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생어
William Sanger윌리엄 생어(William Sanger, 1873년 11월 12일 ~ 1961년 7월 23일)는 독일 태생이며 미국 교육을 받은 건축가 겸 예술가였다. 그는 마가렛 생거의 남편이었다.
전기
베를린에서 태어난 생거는 독실한 유대인 집안 출신이다. 1878년경 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후, 그는 쿠퍼 유니온에서 1893-95년부터 건축학 교육을 받았고, 이후 아틀리에 마스커리, 소사이어티 보아트 건축가, 예술인-아티산스 연구소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1902년 8월 18일 마가렛 생거(네 히긴스)와 결혼하였다.[1]
윌리엄 생거는 산아제한에 관한 마거릿 생어의 팜플렛 '가족 소송' 사본을 나눠준 혐의로 체포되었다. 윌리엄 생거는 1915년 9월 10일 뉴욕시 특별 세션 재판소에 앞서 낸 성명에서 아내의 작품과 감정적으로 동일시하고 앤서니 컴스톡을 '음란과 과학 정보를 구별할 수 있는 지능'이 부족한 '불가역적 성혐오증'의 피해자라고 언급했다.[1]
재판의 판사는 "자신의 죄는 모성애를 막기 위한 당신의 계략에 있어서 인간의 법칙뿐만 아니라 신의 법칙에도 위배되는 것"이라고 진술했다.일부 사람들이 여성 참정권에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기독교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종용한다면 이 도시와 사회가 더 나을 것이다." 법정과 외부의 지지자들이 항의에 나섰다. 판사의 진술은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고 앤서니 컴스톡의 반출산 선전을 통해 이전에 보았던 외설보다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논쟁으로 다시 정의했다. 재판과 그에 따른 시위는 산아제한에 대한 공개적인 논쟁의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었다.[1]
이 재판의 또 다른 결과는 마가렛 생거가 미국으로 돌아가 직접 재판을 받도록 고무시켰다는 것이다.
그 부부는 1921년에 이혼했다.[2]
참조
- ^ a b c Chesler, Ellen (2007). Woman of valor Margaret Sanger and the birth control movement in America. Simon & Schuster. p. 48. ISBN 1416540768. OCLC 254810602. Retrieved May 10, 2021 – via archive.org.
- ^ "Mrs. Sanger Has Never Quit Fight". Arizona Daily Star. New York Times News Service. May 12, 1961. p. 9. Retrieved May 10, 2021 – via Newspaper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