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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히너

Cristina Fernández de Kirchner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히너
2007년 공식초상화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재직중
2007년 12월 10일 ~ 2015년 12월 10일
부통령
앞에네스토르 키르히너
성공자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의 부통령
재직중
2019년 12월 10일 ~ 2023년 12월 10일
대통령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앞에가브리엘라 미체티
성공자빅토리아 빌라루엘
국민참의원
재직중
2017년 12월 10일 ~ 2019년 12월 10일
선거구부에노스 아이레스
재직중
2005년 12월 10일 ~ 2007년 11월 28일
선거구부에노스 아이레스
재직중
2001년 12월 10일 ~ 2005년 12월 10일
선거구산타크루즈
재직중
1995년 12월 10일 ~ 1997년 12월 3일
선거구산타크루즈
아르헨티나의 영부인
인롤
2003년 5월 25일 ~ 2007년 12월 10일
대통령네스토르 키르히너
앞에힐다 곤살레스 데 두할데
성공자네스토르 키르히너
(퍼스트 젠틀맨으로)
국가 부관
재직중
1997년 12월 10일 ~ 2001년 12월 10일
선거구산타크루즈
제헌 전당대회 위원
재직중
1994년 5월 1일 ~ 1994년 8월 22일
선거구산타크루즈
산타크루즈 영부인
인롤
1991년 12월 10일 ~ 2003년 5월 25일
주지사네스토르 키르히너
앞에마르타 아라나 데 가르시아
성공자마리아 글로리아 로스 데 이카즈리아가
산타크루즈 주 부관
재직중
1989년 12월 10일 ~ 1995년 12월 10일
선거구Río Gallegos
리오 갈레고스의 영부인
인롤
1987년 12월 10일 ~ 1991년 12월 10일
의도네스토르 키르히너
앞에소피아 비시치 데 세페르니크
성공자에바 마리아 앙리케스 데 마르티네스
인적사항
태어난
크리스티나 엘리자베트 페르난데스

(1953-02-19) 1953년 2월 19일 (70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톨로사
정당정의론자
기타정치
계열사들
배우자.
(m.1975년, 2010년 사망)
아이들.2, 막시모를 포함하여
모교라플라타 국립 대학교
직종.
  • 정치인
  • 변호사
서명

크리스티나 엘리자베스 페르난데스 데 키르히너(Christina Elizabet Fernandez de Kirchner) 스페인어 발음:[kɾisˈtina eˈlisaβet feɾˈnandes ðe ˈkiɾʃneɾ]; born Cristina Elisabet Fernández[a], 19 February 1953), often referred to by her initials CFK,[1][2][note 1] is an Argentine lawyer and politician who served as president of Argentina from 2007 to 2015 and later as vice president of Argentina from 2019 to 2023 under President Alberto Fernández,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Néstor Kirchner)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재임한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사벨 페론에 이어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여성 대통령이자 아르헨티나 최초의 여성 대통령입니다. 이념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페론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라고 부르며 정치적 접근법을 키르히네리즘이라고 합니다.[5][6]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라플라타에서 태어나 라플라타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함께 파타고니아로 이주했습니다. 그녀는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그녀의 남편은 리오 갈레고스의 시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녀는 1995년 전국적인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그녀의 남편이 산타크루즈 주의 주지사로 선출되는 동안 논란이 있었습니다. 1994년, 그녀는 아르헨티나 헌법을 개정한 제헌 의회에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영부인이었습니다.

