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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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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태
Jeong Min-Tae
삼성 라이온즈 No.79

현대 유니콘스 시절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생년월일 1970년 3월 1일(1970-03-01)(54세)
출신지 대한민국 경기도 인천시
신장 184 cm
체중 88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92년
드래프트 순위 1992년 1차 지명(태평양 돌핀스)
첫 출장 KBO / 1992년 4월 22일
인천쌍방울전 선발
마지막 경기 KBO / 2008년 4월 18일
광주한화전 선발
획득 타이틀
계약금 1억 7,200만원
경력

선수 경력

코치 경력

해설자 경력

  • SPOTV 야구 해설위원 (2023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올림픽 2000년 시드니
아시안게임 1990년 베이징
아시아선수권 2003년 삿포로

정민태(鄭珉台, 1970년 3월 1일 (음력 1월 24일) ~ )는 전 KBO 리그 현대 유니콘스투수이자, 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이다. 1999년 20승 7패로 다승왕에 올라 KBO 리그의 20세기 마지막 20승 투수가 됐다. 시속 150km/h에 근접하는 포심, 범타 유도를 위한 투심 등 속구,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포크볼 등 변화구를 잘 활용해 타자를 잡아내는 투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1] 한편 1998년 17승(모두 선발)[2](당시 최다승(18승) 투수였던 김용수가 3구원승이 포함돼 있어서[3]), 1999년 20승(19선발승), 2000년 18승(모두 선발), 2003년 17승(모두 선발)으로 최다 선발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정규 시즌 MVP와는 인연이 없었는데 1999년에는 8월 28일 쌍방울전에서 선발승으로 19승을 거둔 후[4] 팀 사정상 구원으로도 등판하다 보니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고, 막판 3경기에 선발 등판해 3패를 기록했다. 10월 7일 쌍방울전에서 선발승으로 20승(1구원승 포함)을 기록했으나 정규 시즌 MVP는 홈런, 타점 2관왕의 삼성 이승엽이 차지했다. 2000년에 같은 팀이었던 임선동, 김수경과 공동 다승왕(18승)에 올랐지만 개인 타이틀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사[5] 포수 최다 홈런 신기록을 갱신한 박경완에게 MVP 자리를 내줬고, 2003년에는 다승-승률 2관왕에 올랐지만 평균자책점이 2점대 이상이라 그 해 당시 아시아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운 이승엽이 차지했다. 4월 10일 SK전 선발승(2선발승)[6]으로 역대 8번째 세 자릿수 선발승 투수가 됐다.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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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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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숭의초등학교, 인천 동산중학교, 동산고등학교 야구부에서 투수로 활동했다.[7], 1988년에 졸업 후 연고 팀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한양대학교 체육학과에 진학했으며 한때 지역 연고 인하대[8] 연세대 진학설이 있었지만 감독과 뜻이 달라 불발됐다. 한양대학교 야구부에서는 좌완 구대성과 함께 에이스로 활약했으며[9], 아마추어 국가대표팀으로 뽑혔는데[10], 1989년 IBA 회장배 아마추어 야구 대회에서는 한국 국가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투수 부문 베스트 9에 뽑혔다.[11] 1990년에는 13승 3패, 1.26의 평균자책점으로 그 해 아마추어 야구 대회 MVP가 됐다.[12] 같은 해에 LA 다저스가 입단을 제의했으나[13], 협상이 흐지부지된 후 1차 지명을 받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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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말 팀의 김동기, 가내영과 함께, 구단주가 허위 진단서를 써 병역을 면제시켰다는 혐의에 휘말려[14] 수감 위기에 처했으나[15], 집행 유예로 풀려나 1억 7,200만원의 계약금 및 연봉의 조건으로 정식 선수가 됐다.[16] 하지만 같은 해 부상과 컨디션 난조 등으로 결장이 심해지며[17][18] 이듬해까지 계속 부진했다.[19] 그러나 재활 끝에 1994년부터 서서히 재기하기 시작해[20] 선배 박정현, 최창호, 후배 신인 김홍집, 마무리 정명원 등과 함께 활약하며 팀이 인천 연고 팀 중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21][22] 1995년에는 8승을 기록했으나(이들 중 3승이 완봉승(2개는 무사사구)), 동시에 13패를 기록해 한화한용덕, 구대성과 함께 다패 타이를 기록했다.[23]

