지역의 인구 감소를 목표로 했습니다.[150][151] 일반적으로 유대인과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추방당한 사람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았습니다.[149][152] 비록 사망자의 대부분이 유대인은 아니었지만,[147][150] 반당파 전쟁은 종종 유대인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153]
유대인 집단 총격 사건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살해는 소련에서 시작되었습니다.[155] 침략 기간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붉은 군대에 징집되었습니다. 동쪽으로 피신한 소련 민간인 1,000만 명, 1,500만 명 중 160만 명이 유대인이었습니다.[156][119]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동부,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국경지대 포그롬에서 현지 주민들이 무려 5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습니다.[157][158] 독일군이 포그롬을 선동하려 했지만 폭력을 일으키는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159][160] 루마니아 군인들은 1942년 4월까지 오데사에서 수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161][162]
침공 이전에 아인사츠그루펜은 대량 학살에 대비하여 조직을 개편하고 소련 관리들과 유대인 국가 및 당 직원들을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163] 이 총격 사건은 공산주의 체제를 지지하는 유대인들의 중심적인 역할을 근거로 정당화되었지만, 처음에는 소련의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는 것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164][165] 점령자들은 표적이 될 유대인들을 식별하기 위해 현지인들에게 의존했습니다.[166] 독일 최초의 대량 학살은 공무원으로 일했거나 교육을 필요로 하는 직업에 종사했던 성인 남성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7월 말까지 수만 명이 총에 맞았습니다. 민간인 희생자의 대다수는 유대인이었습니다.[161] 7월과 8월에 친위대(Schutzstaffel)의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더 많은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전달하며 죽음의 팀 작전 지역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167] 이때 살인범들은 유대인 여성들과 어린이들도 살해하기 시작했습니다.[167][168] 리투아니아에서는 8월과 9월에 사형 집행이 한 달에 4만 명에 달했고 벨라루스에서는 10월과 11월에 사형 집행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169]
처형은 종종 한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희생자들은 체포되어 처형장으로 행진했고, 강제로 옷을 벗었고, 이전에 파놓은 구덩이에 총을 맞았습니다.[171] 선호하는 기술은 단 한 발의 총알로 목덜미를 쏘는 것이었습니다.[172] 혼란 속에서 많은 희생자들이 총성에 의해 사망한 것이 아니라 생매장되었습니다. 보통, 구덩이는 처형 후에 지켜지지만 때때로 몇몇 희생자들은 그 후에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171] 처형은 공공의 구경거리였고 피해자들의 재산은 점령자들과 지역 주민들에 의해 약탈되었습니다.[173] 약 200개의 게토가 점령된 소련에 세워졌으며, 많은 게토들이 주민들이 처형되기 전에 잠시 존재했습니다. 빌나(Vilna), 코브노(Kovno), 리가(Riga), 비아위스토크(Białstok), 러프(Lwów)와 같은 몇 개의 대규모 게토는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에 194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집단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 중에는 다른 곳에서 추방된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174] 독일 이외에도 루마니아가 가장 많은 수의 유대인을 죽였습니다.[175][176] 루마니아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약 154,000~17만 명의 유대인을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게토로 추방했습니다.[177]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온 유대인들도 이들 집단에 갇혀 있었는데, 총 사망자 수는 16만 명에 달했을 것입니다.[178] 헝가리는 1941년 수천 명의 카르파티아인 루테니아인과 외국인 유대인들을 추방했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크라이나에서 총살당했습니다.[179][180] 9월 초 독일 유대인들은 모두 노란 별을 달아야 했고, 10월 히틀러는 이들을 동쪽으로 추방하고 이민을 금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181][182] 1941년 10월 중순에서 말 사이에 독일과 그 부속 영토에서 온 42,000명의 유대인과 오스트리아에서 온 5,000명의 루마니아인이 우드 ź, 코브노, 리가, 민스크로 추방되었습니다. 11월 말, 코브노 외곽에서 독일 유대인 5천 명이, 리가 인근에서 또 다른 1천 명이 총살당했지만, 힘러는 그러한 학살을 중단하라고 명령했고, 나치 고위 지도부의 일부는 독일 유대인을 죽이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냈습니다.[174][185] 1942년 초 발트해에서 독일계 유대인에 대한 처형이 재개되었습니다.[186]
소련 유대인 전체를 겨냥한 살해가 확대된 후, 아인사츠그루펜의 3,000명은 부족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힘러는 그들을 돕기 위해 21개 대대의 질서경찰을 동원했습니다.[167] 게다가, 독일군 병사들, 와펜-SS 여단, 그리고 지역 보조 부대들은 많은 유대인들을 쏘았습니다.[171][187][188] 1941년 말까지 우크라이나 중부, 벨라루스 동부, 러시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있는 유대인의 80% 이상이 총에 맞았지만, 90만 명이 생존한 더 서쪽에 사는 유대인의 25% 미만이었습니다.[189]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150만에서 2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총에[155] 맞았고 22만 5천 명의 로마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190] 살인범들은 사형 집행이 고통스럽고 논리적으로 불편하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다른 살인 방법으로 전환하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습니다.[191]
유럽 전역의 체계적인 추방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히틀러가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시적인 명령을 내렸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192] 언제 그랬냐는 데에는 이견이 있습니다.[193][194] 일부 역사학자들은 히틀러와 다른 나치 지도자들의 선동적인 성명과 세르비아계 유대인들의 동시다발적인 총기 난사, 폴란드의 말살 수용소 계획, 독일계 유대인 추방의 시작 등을 1941년 12월 이전에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꼽고 있습니다.[193][195]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들이 지역 지도자들의 계획이었고, 최종 결정은 나중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합니다.[193] 1941년 12월 5일, 소련은 첫 번째 대규모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히틀러는 12월 11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196][197] 다음 날, 그는 나치 당의 지도자들에게 1939년 예언을 언급하며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멸은 반드시 필요한 결과입니다."[197][198]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나치는 대륙 전체의 대량학살을 조직하는 데 몇 달이 걸렸습니다.[197] 1942년 1월 20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독일 국가보안국(RSHA) 국장은 완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번 고위급 회의는 반유대주의 정책을 조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199]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학살은 1942년에 이루어졌으며,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20 또는 25%가 1942년 초 이전에 사망했고, 같은 숫자가 연말까지 생존했습니다.[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