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자르 전투

Battle of Shaizar

좌표: 35°16′00″N 36°34′01″E / 35.266707°N 36.566952°E / 35.266707; 36.566952

사이자르 전투
십자군의 일부
날짜1111년 9월 13-29일
위치
결과 교착 상태
호전성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의 군
에데사의 군
셀주크 투르크스
다마스쿠스부르스
디야르바키르 아흐라트샤스
하마단
지휘관과 지도자
볼드윈 1세
갈릴리 왕자 탠크레드
베르트랑, 트리폴리 백작
볼드윈, 에데사 백작
마우두드 이븐 알툰타시
다마스쿠스의 토그테킨
수크만알쿠트비
부르수크 이븐 부르수크
알 수 없는 알 수 없는
사상자 및 손실

1111년 사이자르 전투에서는 예루살렘의 볼드윈 1세가 지휘하는 십자군 군대와 모술마우두드 이븐 알툰타시가 이끄는 셀주크 군대가 전술적으로 무승부를 이루었으나, 십자군 병력은 철수하였다.

배경

1110년에 시작하여 1115년까지 지속된 바그다드의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1세는 매년 십자군 침략을 개시했다. 에데사에 대한 원년의 공격은 격퇴되었다. 알레포의 일부 시민들의 탄원에 자극되어 비잔틴에 자극을 받은 술탄은 1111년 시리아 북부의 프랑크족 소유물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명령했다. 술탄은 모술의 총독인 마우두드 이븐 알툰타시를 임명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했다. 합성군에는 소크멘 알쿠트비 휘하의 디야르바키르알라트, 부르수크 이븐 부르수크가 이끄는 하마단, 아흐마딜 휘하의 메소포타미아 출신 등이 포함됐다.

에데사 투 알레포

거대한 무슬림 군대의 접근에 따라 에데사 군의 작은 프랑크군은 그들의 두 주요 도시의 성벽 안에서 철수했다. 셀주크족은 비록 라틴 주의 땅을 무임승차하여 이동하였지만, 최초의 에데사와 이후의 터베셀(텔 바시르)에 대해서는 인상을 남길 수 없었다. 곧 좌절된 셀주크 숙주는 알레포로 이동했다. 그 도시에서는 토그테킨이 이끄는 다마스쿠스의 군대가 마우두드의 군대에 합류했다.

알레포 시민 대다수가 도시의 지배자인 셀주크군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파흐르물크 라드완은 도시의 성문을 여는 것을 거부했다. 라드완은 술탄의 군대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부르스끄와 소크멘 알쿠트비 둘 다 병이 나서 서로 다투었다. 숙만의 건강이 나빠지자 추종자들과 함께 군에서 물러났으나 집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부르수크도 군대를 그만두고 그의 부대를 집으로 데려갔다. 수크만의 영토를 얻고 싶어 안달인 아마딜은 자신의 주장을 술탄에게 강요하기 위해 군대를 떠났다.

알레포 투 사이자르

이때 탠크레드는 안티오체네 군대를 소집하여 안티오키아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오론테스 위에 놓인 다리인 지스라쉬 슈구르 근처의 루지아 성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마우두드의 군대는 사이자르의 독립된 문키드 통치자들로부터 도움을 청하여 알레포에서 남서쪽으로 120km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여 그 마을 외곽으로 진을 쳤다.

탠크레드의 원조에 따라 볼드윈 1세는 예루살렘 왕국에서 자신의 군대를, 베르트랑 백작은 트리폴리 카운티에서 군대를 모두 데리고 왔다. 그들은 루지아에서 볼드윈 백작 휘하의 에데사에서 파견된 사단에 의해 합류되었다. 십자군은 병력을 결속시킨 후 먼저 기독교가 장악하고 있는 도시인 아파미야로 진군한 뒤, 사이자르 외곽의 무슬림 숙주를 향해 진격했다.

전투

마우두드의 군대는 "프랑크족의 물자를 차단하고 오롱테스에서 말에게 물을 주지 못하도록 하는 그들의 정상적인 괴롭힘 전술을 운용했다"[1]고 말했다. 기독교의 숙주는 전투에 임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대신 밀폐된 대열을 지어 이동했다. 터키의 말 궁수들이 그들을 너무 바짝 압박하자, 그들은 그들을 밀어내기 위해 싸웠다. 전투라기보다는 셀주크족이 볼드윈의 군대의 진격을 막지 못하는 계속되는 교전이었다.

프랑크족은 사이자르 근처에 진을 쳤으나, 2주 만에 터키군이 물자를 끊었기 때문에 아파미야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하는 동안 그들은 다시 괴롭힘을 당했지만 투혼에 말려들지 않았다. 이때 성공과 약탈의 부족으로 낙담한 마우두드의 전사들은 고향으로 흩어졌다.

미래의 시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당시 16세였던 우사마 이븐 문키드는 이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그의 키타브 알-아이티바르에서 이를 회상했다.

결과.

이 끌린 전투, 정말 연속적인 교전은 볼드윈 1세와 탠크레드가 안티오키아 공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캠페인 기간 동안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떨어진 크루세이더 마을이나 성은 없었다. 시리아 북부의 다음 주요 행동은 1115년 사르민 전투였다.

각주

  1. ^ 스마일, 페이지 142

참조

  • 스미일, R. C. 십자군 전쟁 1097-1193. 뉴욕: 반스 앤 노블 북스, (1956) 1995. ISBN1-56619-7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