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군타
Greek junta그리스 왕국 (1967–1973) Βασίλειον τῆς Ἑλλάδος 헬레닉 공화국 (1973–1974) Ἑλληνικὴ Δημοκρατί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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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974 | |||||||||
국가: 자유의 찬가 | |||||||||
자본 | 아테네 | ||||||||
공용어 | 그리스어 | ||||||||
종교 | 그리스 정교회 | ||||||||
정부 | 군사독재하의 통일헌정 군주제(1967~1973) 군사독재하의 통일공화국(1973~1974) | ||||||||
모나크 | |||||||||
• 킹 1967–1973 | 콘스탄티누스 2세 | ||||||||
요르요스 조이타키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 |||||||||
대통령 | |||||||||
• 1973 |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 ||||||||
• 1973–1974 | 파에돈 기지키스 | ||||||||
수상 | |||||||||
• 1967 | 콘스탄티노스 콜리아스 | ||||||||
• 1967–1973 |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 ||||||||
• 1973 | 스피로스 마르케지니스 | ||||||||
• 1973–1974 | 안드라우토풀로스 | ||||||||
역사시대 | 냉전 | ||||||||
1967년 4월 21일 | |||||||||
• 콘스탄티누스 2세 망명 | 1967년 12월 13일 | ||||||||
• 국민투표 | 1968년 11월 15일 | ||||||||
• 공화국 선언 | 1973년 6월 1일 | ||||||||
• 공화국 주민투표 | 1973년 7월 29일 | ||||||||
• 메타폴라이트프시 | 1974년 7월 24일 | ||||||||
통화 | 그리스 드라크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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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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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군정 또는 콜로넬스[a] 정권은 1967년부터 1974년까지 그리스를 통치한 극우 권위주의 군사 군정이었다. 1967년 4월 21일, 예정된 선거를 한 달 앞두고 한 무리의 식민지배들이 관리 정부를 전복시켰고, 이 선거에서 Georgios Papandreou's Centre Union이 승리하는 데 유리했다. 독재 정권은 우익의 문화 정책, 시민 자유에 대한 제한, 정적들의 감금, 고문, 망명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1973년 군주제에 대한 국민투표와 점진적 민주화에 대한 지지 재개를 위한 시도는 강경파인 디미트리오스 이오아니디스의 또 다른 쿠데타로 끝났다. 군정의 통치는 1974년 7월 24일 터키의 키프로스 침공의 압력으로 막을 내렸으며, 메타폴리트피시("정기변화")는 민주주의로 이어졌고 제3 헬레닉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배경
1967년 쿠데타와 이후 7년간의 군사통치는 30년간의 좌우 세력간의 국론분열이 절정에 달한 것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그리스의 축스 점령에 대한 저항의 시기로 추적할 수 있다. 1944년 해방 후 그리스는 내전에 돌입하여 공산군과 새로 돌아온 망명정부에 충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싸웠다.
그리스에 대한 미국의 영향
1944년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발칸반도의 소련 침투를 중단시키기로 결심하고 퇴각하는 독일군의 뒤를 이어 그리스 내전(데켐브리아나 참조)에 영국군이 개입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장황하고 공개적인 약속이었다. 미국은 1947년 그리스 정부를 돕기 위해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했다.
1947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공식화하고, 이들 국가들이 소련의 영향권에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 터키, 이란의 일련의 권위주의 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1] 1945년, 협력자 보안대대의 장교 퇴역군인들은 Ieros Desmos Ellinon Axiomaticon-Holy Bond (Ieros Desmos Ellinon Axiomaticon-Holy Bond of Gries Officer)라고 알려진 비밀 사회로 조직되었다.[2] 1947년부터는 그리스 주요 '민주주의'(즉 반공) 세력 중 하나로 중앙정보국(CIA)[2]으로부터 연간 100만 달러의 총액을 성금으로 지원받았다. Georgios Papadopoulos와 같은 군정의 미래 지도자들 중 몇몇은 IDEA의 일원이었다.[2] 미국과 영국의 원조로 내전은 1949년 공산주의자들의 군사적 패배로 끝났다. 그리스 공산당과 그 부대조직은 불법화되었고 (509/1947년 법)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이 나라를 떠나거나 박해에 직면했다. CIA와 그리스 군은 긴밀하게 협력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그리스가 1952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한 이후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구스 아브라코토스와 클레어 조지 등 저명한 CIA 장교들이 포함됐다. 아브라코토스는 후기 쿠데타에 관여할 대령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3]
1952년 IDEA는 독재만이 그리스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임을 명시한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그리스 학자인 크리스토스 카시메리스가 1949년 공산당이 패배한 이후, 그리스는 1940년대 생활수준이 무너진 후, 상대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고, 그리스 정치는 이를 '아스토니싱'이라고 불렀다. 안정적이었습니다.[4] 카시메리스는 파파도풀로스가 1952년 선언문을 쓰는 데 큰 역할을 했으므로, 결코 그리스가 1952년 공산주의자 인수 직전의 위기에 놓일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앞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객관적인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이라고 주장했다.[4]
