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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Kim Jong Un
김정은
김정은
2019년 김
조선노동당 총비서[a]
가임직
2012년 4월 11일
앞에김정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
가임직
2016년 6월 29일
제1부통령최룡해
부통령
프리미어
앞에본인(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한국인군 최고사령관
가임직
2011년 12월 30일
앞에김정일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재직중
2012년 4월 11일 ~ 2016년 6월 29일
부회장
프리미어
앞에김정일 (위원장)
성공자본인(국무총리로서)
최고인민회의 위원
재직중
2009년 4월 9일 ~ 2019년 4월 11일
선거구백두산 111
인적사항
태어난 (1982-01-08) 1982년 1월 8일 (42세) (북한 소식통 기준)
평양, 북한
정당조선노동당
배우자.
(m. 2009)
아이들.2(미확인), 김주애 확진자 1명
부모님
친척들.김씨 가문
모교
서명
병역
얼라이언스북한
지점/서비스한국인의 군대
근속연수2010-현재
순위공화국 원수
한국이름
조선 ŭ
한차
로마자 표기법 개정김정(-)은
맥쿤 라이샤워김정 ŭ인
IPA[김 ʑɔŋ]ɯː][b]
중앙기관회원권
  • 2012-현재: 조선노동당 제6기, 제7기, 제8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장
  • 2012-현재: 조선노동당 제6기, 제7기, 제8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2010-현재: 조선노동당 제6·7·8기 중앙위원회 위원

기타 사무실 개최
  • 2012-현재: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 2010년 ~ 2012년 :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Kim Jong Un[c][d] (English: /ˌkɪm ɒŋˈʊn, -ˈn/;[2] Korean: 김정은; born 8 January 1982 or 1983)[e] is a North Korean politician who has been supreme leader of North Korea since 2011 and the leader of the Workers' Party of Korea (WPK) since 2012.[f] 그는 1994년부터 2011년까지 북한의 두 번째 최고 지도자였던 김정일고용희의 셋째 아들입니다. 그는 1948년 북한 수립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설립자이자 첫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손자입니다.

2010년 말부터 김 위원장은 북한 지도부의 후계자로 여겨졌습니다. 2011년 12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국영 TV는 김연아를 "위대한 후계자"로 발표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조선노동당 총비서국무위원장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미국에서 가장 높은 의사결정 기관인 WPK 정치국 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합니다. 2012년 7월, 김정은한국인군최고 원수로 승진하여 국군 최고사령관의 자리를 굳혔습니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그를 종종 "존경하는 김정은 동지" 또는 "마샬 김정은"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1960년대부터 김일성의 정책과 유사한 병진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제와 핵무기 개발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군사지도부를 희생시키면서 당의 권력을 확대하는 WPK의 구조도 부활시켰습니다.

김정은은 북한을 전체주의 국가로 통치하고 있으며, 그의 지도력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같은 인격 숭배를 따르고 있습니다. 2014년 유엔 인권 이사회 보고서는 김씨가 반인도적 범죄로 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몇몇 북한 관리들의 숙청과 처형을 명령했습니다. 또 2017년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이복형 김정남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의 소비자 경제 확대, 건설 프로젝트, 관광 명소 등을 주재해 왔습니다.

김정은은 미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확대했고, 이것은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한국과의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2018년과 2019년에 김정은은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참가하여 비핵화에 대한 진전 없이 결국 협상이 결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두 나라 사이에 잠깐의 해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북한이 2022년 5월까지 확진자를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의 COVID-19 범유행과 싸우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 주장을 의심합니다.

초기생

북한 당국과 관영 매체들은 김정은이 1982년 1월 8일생이라고 밝혔지만,[3] 실제 날짜는 1년 뒤인 것으로 정보 당국은 보고 있습니다.[4] 1982년은 할아버지 김일성의 70번째 생일이고 아버지 김정일의 공식적인 출생 후 40년이 지난 시점이라는 상징적인 이유로 김정일의 공식적인 출생연도가 바뀐 것으로 생각됩니다.[5]

김정은은 고용희김정일의 세 자녀 중 둘째입니다; 그의 형 김정철은 1981년에 태어났고, 그의 여동생 김여정은 1987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6][7] 그는 1948년 북한의 수립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창시자이자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손자입니다.[8] 김정일은 아버지가 소련에서,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북한 주민으로 태어난 최초의 지도자입니다.