네스토르 키르히너는 재선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의 부인은 승리를 위한 전선의 후보였으며, 2007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첫 임기는 농업 부문과의 갈등으로 시작되었고, 그녀가 제안한 세금 제도는 거부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사적 연금 기금을 국유화하고, 중앙은행 총재를 해고했습니다. 그 결과 공공 서비스 가격은 계속 보조금으로 유지되었고, 그녀는 에너지 회사 YPF를 국유화했습니다. 이 나라는 다른 남미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핑크 타이드라고 알려진 지역 정치 운동의 일환으로 서구 블록과의 관계를 경색시켰습니다. 그녀는 또한 남편의 인권 정책을 계속했고, 언론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네스토르 키르치너는 2010년에 사망했고, 그녀는 2011년에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지난 2011년 총선에서 54.11%[7]의 득표율을 기록해 1983년 이후 역대 대통령 후보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그녀와 2위 표인 비너-모란디니의 득표율 차이가 37.3%로 아르헨티나 총선 역사상 두 번째로 컸습니다.[8][9] 그녀는 그녀의 두 번째 임기 동안 통화 통제를 확립했고, 그 나라는 2014년에 국가 디폴트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2015년에 50%[10]가 넘는 지지율로 공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두 번의 기간 동안, 여러 번의 부패 스캔들이 일어났고 그 후 그녀의 정부는 그녀의 통치에 반대하는 여러 번의 시위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달러 선물의 사기적인 저가 판매로 기소되었고,[11] 나중에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12] 2015년, 그녀는 테러 공격에 연루된 이란인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 그녀의 정부와 이란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알려진 "팩트" (각서)로 알려진 알베르토 니스만의 논란이 된 후,[13] 1994년 AMIA 폭격에 대한 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14] 2017년 클라우디오 보나디오가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에게 발부한 체포영장에서 그녀는 "반역" 혐의를 적용했지만,[15] 그녀는 의회의 면책특권 때문에 감옥에 가지 않았고, 이후 반역죄는 취하되었고, 니스만의 고발과 관련된 다른 혐의들은 남아있었습니다.[16][17] 2018년에는 자신의 정부가 공공 공사 계약을 대가로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비리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습니다.[18][19] 2020년 9월 30일, 연방 형사 파기 법원은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부패 재판을 확인하고 전 대통령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20] 2021년 10월 7일 연방 구술법원 8호는 이란과의 무비준 각서에 대한 피고인들의 주장을 분석한 후 이 사건을 무효로 선언했습니다. 재판관들은 이란과의 협정 체결에 범죄가 없었다고 결론짓고 크리스티나 키르치너와 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사법적 해임을 선언했습니다.[21] 2022년 12월 6일, 그녀는 부패 혐의로 징역 6년과 평생 공직 금지를 선고받았고, 판결에 항소할 의사를 밝혔습니다.[22][23]

초기의 삶과 교육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1970년 17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1953년 2월 1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라플라타 교외의 톨로사에서 태어났습니다.[24] 그녀는 에두아르도 페르난데스와 오펠리아 에스더 빌헬름의 딸입니다. 에두아르도는 버스 운전사이자 반 페론주의자였고, 오펠리아는 페론주의 노조 지도자이자 미혼모였습니다. 페르난데스는 크리스티나가 두 살 때 그녀와 결혼하여 그녀의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녀의 초등학교와 같은 어린 시절에 대한 대부분의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25] 그녀는 Popular Merridge와 Misericordia 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25] 그녀의 조부모님 중 세 분은 스페인 이민자였고, 특히 갈리시아 출신이었습니다.[26]

그녀는 라플라타 국립대학에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1년 동안 심리학을 공부했고,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그녀는 1973년에 동료 학생인 네스토르 키르치너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정치적 논쟁을 소개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 혁명군정의 쇠퇴,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망명 복귀, 엑토르 캄포라의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 더러운 전쟁 초기 등으로 인한 정치적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그녀는 페론주의, 좌파 정치, 반제국주의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라플라타에서 몬토네로스 게릴라의 동조자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키르히너들은 한 번도 가담한 적이 없었습니다. 크리스티나와 네스토르는 1975년 5월 9일 시민의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조합에서 그들에게 행정직을 맡겼습니다. 이듬해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네스토르의 고향인 리오 갈레고스로 이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1976년 7월 3일 졸업할 때까지 그들의 출발을 미뤘습니다.[25]

