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요한 두만강 너머
아무리 강한 고통이라 해도 일상이 되어 버리면 무뎌지기 마련이고 어느 순간 통증을 인지하지 못한 채 현실을 살게 된다. 내겐 장애가 그러했다. 시각의 부재를 잊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을 자각하고 영원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만다. 비단 내가 망각하고 사는 것이 장애만은 아니리라.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매해 통일과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는 웅변을 그토록 연습했음에도 말이다. 사실 텔레비전 속 이산가족 상봉이나 남북 정상회담 같은 일들은 모두 내 관심 밖이었고 내 삶에 와닿지 않는 먼 이야기였다.
탈북 얽힌 험난한 세월 풀어내던 이가 문득 떠올랐던 그곳
내겐 관심 밖 분단이 다른 이에겐 사선…평화는 당연하지 않다, 잊었을 뿐
그녀는 아주 작은 사람이었다. 뼈는 가늘었지만 온몸이 근육으로 꽉 차 있어 손이 들어가질 않았다. 마치 밧줄이 온몸을 칭칭 감은 것처럼 단단히 굳어 있어 마사지를 하는 데 애를 먹었다. 노동으로 붙은 근육은 유연성이 떨어지고 제멋대로 유착되어 통증을 일으켰다. 내가 이 몸으로 어찌 일을 하냐 물으니 그녀는 좀 삐그덕대지만 움직이는 데는 아직 지장 없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마사지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삶이 엿보인다. 내가 본 그녀의 세월은 험난하고 참혹했다. 요추가 어긋나 있었고 팔이며 다리뼈에 상흔이 마디마다 있었다. 분명 골절되었다가 다시 붙은 자국이었다. 내가 그런 사실을 잡아내자 그녀가 신기해하며 자신의 지난 세월을 풀어 놓았다.
그녀의 고향은 함경북도였다. 남한에서 월북한 아버지 슬하에서 무남독녀 외동딸로 귀히 자랐다고 했다. 북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으며 혼인해 가정도 이루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향을 늘 그리워하다 결국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한스럽게도 이듬해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다.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남쪽에 사는 피붙이들을 찾았다. 아버지께 받은 정보가 확실했기에 금세 작은아버지와 연결되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었지만 남쪽의 가족들은 그녀를 무척 반겼다. 상봉 이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을 쌓았다. 새로운 가족을 만난 기쁨을 시샘이라도 하듯 그해 남편이 병에 걸려 죽었다.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시어머니는 그 화를 며느리에게 풀기 시작했다.
모진 시집살이는 고됐고 살림은 계속 팍팍해져 갔다.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기로 했다.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과 탈주 계획을 세웠다. 작은아버지에게 상황을 전하니 돈을 지원해주며 남쪽으로 내려오기만 하면 먹고살 걱정은 없게 하겠다 장담했다. 그녀는 작은아버지가 자신의 은인이라 했다. 그의 도움과 용기가 아니었다면 지옥에서 살다 그 자리에서 말라 죽었을 것이라 했다.
생사를 건 탈주가 시작됐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밤낮 가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추격자들에게 발각되어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겨우 몸을 빼 위기를 모면했다. 그사이 함께 동고동락하던 일행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공포와 외로움을 견디며 국경을 넘었다. 마음을 놓기 무섭게 중국 공안이 따라붙었다. 그들을 피해 도망치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팔다리가 부러진 채 나무뿌리에 간신히 매달리는 신세가 됐다. 이대로 죽는구나 체념하고 있을 때 인근 부락 주민들에게 구조됐다. 이후 그녀는 늙은 중국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딸을 낳았다. 아이가 열 살 무렵 나이 차가 많이 나던 남편이 노환으로 쓰러졌다. 가장이 쓰러지자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녀는 10여년 만에 다시 작은아버지를 찾았다. 당장 구명줄이 되어줄 사람은 피붙이뿐이었다. 그녀의 생존을 확인하자 작은아버지는 무척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 반가움 뒤에는 난감함이 자리했다. 그는 운영하던 식당을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뒤라 예전과 달리 그녀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무작정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걸렸지만 다시 한국으로 올 수 있는 지원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의 도움으로 드디어 아버지의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북에서 탈출한 지 12년 만이었다. 딸은 남편의 반대로 데려올 수 없었다. 그녀는 사촌의 식당에서 일을 배우고 현재는 24시 해장국집에서 상주하며 주방일을 맡고 있다.