김정일의 자녀들은 모두 스위스에 살았고, 제네바에 얼마 전부터 살았던 막내아들 두 명의 어머니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9] 첫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은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스위스 굼리겐에 있는 베른의 사립 국제학교에 "철팍" 또는 "박철"이라는 이름으로 다녔다고 합니다.[10] 그는 수줍음이 많고, 반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농구 팬이었다고 묘사되었습니다.[11] 그는 경호원으로 생각되는 나이 많은 학생에 의해 교관을 받았습니다.[12] 그의 형 김정철도 그와 함께 학교에 다녔습니다.[13]

김정은이 다녔던 스위스 쾨니츠의 리베펠트-슈타인stein리 공립학교.

이후 김정은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베른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의 아들로 베른 인근 쾨니즈에 있는 리베펠트 슈타인h리 주립학교에 '빠쿤' 또는 '운팍'이라는 이름으로 다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국은 그 기간 동안 북한에서 온 한 학생이 이 학교에 다녔다고 확인했습니다. 김 씨는 처음에는 외국어 어린이를 위한 특별반에 다녔고 이후 6학년, 7학년, 8학년, 마지막 9학년의 정규반에 참석해 2000년 가을 갑자기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는 농구를 좋아하는 통합적이고 야망 있는 학생으로 묘사되었습니다.[14] 하지만 성적과 출석률이 저조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15] 리철 스위스 주재 북한 대사는 그와 친분이 두터워 멘토 역할을 했습니다.[9] 김정일의 반 친구 중 한 명은 기자들에게 그가 북한 지도자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고 말했습니다.[16][17] 일부 보도에 따르면, 김군은 여학생들에게 어색하고 정치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지만,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미국 전미 농구 협회마이클 조던에게 매료된 수줍음 많은 아이로 급우들에 의해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한 친구는 그가 코비 브라이언트토니 쿠코치와 함께 있는 김연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18]

2012년 4월,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1991년 또는 1992년부터 거주해 왔다는 새로운 문서가 밝혀졌는데, 이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이른 것입니다.[19]

프랑스 리옹대 해부인류학연구소가 1999년 리베펠트 슈타인ö리 학교에서 찍은 김 위원장의 사진과 2012년 김정은의 사진을 비교한 결과 얼굴이 95%의 일치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2009년 김정은의 학교 친구들이 "시카고 불스의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의 연필 그림을 꼼꼼하게 그리며 몇 시간을 보냈다"고 회상했다고 보도했습니다.[21] 그는 농구와 컴퓨터 게임에 집착했고,[18][22] 성룡 액션 영화의 팬이었습니다.[23]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김정은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평양의 대표적인 장교 양성 학교인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24] 김정은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물리학 학위를 취득했고, 김일성종합군사대학에서 육군 장교로 학위를 취득했습니다.[25][26]

2018년 2월 말, 로이터 통신은 김씨와 그의 아버지가 브라질에서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위조 여권을 사용하여 여러 나라에서 비자를 신청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두 개의 10년 여권에는 "프라하 주재 브라질 대사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김정은 여권에는 '요제프 p'이라는 이름과 1983년 2월 1일 생년월일이 기록돼 있습니다.

수년간 확인된 그의 사진 한 장만이 북한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11살이던 1990년대 중반에 찍힌 것으로 보입니다.[28] 때때로, 그의 다른 추정 이미지들이 표면화되기도 했지만 종종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29] 공식 직책을 부여받고 북한 한국인을 공개적으로 소개받기 직전인 2010년 6월에야 김 위원장이 스위스에서 학교를 다닐 때 찍은 사진이 더 많이 공개됐습니다. 2010년 9월 30일에 공개된 단체 사진은 그가 아버지와 두 자리 떨어진 맨 앞줄에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그가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장면이 녹화되었습니다.[31]

계승

2010년 이전 당대회 추측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은 가장 유력한 성공 후보였지만 2001년 도쿄 디즈니랜드를 방문하기 위해 위조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적발된 이후 낙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32] 김정남은 지난 2017년 말레이시아에서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의해 피살됐습니다.[33]

