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카브른자 학살
Škabrnja massacre슈카브른자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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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일부 | |
위치 | 슈카브르냐와 나딘 |
좌표 | 44°05'29 ″N 15°27'02 ″E / 44.091418°N 15.450494°E |
날짜. | 1991년 11월 18~19일 |
대상 | 크로아티아 민간인과 포로 |
공격유형 | 집단 살인, 즉결 처형, 인종 청소 |
죽음 | 67 |
가해자 | SAO 크라이나 영토방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
디펜더스 | 크로아티아군 |
슈카브르냐 대학살은 세르비아 자치주 크라이나에 의해 62명의 크로아티아 민간인과 5명의 포로가 살해된 사건입니다. 1991년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자다르 동쪽의 슈카브른자 마을과 나딘 마을에서 영토방위군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1991년 11월 크로아티아 국민방위군과 유고 인민군 사이에 교전이 증가하자 자다르의 유고 인민군 주둔지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한 직후에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살해는 SAO 크라이나 부대가 11월 18일 슈카브른자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초기 공격에서 공격군은 체포된 민간인들로 구성된 인간 방패를 사용하여 장갑차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마을에서 도망쳤으며, 약 120-130명이 유고 인민군에게 붙잡혀 마을 학교와 유치원에 구금되었습니다. 그러나 지하실에 피신한 다른 사람들은 집 안에서 또는 집 밖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학살로 사망한 사람들 중 일부는 슈카브른자의 집단 무덤에 묻혔고, 수십 구의 시신은 크로아티아 당국에 넘겨졌습니다.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정치 지도자들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대통령인 밀란 바비치와 밀란 마르티치에게 슈카브르냐와 나딘에서 자행된 살인을 포함한 전쟁 범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바비치는 2004년 징역 13년을 선고받았고, 마르티치는 2007년 징역 3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ICTY는 또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을 슈카브른자 대학살과 관련하여 기소했지만, 그의 재판은 판결이 나기도 전에 그가 사망했기 때문에 판결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1991년 11월, 26명의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당국에 의해 슈카브르냐와 나딘에서 일어난 전쟁 범죄로 결석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은 대규모로 남아 있지만, 일부는 학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반면, 다른 일부는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유죄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의 선거 패배 이후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 사이의 민족 갈등이 악화되었습니다. 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 – HDZ).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크로아티아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Teritorijalna obrana – TO) 무기.[1] 8월 17일,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크닌(스플리트에서 북동쪽으로 약 60킬로미터),[3] 리카, 코둔, 바노비나, 크로아티아 동부의 일부 지역을 [2]중심으로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인들의 공공연한 반란으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4] 1991년 1월,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와 코소보의 지원을 받아 크로아티아 보안군을 무장해제하기 위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작전에 대한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5] 이 요청은 거부되었고, 3월[6] 세르비아 반군과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간의 무혈 교전으로 유고 인민군 스스로가 연방 대통령에게 전시 권한을 부여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세르비아와 그 동맹국들이 이 요청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고 인민군의 요청은 3월 15일 거부되었습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유고슬라비아를 연방 단위로 보존하는 것보다 세르비아를 확장하는 것을 선호했고, 유고 인민군을 세르비아군으로 대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했고, 더 이상 연방 대통령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유고 인민군이 밀로셰비치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유고슬라비아를 보존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7] 분쟁의 첫 번째 사상자는 3월 말까지 발생했습니다.