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첼로메이
Vladimir Chelomey블라디미르 첼로메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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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 |
죽은 | 1984년 8월 12일 | (70세)
시민권 | 소비에트 연방 |
모교 |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 |
로 알려져 있다. | 최초의 소련 펄스 제트 엔진의 제작은 물론 다양한 순항미사일, 프로톤 로켓과 UR-100, UR-200, UR-500, UR-700 ICBM 개발을 주도했다.[1] |
수상 | 트와이스 히어로 |
과학 경력 | |
필드 | 미사일 엔지니어, 항공기 엔지니어, 설계자 |
기관 | 키이브 폴리테크닉 연구소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 수학연구소 국립항공대학교 바라노프 중앙 항공 자동차 개발 연구소 |
에 관한 일련의 기사의 일부 |
소비에트 우주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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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첼로메이 또는 첼로메이(러시아어: вааммрррррррррччччччччччччччччч;;;;;;;;;;;; 1914년 6월 30일 ~ 1984년 12월 8일)는 우크라이나 소련의 역학자, 항공 및 미사일 엔지니어였다. 그는 소련 최초의 펄스 제트 엔진을 발명했고 세계 최초의 대함 순항미사일과 UR-100, UR-200, UR-500, UR-700 같은 ICBM 복합체 개발을 담당했다.[1]
초년기
첼로메이는 러시아 제국(현 폴란드) 루블린 주 시들체에서 태어났다. 생후 3개월 때 그의 가족은 우크라이나의 폴타바로 도망쳤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이 시들스에 가까이 왔다.
블라디미르가 12살이었을 때, 그 가족은 다시 키예프로 이사했다.
1932년 첼로메이는 키이브 폴리테크닉 연구소(키이브 항공 연구소의 기초가 되는 곳)에 입학하여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으로서 자신을 보여주었다. 1936년에 그의 첫 번째 책 벡터 분석이 출판되었다. 이 연구소에서 공부한 첼로미는 키이브 대학에서 수학 분석, 미분 방정식 이론, 수학 물리학, 탄성 이론, 역학 등에 대한 강의도 들었다. 우크라이나 SSR 과학 아카데미에서 툴리오 레비-시비타의 강연에도 참석했다. 즉 이 시기에 첼로메이는 역학과 진동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의 여생에 계속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7년 첼로미는 명예롭게 이 연구소를 졸업했다. 그 후 그는 그곳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과학 후보자 논문(1939년)을 변호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대애국전쟁이 시작된 이래 첼로메이는 모스크바의 바라노프 중앙항공모터빌딩(TsIAM)에서 일하면서 나치 독일의 비슷한 현대적 발전과는 별개로 1942년 최초의 소련 맥동식 항공 제트엔진을 만들었다.
1944년 여름, 나치 독일이 영국 남부를 상대로 V-1 순항미사일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1944년 10월 9일, 구 소련 국가방위위원회와 항공산업 인민위원회 알렉세이 샤쿠린에 의한 결정에 따라, 첼로메이씨는 N51 공장의 이사 겸 수석 설계자로 임명되었다(전직 이사 니콜라이 폴리카포프가 얼마 전에 사망했다). 첼로미는 가능한 한 빨리 최초의 소련 순항미사일을 설계, 제작, 시험할 예정이었다. 빠르면 1944년 12월, 암호명 10Kh인 이 미사일은 페틀랴코프 Pe-8과 투폴레프 Tu-2 항공기에서 시험 발사되었다.[1]
OKB-52와 학업 경력
10Kh의 성공에 이어 첼로메이 감독의 주도하에 USSR 무인항공기 설계 특별설계국(OKB-52)이 창설됐다. 1955년에 첼로미는 OKB-52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순항 미사일에 대한 작업을 계속했다.
첼로메이는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에서 과학 박사학위를 따내며 과학 연구를 계속했다. 1951년 논문 방어 후 1952년 이 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8년 OKB-52는 다단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제안을 내놓았다. 비록 그들의 UR-200 로켓 디자인은 미하일 얀겔의 R-36 (NATO 명칭 SS-9 Scarp)에 유리하게 거부되었지만, 그들의 UR-100 디자인은 받아들여졌다.
첼로메이의 OKB는 세르게이 아파나시예프가 이끄는 종합기계건설부 소속이었다.[1]
우주선
1959년 첼로미는 항공장비 최고 디자이너로 임명되었다.
OKB-52는 ICBM 설계와 함께 우주선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고, 1961년 훨씬 강력한 ICBM인 UR-500의 설계 작업을 시작했지만 미사일로서 사용하기에는 다소 비실용적이라고 거부당했다.
1962년 첼로미는 USSR 과학 아카데미의 학자가 되었다.
첼로메이는 '문 레이스'에서 세르게이 코롤레프의 내부 경쟁자가 됐다. 첼로메이는 강력한 UR-500을 달맞이 비행기로 소형 2인조 우주선을 띄우는데 사용할 것을 제안했고, 니키타 흐루쇼프의 가족 구성원들을 고용함으로써 그의 제안에 대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UR-500이 군사 우주정거장을 발사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코롤레프는 UR-500이 극도로 독성이 강한 질소 테트록사이드와 UDMH 추진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반대했다.[citation needed]
흐루쇼프의 권력탈퇴에 이어 첼로메이와 코롤레프의 프로젝트가 결합되면서 소련의 달 프로그램은 계속되었다. UR-500(일명 프로톤)의 첫 발사는 1965년 초에 이루어졌다.
비록 그것이 첼로미가 희망했던 것처럼 달에 우주 비행사를 보내는 데 결코 사용되지 않았지만, 프로토온은 소련/러시아 함대의 주요 중형 리프트 발사체가 되었고 수년 동안 행성 탐사선, 우주정거장, 지구 동기 위성 등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폴리오트와 같은 지구 위성은 첼로미의 OKB에 의해 설계되었다. 이전과 달리 첼로메이 1호 위성인 폴리오트-1(1963년)과 폴리오트-2호(1964)도 스스로 궤도를 바꿀 수 있었다. 그는 또한 프로톤 위성 개발을 지휘했다. 1970년대 첼로메이의 OKB는 실현되지 않은 프로토온 기반 20톤 LKS(Kosmolyot) 우주비행기를 제안하고 알마즈 군 궤도역(살류트2, 살류트3, 살류트5)에서 작업했는데, 이 역시 살류트, 미르, 즈베즈다 민간 우주정거장의 기반이 되었다. 그의 알마즈 역을 지원하기 위해 첼로미는 소유즈의 대안으로 TKS를 설계했다. TKS는 계획한 대로 유인 비행한 적은 없지만, 파생상품은 살류트7과 미르에서 모듈로 비행했다. 1980년대 첼로미의 OKB는 제니트-2 발사체를 기반으로 한 비실현형 15톤 우라간 우주선을 제안했다.[1]
대함 미사일
그는 P-80 주브르 대함 미사일 건설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관련 P-100 오닉스 미사일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죽음
첼로메이는 1984년 모스크바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수상
- 사회주의 노동의 영웅 2회(1959, 1963)
- USSR 주상(1967, 1974, 1982년)
- 레닌상(1959년)
- 레닌 4대 훈장
- 10월 혁명 훈장
참조
외부 링크
위키미디어 커먼스는 블라디미르 첼로미 관련 매체를 보유하고 있다. |
-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첼로메이
- (러시아어) 전기
- "Bank of the Universe" - 2014년 키예프 볼텐코 C가 편집한 출판사 "Phenix", ISBN 978-966-136-16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