김정일의 전 개인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 씨가 아버지의 후계자로 유력시된다며 [34]친분이 두터운 김정은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후지모토는 또 정운이 형인 김정철보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정철은 성격이 너무 여성적인 반면 정운은 "아버지와 꼭 닮았다"고 추론했습니다.[35] 게다가, 후지모토는 "권력을 이양받으려면 김정은이 최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신체적 재능을 가지고 있고, 술을 많이 마시고 절대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후지모토에 따르면 정은 입생로랑 담배를 피우고 조니워커 위스키를 좋아하며 메르세데스-벤츠 600 럭셔리 세단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36] 후지모토는 김정은이 18세 때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는 여기에 농구를 하고, 말을 타고, 제트스키를 타고, 함께 신나게 놀고 있다"고 물었던 일화를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의 삶은 어떻겠습니까?"[35] 2009년 1월 15일, 연합뉴스는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보도했습니다.[32][37]

2009년 3월 8일, BBC 뉴스는 김정은이 북한고무 도장 의회 최고인민회의에 2009년 선거 투표에 참여했다고 보도했습니다.[38] 이후 보도에 따르면 의원 명단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39] 이후 북한군의 한 부서인 국방위원회에서 중간급으로 승진했습니다.[40]

2009년부터 김 위원장이 아버지 김정일의 뒤를 이어 북한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으로 외신들은 파악하고 있습니다.[41] 그는 "찬란한 동지"로 명명되었습니다.[42] 그의 아버지는 또한 해외 대사관 직원들에게 그의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43] 북한 주민들이 김정일과 김일성 관련 찬양곡과 비슷한 방식으로 김정은에게 새로 작곡된 '칭찬의 노래'를 부르도록 유도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44] 이후 지난 6월, 김 위원장은 중국 지도부에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중국을 비밀리에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45] 중국 외교부는 이번 방문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강력히 부인했습니다.[46]

2009년 9월, 김정일은 선전전 끝에 후계구도에 대한 지지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47]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천안함 폭침[48] 연평도[49] 포격 등에 관여해 군사적 신망을 강화하고 아버지로부터 성공적인 정권 이양을 도모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50]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김정은은 2010년 9월 27일 평양에서 열리는 드문 조선노동당 대회를 하루 앞둔 시점에 미국의 4성 장군에 해당하는 대장으로 임명됐는데,[51] 이는 북한 매체들이 그를 이름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며, 군사 경험도 전혀 없습니다.[52] 홍보에도 불구하고, 김씨의 확인 가능한 초상화를 포함한 더 이상의 세부 사항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53] 2010년 9월 28일, 는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임명되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54]

2010년 10월 10일, 김정은은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이는 차기 노동당 당수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인시켜 준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이 행사는 전례 없는 국제 언론의 접근이 허용되어 김정은의 존재의 중요성을 더욱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55] 2011년 1월, 북한은 김정은의 매제 장성택오극렬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친인척 약 200명을 모두 구금 또는 처형으로 숙청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5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2012년 4월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절하는 사람들
김정은 부자 초상화 (평양 아리랑 축제 매스게임)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했습니다. 김 위원장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 실제로 전권을 장악할 것인지, 그리고 새 정부에서 그의 정확한 역할이 무엇인지는 그의 사후에 명확하지 않았습니다.[57] 일부 분석가들은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장성택이 섭정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은은 너무 경험이 부족해서 당장 나라를 이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58][59]

김정은은 아버지의 사망 이후 '주체혁명 대의의 위대한 [60]계승자', '당·군·인민의 탁월한 지도자',[61] '김정일 최고사령관과 동일한 존경하는 동지'[62]로 칭송받으며 김정일 장례위원장에 올랐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을 "하늘에서 태어난 위대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만이 누렸던 선전 용어입니다.[63] 노동당도 사설을 통해 "김정은을 우리의 최고사령관, 우리의 지도자라고 부르겠다고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한다"고 밝혔습니다.[64]

2011년 12월 24일 한국인군 최고사령관으로 공식 임명되었고, 2011년 12월 3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존경하는 김정은을 courte으로 선포하면서 공식 임명되었습니다. WPK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한국인군 최고사령관직 맡음"

2012년 평양 혁명열사묘역에서 경례하는 북한 군인들

2011년 12월 26일, 북한 노동신문은 김정은이 아버지의 사망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67] 그리고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68]