그리스는 이란의 동쪽 국경에서 노르웨이의 최북단 지점까지 확장된 나토 방어선의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특히 그리스는 공산 반란을 경험하면서 위험에 처한 것으로 보였다. 특히 새로 설립된 헬레닉 국가정보원(EYP)과 마운틴 레이딩 컴퍼니(LOK)는 미국측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소련군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 외에 좌익 쿠데타를 경계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LOK는 유럽 체재망에 통합되었다.[5]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쿠데타 지원설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6][7] 쿠데타의 타이밍이 CIA를 기습적으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군사독재를 지지했다.[9]
아포타시아와 정치적 불안정
수년간의 보수적인 통치 끝에 중앙연합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로 선출된 것은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제한된 헌법상의 힘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통치권을 얻기 위해, 젊고 경험이 없는 콘스탄티누스 2세는 자유주의 개혁자들과 충돌했다. 1964년 7월 파판드레우는 국왕이 해임하기를 원치 않는 IDEA 소속 장교들을 해임할 뜻을 밝히면서 IDEA 장교들을 보호하는 것이 왕실의 특권이라고 주장했고, 이는 결국 공화주의적 풍미를 지닌 아테네에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10] 국왕은 1965년 파판드레우를 해임하여 "1965년의 아포스타시아"로 알려진 헌법적 위기를 초래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는 반체제 성향의 중앙연합과 보수당 하원의원에 의존하여 여러 차례 정부를 구성하려 한 끝에 이오아니스 파라스케보풀로스 산하의 임시정부를 임명하였고, 1967년 5월 28일 새 선거가 소집되었다. 파판드레우 중앙연합이 제1당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징후가 많았지만, 단일정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금지된 한유총의 대리인으로 의심받던 통합민주좌파와의 연대에 내몰릴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이 가능성은 쿠데타의 구실로 이용되었다.
'세대 쿠데타'
그리스 역사학과 언론인들은 공산주의 체제 전복과 싸운다는 명분 아래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배치되었을 쿠데타인 '세대 쿠데타'[11]에 대한 가설을 세워왔다.[12][13]
1967년 5월 28일로 예정되어 있던 선거를 앞두고, 광범위한 센터 연합의 승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다수의 보수적인 전국 급진 연합 정치인들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조르요스 파판드레우의 아들) 등 좌파 중도파의 정책이 헌법상의 위기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러한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조지 랄리스는, 그러한 "무차별적"의 경우에, 군주제 헌법이 허락한 대로, 국왕은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랄리스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그 생각에 수용적이었다.[14]
미국 외교관 존 데이에 따르면, 워싱턴은 또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아버지의 노환 때문에 차기 정부에서 매우 강력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당시 아테네에 주재하던 미국 외교관 로버트 킬리와 존 오웬스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윌리엄 필립스 탤벗 미 대사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의회 차원의 추가 해법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어떠하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대사관 측은 원칙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것을 부인하고 있다.[15] 탈봇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군 장성들을 만났는데, 군 장성들은 다가오는 선거 전에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비난은 그들을 긴장하게 했고, 그들은 선거 결과를 보고 재심을 결의했다.[15]
1966년 콘스탄티누스는 전 총리 콘스탄티누스 카라만리스에게 그리스로 돌아가 정치에서 이전의 역할을 재개하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띠고 데메트리오스 비트시오스를 파리로 보냈다. 전 군주의 무관한 주장에 따르면 카라만리스는 비트시오스에게 헌법상의 특권처럼 국왕이 계엄령을 내리면 돌아올 것이라고 대답했다.[16] 사이러스 L에 따르면 뉴욕타임스 설즈버거 특파원,[17] 카라만리스는 뉴욕시로 날아가 라우리스 노스타드 USAF 장군과 만나 카라만리스를 그리스의 지도자로 세울 보수 쿠데타를 위한 로비를 벌였다. 술즈버거의 설명은 오로지 자신과 노스타드의 약속의 권위에 달려 있다. 1997년 전 국왕이 설즈버거의 주장을 재차 강조했을 때 카라만리스는 "전 국왕의 진술 내용과 태도가 모두 언급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이에 대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18]
킹이 카라만리스에 대한 술즈버거의 주장을 채택한 것은 그리스의 좌파 언론들이 카라만리스에 대해 "무표하고" "광인"[18]이라고 비난한 것에 의해 비난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누스는 카라만리스의 계획적인 쿠데타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술즈버거의 계정을 독점적으로 언급했으며, 1966년 비츠이오스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두 참가자가 모두 죽고 나서야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밝혀진 바와 같이, 헌법적 위기는 정당이나 궁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중진군 퍼치스트에서 비롯되었다.
4월 21일 쿠데타
1967년 그리스 쿠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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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지원 대상: 미국 홀리 시[필요하다] | |||||||
지휘관과 지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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