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바로크

Italian Baroque

이탈리아 바로크(또는 바로크)는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걸친 이탈리아의 역사와 예술에 있어서 양식주의 시대다.

역사

17세기 초는 로마 카톨릭 신자들에게 변화의 시기를 맞았는데, 이는 신도로서의 힘과 창조적인 정신의 지능을 상징한 것이다. 16세기 초의 개신교 개혁에 대응하여,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반개혁으로 알려진 새로운 생활 방식인 복원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반개혁의 목적은 세기에 앞서 개신교 신자들이 도전한 학대의 일부를 교정하기 위한 것이었다.[1] 교회 내에서는 이탈리아 사회에 새로운 가톨릭 문화가 강요되었다. 교황 바오로 3세가 부과한 트렌트 평의회에서 출발했는데, 교황 바오로 3세가 가톨릭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성도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함께 모인 추기경 위원회였다.[2] 이는 성서의 진리와 이상을 전달하기 위한 예술가의 위탁 작업을 위해 교회가 수립한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세속적 건설

새로운 세속적 건설은 선구적인 종교질서의 확립에서 비롯되었다. 1524년에서 1575년 사이에 바르나비테, 예수회, 오라토리아, 극장 명령이 생겨났고, 이들의 영향력이 확산되면서 점점 더 많은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1725년까지 로마에만 323개의 교회가 있어 15만 명 미만의 영구 인구를 섬겼다.[1] 이러한 교회 건축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 가톨릭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이러한 종교적 명령의 책임이 되었다. 베네치아에서는 성직자와 문맹 예배자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종교 서적들이 점점 더 많이 인쇄되고 있었고, 미사 중에 기절하여 일상 생활에 그리스도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주고 있었다.[3]

교회는 이제 넓은 아름다움과 장식의 공간인 격려의 장소가 되었다.

그들은 마틴 루터가 이끄는 개신교 개혁의 우상숭배적 성향과 크게 대비되는 흥미로운 이미지를 제공했다.[2]

로마 교회는 예술이 영감을 줄 수 있는 힘을 깨달았고, 따라서 그들은 사치와 전시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들의 의도는 시청자들을 압도하고, 그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더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었다. 시각 공간과 음악, 의식 등이 어우러진 바로크 교회에 들어가는 것은 집단의 충성도를 확보하는 강력한 장치였다. 공간이 크고 아름다울수록 사람들은 더 가고 싶어했다. 복잡한 기하학, 구부러지고 복잡한 계단 배치, 그리고 대규모 조각 장식은 공간 내부의 움직임과 신비감을 제공했다.

일게시는 로마에 세워진 많은 반개혁 교회들 중 첫 번째 교회로, 새로운 예수회 교단의 모교 역할을 했다. 지아코모 바로찌 비뇰라가 설계한 일게스 교회는 곧 반개혁 시대에 예수회 명령이 짓거나 재건한 바로크 교회의 원형이 되었다.[4] 게수의 내부는 로마 고전주의가 대규모의 단순함과 결합했을 때 제공할 수 있는 웅장함에 대한 연구였다. 높은 유리창은 나브의 통 금고에 구멍을 내는데, 돔의 드럼통에 있는 창문 고리는 자연 빛의 빔을 내부로 들여와 상대적으로 어두운 공간에서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만들어낸다.[2]

일 게시의 계획은 앞으로 몇 년 동안 교회의 기준이 되었고,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중앙 계획 교회에서 새로운 것으로 탈피했다. 라틴 십자가의 변화는 공간 내에서 공간 통일의 더 큰 의미를 만들어냈다. 일게스 교회 설계에서 비뇰라는 나베를 넓히고 트란스(transpent)와 측면 채플을 작게 만들어 주공간의 더 좋고 밝은 초점을 만들고 미사에 있는 신도들을 위한 더 많은 공간을 허용했다.[4] 로마에서 교황의 문화적 후원은 주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다양성의 극단적인 경우였다.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수장은 물론, 도시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무엇이 지어졌는지, 누가 그것을 짓도록 위임받았는지 통제했다.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는 교황의 초창기에 카를로 마데르노에게 성 재설계를 의뢰하였다. 베드로 대성당. 미켈란젤로가 브라만테에 의해 시작된 미완성 재건 프로젝트를 처음 손에 넣은 것은 1546년 72세의 나이였다.[3] 미켈란젤로가 죽었을 때, 당시 교황 제단과 베드로의 무덤을 둘러싼 그리스 십자가 구간의 건설은 북 꼭대기까지만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서 이 돔은 1590년 Giacomo della Porta에 의해 일부 개조와 함께 완성되었다.[5] 폴 5세가 마데르노의 봉사를 과감하게 위임하게 된 것은 그리스 십자군 계획을 유지하거나 라틴 십자군 계획으로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종교적, 미학적 이점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이었다. 마데르노의 초기 프로젝트들은 지상계획과 함께 새로운 라틴크로스 솔루션을 만든 롱 나브 추가, 파사드, 포르티코 등 로마와 가톨릭 기독교의 심장과 정신을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가 되었다.[6]

업데이트된 바실리카 내의 과잉 개방 공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 우르반 7세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내부 공간 설계를 의뢰했다. 베르니니는 바실리카의 내부 외관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특히 성 돔 위에 세워진 발다치노(1624–33)가 두드러졌다. 피터. 조각과 건축을 모두 통일된 예술 작품으로 결합하여 공간의 주요 초점 역할을 한다. 형태가 복잡하고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발다치노는 바로크 '스타일'의 훌륭한 예로서 거대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교회와 가톨릭 종교를 미화한다.