크리스티나는 리오 갈레고스로 이사했을 때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고 원격 교육으로 남은 과목을 마쳤습니다. 그녀가 졸업한 적이 없고, 학위도 없이 변호사로 일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헌법학자 Daniel Sabsay에 의해 제안되었으며, 라플라타 국립대학(UNLP)이 학위를 공개하기를 꺼린 것에 의해 촉진되었습니다.[27] 그녀는 1980년 산타크루즈 재판소, 1985년 코모도로 리바다비아 항소회의소에 등록했으며 1983년 정의당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그녀가 변호사로 활동했던 경미한 사건들에 대한 기록들도 있습니다.[28] 이 주장은 네 차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노베르토 오야르비데, 아리엘 리호, 세르히오 토레스, 클라우디오 보나디오 판사는 모두 그녀에게 학위가 있다고 판결했습니다.[29]

네스토르는 크리스티나가 1979년에 합류한 로펌을 설립했습니다.[30] 회사는 퇴거 소송을 제기하는 은행과 금융그룹에서 일했는데, 당시 중앙은행의 1050 판결로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인상됐기 때문에 그 비율이 증가했습니다.[30] 키르히너 부부는 경매를 앞둔 시점에 21필지의 토지를 싼 가격에 취득했습니다.[31] 그들의 법률 회사는 더러운 전쟁 동안 범죄를 저질렀다고 기소된 군인들을 변호했습니다.[32] 당시 강제 실종은 흔한 일이었지만, 다른 변호사들과 달리 키르히너 부부는 인신보호영장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1985년 군을 상대로 한 준타스 재판에서 검사인 훌리오 세자르 스트라세라는 키르치네르족의 군에 대한 법적 조치 부족을 비판하고,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나중 관심을 위선의 한 형태로 여겼습니다.[33]

정치경력

크리스티나 키르치너는 1989년 산타크루즈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카를로스 메넴(Carlos Menem)이 이끄는 정의주의 정당(PJ)이 1989년 총선에서 대통령직에 복귀했습니다. 그녀는 1990년 리카르도 발의 탄핵 이후 산타크루즈의 임시 주지사를 이틀 동안 역임했습니다.[34] 그녀는 네스토르가 1991년 산타크루즈 주지사로 선출되었을 때 그의 정치 캠페인을 조직했습니다. 1994년, 그녀는 아르헨티나 헌법을 개정한 제헌 의회에 선출되었습니다.[35]

그녀는 1995년 총선에서 전국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칠레 국경 분쟁에서 칠레에 이익이 되는 파트리치오 아일윈 칠레 대통령과의 조약과 같은 메넴이 제안한 일부 법안에 반대했습니다.[36] 오스카 카밀리온 국방부 장관은 아르헨티나 무기 밀매 사건에 대해 의회에서 심문을 받았고, 키르히너 장관은 사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37] 그 결과, 그녀는 말썽꾸러기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녀는 1997년에 위법 행위로 인해 의회에서 PJ 블록에서 제거되었습니다.[36] 그녀는 그해 상원의원직을 사임하고 대신 1997년 중간선거에 국가대표로 출마했습니다. 메넴은 1999년에 임기를 마치고 페르난도 루아로 교체되었습니다.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동료 의원 엘리사 카리오함께 자금세탁 조사 위원회에 참여했다가 그녀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녀는 2001년 중간선거에서 상원의원 후보로 다시 출마했습니다.[36]

네스토르 키르치너는 2003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녀는 영부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의회에서 더 낮은 인지도를 추구했습니다.[36] 그녀의 남편은 에두아르도 두할데 전 대통령과 정치적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들의 분쟁은 2005년 중간선거 동안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상원의원 후보 단일화에 대한 PJ의 합의 없이, 두 지도자는 각각의 부인을 출마시켰습니다. PJ의 힐다 곤살레스두할데, 승리를 위한 전선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38] 그녀는 선거에서 이겼습니다.[39]