“딸애가 누굴 닮았는지 공부를 아주 잘합네다. 북경으로 대학을 갈 거라고 하는데 내 몸 부서지더라도 뒷바라지해야지 않컸어요.”
그녀는 하루 서너 시간 쪽잠을 자며 돈을 벌어 아이 학비로 송금했다. 몸에 밴 파스 냄새와 해장국 누린내가 그녀의 고된 삶을 대변했다.
“사장이 고맙게도 오늘 내 귀빠진 날이라고 이런 호강을 다 시켜줍네다.”
그녀는 진한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고 갔다. 그녀를 지탱하는 건 두고 온 딸과 카페인이었다. 나는 금방 그녀를 잊었고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 역시 망각해 버렸다.
최근 북에서 내려보내는 오물 풍선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에 무심히 넘겨 버렸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중국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비행기 탑승을 마치고 이륙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출발 지연 방송이 나왔다. 북에서 날아온 오물 풍선 때문이었다. 나는 내 일이 되어서야 남과 북이 왜 이런 사이가 되었나 관심이 가면서 불안정한 평화 속에 내가 속해 있음을 깨달았다. 40분 대기 끝에 비행기가 목적지로 출발했다. 연길 공항에 도착해 버스로 갈아타고 도문으로 향했다. 도문시는 북한과 국경을 마주한 지역으로 경계에 두만강이 흘렀다. 가이드는 중국 국적의 교포였는데 할아버지 고향이 함경북도라 했다. 그가 최근 북한을 여행했다며 자기가 보고 온 북쪽 실정을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한 게 참 다행입니다.”
그의 짧은 소감이 북의 현실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도문이 가까워지자 그가 주변 풍경을 설명했다. 북쪽 산은 모두 민둥산이었다. 땔감이 없어 나무를 벤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탈북을 감시하기 위해 벌목한 것이라 했다. 저 언덕을 넘어가면 그 유명한 아오지 탄광이 있다는 말도 했다.
두만강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기 전 가이드가 주의 사항을 주지시켰다. 태극기를 흔들거나 사진을 마구잡이로 찍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버스가 광장에 도착하자 공안이 다가와 가이드에게 싸늘한 경고를 내뱉고 갔다. 가이드는 다시 일행들에게 주의 사항을 다짐받았다. 그의 긴장이 여행자들에게 전염되었다. 천천히 그를 따라 두만강 변을 둘러봤다. 관광지로 꾸며 놓았지만 인기는 그다지 없는지 거리가 휑했다. 난간 앞에 붙어서서 북쪽을 바라봤다. 강 너머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내가 상상한 국경 분위기는 아니었다.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을 어깨에 메고 발맞춰 순찰을 돌 거라 상상했는데 강 건너에는 인공기만 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긴장했던 마음이 머쓱했다.
두만강은 내 고향 하천보다 폭이 좁고 수심이 얕았다. 물은 더럽고 물살은 잔잔했다. 나는 허탈해졌다. 강 건너 누군가에게는 이 물길이 수백, 수천리 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내게 안마를 받았던 그녀를 떠올렸다.
가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는 북에서 넘어온 여자들이 연변 시골 남자들이랑 혼인해 사는 일이 많았어요. 그땐 중국 정부가 은근히 눈을 감아줬었는데 지금은 단속이 어찌나 심한지 그런 일은 모두 사라져 버렸죠.”
나는 그 여성들이 자기 의지로 중국 남성과 혼인해 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내게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10여년에 걸쳐 겨우 도착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저릿해졌다.
한동안 강 건너를 지켜보다 오래전 외웠던 웅변 한 구절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한민족 한겨레 한마음으로 염원하니 통일이여 오라!”
