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논 스닐릭

Zenon Snylyk
제논 스닐릭
개인정보
출생의 날짜.(1933-11-14)1933년 11월 14일
출생지로하틴 카운티 푸티틴시
스타니스라워프 보이보드십, 폴란드
사망일자2002년 1월 21일 (2002-01-21) (68세)
사망장소미국 뉴저지 버클리 하이츠
높이5피트 7인치(170cm)
청년 경력
1951–1954 로체스터 대학교
시니어 커리어*
몇 해 Apps (Gls)
1950–1955 로체스터 우크라이나인
1956 시카고 레비
1955–1957 몬트리올 우크라이나인
1957로체스터 우크라이나어
1958–1961시카고 레비
1959–1960 뉴욕 우크라이나인
1962–1970 뉴어크 우크라이나 시트치
1964 몬트리올 우크라이나인
국가대표팀
1957–1961 미국 5(0)
* 시니어 클럽의 등장과 골은 국내 리그에만 반영됨

제논 스닐릭(우크라이나어: :еоо,,, 1933년 11월 14일 현재 우크라이나 푸티틴시 - 2002년 1월 21일 뉴저지 버클리 하이츠)은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축구선수 출신이다.그는 20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의 수많은 우크라이나 민족 아마추어 클럽과 프로 클럽에서 뛰었다.또한 1957년부터 1963년 사이에 미국 국가대표팀과 함께 5개의 캡을 획득했고 1956년 미국 올림픽 축구팀 소속이었다.[1]

청춘

푸티아틴시(Putiatynsi)에서 태어났을 때, 스닐릭의 가족은 2차 세계 대전까지 그들이 살았던 도시인 Lviv로 이사했다.전쟁이 끝난 후, 스닐릭 가족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실향민 수용소에서 살았던 서독 미텐발트로 도망쳤다.스닐릭은 그 동안 우크라이나의 한 중등학교에 다녔고 여러 스포츠를 하면서 탁구 실력으로 유명해졌다.그가 15살이었던 1949년에 스닐릭스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다.그들은 그가 벤 프랭클린 고등학교를 다녔던 뉴욕의 로체스터에 정착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로체스터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스닐릭은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로체스터 대학교에 다녔고, 로체스터 대학교의 축구팀 멤버였다.그는 1953년과 1954년에 명예로운 언급 (제3팀) 올아메리칸이었다.스닐릭은 1955년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고 2005년 로체스터 명예의 전당에 입교했다.[1]1955년 로체스터를 졸업했을 뿐 아니라 그해 미국 시민권도 취득했다.

1958년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시카고를 졸업한 뒤 1959~1960년 학창시절 캐나다 몬트리올맥길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다.

클럽 커리어

스닐릭은 아버지가 로체스터의 우크라이나 미국 스포츠 협회(일명 로체스터 우크라이나인)에서 창단한 팀으로 조직적인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그는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우크라이나인들과 경기를 하곤 했는데, 1957년에 다시 경기를 하곤 했다.1957년 우크라이나 인들은 세인트루이스에 1-0으로 졌다. 전국 아마추어 컵 결승전에서 루이스 쿠티스가 우승했다.[2]

수년간, 그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게임을 만들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면서 여러 팀에서 뛰었다.1955년 스닐릭은 로체스터의 시즌이 끝난 후 몬트리올 우크라이나 인에 입단하였다.그 후 그는 1957년까지 몬트리올에서 뛰었고, 그 때 그는 로체스터와 함께 아마추어 컵 결승전에 진출했다.몬트리올은 1955년에 리그 준우승을 했고 1957년에 챔피언을 차지했다.

때때로 스닐릭은 미국과 캐나다의 팀들을 위해 동시에 경기를 하곤 했다.오프 세트 시즌으로 인해 이 일을 할 수 있는 동안, 때때로 그는 비행기를 타고 한 게임에서 다른 게임으로 여행할 수밖에 없었다.예를 들어, 몬트리올 우크라이나인에서 경기하는 동안, 스닐릭은 1956년에 시카고 레비와 경기했고, 그 후 1958년부터 1961년까지 경기를 했다.그곳에서 어느 순간에는 토론토 우크라이나인에서도 뛰었고 1959~1960년 몬트리올 맥길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뉴욕 우크라이나인들과 게임을 하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가곤 했다.