대통령 선거운동

2007년 대통령 선거운동

2007년 영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오른쪽)가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함께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는 2007년 10월 28일에 실시되었습니다.[40]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선거 전 모든 여론조사에서 큰 차이로 앞서고 있는 가운데, 그녀의 도전자들은 그녀를 투표에 참여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보가 단일 라운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45% 이상의 득표율이나 40% 이상의 득표율, 그리고 2위를 10% 포인트 이상의 리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13명의 도전자가 표를 쪼개는 가운데 1차 투표에서 엘리사 카리오(시민연합 후보)가 23%, 로베르토 라바냐 전 경제장관이 17%였던 것에 비해 45%를 조금 넘는 득표율로 결정적으로 승리했습니다.[40]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교외 노동자 계층과 농촌 빈곤층에게 인기가 있었고, 카리오와 라바냐는 도시 중산층에게 더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41] 그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사리오라는 큰 도시에서 선거에서 졌습니다.[41]

11월 14일, 대통령 당선인은 12월 10일 취임 선서를 한 새 내각의 이름을 발표했습니다. 임명된 12명의 장관 중 7명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정부의 장관이었고, 나머지 5명은 처음으로 취임했습니다. 선출된 사람들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시행한 정책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42]

그녀는 2007년 12월 10일에 4년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인플레이션, 열악한 치안, 국제적인 신뢰도, 잘못된 에너지 기반 시설, 그리고 수출세에 대한 거의 30%의 인상에 대한 농업 부문의 항의와 같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42]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이사벨 페론에 이어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여성 대통령이었지만, 그녀는 페론과 달리 대통령직에 선출되었고, 이사벨 페론은 후안 페론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그가 사망하자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맡았습니다.[41]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로의 전환은 또한 민주적인 국가 원수가 사망하지 않고 그들의 배우자로 교체된 최초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내의 임기 동안 경제를 감독하고 [43]PJ를 이끄는 등 큰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44] 그들의 결혼은 후안과 에바 페론 그리고 빌과 힐러리 클린턴의 결혼과 비교되었습니다.[45] 언론 관측통들은 키르치너 씨가 임기 제한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이 부인과 역할을 바꾼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44][45][46]

2011년 대통령 선거운동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2007년 재선 출마를 거부하고 대신 부인을 제안했을 때 이들은 앞으로 12년 동안 대통령직에서 번갈아가며 2연임이라는 헌법적 한계를 피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크리스티나가 2011년에 네스토르를 지지하고 물러났고, 네스토르는 2015년에 FPV 후보를 크리스티나에게 다시 넘겨주었을 것입니다. 2010년 네스토르 키르치너의 죽음은 그러한 계획을 좌절시켰습니다.[47] 그녀는 30%[47] 미만의 낮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1년 6월 21일, 그녀는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임기에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며칠 후, 그녀는 그녀의 경제 장관 아마도 부도가 그녀의 티켓으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의회의 대부분의 대리 후보들을 선택하여 캄포라 의원들을 선호했습니다.[48]

선거는 10월 23일에 열렸습니다. 그녀는 54%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고, 사회주의자 헤르메스 비너가 37% 포인트 뒤를 이었습니다. 몇몇 후보들 사이에 반대 의견이 나뉘었고 부패와 정실에 대한 유권자들의 우려보다 경제적 번영이 우세했습니다.[47] 이는 1983년 이래 전국 선거에서 가장 큰 승리율이었습니다.[49] 페론당도 이날 치러진 주지사 선거 9곳 가운데 8곳에서 승리해 상원의원 수를 늘렸고, 정족수에 필요한 의원 수를 포함해 하원 다수당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은 2009년 선거에서 다수당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축하 행사 동안 무대 위에 어린이들을 초대했고, 부통령 아마도 바우두는 전기 기타를 연주했습니다. 2007년에도 그랬듯이, 그녀는 유화적인 연설을 했습니다.[50]