1996년에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며 소속 팀이 바뀌었다. 4월 16일 개막전에서 선발 등판해 첫 승을 거둔 뒤[24] 시즌 초반 마무리 정명원과 함께 팀의 6연승을 이끌었으며[25], 1996년 올스타전에도 베스트 10에 이름을 올렸는데[26], 이 과정에서 팀의 부정 투표 논란이 일어났다.[27] 9월까지 15승을 거두며 구대성, 송진우, 주형광 등과 다승 경쟁을 하다가[28], 15승 9패, 2점대 평균자책점, 127탈삼진을 기록해 다승 6위로 시즌을 마쳤다. 이 해에 신인왕 타이틀을 획득한 박재홍, 박진만, 윤덕규 등도 활약하며[29][30][31]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해태 타이거즈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는 한국시리즈에서 조계현을 상대로 2번 등판했으나[32][33], 1구원승(조웅천)[34]과 1번의 패전을 기록했다.[35] 시즌 후 9,000만원으로 오른 연봉에 재계약해 2년 연속 100% 연봉 상승을 기록했다.[36] 1997년에도 개막전에 선발 등판해 승리를 거뒀다.[37] 그러나 타선의 부진으로 패전을 거듭하며 시즌 초반에 부진했다.[38] 그러나 7월 12일에 2연패를 끊은 것을 시작으로 점차 승수를 채워나가며[39][40], 박지철, 김상진, 정민철과 다승왕 경쟁을 했다.[41] 그 중 정민철과는 다승왕 뿐만 아니라 탈삼진왕 타이틀을 두고도 경쟁했는데[42], 시즌 최종전이었던 9월 23일에도 완봉승을 거두며 13승 13패로 시즌을 마쳤다. 그 날까지 탈삼진 1위였으나[43], 잔여 경기에서 정민철이 삼진을 더 많이 잡아 탈삼진왕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44] 시즌 후 그는 팀 내 최우수 선수 타이틀을 차지했다.[45] 1998년에 3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로 낙점됐지만 비로 연기됐다.[46][47] 4월에 4승을 기록하며 이승엽과 함께 첫 월간 MVP로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48] 박재홍과 함께 팀의 최단기 시즌 40승을 기록하는 데 공헌했다.[49] 후반기에 그는 베이커, 위재영, 정명원, 문동환 등과 다승 경쟁을 했다.[50] 7월 30일에 12승을 기록했고[51], 8월 7일에 다시 완봉승을 거두며 13승을 기록했으나[52] 결국 18승을 거둔 김용수가 다승왕을 차지했다.[53] 팀은 정규 리그에서 우승해 한국시리즈로 직행했는데[54], LG 트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1차전, 4차전 선발승[55][56], 6차전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첫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됐다.[57] [58] 시즌 후 그는 '레간자 대상'에서 선수들이 직접 뽑은 선수에게 주는 상인 '라노스 대상'을 받았고[59], 골든 포토상에 선정됐으며[60] 경쟁 후보였던 김용수를 제치고 처음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61] 1999년에 그는 1억 5,200만원의 연봉에 재계약했는데 정명원에 이어 두 번째로 그 해에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됐다.[62] 이 해 2월에 처음으로 KBO 리그 팀들이 해외 전지훈련지에서 현지의 프로 야구단과 연습 경기를 치렀는데 그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두 번째 연습경기[63]에 첫 등판했다.[64] 1999년에는 또한 KBO 리그가 드림 리그와 매직 리그의 양대 리그제를 시행했을 때 그는 드림 리그 개막전에서도 선발 등판해 3년 연속 개막전 선발승을 거뒀다.[65][66] 시즌 중반 그는 허리 통증과 허벅지 부상 등으로 경기에 등판하지 못했지만[67][68] 20승을 기록해 다승왕을 차지했다.[69] 시즌 후 그는 1999년 한일 슈퍼 게임 한국 대표로 출장했다.[70]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영입에 관심을 보였으나[71]프로 야구 선수는 7년 이상 한국에서 활동해야 해외로 진출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둔 KBO가 그가 아직 7년을 채우지 못했다며 허락하지 않았다.[72] 그 후에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진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73][74], MLB 메이저 리그 커미셔너 사무국에서 그와 정민철의 신분 조회를 요청하며 관심을 보였으나[75] KBO가 허락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자[76] 구단과 모기업 현대그룹까지 엮이며 마찰을 빚었다.[77] 결국 일본 진출이 무산된 그는 구단에게 3억원을 요구해 논란이 일었다.[78] 12월에 그는 골든 글러브 투수 부문을 수상했다.[79] 2000년에 207이닝을 던지면서 18승, 3점대 평균자책점, 153탈삼진을 기록해 다승 1위, 투구 이닝 2위, 평균자책점 7위, 탈삼진 4위에 올랐다. 임선동, 김수경과 함께 다승왕이 되며 1999년에 이어서 2년 연속으로 다승왕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 1, 4차전에 선발 등판해 모두 승리했으며, 한국시리즈에서는 2번 선발 등판해 1승을 기록했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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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0년 시즌 후 해외 진출을 원했다. 그 때 당시 일본 야구팀 중 주니치 드래건스, 오릭스 블루웨이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관심을 보였고, 2001년에 입단했다. 그는 3년 계약에 이적료 약 5억 5,000만엔, 계약금 1억 5,000만엔, 연봉 1억 3,000만엔에 계약해 당시 최고 대우를 받았다. 결국 2001년 ~ 2002년 동안 일본 리그 적응 실패와 실력 차이를 느꼈다. 일본에서 통산 성적은 27경기에 등판해 6점대 평균자책점, 2승 1패를 기록했다. 그가 KBO 리그에서 활약한 모습과는 달리 불명예를 남기며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현대 유니콘스에 복귀했다.

