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 에쿠리
Boy Ecury보이 에쿠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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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 세군도 호르헤 아델베르토 에쿠리 22년 4월 22일 |
죽은 | 1944년 11월 6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왈스도르페르블라크테 | (22세)
직업 | 레지스탕스 파이터 |
보이 에퀴리(Boy Ecury[1], 1922년 4월 23일 ~ 1944년 11월 6일)는 제2차 세계대전의 네덜란드 저항군의 일원이었다.
전기
그는 대가족의 네덜란드령 안틸레스의 섬 아루바의 오라녜스타드에서 태어났다. 에쿠리는 13명의 아이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였다. 그의 이름은 세군도 호르헤 아델베르토 에쿠리였지만,[2] 소년이라는 별명으로 통했고, 그가 기억되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이다.
푸에르토리코의 한 사관학교에서 그의 형과 함께 잠시 머물다, 그는 네덜란드로 유학 보내졌다.[3]
에쿠리는 1937년 성 형제로부터 상업학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Oudenbosch에 있는 Louis School,[4] 그리고 그는 네덜란드를 여행했다. 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그곳에서 살았고 1940년 나치 침공을 직접 목격했다.[2]
네덜란드의 틸부르크 시에 있는 동안 에쿠리는 또 다른 청년 루이스 데 란노이 와 친구가 되었는데, 이 청년 역시 이 도시의 지하 저항 단체에 소속되어 있던 앤틸레스 출신이었다.[4] 이 단체는 독일 트럭과 도로에 폭탄을 심는 등 파괴 작전을 펼쳤다. 지하 운동 회원들은 또한 도움이 필요한 부상당한 연합군과 민간인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길을 떠났다.[4]
에쿠리는 가끔 가서 은밀한 작전을 도왔으며 후에 오이스터바이크에서 저항군의 일원이 되었다.[2] 저항하는 동료들처럼, 그리고 피부색 때문에 에쿠리는 숨어 살아야 했고, 네덜란드의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하며 살았다. 1944년 헤이그 지하와 함께 은신하고 NSB 조직원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다.[4]
동료들을 배신한 조직원도 있었고, 위트레흐트에서 투옥돼 고문을 당한 루이스 등 나치에게 붙잡힌 조직원도 적지 않았다. 에쿠리는 노력했지만 친구를 풀어주려는 시도에 실패했다.[4]
1944년 11월 5일, 키에스 비터 ]에게 배신당한 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에쿠리는 로테르담에서 시셰르헤이트디엔스트(SD)에 의해 체포되어 '오란지호텔'(옛 감옥은 유치장과 취조소로 바뀌었다)로 끌려갔다[4][3] 그는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했지만 친구들을 배반하려 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독일 총살단에 의해 왈스도르페르블락테에서 처형되었다.[3] 그는 22살이었다.
그의 시신은 1947년에 발견되었고,[2] 그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의 시신을 네덜란드에서 다시 가져왔다. 그는 오란제스타드에서 군영예의 영예를 안은 채 장례식을 치렀다.[3] 2년이 지난 지금도 마을에는 지역 영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또한 마을의 전쟁 박물관과 그의 전 가족 집인 고고학 박물관의 전시 대상이기도 하다. 에쿠리는 사후 40년 만에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추서되어 저항 영웅 기념 십자가를 수여받았다.[4]
아들의 말년에 대한 진실을 찾는 소년 에큐리와 그의 아버지의 탐구는 네덜란드의 영화 감독 프란스 와이즈가 2003년 영화 보이 에큐리 의 기초로 사용한 책의 주제였다.[3]
참조
외부 링크
위키미디어 커먼스의 보이 에큐리 관련 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