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히 왕위 계승 전쟁

War of the Jülich Succession
율리히 왕위 계승 전쟁
유럽의 종교 전쟁의 일부
그리고 80년 전쟁
The Siege of Aachen.png
1614년 암브로지오 스피놀라 휘하의 플랑드르 스페인군에 의한 아헨 포위전. 캔버스에 기름이 묻었다. 피터 스나이어스 덕분이야
날짜1609년 6월 10일 – 1610년 10월 24일
1614년 5월 – 1614년 10월 13일
위치
결과 샨텐 조약
호전성
1609–1610:
Holy Roman Empire 루돌프 2세
Straatsburg-Bistum.PNG 스트라스부르 공국
리에주교
가톨릭 연맹
1609–1610:
브란덴부르크의 마르그라비테
팔라틴누부르크
연합 주
프랑스 왕국
개신교 연합
1614:
Spain 스페인 제국
팔라틴누부르크
1614:
브란덴부르크의 마르그라비테
아헨 자유 제국 도시
연합 주
지휘관과 지도자
1609–1610:
Holy Roman Empire 레오폴트 5세 대공

1614:
Spain 암브로지오 스피놀라
볼프강 빌헬름 노이부르크의 팔라틴 백작
1609–1610:
볼프강 빌헬름 노이부르크의 팔라틴 백작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마르그라베 요아힘 에른스트
Kingdom of France 클로드 드 라 차트르 남작 드 라 메종포르
Dutch Republic 나소의 모리스
오토 폰 솔름스-브라운펠스

1614:
조지 윌리엄 브란덴부르크 대통령 당선자
Dutch Republic 나소의 모리스

쥘리히 왕위 계승전쟁쥘리히-클레브스-베르크 연합의 후계권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이었다. 1609년 6월 10일에서 1610년 10월 24일 사이에 지속되어 1614년 5월에 재개되어 1614년 10월 13일에 종영되었다. 1차 분쟁은 브란덴부르크의 개신교 마르그라비테팔라티네-뉴부르크연합군에 맞서 가톨릭 대교 레오폴트 5세를 격파하여 전자의 군사적 패배로 끝났다. 브란덴부르크와 느부르그의 대표들은 이후 각각 칼뱅주의와 가톨릭으로 종교적인 개종 이후 직접적인 갈등에 돌입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개입해 80년 전쟁의 일부가 되면서 갈등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것은 마침내 샨텐 조약에 의해 해결되었고, 그 조약의 조항들은 스페인을 선호했다.

배경

요한 빌헬름(Johann Wilhelm)은 1605년에 쥴리히-클레브스-베르크 공작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미 그의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특징지어졌다.[1]

개신교 개혁 이후 루터교칼뱅교 교리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은 '반개혁'으로 알려진 로마 가톨릭 부활의 시기에 맞닥뜨렸다. 쾰른 전쟁스트라스부르 주교 전쟁과 같은 이러한 교파간 갈등은 각각 신성로마제국의 가톨릭과 개신교 귀족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의도로 가톨릭 연맹개신교 연합의 창설을 촉진시켰다. 앞서 언급한 동맹국들은 1609년 뮐리히-클레브스-베르크 연합의 후계 위기가 뮐리히 후계전쟁을 촉발하면서 첫 분쟁에 돌입했다. 문제의 영토는 14,000 km²의 면적을 차지했는데, 스페인 도로와 가깝기 때문에 지정학적 중요성과 80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탈출한 피난민들로 인해 활기를 띠는 경제 호황으로 인해 둘 다. 심각한 정신질환의 영향을 받은 쥘리히-클레브스-베르크 공작 요한 빌헬름(Johann Wilhelm)이 1609년 3월 25일 사망하여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다.[1] 루돌프 2세 황제는 간혼에서 비롯된 뒤치족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인식된 중립성을 훼손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의사를 밝힐 수는 없었다. 브란덴부르크의 마르그라비테팔라티네-뉴부르크의 두치 지배자들이 요한 빌헬름의 이모들과 결혼함으로써 믿을 만한 유일한 주장을 하는 등 총 6명의 다른 청구인들이 나타났다. 4월 2일, 공작 부인 로레인의 앙투아네트, 추밀원, 황실 집행관 등 섭정이 설립되었다. 5월 24일, 루돌프 2세는 오울릭 평의회가 4주 이내에 확정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2]