이 공간은 건축, 회화, 조각 등을 통해 착각을 일으키려는 시도인 쿼드라투라의 한 예다. 그림과 조각은 끝이 없는 높이와 극적인 구성의 환상을 만들어낸다.

인테리어

피에트로 코르토나는 17세기의 화가들 중 한 사람으로 이러한 환상주의적 화법을 사용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에는 그가 바베리니 가문의 궁전을 위해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의 작품은 시스티나 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 이후 로마에서 행해진 가장 큰 장식 프레스코였다.[3] '옥스퍼드 미술의 동반자'의 저자 해롤드 오스본은 바버리니 궁전을 위해 완성한 'Divine Providence'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이 그림은 천장의 중앙이 하늘에 열려 있고 아래에서 보이는 형상이 그 밖으로 치솟을 뿐 아니라 방안으로 내려오는 듯한 착시주의의 승리라고 말했다.[2]

스투코는 바로크 인테리어의 전체적인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되어 벽 공간, 틈새, 천장을 강화시켰다.

성년 동안 영구 인구의 5배에 달하는 더 많은 성도들을 도시로 불러들인 점점 더 많은 건축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한 것은 교회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이러한 관광 붐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지속적인 취업 기회가 생겼다. 로마의 건설업은 곧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고용주가 되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영감을 주는 건축가들이 현장 훈련을 받았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지역 건축가들이 건축의 필요를 만족시켰지만, 로마에서는 특히 교황국이나 가족 왕조에 의해 건축가들의 프로젝트 작업을 의뢰받았다.[1] 바베리니, 보르게세, 치기, 팸플릴리 등 교황과 관련된 가정들은 매우 부유하고 웅장한 빌라 몇 채가 그들을 위해 지어졌다. 이들 지배가족 간의 경쟁은 그들이 지지하는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세부사항의 정교함에서도 서로 경쟁하는 것을 의미했다.[2]

이탈리아의 더운 기후는 재료 선택과 건축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바닥재에는 타일, 대리석, 돌 등이 사용되었고, 대리석 케이스를 시멘트로 조각하여 만든 테라조 바닥재도 인테리어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 모든 재료들이 공간을 시원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건축계획 수립 시 지리적 위치의 고려도 검토되었다. 예를 들어, 평균적으로, 시칠리아는 토리노보다 매년 1,000시간의 햇빛을 더 받는다.[1] 시칠리아에서 건축된 건축물의 정면은 이탈리아 본토에 있는 현대 건축물과 비교해 볼 때 매우 거대해 보인다. 이와 같은 지역적 변화는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볼 수 있다.

로마 인테리어에서 가구의 역할은 사회적 지위를 강조하고 단순히 인테리어에 장식적인 요소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조각은 가구를 장식하는 데 선호되는 방법이었고, 호두는 일차적인 가구 목재였다.[2] 가구는 조각과 회전이 강조되었는데, 높은 등받이 의자와 탁자에 정교하게 배치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내부를 위한 공간적 관계는 르네상스 시대의 블록 구조에서 보다 열린 계획으로 바뀌었다. 웅장한 비율은 바로크 인테리어의 전형이었다. 살롱은 다시 과장된 장식에 중점을 두고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았는데, 이번에는 서로 다른 높이의 방에 억양을 통합했다. 니케스, 엔테이블, 페디멘트와 벽면 구조물은 공간 내에서 역동성을 만들어냈다.

참고 항목

  • 1800년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연표
  • 마시모 콜렐라, 일바로코 사부도는 메케노티코 에 레토리카를 트롤한다. Maria Giovanna Battista di Savoia Nemours e l’Accademia Reale Letteraria di Torino, Fondazione 1563 per l’Arte e la Cultura della Compagnia di San Paolo, Torino (“Alti Studi sull’Età e la Cultura del Barocco”, IV-1), 2019, pp. 180.
  • 마시모 콜렐라, 디파티차 e tonkazione. 손다기 인터테슈얼리는 «세니아에 있는 Ciro di Pers에 갔다. Trimestrale di Letteratura e Cultura »(Genova), IV, 1, 2019, 페이지 11–37.

참조

  1. ^ Jump up to: a b c d John Varriano, Italian Barriano and Rocococo Architec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2. ^ Jump up to: a b c d e f 블레이크모어, 1997
  3. ^ Jump up to: a b c 홈즈, 1997년
  4. ^ Jump up to: a b Marilyn Stokstad, ed. (2005). Art History. 3rd Edition. New Jersey: Prentice Hall.
  5. ^ Blakemore, 1997, 페이지 143
  6. ^ Charpentrat, Pierre (1967). Living Architecture: Baroque. Oldbourne. OCLC 59920343.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