[8] 4월 초,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반란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는 세르비아 자치주 크라이나(SAO Krajina)를 세르비아와 통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 지역들을 분리된 지역으로 간주했습니다.[9]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이 없었습니다.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해 크로아티아는 경찰 수를 약 2만 명으로 두 배 늘렸습니다. 크로아티아 경찰의 가장 효과적인 부분은 군선을 따라 12개 대대로 구성된 3,000명의 특수경찰이었습니다. 16개 대대, 10개 중대에 9,000~10,000명의 지역 조직 예비 경찰도 있었지만 무기는 부족했습니다.[10] 상황이 악화되자 크로아티아 정부는 지난 5월 특수경찰대대를 4개 전문경비여단으로 확대해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크로아티아어: Zbor narodne garde – ZNG)을 창설했습니다. 크로아티아 국방부가 지휘하고, 유고 인민군의 마르틴 슈페겔리 장군이 지휘하는 4개 경비여단은 약 8,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11] 예비 경찰도 4만 명으로 확대되었고, ZNG에 소속되어 19개 여단과 14개 독립 대대로 재편성되었습니다. 보위여단은 ZNG에서 유일하게 소형 무기를 완비한 부대였고, ZNG 전역에는 더 무거운 무기가 부족했고, 여단급 이상의 지휘통제 구조도 열악했습니다.[10] ZNG는 박물관과 영화 스튜디오에서 가져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기를 사용할 정도로 중화기 부족이 심각했습니다.[12] 당시 크로아티아 무기 비축량은 해외에서 구입한 소형 무기 3만여 개와 기존에 경찰이 보유하고 있던 1만 5천여 개로 구성됐습니다. 경비여단에 빼앗긴 인원을 대체하기 위해 1만 명 규모의 특수경찰이 신설됐습니다.[10]
전주곡
크로아티아군과 SAO 크라이나TO 사이의 산발적인 교전은 1990년 하반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주로 자다르 내륙에서 총격전이 오갔습니다. 이러한 공격은 1991년 7월까지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는 마을에 대한 박격포 공격으로 점차 확대되었습니다.[13] 당시 유고 인민군 제9군단은 어느 한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SAO 크라이나TO와 ZNG를 분리하기 위한 완충지대를 만들었습니다. 크로아티아 당국은 이 조치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부대가 카린, 부코비카, 벤코박, 오브로박으로부터 얻은 영토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8월 26일, 제9군단은 제4프롤레타리아 기동여단의 제1대대의 증원을 받아 ZNG와 공개적으로 교전하기 시작했습니다.[14] 9월 16일부터 23일까지 유고 인민군은 시베니크 전투에서 제한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자다르로 초점을 옮겼습니다.[15]
자다르 방면의 유고 인민군 진격은 SAO 크라이나 TO와 마을의 유고 인민군 주둔군의 지원을 받았으며, 후자는 ZNG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주요 공격 병력은 군단급 포병과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지원을 받은 제180기동여단으로 구성되었고 크로아티아 방위는 제4보병여단과 제112보병여단, 그리고 독립적인 ZNG 대대에 의존했습니다.[16] 자다르에서 동쪽으로 18킬로미터(11마일) 떨어진 슈카브른자와 나딘 마을 주변은 ZNG가 보유한 돌출부의 끝을 나타냅니다.[17] 이 지역은 약 2,600명의 크로아티아인 인구를 자랑하며, 라브니 코타리 지역과 벤코박-자다르 공항 도로를 지배하는 라 ž블예바 글라비카와 나딘스카 코사 언덕에 위치한 ZNG 위치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유고 인민군은 9월 말 두 마을을 포위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17] 자다르 주변에서의 전투는 10월 5일부터 6일까지 끝이 났고, 10월 8일에는 휴전이 이루어졌고, 유고 인민군은 도시에서 주둔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10월 21일까지 철수가 완료되었습니다.[20]
휴전에도 불구하고 유고 인민군은 10월 4일에서 10월 10일 사이에 슈카브르냐와 나딘을 공격했습니다. 기갑차량과 보병이 이끄는 나딘에 대한 공격은 격퇴되었고, 슈카브른자는 포병과 집단군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 공격으로 인해 ZNG군 4명이 사망하고 가옥 24채와 학교가 파손됐습니다.[21] 공격 이후 ZNG의 자다르 지역 방어 참모부는 750명의 슈카브른자 독립대대를 창설하여 두 마을의 방어 능력을 향상시켰습니다. 책임 지역은 자다르에서 동쪽으로 32킬로미터(20마일) 떨어진 ZNG 진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 대대는 240명의 병사로 구성된 2개 중대를 슈카브른자 주변의 전선 6킬로미터(3.7마일)를 따라 배치했고, 나딘에는 100명의 중대가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의 수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부족으로 인해 대대의 효율성은 떨어졌습니다. 부대는 병력의 70%를 무장할 수 있는 충분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비축된 무기의 30%는 구식 총기나 사냥용 무기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두 마을의 민간인들은 우글잔 섬과 두기 오톡 섬으로 대피했습니다. 11월 6일, 5대의 난민 버스가 새로운 휴전 후 돌아왔습니다.[19] ZNG는 11월 초 크로아티아 육군(Hrvatska vojska – HV)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22]
