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산나브라 전투
Battle of al-Sannabra알산나브라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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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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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예루살렘 왕국 | 셀주크 투르크스 | ||||||
지휘관과 지도자 | |||||||
볼드윈 1세 | 마우두드 이븐 알툰타시 자히르 앗딘 토흐테킨 | ||||||
힘 | |||||||
알 수 없는 | 알 수 없는 | ||||||
사상자 및 손실 | |||||||
알 수 없는 | 알 수 없는 |
알-산나브라 전투(1113년)에서는 예루살렘의 볼드윈 1세가 이끄는 십자군 군대가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이 보내고 모술의 마우두드 이븐 알툰타시가 지휘하는 무슬림 군대에 패배하였다.
배경
1110년부터 바그다드의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1세는 십자군 침략을 6년 연속 명령했다."1110년, 1112년, 1114년 에데사 시가 목적이었고, 1113년 갈릴레이가 침략당했으며, 1111년과 1115년 알레포와 사이자르 사이에 오론테스 동쪽에 위치한 라틴계 소유가 목적이었다."[1]
1110년 에데사에 대한 공격은 도시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1111년 모술의 마우두드는 볼드윈 1세의 프랑크 군대를 이끌고 사이자르 전투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이후 이슬람 지도자의 군대는 성공과 약탈이 부족하여 흩어졌다.1112년과 1114년 에데사에 대한 무슬림들의 반격은 약했다.나머지 4년 동안,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카운티, 에데사 카운티 등 십자군 국가들은 방어에 힘을 합쳤다.
전투
1113년 마우두는 다마스쿠스의 토그테킨과 그들의 연합군이 갈릴리해 남쪽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을 목표로 했다.볼드윈 1세는 알-산나브라 다리 근처에서 전투를 제의했다.Mawdud는 Baldwin 1세를 무모하게 충전을 명령하도록 유인하기 위해 위장 비행의 장치를 사용했다.[2]프랑크군은 뜻밖에 터키 본군과 부딪히자 놀라며 구타했다.
살아남은 십자군은 응집력을 유지하고 다시 내륙 바다 서쪽 언덕으로 떨어져 진지를 보강했다.이 위치에서 그들은 트리폴리와 안티오키아로부터 강화되었지만 여전히 비활성 상태에 있었다.[1]많은 기독교 순례자들도 알-산나브라 이후 군대로 집결했다.
십자군을 섬멸할 수 없었던 마우두는 시골을 황폐화시키고 나블루스 마을을 자르기 위해 급습기둥을 보내면서 주군들과 함께 그들을 지켜보았다.이에 마우두는 벨부아르 성 전투(1182년)와 알풀 전투(1183년)로 점철된 이후 두 번의 유세에서 살라딘의 전략을 기대했다.이러한 캠페인에서와 같이 프랑크 야전군은 주 이슬람군에 반대할 수도 있지만, 습격군이 농작물과 마을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터키의 침입자들이 십자군 땅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동안, 지역 이슬람 농민들은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이것은 궁극적으로 토양의 경작자들로부터 임대료에 의존하는 프랑크 땅 거물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했다.
여파
마우두는 승리한 후 어떤 영구적인 정복도 할 수 없었다.곧이어 암살당했고 1114년 에데사에 대한 실패한 시도를 아크순쿠르 부르스키가 지휘했다.[3]살레르노의 로저는 1115년 장기전 끝에 마지막 셀주크 침략군을 사르민 전투에서 격파했다.
참조
- 스미일, R. C. 십자군 전쟁 1097-1193.뉴욕: 반스 앤 노블 북스, (1956) 1995. ISBN1-56619-7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