대통령직 (2007 ~ 2015)

경제정책

Fernandez de Kirchner와 Axel Kicillof 경제부 장관

크리스티나 키르치너는 처음 취임했을 때 남편이 전 대통령으로 임명한 미겔 구스타보 페이라노 전 경제부 장관을 대신했습니다. 페이라노는 2007년 12월 마르틴 루스토의 뒤를 이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여러 경제 장관들 중 첫 번째 장관을 지냈습니다. 농산물 수출세 인상 시도로 농업계와 갈등을 빚었고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세금이 인상되지 않았고, 루스토는 임명된 지 불과 몇 달 후인 2008년 4월에 사임했습니다.[51] 그는 아르헨티나 국세청장 카를로스 라파엘 페르난데스로 대체되었습니다.[51]

세금을 늘리고 다음 해에 빚을 갚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정부는 "Administradoras de Fondos de Jubilaciones" (AFJP)로 알려진 민간 연금 기금을 국유화했습니다. 이 작업에 참여한 돈은 거의 300억 달러, 채무는 거의 240억 달러였습니다.[52] 대통령은 위기 당시 정부의 보호무역주의로 국유화를 정당화했고 유럽과 미국의 은행 구제금융과 비교했습니다. 재산권과 법치주의에 대한 위협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52]

2009년 총선에서 키르히네르주의자가 패배하자 페르난데스는 사임했고, 아마도 바우두 ANSES 회장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물가 상승률이 25%에 육박하고 상승하는 추세였지만, 부도우는 그것을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53]

2010년 1월,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너는 외환보유액으로 부채를 갚기 위해 필요성과 긴급성 법령을 채택하여 200주년 기금을 만들었습니다. 마르틴 레드라도 중앙은행 총재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고, 다른 법령에 의해 해고되었습니다.[54] 마리아 호세 사르미엔토 판사는 중앙은행이 독립적이라는 이유로 두 법령을 무효화했습니다. 레드라도는 한 달 후 사임하고 메르세데스 마르코폰트로 대체되었습니다.[55]

빈곤 퇴치를 위해 정부는 2009년 실업 상태이거나 비공식 경제에 있는 부모들에게 현금 송금 프로그램인 보편적 아동 수당을 도입했습니다.[56] 나중에 다른 불우한 그룹을 대상으로 확장되었습니다.[57]

키르치너의 정책이 빈곤을 어느 정도 낮추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는데, 정부의 보고된 빈곤율에 대해서는 일부 전문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57] 2017년 유니세프 보고서에 따르면, 현금 이전은 극빈층을 30.8%, 일반 빈곤층을 5.6%[58] 감소시켰습니다.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2011년 아마도 바우두와 함께 부통령으로 재선되었고 승리를 위한 전선은 의회 양원을 장악했습니다.[59] 에르난 로렌치노가 새로운 경제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정부는 외화, 특히 미국 달러를 사고 팔 수 있는 권한을 제한하는 통화 통제를 확립했습니다.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헤지 수단으로 저축한 돈을 달러로 보관했습니다. 정부는 자본 유출과 탈세를 막기 위해 통제가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60]

그들은 여러 차례의 증세, 임금 인상 제한, 그러나 보호무역주의의 확대, 국영기업의 재편 등을 포함한 재정 개혁의 시기를 시작했습니다.[61] 키르히네리즘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주요 노조 지도자 휴고 모야노는 대통령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62] 모야노는 이후 마요 광장에서 3만 명이 모여 양도소득세 폐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63]