2012년 3월 27일 김 위원장은 제4차 조선노동당 대회에 선출되었습니다. 4월 11일, 그 회의는 당헌에서 총서기직을 제외하고 김정일을 당의 "영원한 총서기"로 임명했습니다. 이어 대회에서는 김정은을 당 대표로 선출했습니다. 김정은은 아버지의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직과 아버지의 옛 정치국 위원장직도 맡았습니다.[69] 김정은은 대회에 앞서 한 연설에서 "김일성주의-김정일주의로 전 사회를 감동시키는 것이 우리 당의 최고 프로그램"이라고 선언했습니다.[70] 2012년 4월 11일 제12기 최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임명되었습니다.[71]

2012년 7월 [72]김정은은 현역 최고위급인 원수(원수)로 승진했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후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와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공동으로 결정했다고 발표했습니다.[73]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갖고 있던 태원수(대총사령관 또는 장군시모)가 2012년 2월 아버지 김정일에게 추서된 것이 유일합니다.[72][73] 이번 승진은 북한군 최고지도자로서의 김 위원장의 역할을 확인시켜 준 것으로 리용호 총참모장이 현영철로 교체된 지 며칠 만에 이뤄졌습니다.[73]

외부이미지
image icon 위성사진은 산비탈에 있는 한국어로 "김정은 장군님, 빛나는 태양 만세!"라는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2014년 3월 9일, 김정은은 북한의 단원제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반대 없이 출마했지만, 유권자들은 찬반 투표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기록적인 투표율이 있었고,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의 고향인 백두산 지역에서 모두 "예"라고 투표했습니다.[74] 이후 최고인민회의는 그를 초대 국방위원장으로 선출했습니다.[75]

개혁

김 위원장은 북한의 내부 권력 역학을 변화시켜 WPK의 영향력을 높이면서도 군사력은 감소시켰습니다.[76] 2016년 5월, 그는 1980년 이후 처음으로 2016년 5월 WPK의 제7차 대회를 조직했습니다.[77] 이 대회에서 김 위원장은 WPK의 제1비서를 대신한 WPK의 의장이 되었습니다.[78]

최고인민회의(SPA)는 2016년 6월 헌법을 개정하여 전쟁 시를 제외하고는 국방위원회(NDC)를 폐지하고, '국가권력의 최고정책 중심의 지도기관'으로 명명된 국무위원회(SAC)로 대체했습니다. 위원장은 2016년 6월 29일에 국무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정들은 군의 영향력이 감소했음을 나타냈고, 새로 설립된 SAC에는 NDC보다 더 많은 민간인과 더 적은 수의 군 구성원들이 포함되었습니다.[76]

2019년 북한 국회의원 선거 때 김정은은 SPA 후보로 참여하지 않은 최초의 북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79] 헌법은 2019년 SPA에 의해 추가로 개정되었습니다.[80] 주체선군에 대한 언급은 김일성주의-김정일주의로 대체되었고, 그리고 북한 군대의 임무는 "위대한 김정은 동지가 이끄는 당 중앙위원회를 죽음까지 수호하는 것"이라고 헌법에 명시되었고, 이것은 김정은이 현재 권력을 잡고 있는 최초의 북한 지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국무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지도자'로 수정되면서 사실상 김정은을 국가원수로 만들었고,[80] 종전에는 SPA 주석이 사실상 국가원수였습니다. 의장은 "모든 한국인의 supreme 대표"이자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2021년 1월, WPK는 제8차 대회를 개최했고, 그곳에서 김 위원장은 9시간 동안 경제 계획 수행의 실패를 인정하고 주요 관리들의 단점을 비난하는 보고서를 전달했습니다.[82] 그는 또한 북한의 핵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미국을 북한의 주적으로 대했습니다.[83] 김정은이 WPK 위원장을 교체한 WPK 총비서로 선출됐습니다.[84] 이전에 총서기 직함은 2012년 김정일에게 "영원히" 수여되었습니다.[85] 의회는 또한 WPK가 공산주의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86] 통제위원회는 폐지되었고, 중앙감사위원회가 그 임무를 맡았습니다.[87] 대회 배경에 통상적으로 그려진 김일성과 김정일 초상화가 포함되지 않은 점도 특이해 김정은이 나라 정치에 이름을 날리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습니다.[76]

위원장 체제에서 북한은 '정상국가'임을 내세우려는 노력으로 연합뉴스가 지목한 곳에 여러 사무소와 기관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인민무력부는 2021년 1월 국방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관영 언론들은 2021년 2월부터 김 위원장을 영어 기사에서 '위원장'이 아닌 '국무위원장'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88]