갈등

브란덴부르크와 노이부르그는 섭정을 뒤치(Duchy)를 합병하려는 직접적인 시도로 보았다. 1609년 6월 10일, 그들은 도르트문트 조약[de]에 서명하여 다른 모든 청구인을 배척하고 지방 토지와 함께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연기 섭정과 황제에 반항하여 뒤치에 들어갔다. 1610년 1월 프랑스의 헨리 4세는 개신교 연합과 군사 조약 초안을 체결하여 마르샬 차트르 휘하의 2만 2천 명을 프랑스 북동부에 파견하였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향해 상당한 수의 병력을 파견했다. 레오폴트 5세 대교는 전자를 설득하여 도르트문트 조약을 파기하고 그를 황제로 임명함으로써 황제와 마티아스 대공이 진행중인 권력 투쟁에서 그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레오폴드는 의기양양하게 율리히에 들어갔으나, 곧 전투가 아헨뒤렌으로 번지면서 자기 크기의 세 배나 되는 군대에 포위되는 것을 알았다. 가톨릭 왕실과 개신교 왕자들 사이의 투쟁은 더 큰 종교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왔다. 개신교 연합은 5천 명을 동원했고, 레오폴드는 스트라스부르의 왕자-비숍리에 기병 1천 명과 보병 3천 명을 모집했다. 그의 합스부르크 친척들과 카톨릭 연맹의 나머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레오폴드를 지지하기를 거부했고, 단지 그들 자신의 보호를 위해 군대를 모을 뿐이었다. 1610년 3월 13일 개신교 백작 오토 폰 솔름스-브라운펠스가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트라스부르를 침공했다. 카톨릭 신자들은 그저 사베르네와 같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후퇴하여, 규율이 좋지 않은 침략자들이 돈이 다 떨어져 후퇴할 때까지 기다렸다. 1610년 5월 1일 프라하에서 중개인결제를 위한 회의가 열렸다. 크리스천 2세에 대한 루돌프의 초기 결정 작센의 엘렉터는 다수의 온건파 왕자들에 의해 거부되어 8월까지 추가 협상을 연기하게 되었다.[3]

이번에 9800명의 병력과 포병 등으로 구성된 제2차 개신교 침공작전이 닥스테인, 무치히, 몰쉐임 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지역 주민들이 식량 공급을 거부하면서 중단되기도 했다. 그 사이에 레오폴드는 율리히를 도망쳐 1,500명의 병력을 내부에 남겨 두었다. 그들의 운명은 결국 프랑스 왕국네덜란드 공화국이 개신교인들의 지원에 개입하면서 스페인 로드에 더 많은 압력을 가해 스페인의 반감을 사려고 함에 따라 봉합되었다. 네덜란드는 리에지의 비숍 왕자에서 향하는 구호대를 가로채는 한편, 포위자들을 총 2만5천2백 명의 군대로 증강시켰다. 9월 1일, 수비대는 알자스 상부로의 자유 통행을 대가로 항복했다. 10월 24일 개신교 연합과 가톨릭 연맹은 연말까지 병력을 철수하고 해산하기로 합의했다. 전쟁은 모든 관련 당사자들의 재고를 심각하게 고갈시켰고, 세금 인상으로 이어졌고 1612년 티롤 농민 반란을 촉발시켰다. 소유자인 볼프강 빌헬름, 누부르크의 팔라틴 백작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마르그라베는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군사적 힘으로 뒤치를 점령했다.[4]

1611년 개신교는 아헨 부근의 스톨베르크웨이덴 마을로 전파되었다. 이에 대해 아헨 시의회는 개신교 예배에 참석한 주민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시민 5명이 마을 훈령을 무시한 혐의로 구금됐다가 벌금 납부를 거부하면서 추방됐다. 이로 인해 7월 5일 의회를 상대로 폭동이 일어났다. 가톨릭 참의원들은 추방되었고 많은 가톨릭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반란군들은 교회와 예수회 대학을 습격하고 제단과 이미지를 박살내고 압수된 사제복을 입은 모의 미사를 집전했다. 새로운 개신교 협의회가 설립되어 소유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1612년 루돌프는 소유자들에게 금지의 위협 아래 아헨 시의 천주교를 복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도시의 개신교 신자들은 이 명령을 무시하고 황제의 칙령을 이행하기 위해 파견된 제국 평의회에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5][6]