한국 프로야구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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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돌아오며 그는 투심을 새로 연마했고, 슬라이더, 직구, 특유의 슬로 커브를 통해 경기를 운영했다. 이 시즌에 177이닝 17승 2패, 3점대 평균자책점, 122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군림했다. 또한, 이 해 2000년의 기록과 이어지는 선발 21연승을 달성해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이 시즌에는 다승 1위, 투구 이닝 4위, 평균자책점 3위, 탈삼진 3위, 승률 1위를 기록했으며 팀의 정규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1, 4, 7차전에 선발 등판했는데 모두 승리를 기록했다. 특히 7차전에서는 허벅지 통증이 심한 상태임에 불구하고, 테이핑을 감으면서까지 경기에 선발 등판해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3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거둔 그는 1998년에 이어 2번째 한국시리즈 MVP, 1999년 ~ 2000년에 이어 3번째 다승왕, 데뷔 첫 승률왕이 됐다. 이러한 그의 활약과 공헌을 인정받아 시즌 후 연봉 7억 4,000만원에 계약해 당시 프로 야구 선수 중 최대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2004년 4월 말 무렵에 노화와 허리 부상 등이 겹치며 악화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7승 14패,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부진했고,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2차전, 7차전에 등판했을 때도 크게 부진했다. 이때부터 그는 '먹튀'라는 온갖 오명을 받아야만 했고, 그의 연봉은 그 이후에도 계속 대폭 삭감됐다. 2005년 ~ 2007년 사이에는 부상과 재활을 반복해 부상 후유증 등 부진으로 인해 단 1승도 못 거둔채 10패만 기록했다.

2008년 3월에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선수단을 인계해 새로 창단한 우리 히어로즈와 계약 협상을 진행했으나 입장 차이로 협상이 결렬돼 FA로 풀렸다. 그리고 연봉 7,000만원에 계약하며 선수 생활 16년만에 처음으로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2008년 4월 18일 한화전에 시즌 첫 선발 등판해 김태완의 장외 만루 홈런을 포함해 3.2이닝 5피안타, 6실점을 기록해 패전 투수가 됐다. 이 경기가 2008년 시즌 첫 경기이자 현역 마지막 경기였다.[80] 이후 2군에 내려가며 재활했으나 그 해 7월 8일 오른쪽 어깨 부상을 이유로 재활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했다.[81]

야구선수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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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초창기에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한 KIA에서의 투수코치 생활을 하고 싶어했고, 미국이나 일본에서의 코치 연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외 연수를 한다지만 실상은 MLB와 일본 1군 야구가 아닌 마이너 리그와 일본 2군 야구에서의 연수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이에 해외 연수라는 우회로를 이용하지 않고 곧바로 투수코치를 하겠다고 밝혔다.[82]

