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유왕
King You of Zhou동주 유왕 周幽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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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왕 | |||||
군림하다 | 기원전 781–771년 | ||||
전임자 | 동주 선왕 | ||||
후계자 | 동주 평왕 | ||||
태어난 | 지공성 기원전 795년 | ||||
죽은 | 기원전 771년 | ||||
배우자 | 심씨부 바오시 | ||||
이슈 | 동주 평왕 보푸 황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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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 주 왕조 | ||||
아버지 | 동주 선왕 | ||||
어머니 | 장황후 |
주왕 유(중국어: 周幽王; 핀인:조우요우완; 기원전 795년–771년), 개인명 지공성은 중국 주나라의 12대 왕이자 서주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기원전 781년부터 771년까지 통치했다.
역사
기원전 780년에 큰 지진이 관중(關中)을 덮쳤다. 보양푸(伯陽fu)라는 이름의 목사는 이것을 주나라의 멸망을 예고하는 징조로 여겼다.
기원전 779년, 바오시라는 후궁이 궁에 들어가 유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그에게 보푸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1] 유왕은 심왕후와 이지우 태자를 폐위시켰다. 그는 바오시를 새로운 여왕으로, 보푸를 새로운 왕세자로 삼았다.[2]
바오시는 쉽게 웃지 않았다고 한다. 유왕은 여러 방법을 시도하고 실패한 후, 콴롱 유목민들이 공격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도록 경고 비콘에 불을 붙이고 귀족들을 속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왕을 즐겁게 하려고 했다. 귀족들은 바오시에게 비웃음을 당하기 위해 성에 도착했다. 유왕이 바오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경고 비콘을 남용하여 귀족들의 신뢰를 잃었다.[3]
선왕후의 아버지인 선왕후는 딸과 손자 이지우 황태자의 퇴정에 격분하여 취안룽과 함께 유왕의 궁전을 공격하였다. 왕 유는 이전에 학대받았던 비콘을 사용하여 그의 귀족들을 불렀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결국 유왕과 보푸가 살해되고 바오시가 붙잡혔다.[4]
유왕이 죽은 후, 선왕의 마퀘스, 쩡의 마퀘스, 쉬의 원공 등 귀족들은 폐위된 이지우 왕자를 주나라의[5] 핑왕으로 옹립하여 주나라를 이어갔다. 국도 하오징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취안룽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에, 기원전 771년에 주 핑왕은 수도를 동쪽으로 뤄양으로 옮겨 동주 왕조를 시작하여 춘추시대를 맞이하여 300년 이상 지속되었다.[6]
문학에서.
전통적인 마오쩌둥 해설에서는 이 해석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군법회의 찬송가 '카이슈' ( shu菽)는 봉건 영주들의 존경을 낭비하고 굴욕감을 주는 유왕을 비판한다고 한다.[7]
가족
퀸즈:
- 선왕후(善王后)는 선후(先後)의 딸로, 이지우 태자의 어머니인 선씨(善氏)의 장씨(江氏)이다.
- 두보의 딸 바오( clan姒 祁姓, 기원전 791년–771년) 제씨 가문의 두씨족인 바오시는 기원전 779년에 결혼하였고, 보푸 태자의 어머니였다.
아들:
조상
동주 이왕(기원전 899–892년) | |||||||||||||||||||
동주 이왕(기원전 878년) | |||||||||||||||||||
왕보장 | |||||||||||||||||||
동주 리왕(기원전 890–828년) | |||||||||||||||||||
왕지왕 | |||||||||||||||||||
동주 선왕(기원전 782년) | |||||||||||||||||||
선장 | |||||||||||||||||||
동주 유왕 (기원전 771년) | |||||||||||||||||||
제 구이 공작(기원전 902년) | |||||||||||||||||||
제 시안 공작 (기원전 850년) | |||||||||||||||||||
제 우공 | |||||||||||||||||||
제 장왕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