루돌프가 사망하자 마티아스 황제는 작센의 피신권 권리를 확인하면서 분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게다가 에른스트와 볼프강 빌헬름의 칼뱅주의와 가톨릭교로의 전환은 각각 과거의 동맹을 완전히 재구성했다. 브란덴부르크와 노이부르그 관리들은 1614년 초까지 서로 연락을 끊었다. 1614년 5월, 300명의 네덜란드 군대는 네덜란드의 정치가 요한 판 올덴바르네벨트의 전자에 대한 브란덴부르크의 음모를 막기 위한 시도로 뮐리히에서 네우부르크 수비대를 철수시켰다. 볼프강 빌헬름 전 대통령은 900명의 병력을 증강하고 뒤셀도르프를 함락시키는 선전포고로 해석했다. 새로운 브란덴부르크 소유주 조지 윌리엄은 실제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인에 대한 재정적 의존 때문에 그는 그의 계획을 이행하지 못했다. 또 다른 오해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대공 알베르 7세가 스페인 장군 암브로지오 스피놀라 휘하의 1만3300명의 보병과 1300명의 기병을 동원한 네덜란드 군대의 축적을 12년 휴전 위반으로 해석하면서 일어났다.[7] [6]

1614년 2월 20일 마티아스 황제는 아헨에서 가톨릭 통치의 복원을 명령했다. 공격이 두려워 마을 의회는 브란덴부르크의 엘렉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게오르크풀리츠 장군 휘하의 수백 명의 군인들을 보내 지역 민병대를 증강시켰다. 8월 24일, 스피놀라는 루돌프가 발행한 2년 전의 칙령을 부과하는 것을 전제로 아헨을 포위했다. 며칠간의 협상 끝에 수비대는 개신교 성직자들과 비시민들과 함께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다. 구 시의회는 1611년 폭동의 참가자들이 처벌을 받는 동안 복권되었다. 아헨 스피놀라로부터 볼프강 빌헬름의 도움으로 잡은 뒤렌, 네우스, 웨셀, 뮐하임을 향해 다그쳤다. 네덜란드는 마르크와 클레브스의 나머지 두키족을 점령하는 한편 율리히도 보강했다.[8][9] [7]

여파

1614년 10월 13일 나소의 스피놀라와 모리스가 프랑스와 영국의 중재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분쟁은 11월 12일 샨텐 조약의 체결로 끝이 났다. 율리히-베르크라벤슈타인의 영토는 누부르크의 볼프강 빌헬름으로, 클레브스-마크라벤스버그는 조지 윌리엄으로 갔다. 스페인은 라인 강을 가로지르는 세 개의 교차지, 즉 웨셀, 오르소이, 라인베르크 등 총 62개의 도시를 획득해 북서유럽에서의 입지를 대폭 강화했다. 네덜란드는 쥴리히와 파펜뮌체에서 그들의 가위바위보를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재 가격보다 높거나 심지어 고립되어 있어, 1621년 4월 12년 휴전이 만료되었을 때 그들을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했다.[7][10][11][12]

참고 항목

메모들

  1. ^ a b Whaley, Joachim (2013) [2012]. "Managing the Peace, 1555–1618". Germany and the Holy Roman Empire: Volume I: Maximilian I to the Peace of Westphalia, 1493–1648.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p. 279. doi:10.1093/acprof:oso/9780198731016.003.0006. ISBN 9780198731016.
  2. ^ 윌슨 2011, 229-232 페이지.
  3. ^ 윌슨 2011, 232-236 페이지.
  4. ^ 윌슨 2011, 페이지 236–238, 252.
  5. ^ 듀얼루 2012, 343페이지.
  6. ^ a b 얀센 1906, 페이지 564–566.
  7. ^ a b c 윌슨 2011, 페이지 252–253.
  8. ^ 얀센 1906 페이지 564–567.
  9. ^ 듀를루 2012, 347페이지, 369페이지.
  10. ^ 로렌스 2009, 페이지 79.
  11. ^ 반 님위겐 2010, 페이지 79.
  12. ^ 헤이든 1973쪽 22-23쪽

참조

  • Duerloo, Luc (2012). Dynasty and Piety: Archduke Albert (1598–1621) and Habsburg Political Culture in an Age of Religious Wars. Ashgate Publishing. ISBN 9780754669043.
  • Hayden, Michael (1973). "Continuity in the France of Henry IV and Louis XIII: French Foreign Policy 1598–1615". Journal of Modern Histor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45 (1): 1–23. doi:10.1086/240888.
  • Janssen, Johannes (1906). History of the German People at the Close of the Middle Ages. Vol. X. Leading up to the Thirty Years' War. London: K. Paul, Trench, Trübner, & Co., Ltd. OCLC 1520859.
  • Lawrence, David (2009). The Complete Soldier: Military Books and Military Culture in Early Stuart England 1603–1645. Boston: Brill Academic Publishing. ISBN 978-90-04-17079-7.
  • Van Nimwegen, Olaf (2010). The Dutch Army and the Military Revolutions 1588–1688. Woodbridge: The Boydell Press. ISBN 978-1-84383-575-2.
  • Wilson, Peter (2011). The Thirty Years War: Europe's Tragedy. London: Belknap Press. ISBN 978-067406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