2008 시즌 후 히어로즈의 신임 감독으로 선임된 김시진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시절 오랫동안 코치 및 감독과 선수로서 함께했던 그를 투수코치로 영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를 수락해 2008년 10월 14일히어로즈와 연봉 6,000만원에 투수코치로 계약했다. 히어로즈의 코치로 들어온 후 2009년 8월 2일목동야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다.[83] 은퇴식 때 정동진태평양 돌핀스 감독 등 예전 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시절에 함께한 선수 및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84] 이후 2013년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부임했던 김시진을 따라 이적했지만 투수진을 이끌지 못하고 2014년 도중 1군 투수코치에서 3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됐고,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와 재계약에 실패했다. 2014년 10월 31일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했고, 2020년에 사임했다.

2023년SPOTV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영입되어 1시즌 동안 해설가로 첫 활동했고,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현장으로 복귀했으나 전반기를 5연패로 마감하자 전반기 종료 후 2군 투수코치로[85] 보직 변경됐다.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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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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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O 리그 정규 리그 선발승 1위(1998년(17선발승), 1999년(19선발승), 2000년(18선발승), 2003년(17선발승))
  • KBO 리그 플레이오프 최우수 선수 (2000년)
  •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0년)
  • 일간스포츠 제일화재 프로야구 최고 투수상 (2003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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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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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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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W
H
I
P
1992 태평양 23 1 3 .250 3.81 7 2 0 0 0 0 26.0 21 3 13 0 21 0 0 1 13 11 110 1.31
1993 24 0 0 ---- 6.75 5 0 0 0 0 0 9.1 11 0 4 0 7 0 0 0 7 7 41 1.61
1994 25 8 9 .471 3.72 25 25 5 0 0 0 145.1 159 7 38 0 91 2 0 5 66 60 619 1.36
1995 26 8 14 .364 3.69 28 28 8 3 0 0 188.0 187 8 58 3 115 4 0 7 92 77 796 1.30
1996 현대 27 15 9 .625 2.44 30 29 4 2 0 0 210.1 180 15 45 4 127 3 1 4 67 57 834 1.07
1997 28 13 13 .500 3.33 31 31 8 1 0 0 219.0 189 15 51 2 159 7 1 3 97 81 886 1.10
1998 29 17 9 .654 2.83 28 28 5 2 0 0 200.2 184 18 49 1 159 2 0 9 77 63 825 1.16
1999 30 20 7 .741 2.54 33 29 7 0 3 0 230.2 208 24 63 3 178 4 0 5 69 65 936 1.18
2000 31 18 6 .750 3.48 29 29 3 1 0 0 207.0 192 21 66 2 153 1 0 7 85 80 846 1.25
2001 요미우리 32 2 0 1.000 6.16 10 3 0 0 0 0 19.0 21 2 3 0 14 1 0 1 13 13 81 1.26
2002 33 0 1 .000 6.41 17 0 0 0 0 0 19.2 24 4 7 1 14 1 1 0 14 14 89 1.58
2003 현대 34 17 2 .895 3.31 29 29 1 0 0 0 177.0 179 17 42 1 122 5 0 3 76 65 741 1.25
2004 35 7 14 .333 5.00 28 28 1 0 0 0 165.2 193 21 42 0 123 8 0 9 109 92 721 1.42
2005 36 0 3 .000 4.73 8 5 0 0 0 0 26.2 34 2 6 0 13 1 0 1 19 14 120 1.50
2006 37 0 0 ---- 4.50 1 0 0 0 0 0 2.0 2 1 1 0 1 0 0 0 1 1 9 1.50
2007 38 0 6 .000 12.81 7 6 0 0 0 0 19.2 35 5 11 1 6 1 0 1 29 28 103 2.34
2008 KIA 39 0 1 .000 14.73 1 1 0 0 0 0 3.2 5 1 2 0 3 1 0 0 6 6 19 1.91
KBO 통산 : 15년 124 96 .564 3.48 290 270 42 9 3 0 1831.0 1779 158 491 17 1278 39 2 55 813 707 7606 1.24
NPB 통산 : 2년 2 1 .667 6.28 27 3 0 0 0 0 38.2 45 6 10 1 28 2 1 1 27 27 170 1.42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리그 최고 기록