타임라인
전투
유고 인민군은 11월 18일 아침 7시에 나딘을, 7시 30분에 슈카브른자를 다시 공격하여 많은 시민들이 탈출했습니다.[23] 유고 인민군의 지상 공격은 7시 30분에 시작되었고, SAO 크라이나 경찰과 TO, 그리고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을 받았습니다.[24] 작전의 총 지휘관은 제180기동여단의 유고 인민군 중령 맘칠로 보구노비치였습니다.[23] 공격군은 북서쪽의 제문익 곤지 마을, 북동쪽의 스밀치치와 곤제 빌자네 마을, 그리고 남동쪽의 슈카브르냐와 벤코바크를 연결하는 도로에 배치된 탱크를 사용하여 슈카브르냐-나딘 군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초기 공격에는 28대의 기갑 병력 수송선(APC)과 전차가 참여했으며,[25] 1대의 전차 중대, 1대의 기계화 중대, 2대의 보병 중대로 조직되었습니다.[26]
군대의 일부는 스밀치치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여 11시 30분에 슈카브른자로 가는 서쪽 접근로에 위치한 암바르의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HV는 마을 중앙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마을 뒤에 남아있던 몇몇 군대와 민간인들이 붙잡혔습니다. 암바르에서 가까스로 철수한 사람들은 유고 인민군이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보고했습니다.[25] 12시 30분에 슈카브른자의 포격은 멈췄지만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집속탄을 목표로 했고,[23] 인근 자다르 공항에 주둔하고 있던 63 낙하산 여단의 부대를 마을 외곽으로 공수했습니다.[16] 13시 30분, HV는 라 ž블예바 글라비카를 버리고 슈카브른하로 후퇴했습니다. 16시 30분까지 공격군은 포로가 된 민간인과 포로들을 인간 방패로 삼아 암바르에서 슈카브른하 중심부로 계속 진격했고, 자다르에서 HV의 돌출부가 차단될 때까지 계속 진격했습니다.[25] 유고 인민군은 이날 병력 4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했다고 보고했으며, 오전까지 진격을 중단했습니다.[26] 하룻밤 사이에 슈카브른자 독립대대장 마르코 밀야니치는 마을을 몰래 빠져나와 자다르로 가서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한 그는 대대에 6시까지 마을을 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25]
11월 19일 아침, 유고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인 슈카브른하 동부로 진격하여 14시에 서쪽에서 나딘에 도착했습니다. 크로아티아군은 17시 30분에 유고 인민군이 나딘스카 코사를 점령할 때까지 버텼습니다.[27] SAO 크라이나TO는 이날 부상자 2명을 발표했습니다.[28]
살인사건
유고 인민군이 슈카브른자를 통해 진격할 때, 탱크와 로켓 추진 수류탄(RPG)이 공격군에 의해 집으로 발사되었습니다. 성모 추정 교회도 탱크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이 교회의 승무원들은 교회로 진입하려 했으나 유고 인민군 대위에 의해 저지당했습니다.[29]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약 1,500명의 민간인들이 인근 프르코스까지 걸어서 마을을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그들은 버스에 태워져 자다르로 옮겨졌습니다.[30]
주택 지하실에 피신한 민간인들이 무더기로 숨졌습니다. 이 살해는 유고 인민군 정규 부대로 구성된 공격군의 주요 요소가 진격하고 SAO 크라이나군이 그들을 따라 들어오면서 주로 발생했습니다.[31] 유고 인민군과 SAO 크라이나 TO군은 유고 인민군 탱크 1대가 파괴되자 슈카브른자에 있는 주택을 수색하기 시작했습니다.[32] 사람들은 대피소에서 총을 맞거나 지하실에서 쫓겨나 심문을 당하거나 구타당하거나 살해당했습니다. 붙잡힌 HV 병사가 가족들 앞에서 총을 맞기 전에 구타를 당하고 귀가 잘린 경우도 있었습니다.[33] 사망한 민간인이나 전쟁포로의 대다수가 점박이 사격을 받았고, 여성 1명은 탱크에 깔려 숨졌습니다.[32]
유고 인민군 장교들과 일반 병사들이 추가 살해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 개입했고, 다수의 민간인들을 구했습니다.[31] 제180기동여단 경비대는 살해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브라니슬라프 리스티치 소령은 이 살해에 대해 여단 헌병대원 2명을 인터뷰했습니다. 의원들은 즉결 처형, 민간인에 대한 간략한 심문 그리고 그들의 살해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TO군이 아버지와 딸을 집 밖으로 끌고 나와 소녀 앞에서 남자의 입에 총을 쏘고 또한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어떻게 보았는지 설명했습니다. 마침내, 의원들은 그들의 차량에서 나와서 그 소녀를 데려갔고, 그들이 저항하지 않으면 군인들을 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들은 TO 군인이 노인의 머리를 소총 엉덩이로 때리고 다리를 쏜 다음 머리를 쏜 사례를 보고했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RPG의 표적이 된 집에 아이를 강제로 집어넣고 불을 지른 사건도 떠올렸습니다.[34] 리스티치는 또한 최소 한 명의 슈카브른자 노인이 RPG를 사용하여 처형되었고, TO의 한 멤버가 죽은 마을 사람들의 것으로 알려진 귀 주머니를 자랑하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35]