1962년 스닐키는 신문을 관리하기 위해 뉴저지 뉴어크로 이사했다.그 동안 그는 미국 축구 리그(ASL)의 뉴어크 우크라이나 시트치(Chornomorska Sitch라고도 한다)와 계약했다.그는 1970년 은퇴할 때까지 그의 마지막 클럽인 이 클럽에 남아있었다.1963년, 시트치는 루이스 컵으로 알려진 ASL 리그 컵에서 우승했다.1964년 여름, 그는 내셔널 축구 리그에서 몬트리올 우크라이나인들과 경기하기 위해 돌아왔다.[2]

올림픽팀

스닐릭은 미국 시민권을 얻은 지 1년 만에 국제 차원에서 미국을 대표하기 시작했다.1956년, 그는 1956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축구팀의 주장으로 선발되었다.미국은 경기 준비를 위해 아시아를 순방했다.이러한 친선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차전에서 유고슬라비아에 9 대 1로 졌다.

1956년 이전 올림픽 투어

  • 일본 3-5 미국
  • 칸세이 0-6 미국
  • 한국 1-0 U.
  • 대만 1-6 미국
  • 홍콩 2 대 1 미국
  • 필리핀 0-4 미국
  • 싱가포르 1-2 미국
  • 인도네시아 7-5 미국

1959년 스닐릭이 1960년 하계 올림픽 출전 자격에 들어가면서 다시 미국 축구팀의 주장으로 발탁되었다.이번 예선 1차전에서 멕시코에 패하고 무승부를 기록함에 따라 미국은 이번 대회 출전권 경쟁에서 밀려났다.1964년 스닐릭은 3연속 올림픽 축구팀에 소집됐지만 미국은 또다시 예선 1-2로 예선 탈락했다.

팬아메리칸 게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 국가대표팀의 대부분의 선수들은 아마추어였다.이것은 그들이 당시 완전히 아마추어였던 올림픽과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풀 인터내셔널에서 뛸 수 있게 해주었다.1959년, 스닐릭은 시카고에서 열린 1959년 팬암 게임에서 미국 축구팀에 선발되었다.스닐릭은 올림픽 선수단과 마찬가지로 이 경기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미국의 팀 주장이었다.1959년 8월 29일 미국은 브라질을 5-3으로 대파했다.하지만 이날은 스닐릭의 결혼식 날이기도 했다.그는 경기를 한 뒤 동료들과 함께 시카고 출신인 야라 마투라와 결혼하는 교회로 차를 몰았다.리셉션에 이어 그는 다시 경쟁자들의 숙소로 가서 잠을 잤다.

스닐릭은 1963년 팬암 경기에 출전했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이 꼴찌를 하고 브라질에 10-0으로 패하는 등 성공적이지 못했다.

국가대표팀

스닐릭은 1957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 국가대표팀에서 5개의 모자를 얻었다.1957년에는 두 번의 월드컵 예선전을 치렀다.첫 번째, 멕시코에 6 대 0의 패배는 1956년 4월 7일에 일어났다.1960년 11월 13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미국이 멕시코시티에 3-0으로 패하면서 팀 주장을 맡았다.그의 마지막 모자는 1961년 2월 5일 콜롬비아에 2 대 0으로 패하면서 케네스 핀의 대체 선수로 나왔다.[3]

신문 편집자

1962년 우크라이나 민족협회는 《우크라이나 주간》을 편집하기 위해 스닐릭을 고용했다.그는 1980년까지 편집자로 남아 있었다.그 해 우크라이나어 신문인 스보보다 편집장이 되었다.그는 1988년 6월에 은퇴했다.

스닐릭은 2002년 1월 21일 뉴저지 버클리 하이츠의 자택에서 사망했다.[3]

이후 로체스터에서 스닐릭과 함께 뛰었던 진 치조위치는 "그는 내가 함께 뛰었던 가장 똑똑한 전술가였다." "제논은 크지도 힘도 없었지만, 기술과 생각의 속도는 다른 선수들이 하게 될 결투와 태클을 보상해 줄 것이다.[4]

참조

  1. ^ "Zenon Snylyk". Olympedia. Retrieved December 2, 2021.
  2. ^ Gillespie, Norman (May 22, 1964). "Ukraina Rejoins League Plays Polonia Sunday". Montreal Gazette. p. 27.
  3. ^ 스태프. 2002년 2월 4일 우크라이나 주간지 The Weeklyweek, The Weekly, Svoboda의 전 편집장 제논 스나이릭이 69세로 세상을 떠났다.2011년 2월 27일 접속. "스닐릭 씨는 1월 21일 새벽 N.J. 버클리 하이츠의 자택에서 별세했다."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