의회는 군대에 대한 WPK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군대의 힘을 더욱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7차 의회에서 719명이었던 군사 대표단의 수는 408명으로 줄었습니다.[89] 정치국원은 28명에서 30명으로 늘었지만, 현재 군 정예원은 8명에서 6명으로 줄었습니다. 조선인민당 위원회와 총정치국(GPB)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위원회의 순위는 이전에 그들보다 높았지만 이제는 도당 위원회와 같아졌습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더 이상 중앙위원회와 동등하지 않은 반면 중앙군사위원회는 군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부여받았습니다.[89] "선군 정책"도 "민선 정치"로 대체되면서 헌장에서 삭제되었습니다.[76]

2021년 11월, 남한 국가정보원은 북한 정부가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이념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으로 "김정은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분석가 켄 가우스(Ken Gause)는 이것을 김 위원장이 "이제 정권에 자신의 도장을 확실히 찍을 준비가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90]

정부에서의 역할

북한 헌법에 따르면, 김정은은 김독훈 총리,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주석과 함께 북한 정부의 행정부를 이끄는 삼두정치의 일부입니다. 김정은은 군대를 지휘하고, 김독훈은 내각을 이끌고 내정을 처리하며, 최룡해는 입법부를 지휘합니다. 그러나 헌법에 따르면 김정은은 세 사람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며, 헌법은 그의 직책을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1998년부터 NDC 의장직은 헌법적으로 "국가의 최고위직"으로 규정되었고,[91] 정권에 의해 제정된 헌법 개정안은 NDC(최초) 의장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로 명시적으로 지명했습니다.[92] 하지만 김 위원장의 실제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분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93][94][95]

리더십 스타일

2012년 7월, 김정은은 모란봉악단 공연에 참석함으로써 아버지로부터 문화정책의 변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콘서트는 서양, 특히 미국의 여러 대중 문화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이 행사를 자신의 아내를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해 사용했는데, 이는 북한에서는 전례가 없는 조치입니다.[96] 같은 해 김정일의 개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가 북한을 방문해 "평양의 가게들은 상품들로 가득했고 거리의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습니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김정은 때문입니다."[97]

분석가들에 따르면, 김정은은 김일성의 인격 숭배와 대중의 향수를 이용하기 위해 그의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합니다.[98] 2013년, 김정일은 그의 첫 신년 연설을 할 때 그의 할아버지의 스타일을 모방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은 그의 17년간 그의 권력 기간 동안 텔레비전 연설을 한 적이 없었던 그의 아버지 김정일의 접근 방식에서 벗어났습니다.[99] 그는 또한 아버지보다 더 접근하기 쉽고 개방적으로 보였고, 젊은 사람들과 나이 든 사람들과 팔을 껴안고 연결했습니다.[98] 그는 공식 석상에서 벌초, 말 타기, 탱크 운전, 롤러코스터 타기, 정보 기술 사용 등 아버지나 할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으로 보입니다.[98]

평양 사람들은 북한 TV를 통해 김정은을 봅니다, 2015

2012년 4월, 위성 발사가 실패했을 때, 정부는 처음으로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했습니다.[98] 2014년 5월 평양 아파트 붕괴 사고 이후 김정은은 인명 피해에 매우 화가 났다고 합니다. 한국의 관영 통신사인 조선중앙통신이 발표한 성명서는 "큰 위로와 사과"라는 드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BBC는 익명의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김정은이 "고통을 느끼며 을 새웠다"고 전했습니다.[100] 건물의 높이와 사상자 수는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언론 보도로 23층짜리 건물이라며 붕괴 사고로 100명 이상이 숨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습니다.[101]

인격숭배

김정은은 자신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인격 숭배와 연관시키는 상징적인 행위를 자주 합니다.[102][103] 이들처럼 김정은도 정기적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다양한 현장에서 '현장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104] 북한 관영 매체들은 그를 종종 "존경하는 김정은 동지"[105][106] 또는 "마샬 김정은"이라고 부릅니다.[107][108]

2012년 1월 9일, 한국인군은 금수산태양궁전 앞에서 김정은을 기리고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다른 언어로 번역된 김정은의 작품들을 선별한 작품들