각주

[편집]
  1. 박동희 기자, "마지막 20승 투수 현대 유니콘스 정민태 - 가장 두려운 타자는 오해와 편견", 《SPORTS 2.0 》, 2006년 9월 18일.
  2. “개인 성적”. 한국야구위원회. 2015년 4월 1일. 528면. 2019년 2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3월 16일에 확인함. 
  3. “개인 성적”. 한국야구위원회. 2015년 4월 1일. 364면. 2019년 2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3월 16일에 확인함. 
  4. 정유미 (1999년 10월 8일). “40일만에 아홉수 탈출”. 경향신문. 2019년 3월 16일에 확인함. 
  5. 장환수 (2012년 9월 8일). “[O2/장환수의 數포츠]내 식구 타이틀 챙기기… 야구감독 ‘4金의 비법’”. 동아일보. 2019년 3월 16일에 확인함. 
  6. 전석운 (2003년 4월 11일). “프로야구 / 정민태 SK울리고 2승”. 국민일보. 2020년 6월 12일에 확인함. 
  7. '왕중왕' 내일 결판,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6년 10월 16일.
  8. 문갑식 (1994년 4월 17일). “「소년가장」장광호"이제 비극은 없다". 조선일보. 2024년 9월 10일에 확인함. 
  9. 결승 앞둔 양팀 감독, 출사표…,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9년 5월 19일.
  10. 한국 아마야구 한미선수권·대륙간컵 참가…,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9년 7월 21일.
  11. 한국, 12년 만에 국제 야구 패권…,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89년 11월 13일.
  12. 정민태, 90' 아마 야구 MVP,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0년 12월 13일.
  13. 투수 정민태·김도완, 미국에서 스카우트 교섭,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0년 12월 14일.
  14. 태평양 돌핀스 프로 야구 선수 6명, 병역 부정 조사…,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1년 11월 26일.
  15. 프로 야구 선수 1명 구속 영장,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1년 12월 11일.
  16. 정민태, 신인 최고 몸값…,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2년 2월 28일.
  17. 프로 야구의 마운드가 무너진다…,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2년 6월 2일.
  18. 팀 "간판-거액" 투수 부진…,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2년 9월 19일.
  19. 억대 신인 투수, 실력은 천만원대…,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3년 3월 11일.
  20. 돌아온 억대팔,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4년 3월 16일.
  21. 정민태-구대성, '부활의 노래',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4년 4월 15일.
  22. 프로 야구 - LG 특급 방망이, 태평양 철벽 마운드와 자존심 대격돌,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4년 10월 18일.
  23. 창피한 기록…,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5년 9월 20일.
  24. 김동수, '잠실 개막' 2점 축포,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4월 17일.
  25. 현대, 파죽지세의 6연승,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5월 10일.
  26. 홍현우, 5년 연속 베스트 10…,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7월 20일.
  27. 올스타전 인기 투표, 현대 "부정 몰표" 의혹…,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7월 16일.
  28. '다승왕', 누구? "저요, 저요",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9월 13일.
  29. 박재홍, "과연 신인왕",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10월 2일.
  30. 박진만, 김인호 '투혼'…,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10월 11일.
  31. "역시 윤덕규"… 현대 살렸다,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10월 11일.
  32. 해태 조계현, 현대 정민태와 '강철 어깨' 두고 명예 대결,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10월 16일.
  33. 조계현 - 정민태, "에이스 재대결",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10월 12일.
  34. 현대, 연장 11회 짜릿한 역전승,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10월 18일.
  35. 해태, 8번째 축배까지 "1승" 남았다,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10월 23일.
  36. 현대 정민태, 9,000만원에 사인,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6년 12월 31일.
  37. 한대화, 1회 "개막 축포",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4월 13일.
  38. "패전, 패전…" 고개 숙인 에이스 투수들,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5월 13일.
  39. 에이스 정민태, "이름값",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7월 13일.
  40. 실력은 행운을 부른다 - OB전 승리 투수, 현대 정민태,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7월 23일.
  41. 박지철, 다승-방어율 "2관왕" 잰걸음,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8월 14일.
  42. 닥터 K 자리 두고 "정가 형제" 싸움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9월 23일.
  43. 현대 정민태 완봉승, "유종의 미",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9월 24일.
  44. 정민철, 160개로 "탈삼진왕",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10월 3일.
  45. 정민태, "팀MVP"에…,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7년 12월 24일.
  46. 김용수 노련미에 정민태 강속구 '맞불'…,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4월 11일.
  47. '헝그리 투혼' 쌍방울, 대폭발,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4월 13일.