악셀 키실로프는 2013년 장관으로 임명되어 키르히너의 남은 임기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파리 클럽에 대한 채무 지불을 주선했고, 렙솔YPF의 국유화를 위해 요구한 보상금.[64] 달 뒤 헤지펀드와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갔고, 미국의 토마스 그리사 판사는 아르헨티나 채무 재조정 계획에 나와 있는 대로 감액된 지급을 받아들인 채권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채권자들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65] 키실로프는 그 나라가 국가부도 상태에 빠졌다는 것에 동의하기를 거부했습니다.[66]

2014년 1월 아르헨티나가 페소화를 평가절하했을 때, 키실로프는 아르헨티나의 로열 더치책임자인 후안 호세 아랑구렌거래소 시장 추측에 책임을 돌렸습니다. 그 해 말, 페소화가 달러 대비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을 때, 그는 미국의 "벌처 펀드"를 비난했습니다.[citation needed] 2014년 유엔 회의에서 그녀는 "독수리 펀드"가 국가 경제를 불안정하게 한다고 비난하고 그들을 "경제 테러리스트"라고 불렀습니다.[67][68]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키르히너 부부는 아르헨티나를 "경제적 민족주의와 거의 자율주의"로 되돌렸습니다.[69]

에너지정책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너, YPF 재국유화 법안 발표

2002년, 에두아르도 두할데는 전기, 가스, 수도와 같은 공공 서비스의 가격을 고정시켰습니다. 두할데와 네스토르, 크리스티나 키르히너의 임기 중에도 그들을 자극했던 위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물가 상승률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는 보조금으로 이러한 가격의 일부를 조달했습니다. 이들 분야에 대한 투자가 줄었고, 세대와 유통망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잉여금을 수출할 수 있는 대신 자체 에너지 공급을 잃고 수입해야 했습니다.[70]

그녀는 2012년 초 보조금의 점진적인 철폐를 포함한 재정 긴축 프로그램을 제안했습니다.[71] 그 제안은 인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대신 1993년 민영화된 YPF의 국유화를 위한 법안을 의회에 보내는 것을 선택했고, 스페인 회사 Repsol을 에너지 무역 적자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 법안은 하원에서 207대 32의 차이로 승인되었습니다. 렙솔과 협상이 이뤄지지 않아 권위주의적 행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72] 또한 이때까지 바카 무에르타 유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YPF는 현장에서 석유를 개발하기 위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고, 바카 무에르타에서 시추할 수 있는 권리는 셰브론 코퍼레이션에 매각되었습니다.[73] 에너지 수입 비용으로 무역 적자와 물가 상승률이 높아졌고 정전이 잦아졌습니다. 정전은 일반적으로 여름 시즌 중 가장 더운 날에 발생했는데, 에어컨 사용으로 전력 소비가 최고 수준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74]

농업부문과의 갈등

2008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코르도바주 비야 마리아에서 농업 부문과 충돌하는 동안 도로 봉쇄

2008년 3월, Fernandez de Kirchner는 농산물 수출에 대한 새로운 슬라이딩 규모의 과세 제도를 도입하여 국제 가격에 따라 금리가 변동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발표 당시 수출에 대한 부담금이 35%에서 44%로 사실상 인상될 것입니다. Martin Lousteau 장관이 제안한 이 새로운 세금 제도는 정부가 새로운 세금 제도를 철회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목적으로 농업 협회에 의해 전국적인 봉쇄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3월 25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오벨리스크대통령궁 주변에 모인 수천 명의 냄비를 두드리는 시위자들에 의해 합류했습니다. 도로 봉쇄와 식량 부족을 포함한 전국의 장소에서 이러한 시위가 이어졌습니다.[75]

시위는 극도로 양극화되어 있었습니다. 정부는 새로운 세금이 더 나은 부의 재분배를 가능하게 하고 음식 가격을 낮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농부들이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주장했습니다.[76] 농부들은 높은 세금으로 인해 경작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75] 운동가 루이스 델리아([75]Luis D'Elía)는 시위대 중 한 명을 방해하고 시위 참가자들을 공격했습니다. 위기 속에서 루스토 장관은 사임했고, 페론주의 주지사들은 그녀의 접근법을 무시한 채 농부들과 스스로 협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녀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2007년 10월 선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77]