너무도 당연해서 잊고 있던 평화가 이 순간 소중하고 감사했다.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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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매해 통일과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는 웅변을 그토록 연습했음에도 말이다. 사실 텔레비전 속 이산가족 상봉이나 남북 정상회담 같은 일들은 모두 내 관심 밖이었고 내 삶에 와닿지 않는 먼 이야기였다.
탈북 얽힌 험난한 세월 풀어내던 이가 문득 떠올랐던 그곳
내겐 관심 밖 분단이 다른 이에겐 사선…평화는 당연하지 않다, 잊었을 뿐
그녀는 아주 작은 사람이었다. 뼈는 가늘었지만 온몸이 근육으로 꽉 차 있어 손이 들어가질 않았다. 마치 밧줄이 온몸을 칭칭 감은 것처럼 단단히 굳어 있어 마사지를 하는 데 애를 먹었다. 노동으로 붙은 근육은 유연성이 떨어지고 제멋대로 유착되어 통증을 일으켰다. 내가 이 몸으로 어찌 일을 하냐 물으니 그녀는 좀 삐그덕대지만 움직이는 데는 아직 지장 없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마사지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삶이 엿보인다. 내가 본 그녀의 세월은 험난하고 참혹했다. 요추가 어긋나 있었고 팔이며 다리뼈에 상흔이 마디마다 있었다. 분명 골절되었다가 다시 붙은 자국이었다. 내가 그런 사실을 잡아내자 그녀가 신기해하며 자신의 지난 세월을 풀어 놓았다.
그녀의 고향은 함경북도였다. 남한에서 월북한 아버지 슬하에서 무남독녀 외동딸로 귀히 자랐다고 했다. 북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으며 혼인해 가정도 이루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향을 늘 그리워하다 결국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한스럽게도 이듬해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다.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남쪽에 사는 피붙이들을 찾았다. 아버지께 받은 정보가 확실했기에 금세 작은아버지와 연결되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었지만 남쪽의 가족들은 그녀를 무척 반겼다. 상봉 이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을 쌓았다. 새로운 가족을 만난 기쁨을 시샘이라도 하듯 그해 남편이 병에 걸려 죽었다.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시어머니는 그 화를 며느리에게 풀기 시작했다.
모진 시집살이는 고됐고 살림은 계속 팍팍해져 갔다. 그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기로 했다.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과 탈주 계획을 세웠다. 작은아버지에게 상황을 전하니 돈을 지원해주며 남쪽으로 내려오기만 하면 먹고살 걱정은 없게 하겠다 장담했다. 그녀는 작은아버지가 자신의 은인이라 했다. 그의 도움과 용기가 아니었다면 지옥에서 살다 그 자리에서 말라 죽었을 것이라 했다.
생사를 건 탈주가 시작됐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밤낮 가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추격자들에게 발각되어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겨우 몸을 빼 위기를 모면했다. 그사이 함께 동고동락하던 일행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공포와 외로움을 견디며 국경을 넘었다. 마음을 놓기 무섭게 중국 공안이 따라붙었다. 그들을 피해 도망치다 절벽에서 굴러떨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팔다리가 부러진 채 나무뿌리에 간신히 매달리는 신세가 됐다. 이대로 죽는구나 체념하고 있을 때 인근 부락 주민들에게 구조됐다. 이후 그녀는 늙은 중국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딸을 낳았다. 아이가 열 살 무렵 나이 차가 많이 나던 남편이 노환으로 쓰러졌다. 가장이 쓰러지자 생계가 막막해졌다.
그녀는 10여년 만에 다시 작은아버지를 찾았다. 당장 구명줄이 되어줄 사람은 피붙이뿐이었다. 그녀의 생존을 확인하자 작은아버지는 무척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 반가움 뒤에는 난감함이 자리했다. 그는 운영하던 식당을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뒤라 예전과 달리 그녀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무작정 손을 놓고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걸렸지만 다시 한국으로 올 수 있는 지원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의 도움으로 드디어 아버지의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북에서 탈출한 지 12년 만이었다. 딸은 남편의 반대로 데려올 수 없었다. 그녀는 사촌의 식당에서 일을 배우고 현재는 24시 해장국집에서 상주하며 주방일을 맡고 있다.
