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의정서 (1829년)
London Protocol (1829)1829년 3월 22일 런던 의정서는 3대 강대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의 합의로 오스만 초저래티 하의 내부적으로는 자율적이지만 지류적인 그리스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관한 최초의 런던 의정서를 개정하였다.[1]
1821년 시작된 그리스 독립전쟁과 나바리노 전투(1827년)에서의 분쟁에 대한 대국의 개입으로 그리스 남부의 어떤 형태의 그리스 국가의 탄생이 확실해졌다. 1827년 그리스 제3국회는 1828년 1월 그리스에 도착한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에게 신생국의 통치권을 맡겼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근대 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노력과 함께 특히 1828년 9월 대국 대사들의 포로스 회의 동안에 새로운 그리스 국가의 범위와 헌법적 지위에 대해 대국들과 협상에 나섰다. 1828년 11월, 대사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대국들은 펠로폰네세(모레아)와 사이클라데스 섬만을 아우르는 그리스 자치 국가를 만든 제1차 런던 의정서에 합의했다.
1829년 3월 22일 영국 외무장관 조지 해밀턴 고든(George Hamilton-Gordon) 제4대 애버딘 백작과 프랑스와 러시아의 사절인 쥘 드 폴리그낙(Jules de Polignac)과 크리스토프 폰 리벤(Chrioph von Liven)이 제2차 런던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 의정서는 포로스 총회의 권고안을 대체로 수용하였다. 의정서에 따르면, 그리스는 세습 기독교 왕자가 열강에 의해 선발되는 통치하에 완전한 자치를 누리는 독립국가가 되겠지만, 오스만 술탄의 초저성을 인정하고 매년 150만 터키의 피아스트르를 헌납한다. 새로운 주의 국경은 서쪽의 아르타 만을 따라 동쪽의 파가세틱 걸프까지 이어져 펠로폰네스와 대륙 그리스는 물론 사이클라데스까지 포함되겠지만, 크레타 섬이나 사모스 같은 다른 에게 섬들 중 어느 것도 독립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여전히 그리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1828–29년의 러-터키 전쟁을 종결시킨 아드리아노플 조약에서 의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곧이어 1830년 2월 3일 런던 의정서에서 인정된 그리스에 대한 완전한 독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참조
- ^ 윌리엄 리글리, "이오니아 제도와 앵글로-오토만 외교의 복원, 1827-29" 쉬도스트-포스춘게(2010/2011), 69/70권, p51-89.
추가 읽기
- 앤더슨, M.S. 동방문제, 1774-1923: 국제관계 연구(1966) 온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