아르헨티나 의회에서 4개월간의 갈등과 다수당을 차지한 후, 대통령은 새로운 세금 법안을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입법자들은 그들의 경제가 농업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그들의 지방의 지역 의제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루벤 마린(Rubén Marín)과 같은 많은 FPV 입법자들은 이 법안에 반대했습니다. 마린은 "우리에게 농업은 경제"라고 주장했습니다.[76] 투표 당일에는 235,000명이 참석한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와 10만명이 참석한 법안에 찬성하는 시위가 있었습니다.[76] 농부들은 만약 법안이 수정 없이 승인된다면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75]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출신의 에밀리오 라케드 상원의원이 투표를 하여 36-36 동점이 되었습니다. 동점일 경우, 상원의장을 겸하고 있지만 투표권이 없는 부통령이 동점표를 던져야 합니다. 훌리오 코보스는 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고, 반대표는 "나의 투표는 찬성이 아니라 반대"[76]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코보스와 크리스티나 키르히너 사이의 냉랭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통령으로서의 임기를 마쳤습니다.[78]

기타시위

200,000명의 사람들이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를 상대로 카세롤라조에 참가했습니다.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2011년에 재선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 헌법은 단 한 번의 재선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지지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무기한 재선거를 허용하는 헌법 개정안을 제안했습니다. 그녀는 공개적으로 그 제안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거절하거나 거절하지도 않았습니다. FPV는 여전히 수정안을 승인하는 데 필요한 3분의 2의 과반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 제안은 의회에 제출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회의 많은 부문에서 거부되었습니다. 첫 번째 대규모 시위(acerolazo)는 2012년 9월에 열렸습니다. 특정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자들이 부른 것이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한 대중들이 부른 것입니다. 이 같은 대규모 투표율은 정부와 야당 모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79] 사람들은 또한 201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철도 참사, 키르치네리즘과 언론 사이의 갈등, 범죄율 증가, 그리고 엄격한 통화 통제에 항의했습니다. 그녀는 시위를 일축하고 예전처럼 계속 일하겠다고 말했습니다.[79] 그러나 대부분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충성파들은 시위를 그냥 무시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80]

더 큰 규모의 시위인 8N이 두 달 후에 발생했습니다. 거의 50만 명이 참석했습니다.[81] 그들은 이전 시위의 문제뿐만 아니라 증가하는 물가 상승률과 부패 스캔들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에 항의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정책을 변함없이 유지하겠다고 약속했고, 아니발 페르난데스 상원의원은 시위의 중요성을 일축했습니다.[81] 기자 호르헤 라나타는 양극화가 정부와 지지자들이 혁명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이는 언론의 자유와 다른 공공의 권리에 반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후안 마누엘 아발 메디나 내각 수반은 시위자들이 사회 정의에 위배되는 계층에 속하며 시위를 쿠데타에 비유했다고 말했습니다.[82]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충신들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80]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라플라타에서는 지난 4월 홍수가 발생해 7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마우리시오 마크리 시장은 국가 정부가 도시가 국제 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해 인프라 개선에 사용됐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83] 일주일 후,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아르헨티나 사법부의 수정안을 발표했습니다. 세 가지 법안이 논란이 됐습니다. 첫 번째 법안은 국가에 대한 금지 명령을 제한하는 것이고, 두 번째 법안은 판사를 임명하거나 해임하는 기관에 전국 선거에서 뽑힌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이고, 세 번째 법안은 대법원에서 심리하는 사건의 수를 제한하는 새로운 법원을 만드는 것입니다. 야당은 이 법안들을 사법부를 통제하려는 시도로 여겼습니다.[84] 탐사보도 프로그램인 Periodismo paratodos의 2013년 시즌에는 "K-Money의 루트"라고 불리는 네스토르 키르치너가 연루된 정치적 부패가 진행 중인 사건이 밝혀져 큰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습니다.[85] 이것은 4월 18일에 18A로 알려진 새로운 cacerolazo로 이어졌습니다.[86]

