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안보인다”… 판검사들 ‘서초동 엑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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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기관 불신 위축…사명감 저하
고강도 업무·인사 적체 등도 원인
지방 근무·낮은 급여 이탈 부추겨
뉴시스

‘법조 엘리트’로 불리는 판검사들이 대거 조직을 떠나는 ‘엑소더스’ 현상이 만성화하고 있다. 한때 ‘정의 실현’을 꿈꾸며 법원·검찰에 입성해 수련을 거친 인력의 이탈이 매해 반복되면서 재판·수사의 질 저하 우려도 크다. 판검사 퇴직의 공통된 이유는 “조직에서 미래를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법기관 불신 문제와 함께 고강도 업무, 인사 적체 등도 주된 사유로 꼽힌다. 지방 근무를 비롯해 최근 들어 급격하게 벌어진 변호사업계와의 급여 문제까지 겹쳐 법원·검찰이 더는 매력적인 근무처가 아니란 지적도 나온다.

“검찰 악마화, 사명감 저하돼”

8일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퇴직 검사 수는 109명으로 집계됐다. 검사 현원(2130명 내외)의 5%가량이 옷을 벗었는데 올해 4분기까지 총 퇴직자는 더 늘 것으로 보인다. 검사 퇴직자는 2020년 94명, 2021년 79명에서 2022년 146명, 2023년 145명으로 급증했다. 수도권의 한 검찰 간부는 “초임 검사를 많이 뽑아 일선 업무 부담을 줄이면 퇴직자가 줄어들 것으로 봤는데 올해도 퇴직자가 대규모로 나왔다”며 “조직의 미래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검찰을 떠나는 이유로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검찰청 폐지 입법 추진, 개별 검사 탄핵 등 정치권의 공격으로 인한 사명감 저하가 꼽힌다. 한 차장검사는 “검찰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이 존재하던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조롱에 가까운 공격이 이어지면서 검사들이 위축돼 있다”며 “검찰 위신 추락으로 일반 형사사건 피의자들의 태도도 굉장히 비협조적·공격적으로 바뀌어 업무 부담 또한 커졌다”고 말했다.

‘형사부 붕괴’도 원인으로 꼽힌다. 각종 특별·전담수사팀과 합동수사단으로 파견 인력이 늘어 ‘민생 사건’을 다루는 형사부 인력난이 심화했다는 것이다. 지방의 한 평검사는 “능력 있는 선배들이 각종 수사팀에 파견을 가서 사건은 쌓이고, 미제사건도 늘어나는 구조”라며 “쌓이는 사건 때문에 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 같은 인력난으로 10년 차 이하 검사들 사이에 ‘조직에서 성장하기 어렵다’는 자조적 기류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수도권의 한 평검사는 “파견뿐만 아니라 선배들도 사건에 파묻혀 사는데 무슨 교육이 되겠느냐”며 “성장 없이 소진된다는 느낌이 강해 조직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간간부급 이상 검사들도 고충을 토로한다. 지방의 한 차장검사는 “과거와 달리 중간간부에게 부여된 역할과 책임이 커졌다”며 “인력난으로 부장검사가 직접 발로 뛰고 사건을 처리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후배들과의 소통도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많다. 다른 간부급 검사는 “일방적으로 외부에 자신이 상사와 겪은 일을 알리는 일도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전국에 소문이 쫙 난다”고 말했다.

현재 검찰 내 부장·부부장검사 인사 적체가 심각하다는 우려도 크다. 한 부장검사는 “부장 자리가 없으면 고검 검사로 가야 하는데 그곳도 포화상태고, 이를 해결하려 만든 중요경제범죄조사단도 포화상태”라며 “인사 적체로 부장을 부부장으로 강등시키는 때도 있다”고 말했다. 한 수석검사는 “승진이 늦어지니 조직에서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고 했다.

“승진 없고, 미래 안 보여”

판사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올해 10월까지 전국 법원 퇴직 판사는 94명이었다. 2020년 71명, 2021년 91명, 2022년 88명, 2023년 80명 등 꾸준히 두 자릿수 판사들이 법원을 떠났다. 특히 법관 경력 15년 이상 지방법원 부장판사와 고등법원판사 등 중견 법관 이탈이 도드라진다. 2022년 70명, 2023년 65명, 2024년(10월 기준) 72명 등 퇴직 법관 상당수가 중견 법관이었다.

사건의 다양화·복잡화로 재판 업무 강도는 갈수록 높아지는데 뚜렷한 보상이나 승진 기회가 없는 현실이 원인으로 거론된다. 과거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지법 부장판사는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하고, 그중에 법원장 승진자도 나왔다. 하지만 김명수 전 대법원장 시기 고법 부장판사 승진 제도가 폐지됐고 중견 법관들이 보상을 얻을 기회가 크게 줄었다.

신임 법관을 변호사 등 5년 이상 법조 경력자 중 임용하는 법조일원화 제도도 원인으로 꼽힌다. 경력자들이 법원에 들어오다 보니 과거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후배 판사들이 쓴 판결문을 부장판사가 도제식으로 첨삭하는 전통적 합의재판부가 사라지고 있다. 고법판사들은 부장판사 3명이 한 재판부에서 재판장과 주심을 번갈아 맡는 대등재판부에 속해 있다. 연차가 쌓여도 수천·수만 쪽 기록을 검토하고, 판결문도 직접 쓰는 고된 서류 작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한 고법판사는 “나이가 들고 연차가 쌓여도 비슷한 형태의 고된 업무를 평생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경제적 처우도 법관 이탈을 부추긴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대형 로펌으로 가면 급여가 2~3배 뛰고, 대형 로펌 초임 변호사가 법원장급 판사보다 연봉을 많이 받는 게 현실”이라며 “업계와 맞출 수는 없겠지만 법관 급여가 일정 정도 인상돼야 퇴직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권과 지방을 오가는 순환 근무도 수험생 자녀가 있는 40, 50대 법관들의 이탈 원인으로 지목된다.

검찰과 법원의 숙련 인력이 대거 퇴직하는 현상은 수사와 재판의 질 저하로 이어지고 결국 국민 피해로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결국 판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명예에 대한 보상”이라며 “판사로서 자긍심과 소명의식을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승진 등 보상을 주는 방안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검찰 출신 변호사는 “요즘 서초동에서는 수년간 숙련된 검사들이 빠져나간 검찰에서 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며 “정치권이 합리적 근거 없이 검찰을 악마화하는 일부터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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