약 120-130명의 민간인들이 마을의 학교와 유치원에서 픽업되어 벤코박으로 이송되었습니다.[36] 그들은 벤코바크에 머무는 동안 적어도 어느 정도 학대를 당하자 11월 20일 프리스테그 마을에서 크로아티아 당국에 인계되었습니다.[25] 11월 18일 이 단체의 민간인 2명이 살해되었습니다.[37] 붙잡힌 11명의 HV 병사들도 벤코박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들 중 2명은 목숨을 잃었지만, 이들이 벤코박에서[31] 죽었는지,[30] 아니면 나머지 수감자들이 옮겨진 크닌에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소식통들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습니다.[31]
48명의 민간인이 슈카브른자에서 [38]사망했고, 14명은 나딘에서 사망했습니다.[39] 대부분 여성이거나 노인들이었습니다.[32] 이틀간의 전투와 그 직후의 여파로 약 15명의 HV 인력이 사망했지만,[30] 처음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사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전쟁 포로로 처형되었는지는 불분명했습니다.[40] 이후 조사에서 두 마을에서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포로로 잡혀 처형된 5명의 HV 부대가 확인되었습니다.[41] 살해 사건의 즉각적인 여파로 일부 희생자들은 마을 학교 옆에 있는 집단 무덤에 묻혔습니다.[40] 전투 기간과 그 직후에 슈카브른자에 있는 450채의 집과 3개의 가톨릭 교회가 불에 탔습니다.[42][43] 11월 19일/20일 밤, 유고 인민군이 마을을 떠나 벤코박 막사로 철수한 후 나딘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탔습니다.[30]
후폭풍
11월 18일의 사건들로 인해 제9군단 사령관 블라디미르 부코비치는 "지휘권과 지휘권, 전투 활동의 준비와 실행, 물자의 전투 훈련 지출, 그리고 전투 지역에서의 통일된 통제권 등에서 수많은 누락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군대 구성원들의 전투 사기와 평판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부코비치는 하위 부대의 지휘관들에게 세르비아 국가와 유고슬라비아 거주권을 보호하고 포위된 유고 인민군 주둔군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음을 알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부코비치는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적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신 나치주의에 의해 지지를 받았으며 전쟁의 목적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고 인민군에 현대식 탄약이 부족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T-34와 같은 구형 무기를 다시 사용하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했습니다.[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두 달을 보낸 세르비아 예비군 200여 명은 유고 인민군과 함께 복무를 마친 후 베오그라드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유고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마을을 점령하자 "강간, 강간, 심지어 학살"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군의 만행에 항의했습니다.[45] 이는 리스티치가 11월 23일 제180기동여단장에게 SAO 크라이나 TO를 배치하지 말 것을 요구한 것과 같다.[46]
1991년 11월 23일 유고 인민군은 자다르 지방민방위대에 희생자 35명의 시신을 인계했습니다. 12월 5일, 유고 인민군은 슈카브르냐와 나딘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유해 13구를 크로아티아 당국에 추가로 공개했습니다.[47] 포로로 잡힌 크로아티아군은 1992년 2월 28일과 5월 30일 포로 교환소에서 풀려났습니다.[31] 살인에도 불구하고, 많은 민간인들이 슈카브른자에 남아있었습니다.[48] 1992년 3월 11일까지 유고 인민군, SAO 크라이나TO, 세르비아 준군사조직에 의해 18명이 사망했습니다.[49] 재산 파괴는 199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스카브른야와 나딘에 있는 집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50] 13세기에 지어진 성 루크 교회와 성 루크 교회.[51] 메리의 교회는 심하게 [50]손상되었어요 이 집단 무덤은 크로아티아가 폭풍 작전 동안 이 지역을 탈환한 후인 1995년에 조사되었습니다. 현장에서 시신 27구가 수습됐습니다.[40]
