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S 푸에블로 (AGER-2)

USS Pueblo (AGER-2)
USS 푸에블로 (AGER-2)
Laika ac USS Pueblo (7960099660).jpg
2012년 북한의 푸에블로
역사
미국
이름푸에블로
네임스케이크콜로라도 푸에블로 군과 콜로라도 푸에블로 군.
빌더커와이 조선공업
눕다1944
시작됨1944년 4월 16일
커미셔닝됨1945년 4월 7일
가동중1945
재분류됨1966년 6월 18일, AKL-44 13 1967년 5월 13일, AGER-2
명예와
상을 주다
  • 국방훈장
  • 대한민국 국방훈장
  • 전투 액션 리본(소급 작동)
발동.1968년 1월 23일
운명북에 붙잡혀
상태활동 중 (압류 방지를 위해, 현재 북한이 박물관 선박으로 보유하고 있음)
배지USS Pueblo AGER-2 Crest.png
일반적 특성
클래스 및 유형
  • (건설된 경우) 육군 화물 및 공급(FS)
  • (초기해군) 카마노급 경화물선(AKL)
  • (변환) 배너급 환경연구선
유형(건조된 경우) 경화물선, (전환된 경우) 인텔-게더링 선박
톤수345톤 dwt
변위550톤 조명, 895톤 가득
길이177피트(54m)
32피트(9.8m)
초안9피트(2.7m)
추진500hp급 GM 클리블랜드 디비전 6-278A 6실 V6 디젤 엔진 2개
속도12.7노트(23.5km/h; 14.6mph)
보완장교 6명, 남자 70명
무장을2 × M2 브라우닝 .50 cal. (12.7×99mm)

푸에블로호(AGER-2)는 배너급 환경연구선으로 1968년 1월 23일 북한군에 공격당해 나포된 정찰선으로, 이후 '푸에블로호 사건'[1] 또는 '푸에블로호 위기'로 알려졌다.

미 해군 함정과 83명의 승무원 중 한 명이 이번 공격으로 숨진 것은 린든 B 대통령 이후 일주일도 안 돼 이뤄졌다. 존슨 국무장관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에서 테트공격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그리고 북한 124부대원 31명이 비무장지대(DMZ)를 넘어와 한국 청와대(집행위원)를 공격하려다 한국인 26명을 사살한 지 사흘 만에 미국 의회에 연설했다. 수도 서울의 대저택. 이후 11개월 동안 푸에블로 수용과 그녀의 승무원들에 대한 학대와 고문은 주요 냉전 사건이 되어 서구 열강과 동부 열강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북한은 푸에블로호료도에서 7.6해리(14㎞) 떨어진 자국 영해로 고의로 진입했으며, 이들이 수차례 침입한 것으로 로그북에 나와 있다고 밝혔다.[2] 그러나 미국은 이 선박이 사건 당시 공해상에 있었고 북한이 자신들의 성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증거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3] 푸에블로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북한이 억류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미 해군임관함으로 남아 있다.[4] 2013년 초부터 평양 포통강을 따라 계류된 뒤 승전전시박물관에서 박물관 선박으로 사용했다.[5] 푸에블로호현재 포로로 잡혀 있는 미 해군의 유일한 함정이다.[6]

초기 작업

미 육군 화물선 FP-344(1944년). 1966년 해군으로 이양된 그녀는 USS 푸에블로호(AGER-2)가 되었다.

이 배는 1944년 4월 16일 위스콘신주 커우니의 Kewaunee 조선공학과에서 미육군 화물여객(FP) FP-344로 진수되었다. 육군은 나중에 FP 선박을 Freight and Supply로 재설계하여 FS-344로 명칭을 변경하였다.[7] 1945년 4월 7일 뉴올리언스에서 취역한 이 배는 육군의 민간인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되는 해안경비대 조종 육군 함정의 역할을 했다. 그녀의 첫 지휘관은 J. R 중위였다. Choate, USCGR, J.G. Marvin B 중위가 뒤를 이었다. 바커, USCGR, 1945년 9월 12일.[8] FS-344는 1954년에 서비스 중단되었다.