1994년 아소시아시온 상호이스라엘리타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이스라엘 상호협회) 폭탄테러 수사에 참여한 알베르토 니스만 검사는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공격을 은폐하기 위한 범죄적 은폐 음모에 가담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는 의회에서 자신의 비난을 설명하기 위해 전날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사법당국은 니스만의 죽음을 살인으로 결론 내렸습니다.[87] 그 미제 사건은 논란이 많았습니다. 18F 시위는 그가 죽은 지 한 달 후에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알베르토 니스만에 대한 경의로서, 침묵 시위로 조직되었고, 정치 깃발이나 현수막은 없었습니다. 규칙은 때때로 예외를 제외하고 자발적인 박수의 물결이나 아르헨티나 국가를 노래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켜졌습니다. 시 경찰은 시위에 40만 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산했습니다.[88]

비리의혹

마데로센터 호텔에 위치한 한 금융회사가 K-Money 수사의 시작점이었습니다.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행정부에서 몇몇 유명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베네수엘라계 미국인 사업가 안토니니 윌슨이 80만 달러가 든 여행 가방을 발견한 후 공항에 구금된 것입니다.[89] 이 돈은 국영 석유회사인 베네수엘라 페트롤레오스가 2007년 총선 선거운동에 사용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제공한 것입니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사업가 카를로스 카우프만과 변호사 모이세스 마이오니카가 유죄를 인정하면서 설명했습니다.[90] 2007년 선거의 FPV 자금 조달은 몇 년 후에 또 다른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세바스티안 포르자, 다미안 페론, 레오폴도 비나 등 3명의 제약 사업가가 2008년 숨진 채 발견됐는데, 이 사건은 '트리플 범죄'로 알려졌습니다. 20만 달러를 기부한 포르자에 대한 추가 조사에서 그는 시날로아 카르텔에페드린을 제공한 사람으로 확인되었습니다.[91] 2015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마르틴 라나타와 호세 루이스 살레르노는 아니발 페르난데스가 에페드린의 불법 통행을 확보하기 위해 살인을 지시한 마피아 조직의 두목이라고 주장했습니다.[92] 페르난데스는 혐의를 부인하면서 2015년 총선에서 자신의 기회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92] 키르치네리즘 시기에 아르헨티나에서는 일반 불법 마약 거래가 증가했고, 멕시코와 콜롬비아의 조직원들이 페루와 볼리비아의 밀수업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세탁에 대한 유죄판결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노 페데리치 금융정보부 팀장은 "위협의 규모는 매우 심각하며, 이 나라 정부 관계자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93]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1기 때 경제장관, 2기 때 부통령을 지낸 아마도 바우두는 2012년 사건에서 부패 의혹을 받았습니다.[94] 시콘 칼코그라피카 인쇄 회사는 2010년에 파산을 신청했지만 사업가 Alejandro Vandenbrole가 그것을 구입하면서 이 요청은 취소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부채를 갚기 위해 세금 감면 혜택을 받았고, 아르헨티나 페소화 지폐를 인쇄하도록 선정되었습니다. 반덴브롤레는 실제로 부도우의 앞잡이이고, 자신의 영향력을 경제부 장관으로 활용해 자신이 실제로 속한 회사에 이익을 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95]

2013년, TV 프로그램인 Periodismo Paradotos는 정치적 부패로 알려진 것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과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당시 대통령이 연루됐음을 암시하기 위해 수사를 "K-머니의 경로"라고 명명했습니다. 사업가 레오나르도 파리냐는 TV 인터뷰에서 사업가 라자로 바에즈를 도와 공공사업에서 돈을 빼돌려 마데로 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