2012년 4월 15일, 김일성 100주년 기념 열병식 동안, 김정은은 첫 대중 연설인 "선군기치를 높이 들고 마지막 승리를 향해 역동적으로 나아가자"를 했습니다.[110] 그 연설은 그에게 바치는 찬송가 "마지막 승리를 향하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111]

2012년 11월, 위성 사진들은 "김정은 장군님, 빛나는 태양 만세"라고 쓰인 양강도의 산비탈에 새겨진 반 킬로미터 길이의 선전 메시지를 보여주었습니다.[112]

경제정책

김정은은 1960년대부터 할아버지 김일성의 정책과 유사한 병진정책을 추진하여 국가경제를 핵개발과 병행하여 발전시켜 왔습니다.[113][114][115] 2013년에는 종합적인 경제 대책인 "사회주의 기업 책임 경영 제도[ko]"가 도입되었습니다.[116] 이 조치는 "사회주의적 분배제도의 적절한 시행을 통해 기업 활동을 자율적으로 하고 노동에 대한 의지를 고양할 수 있는 일정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기업의 자율성을 높였습니다. 그해 경제정책의 또 다른 우선순위는 포존(식물원) 책임제가 시행된 농업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은 일부 집단 농장에서 생산량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116]

북한 매체들은 기업들이 경제 발전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이고 진화적인 행동'을 적용하는 '유연한 집단주의 체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보고서들은 경영을 개혁하고, 경제 주체들의 자율성과 인센티브를 늘린다는 김 위원장의 일반적인 경제 정책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5·30 조치"로 알려진 이 일련의 개혁은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사회주의 소유권과 "지도와 관리에 있어서 객관적인 경제법"을 재확인합니다. 이 조치의 다른 목적은 국내 제조 제품의 시장 판매 가능성을 높이고, 민간 부문에 국방 혁신을 도입하고, 국제 무역을 활성화하는 것입니다.[117]

평양에는 건축 붐이 일었고, 그 도시에 색채와 창의적인 건축 양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과거에는 기념물 건설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김정은 정부는 놀이공원, 수생공원, 스케이트장, 돌핀아리움, 스키장 등을 건설했습니다.[118][119] 김씨는 엔터테인먼트, 화장품 등 소비문화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습니다.[98] 그는 또한 국가의 관광 명소 건설을 감독했습니다.[120]

김 위원장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식량 상황이 악화되었지만 북한의 식량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121] 그는 2023년 3월 WPK 전체회의에서 "모든 농장에서 수확량을 늘리는 데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농업 생산을 활성화할 것을 주문했습니다.[122]

숙청 및 실행

모든 대북 보도가 그러하듯 숙청과 처형 보도는 검증이 어렵습니다.[123] 2013년 김정은이 전 여자친구인 가수 현송월을 음란물법 위반 혐의로 처형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124][125] 2016년 5월, 분석가들은 한국이 올해 초에 처형되었다고 보고한 리용길 장군이 사실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126]

2013년 12월, 김정은의 삼촌 장성택이 배반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습니다.[127][128] 장씨는 총살형을 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합은 다수의 익명의 소식통에 따르면 김정은이 장성택의 가족 구성원들을 처형함으로써 가까운 친척들의 자녀와 손자들을 포함한 그의 가족에 대한 "광범위한 처형"을 통해 장성택의 존재의 모든 흔적들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말했습니다. 김 위원장의 숙청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장 씨의 여동생 장계선 씨와 남편이자 주쿠바 대사인 존용진 씨, 장 씨의 조카이자 주말레이시아 대사인 장용철 씨 등입니다. 조카의 두 아들도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129] 장성택의 제거 당시 "장성택 집단의 발견과 숙청은 우리 당과 혁명 서열을 더욱 순수하게 만들었다"[130]고 발표했고, 2013년 12월 12일 그의 처형 이후 관영 언론은 "최고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모든 이들을 결코 사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131]

오상혼은 지난 2014년 정치숙청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 정부의 인민보안부 부부장. 한국 신문 조선일보에 따르면, 오씨는 김정은의 삼촌 장성택을 지원하는 역할로 화염방사기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132]

인권 침해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김정은은 북한을 전체주의 국가로 통치하고 있습니다.[5][44] 2013년 1월 나비 필레이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은 김 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조사를 촉구했습니다.[133] 마르주키 다루스만 유엔 특별보고관의 2013년[134] 2월 북한 인권상황 보고서는 유엔 조사위원회를 제안했습니다.[135] 조사위[136] 보고서는 2014년 2월 발간돼 김 씨가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가능성 있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137]