1964년 국방부는 기존 AGTRT-AG 함정보다 작고, 비용이 적게 들며, 유연하고, 대응력이 뛰어난 신호수집함을 보유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방형 경화물선은 현존하는 DOD 선박 중 가장 적합한 선박이었으며, 1964년 한 USS 배너로 전환되어 1965년부터 운항을 시작했다.[9] 배너의 임무는 시야 전파로 고주파 전자배출량을 감시하는 것으로, 이전의 정보 수집 임무보다 해안 가까이에서 운용해야 했다. 배너는 비무장 상태였지만 승무원들에게는 M1911 권총 5발과 M1 가란트 소총 3발이 발급됐다. 배너소련 태평양 연안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소련 해군 함정과 대치했다. 이 배들은 때로 "가면 발사하겠다"는 의미의 국제 신호기를 띄우기도 했지만 배너는 해상 충돌 방지를 위한 국제규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기선을 제압했다. 소련은 유사한 임무에서 소련 선박에 대한 미국의 상호주의 가능성을 인정했다.[10]

FS-344는 1966년 4월 12일 미 해군으로 이양되었으며, 6월 18일 푸에블로호, 콜로라도주 푸에블로 카운티의 이름을 따서 USS 푸에블로호(AKL-44)로 개칭되었다. 당초 그녀는 1966년 푸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에서 기본 장착을 위한 경화물선으로 분류되었다.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으로 비비밀 엄호 아래 준비돼 있어 일반 승무원 인력과 훈련은 이 기준이었고, 44%는 처음 배정을 받았을 때 바다에 가본 적이 없었다. 15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신호 지능 장비의 설치가 예산상의 이유로 1967년으로 지연되어, 구어적으로 "스파이 배"로 알려진 서비스를 재개하고 1967년 5월 13일에 AGER-2를 재설계하였다.[9] 한정된 전환 예산은 예비 지휘관 로이드 부처가 요청한 몇 가지 개선안에 대한 거부감을 야기했다. 배너가 순찰 중인 양쪽 엔진의 고장에 따라 이틀 동안 표류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요청된 엔진 점검은 거부되었다. 요청된 긴급 스커틀링 시스템은 거부되었고, 이후 Bucher는 철거 혐의로 폭발물을 얻을 수 없었다. 기밀문서를 신속하게 파기할 수 있도록 연료가 공급된 소각로로 번 을 교체하는 것은 거부되었다. 이후 배의 기밀 출판물 도서관을 축소해 달라는 부처의 요청이 비슷하게 거부된 후, 그는 선원들의 편의를 위해 의도된 일부 재량적 자금을 사용하여 덜 유능한 소각장을 구입할 수 있었다. 지난 6월 8일 USS 리버티 사건에 이어 호라시오 리베로 주니어 해군 작전부 차장은 "적절한 방어 수단 없이는 어떤 해군 함정도 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시했다. VCNO 직원들은 조선소에 탄약 저장용량을 갖춘 3인치/50구경 총푸에블로 본갑판에 설치하라고 지시했지만, 부처는 본갑판 위 중량을 추가해 선박 안정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는 주장을 폈다.[10] 푸에블로호는 시험과 결핍을 거친 후 1967년 9월 11일 조선소에서 샌디에이고로 가서 분해 훈련을 받았다.[9]

무장하지 않은 푸에블로호일본 요코스카의 미 해군기지에 도착했을 때, 미 해군사령관은 실종된 갑판총의 대체품으로 M2 브라우닝.50구경 기관총 2발을 가져가라고 함정에 지시했다. 훈련할 수 있는 제한된 시간 동안, 10명의 선원들은 각각 5발을 발사했다. Bucher는 다리 위의 자신의 위치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이 총들을 선미에 노출된 위치에 장착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 위치들은 포병들을 보호하고 총과 탄약 보관함을 감추기 위해 배의 상부 구조를 사용할 가능성을 없앴다. 근처에 탄약 공급이 없는 노출된 총은 캔버스 덮개 밑에 위장되어 있었는데, 이 총은 냉동 스프레이로 단단해졌다.[10]

푸에블로 사건

푸에블로 사건
한국 DMZ 갈등과 한국 갈등의 일부
The USS Pueblo as a museum in Pyongyang, North Korea after its capture
포획 후 북한 평양에 있는 박물관으로서의 푸에블로호.
날짜1968년 1월 20-23일
위치
결과 북승
푸에블로 호와 선원들의 생포
호전성
미국 북한
지휘관과 지도자
United States 로이드 M. 부처 (POW) 알 수 없는
1 첩보선 어선 2척
2 잠수함 추격전
어뢰정 4척
MiG-21 전투기 2대
사상자 및 손실
1명 사망
82명 생포
없음