  48. 정민태·이승엽, 첫 월간 MVP,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5월 9일.
  49. 박재홍, 연타석포… 현대, 최단기 40승,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6월 16일.
  50. 박세리와 월드컵으로 썰렁한 프로야구, 타이틀 경쟁만은 '후끈',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7월 11일.
  51. 현대 정민태, 12승 '단독 선두',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7월 31일.
  52. 정민태, 13승 '완봉쇼',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8월 8일.
  53. 김용수, 18승 다승왕 '노장 찬가',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9월 29일.
  54. 현대 우승비결, 투수-타격-이적 선수-구단의 후원 '4박자 척척',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9월 5일.
  55. '호투맹타' 현대 먼저 웃었다…,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10월 24일.
  56. 현대, "정민태 있으매…",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10월 28일.
  57. 아토스배 '98 포스트 시즌 - 인천, "17년 갈증" 풀었다,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10월 31일.
  58. 현대 우승 주역 정민태, "그저 최선 다했을 뿐… 내가 MVP라니",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10월 31일.
  59. 삼성 양준혁, 올 시즌 '레간자 대상' 수상,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12월 8일.
  60. 골든포토상에 정민태 선정,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12월 10일.
  61. 정민태·유지현, 첫 '황금장갑',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8년 12월 12일.
  62. 현대 정명원, 1억 5,400만원으로 1위…,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2월 5일.
  63. 팀은 1998년에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연습 경기를 치뤘다.
  64. 벼르던 맞대결…,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2월 11일.
  65. '드림' 구장 '매직' 쇼… 99' 프로야구 개막,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4월 3일.
  66. 마해영, '거인 중의 거인',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4월 5일.
  67. 현대 정민태, 허리통증으로 출장 불명,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7월 30일.
  68. 현대 정민태, 허벅지 근섬유 파열 재발,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9월 4일.
  69. 승엽아, 그래도 잘했다,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0월 8일.
  70. 99' 한일 슈퍼 게임 대표 명단발표,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0월 9일.
  71. 日 프로 야구, 국내 투수에 '손짓',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0월 16일.
  72. "정민태 일본행 불허" KBO, "국내 활동 7년 채우지 않았다",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0월 29일.
  73. 정민태, "요미우리에서 뛰고 싶다",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1월 8일.
  74. 요미우리, 정민태에 '구애 공세',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1월 13일.
  75. 美 메이저 리그, "정민철 영입 희망", 매일경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1월 19일.
  76. KBO, 정민태 日 진출 불허,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1월 17일.
  77. 정민태, "선수 뜻 막는 '노예 규정', 해도 너무해…",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1월 19일.
  78. "일본 못 가면 3억 달라"…,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1월 24일.
  79. 이승엽, 최다 득표로 3년 연속 "황금 장갑"…,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99년 12월 16일.
  80. 이완, '아…정민태', 《한겨레》, 2008, 4, 19
  81. 정민태. 전격 은퇴 권오상 기자, 《한겨레》, 2008, 7, 9
  82. 정민태 "KIA 투수코치 하고 싶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강영조 기자, 《스포츠 서울》,2008, 9, 23
  83. 정민태 지각 은퇴식…영웅들 끈끈한 정에 뭉클[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동아일보
  84. 정민태 코치 은퇴식, 현대 유니콘스 동창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일간스포츠
  85. 안호근 (2024년 7월 5일). “[공식발표] 삼성, 정대현 1군 수석+투수코치 승격... 이병규-정민태 2군 이동 "팀 쇄신 차원". 스타뉴스. 2024년 7월 28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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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
제17대 한국 프로 야구 골든글러브 투수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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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태 
이전
정민태
제18대 한국 프로 야구 골든글러브 투수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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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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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제22대 한국 프로 야구 골든글러브 투수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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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