“딸애가 누굴 닮았는지 공부를 아주 잘합네다. 북경으로 대학을 갈 거라고 하는데 내 몸 부서지더라도 뒷바라지해야지 않컸어요.”
그녀는 하루 서너 시간 쪽잠을 자며 돈을 벌어 아이 학비로 송금했다. 몸에 밴 파스 냄새와 해장국 누린내가 그녀의 고된 삶을 대변했다.
“사장이 고맙게도 오늘 내 귀빠진 날이라고 이런 호강을 다 시켜줍네다.”
그녀는 진한 믹스커피를 타서 마시고 갔다. 그녀를 지탱하는 건 두고 온 딸과 카페인이었다. 나는 금방 그녀를 잊었고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 역시 망각해 버렸다.
최근 북에서 내려보내는 오물 풍선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에 무심히 넘겨 버렸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중국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비행기 탑승을 마치고 이륙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출발 지연 방송이 나왔다. 북에서 날아온 오물 풍선 때문이었다. 나는 내 일이 되어서야 남과 북이 왜 이런 사이가 되었나 관심이 가면서 불안정한 평화 속에 내가 속해 있음을 깨달았다. 40분 대기 끝에 비행기가 목적지로 출발했다. 연길 공항에 도착해 버스로 갈아타고 도문으로 향했다. 도문시는 북한과 국경을 마주한 지역으로 경계에 두만강이 흘렀다. 가이드는 중국 국적의 교포였는데 할아버지 고향이 함경북도라 했다. 그가 최근 북한을 여행했다며 자기가 보고 온 북쪽 실정을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한 게 참 다행입니다.”
그의 짧은 소감이 북의 현실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도문이 가까워지자 그가 주변 풍경을 설명했다. 북쪽 산은 모두 민둥산이었다. 땔감이 없어 나무를 벤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탈북을 감시하기 위해 벌목한 것이라 했다. 저 언덕을 넘어가면 그 유명한 아오지 탄광이 있다는 말도 했다.
두만강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기 전 가이드가 주의 사항을 주지시켰다. 태극기를 흔들거나 사진을 마구잡이로 찍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버스가 광장에 도착하자 공안이 다가와 가이드에게 싸늘한 경고를 내뱉고 갔다. 가이드는 다시 일행들에게 주의 사항을 다짐받았다. 그의 긴장이 여행자들에게 전염되었다. 천천히 그를 따라 두만강 변을 둘러봤다. 관광지로 꾸며 놓았지만 인기는 그다지 없는지 거리가 휑했다. 난간 앞에 붙어서서 북쪽을 바라봤다. 강 너머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고요했다. 내가 상상한 국경 분위기는 아니었다.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을 어깨에 메고 발맞춰 순찰을 돌 거라 상상했는데 강 건너에는 인공기만 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긴장했던 마음이 머쓱했다.
두만강은 내 고향 하천보다 폭이 좁고 수심이 얕았다. 물은 더럽고 물살은 잔잔했다. 나는 허탈해졌다. 강 건너 누군가에게는 이 물길이 수백, 수천리 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내게 안마를 받았던 그녀를 떠올렸다.
가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는 북에서 넘어온 여자들이 연변 시골 남자들이랑 혼인해 사는 일이 많았어요. 그땐 중국 정부가 은근히 눈을 감아줬었는데 지금은 단속이 어찌나 심한지 그런 일은 모두 사라져 버렸죠.”
나는 그 여성들이 자기 의지로 중국 남성과 혼인해 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내게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10여년에 걸쳐 겨우 도착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저릿해졌다.
한동안 강 건너를 지켜보다 오래전 외웠던 웅변 한 구절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한민족 한겨레 한마음으로 염원하니 통일이여 오라!”
너무도 당연해서 잊고 있던 평화가 이 순간 소중하고 감사했다.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열다섯 살 때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었다. 손끝으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펴냈다.
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조승리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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