1월 5일 1968년 푸에블로 운송 중에 사세보 일본의 미 해군 기지,에서 그녀는 1월 11일 1968년, 북쪽으로 흘러쓰시마 해협을 통과한 일본해로 떠났다 일본 요코스카를 떠났다. 그녀는 쓰시마 해협에서 소련 해군의 활동을 가로채 감시하고 북한의 신호와 전자 정보 수집을 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가지고 떠났다.[11] 미국 전역의 유사한 북한 공관의 부재는 소련측의 대응을 제지했던 현물적 보복의 가능성으로부터 북한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선교 기획자들은 인식하지 못했다.[10] 사건 관련 순찰 중 푸에블로 해군안보그룹(NSG)으로부터 국가안전보위부(NSA)직접지원부대(DSU)의 기밀 해제된 SIGAD는 USN-467Y였다.[12] AGER는 해군과 국가안보국(NSA)의 합동 프로그램을 가리켰다.[13] 이 배에는 장교 5명과 사병 38명, NSG 사병 1명과 사병 37명, 민간 해양학자 2명으로 구성된 선원들이 탑승해 커버스토리를 제공했다.[10]

1968년 1월 16일 푸에블로호는 북한 해안에서 41°N~39°N까지 내려온 뒤 북한 해안에서 13해리(24km) 이상 접근하지 않고 야간 18~20해리(33~37km)까지 이동하는 순찰에 대비해 42°N 평행에 도착했다. 이는 항해 경험이 좋은 선원 2명에 불과해 어려웠는데, 선장은 나중에 "나를 위해 항해 잡무를 할 고도의 전문 선원이 없었다"[9]고 보고했다.

1968년 1월 20일 17시 30분, 북한이 개조한 SO-1급 소련형 잠수함 추격기푸에블로 4000야드(3.7km) 내부를 통과했는데, 푸에블로호 남동쪽 약 15.4해리(28.5km)는 39°47'N'E, 128°28.5'E였다.[9]

1968년 1월 22일 오후, 두 마리의 북한 어선인 '쌀 패디 1호'와 ' 패디 2호'가 푸에블로 30야드(27m) 내를 통과했다. 이날 북한 KPA특수작전군 부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상대로 청와대 간부 맨션에서 암살 시도를 했지만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알리지 않았다.[9]

이 미국계정에 따르면 1월 23일 푸에블로호는 잠수함 추격기에 의해 접근해 국적에 도전받았다. 푸에블로호미국 국기를 게양하고 민간 해양학자들에게 그들의 갑판 윈치로 물 샘플링 절차를 시작하도록 지시하는 것으로 응답했다.[10] 그리고 나서 북한 선박은 푸에블로에게 물러나거나 총격을 가할 것을 명령했다. 푸에블로호는 기동해서 도망치려 했지만 잠수함 추격자보다 상당히 느렸다. 몇 발의 경고 사격이 있었다. 게다가 3척의 어뢰정이 수평선에 나타났다가 추격과 후속 공격에 가담했다.[9]

공격자들은 곧 두 명의 조선인민공군 MiG-21 전투기와 합류했다. 네 번째 어뢰정과 두 번째 잠수함 추적기가 잠시 후 수평선에 나타났다. 푸에블로호의 탄약은 갑판 아래에 보관되어 있었고, 그녀의 기관총은 추운 날씨에 타르폴린에 싸여 있었다. 기관총은 무인화 되어 있었고, 기관총에 사람을 태우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다. NSA 보고서는 항해 명령을 인용한다.

(……) 방어무장(기계총)은 조사된 부대의 비상한 관심을 유발하지 않도록 보관하거나 그러한 방식으로 덮어야 한다.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경우에만 사용해야 한다(…… )

및 참고 사항:

실제로 발화 메커니즘의 기질적 조정 때문에 .50구경 기관총이 작동하는데 최소 10분이 걸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록 선원들이 배의 배치 직전에 무기에 대한 초보적인 지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 육군 경험을 가진 단 한 명의 선원만이 그러한 무기에 대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9]

북한이 푸에블로호가 12해리(22km) 영해에 진입했다고 보고한 17개 지점을 보여주는 도표
미 해군이 보고한 푸에블로 진지

미 해군 당국과 푸에블로호 선원들은 포획 전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서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이 선박이 북한 영토 내에 잘 있었다고 주장한다. 푸에블로호의 임무 성명은 그녀가 그 한계에서 1해리(1,852m) 이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북한은 당시 국제표준이 12해리(22km)였음에도 93km(50nautical mile)의 해상경계선을 기술하고 있다.[14]

북한 선박들은 푸에블로호에 승선하려 했지만, 그녀는 2시간 넘게 이를 막기 위해 조종되었다. 이어 잠수함 추격대가 57㎜ 대포로 포문을 열었고 소형 함정이 기관총을 발사해 시그널맨 리치가 왼쪽 종아리와 오른쪽 상단에서 부상을 입었다. Bucher 선장 역시 약간의 파편상을 입었지만 그들은 무력화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푸에블로호 선원들은 민감한 물질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배에 실려 있는 물질의 부피가 너무 커서 그것을 모두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NSA 보고서는 푸에블로 해군 보안군 사령부 부대의 책임자인 스티브 해리스 중위의 말을 인용했다.