2016년 7월, 미국 재무부는 김씨에게 개인적인 제재를 가했습니다. 비록 그가 인권 유린에 연루된 것이 그 이유로 꼽혔지만,[138] 관계자들은 그 제재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습니다.[139] 2017년 6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 방문 중 투옥된 미국인 학생 오토 웜비어의 사망 이후 김정은의 "잔인한" 정권을 비난하고 김 위원장을 "광인"으로 묘사했습니다.[140] 하지만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웜비어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믿었다고 말했습니다.[141]

암살 시도 혐의

2012년, 김 씨가 이동하려던 경로 근처에 위치한 류경원의 향나무 아래에서 기관총이 발견되었습니다. 암살 시도의 일부로 [142]추정됩니다

2017년 5월, 북한 정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남한 국가정보원(NIS)이 방사능과 나노 독성을 동시에 가진 '생화학무기'로 김씨를 암살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일하던 북한 벌목공을 고용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효과가 몇 달 늦춰졌을 [143]겁니다 북한은 암살 기도에 연루된 모든 사람의 신병 인도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144]

핵무기 개발

2013년 8월 30일 평양에서 열린 꽃 전시회에 전시된 은하 9호 로켓 모형

김정은 체제에서 북한은 2013년 2월, 2016년 1월과 9월, 2017년 9월에 핵실험을 하는 등 핵무기 개발을 계속해왔습니다.[145] 북한은 2021년 기준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보다 4배 많은 120발 가까운 미사일을 시험했습니다.[98][76] 2023년까지 이는 총 226개로 증가했습니다.[146] 여러 분석가들은 북한이 핵 무기가 공격을 억제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으며, 북한이 핵 전쟁을 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습니다.[147] RAND Corporation의 한 선임 연구원에 따르면, 김정은은 핵무기가 체제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148] 2022년, 북한은 약 45-55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149]

2012년 김일성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적들이 핵폭탄으로 우리를 협박할 수 있는 시대는 영원히 지났다"고 말했습니다.[98] 2013년 3월 31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그는 북한이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을 동시에 수행하는 새로운 전략 노선"을 채택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150]

김정은은 2016년 제7차 WPK 대회에서 "공격적 적대세력이 핵무기를 사용해 우리 주권을 침범하지 않는 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151]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도 북한은 미국 주도의 공격에 대해 "선제적"공격을 위협했습니다.[152] 2015년 12월, 김정은은 그의 가족이 "주권과 국가의 존엄성을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 자주적인 A-폭탄과 H-폭탄을 터뜨릴 준비가 된 강력한 핵무기 국가로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153]

2017년 1월 2일 신년 연설에서 김정은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하기 위한 준비의 "마지막 단계"에 [154]있다고 말했습니다. 7월 4일, 북한은 미국의 독립기념일 기념식에 맞춰 ICBM 화성-14형의 첫 번째 공개 비행 시험을 실시했습니다.[155] 9월 3일, 이 나라는 여섯 번째 핵실험을 실시했습니다.[156] 북한은 2017년 11월 28일 화성-15형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는데, 이 미사일은 이론상 미국 본토 전역에 도달할 수 있는 북한이 개발한 최초의 탄도미사일이 됐습니다.[157][145] 이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일련의 제재를 제정했습니다.[158]

2022년까지 북한은 핵무기가 "선제타격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거나 사용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정책적 입장을 밝혔으나, "우리에 대한 군사력에 의존하려는 시도"가 있을 경우 북한은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사전에 활용해 응징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최초 사용 금지 정책이 아니었습니다.[159] 정책은 2022년 최고인민회의에서 최고지도부나 핵지휘통제체계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경우 적에 대한 핵 공격이 자동으로 개시된다는 내용의 법률이 승인되면서 바뀌었습니다. 또 김정은이 사망할 경우 핵타격 권한을 고위 관리에게 이양한다는 내용도 새 법에 담겼습니다.[160][161]

대외관계

중국

북한의 오랜 가장 가까운 파트너인 북한과 중국 사이의 관계는 그의 핵무기 프로그램 때문에 처음에는 김정은 정권하에서 악화되었습니다. 김 위원장은 2012년 11월 30일 리장궈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1위 부위원장을 만나 "제18차 중국공산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