전범재판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슈카브르냐와 나딘에서 자행된 전쟁범죄와 관련해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정치지도자 밀란 마르티치와 밀란 바비치를 기소하고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2004년 바비치는 징역 13년을 선고받았고, 마르티치는 이후 3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52][53] ICTY는 또한 1991년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슈카브른하와 나딘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하여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 국가보안국의 요비카 스타니시치, 프랑코 시마토비치를 기소했습니다.[54][55] 밀로셰비치는 2001년 체포되어 ICTY로 이송되었으나, 2006년 3월 구치소에서 사망함에 따라 그의 재판은 완료되지 않았습니다.[56] 스타니시치와 시마토비치는 2013년 5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57]
크로아티아 당국은 슈카브르냐와 나딘에서 발생한 살인사건과 관련해 27명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1994년 자다르에서 26명이 재판을 받았다: 고란 오파치치, 보스코 드라 ž치, 조란 얀코비치, 주로 코소비치, 미르코 드라차, 나다 푸포바치, 에디타 라젠, 조라나 바니치, 보진 라키치, 페타르 라드마노비치, 밀렌코 비엘라노비치, 이소 비엘라노비치, 슈피로 비엘라노비치, 레나토 페트로프, 시니샤 메다크, 사샤 리리치, 두스코 알냐크, 두샨 알냐크, 미르코 알냐크, 슬로보단 알냐크, 스탕코 렌작, 네네드 브르셀자, 데시미르 이바네 ž라, 미로슬라프 므리나르, 요반 바드 ž오카, 마링코 포즈더. Bad žoka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결석 재판을 받았고 1995년에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배드 ž오카는 10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바니치는 2001년 스위스에서 체포돼 크로아티아로 송환됐습니다. 그녀는 재재판을 받았고 결국 6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2003년 크로아티아 당국은 슈카브르냐와 나딘에서 자행된 전쟁범죄와 관련해 밀렌코 라다크를 체포해 재판했으나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페트로프는 2011년 독일에서 체포되어 새로운 재판을 받았습니다.[58] 그는 2012년에 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59]
기념
그 학살은 매년 기념되고 있습니다.[60] 마을 자체에는 나딘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졌고,[39] 마을 공동묘지에는 슈카브른자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슈카브른자에 있는 집단 무덤의 자리에는 추가적인 기념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61]
2012년 크로아티아의 이보 요시포비치 대통령은 라 ž블예바 글라비카에 기념관을 완공하기 위한 초석을 놓았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당초 2014년까지 800만 쿠나(약 107만 유로)의 비용으로 완료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63] 2013년, 300명의 크로아티아 퇴역 군인들이 그 장소에 80 센티미터(31인치)의 높이, 24 x 15 미터(79 x 49 피트)의 마른 돌 십자가를 지었습니다.[64] 다음 해, T-55 전차가 미래 기념 센터의 일부로 언덕에 배치되었습니다.[65]
메모들
- ^ Hoare 2010, 페이지 117.
- ^ 호어 2010, 페이지 118.
- ^ 뉴욕 타임즈 & 1990년 8월 19일.
- ^ 우드워드 1995, 170쪽.
- ^ 호아레 2010, 118-119쪽.
- ^ Ramet 2006, pp. 384–385.
- ^ 호어 2010, 페이지 119.
- ^ 엥겔베르크 & 1991년 3월 3일.
- ^ 수데틱 & 1991년 4월 2일.
- ^ a b c CIA 2002, 86쪽.
- ^ EECIS 1999, pp. 272–278.
- ^ Ramet 2006, 400쪽.
- ^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6쪽.
- ^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7쪽.
- ^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7-8쪽.
- ^ a b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9쪽.
- ^ a b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8쪽.
- ^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10-11쪽.
- ^ a b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12쪽.
- ^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9-10쪽.
- ^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11-12쪽.
- ^ Marijan 2011, p. 476.
- ^ a b c ICTY & 12 2007년 6월 88쪽.
- ^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12-13쪽.
- ^ a b c d e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13쪽.
- ^ a b 루피치 2007, pp. 473–474.
- ^ 브리고비치 & 라도시 2011, pp. 13–14.
- ^ 루피치 2007, 4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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