(…… ) 우리는 구식 출판물들을 계속 기내에 보관하고 있었고, 이런 것들을 없애려는 모든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임무를 시작할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 장소를 정리하고 싶었고 우리는 너무 많은 카피를 가지고 있었다. (... )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

배에 실려 있던 전체 기밀 자료의 극히 일부만이 파괴되었다.

푸에블로호와 일본 가미세야 해군보안단 간의 무선 교신은 이 사건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 결과 7함대 사령부는 푸에블로호의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에어커버는 약속되었지만 도착하지 않았다. 제5공군은 활주로에 경계 태세를 갖춘 항공기가 없었고, 항공기 발사가 2~3시간 정도 지연될 것으로 추정했다. USS 엔터프라이즈푸에블로 남쪽 510해리(940km) 지점에 위치해 있었지만 경계 태세를 갖춘 F-4B 항공기 4대는 공중전투에 적합하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 기장은 변환된 항공기를 공중으로 띄우는데 1.5시간(90분)이 필요하다고 추정했다.[9]

결국 포격으로 푸에블로호는 명령대로 정지하고 준수 신호를 보내며 북한 선박을 추적할 수밖에 없었다. 푸에블로호는 민감한 물질을 파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벌기 위해 북한 해역 밖에서 다시 멈췄지만 잠수함 추격기에 의해 즉각 발포되었고, 소방관 듀안 호지스가 사망했고, 이후 푸에블로호는 북한 선박을 따라 다시 비행을 재개했다. 이 배는 마침내 UTC 05시 55분(현지시각 오후 2시 55분)[15]에 어뢰정 및 잠수함 추격기에서 나온 남자들에 의해 승선되었다. 승무원들은 두 손을 묶고 눈을 가리고, 때리고, 총검으로 찔렀다. 푸에블로호는 북한 영해에 있다가 이번에도 북한 고위 관리들에 의해 승선했다.[citation needed]

이 배가 북한 수중에 있다는 최초의 공식 확인은 5일 후인 1968년 1월 28일에 이루어졌다. 이틀 전 오키나와 가데나에 있는 프로젝트 블랙 실드 편대에서 조종사 잭 위크스가 비행한 CIA A-12 옥스카트 항공기의 비행은 북한 상공에서 3차례의 고공 초고속 비행을 했다. 이 항공기의 필름이 미국에서 처리되었을 때, 그들은 푸에블로호가 북한 선박 두 척에 둘러싸인 원산 항구에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16]

미국의 정부 관리들 사이에서는 이 상황에 대한 국가의 대응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멘델 리버스 하원의원은 존슨 대통령이 핵공격에 대한 처벌로 푸에블로 복귀를 최후통첩할 것을 제안했고 게일 맥기 상원의원은 미국은 더 많은 정보를 기다리며 "사건 악화에 대해 우주주의적 대응을 해서는 안 된다"[17]고 말했다. 존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인 호레이스 버스비에 따르면, 대통령의 "인질 납치 보복은 북한 주민들에 대한 어떠한 보복이나 다른 공격 요구도 억제하기 위해 한국에서 매우 열심히 일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사여구가 인질들을 살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18]

사건 다음 날인 1968년 1월 24일 수요일, 워싱턴은 광범위한 각료 회의 후 초기 대응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 공군과 해군 병력을 가까운 지역에 배치한다.
  • 푸에블로호 상공에서 정찰 비행을 하라.
  • 군 예비역 소집 및 복무기간 연장
  • 유엔의 틀 안에서 그 사건에 항의하라.
  • 존슨 대통령이 직접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총리에게 전보를 치게 하라.[19][20][21][22]

존슨 행정부는 또 북한 항구의 봉쇄, 군사 목표물에 대한 공습, 남북을 분리한 비무장지대(DMZ)를 가로지르는 공격도 검토했다.[23]

당시 미국 관리들은 푸에블로호 압류가 소련이 지휘한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이후 기밀 해제된 소련 기록보관소들은 소련 지도부가 기습에 붙잡혀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동구권 대사들은 사건 여파로 북한이 신중을 기할 것을 적극 경고했다. 몇몇 문서들은 이 공격적인 행동이 1966년 중-소 분단의 여파로 북한이 중국 공산당에 기울어짐을 알리기 위한 시도였을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 [24]

여파

푸에블로호원산항에 입항했고 선원들은 포로수용소(FAO)로 두 차례 이동했다. 선원들은 석방되자마자 북한 억류 중에 굶주리고 정기적으로 고문을 당했다고 보고했다. 이런 처우는 북한 선원들이 자신들이 만든 선전용 사진에서 몰래 '손가락'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25] 악화됐다.[26]

푸에블로호 포로 북 선전사진 하와이 굿 럭 사인의 비밀을 폭로한 타임 기사의 사진과 설명. 선원들은 북한에 억류된 그들의 처우와 죄의식에 대한 선전을 은밀히 항의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튕기고 있었다. 북한 주민들은 몇 달 동안 중지를 뒤집는 진짜 의미를 모른 채 사진을 찍었고, 선원들은 이 간판이 하와이에서 행운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사령관 로이드 M. Bucher는 그가 자백하도록 하기 위해 모의 총살단을 동원하는 등 심리적으로 고문을 당했다. 결국 북한 사람들은 그의 앞에서 부하들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고, 부처는 "그와 선원들의 비행에 대한 갈등"을 뉘우치고 동의했다. Bucher는 고백자가 직접 쓸 필요가 있는 정의에 의한 "고백" 이후 고백을 썼다. 그들은 그가 쓴 글의 의미를 확인했지만 그가 "우리는 북한[북한]을 괴롭힌다"고 말했을 때 그 말투를 잡지 못했다. 우리는 그들의 위대한 지도자인 김일성을 숭배한다.[27] (버처는 "패안"을 "pee on"이라고 발음했다.)[28]

선원 석방을 위한 협상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동시에 미국 관리들은 협상에서 소외된 것에 불만을 표하는 한국인들의 회유에 신경을 썼다. 리처드 A. 주한 미국대사관의 정치 자문위원이자 푸에블로 협상의 운영 책임자인 에릭슨은 구두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남한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완전히 분노했고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북한 주민들이 가능한 모든 면에서 남한의 불리한 상황을 이용하려고 할 것으로 예상했고, 그들은 급속도로 우리를 불신하고 그들의 위대한 동맹국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한국이 청와대 압수수색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고 그들의 커져가는 불안감을 어떻게 완화시킬 것인가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DMZ가 다공성이고 더 많은 장비와 원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저글링하고 있었다.[29]

그는 또한 판문점에서의 회담이 북한 주민들의 특별한 협상 스타일 때문에 보통 어떻게 비생산적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 예로, 우리는 승무원의 석방과 관련하여 제안서를 작성했고, 그들은 카드 카탈로그를 가지고 앉아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제시한 특정 제안에 대한 대답이 카드에 없다면, 그들은 전혀 반응이 없는 말을 한 다음 질문으로 향하는 대답을 가지고 다음 모임에 다시 오곤 했다. 그러나 좀처럼 즉답은 없었다. 그것은 협상 내내 일어났다. 그들의 협상가들은 개인적인 판단이나 일반적인 지시에 근거하여 행동하거나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결코 부여받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대답을 미루어야 했고 아마도 평양에서 그것을 검토해서 그것을 돌려주고 나서 그것을 결정했을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그들이 당면한 제안과 일치하는 카드 파일이 없다면 완전히 터무니없는 반응을 얻곤 했다.[29]


에릭슨과 조지 뉴먼 주한 미사절단 부단장은 1968년 2월 국무부에 보낸 전보를 통해 협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했다.

우리가 실제로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판문점에서 이런 일을 할 생각이라면, 그리고 선원들을 되찾는 것이 유일한 목표라면 북한의 손에 놀아나고 협상은 분명하고 피할 수 없는 길을 따를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작성하게 될 문서에 서명하라는 요청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관점을 제시하고 그들이 당신을 ...라고 비난하는 모든 것을 자백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만약 허락한다면, 그들은 그들의 선전 목표 면에서 이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빌어먹을 것들을 쥐어짜야 한다고 느끼는 만큼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들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한미간의 쐐기를 박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느낄 때, 그리고 우리가 그들의 자백과 사과 문서에 서명하기로 동의하면, 그들은 승무원을 돌려보낼 것이다. 그들은 그 배를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래왔기 때문에 이런 식이 될 것이다.[29]

사과문, 푸에블로호가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미국의 서면 인정, 향후 미국이 스파이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언에 이어, 북한 정부는 석방만을 위해 한 것이라는 구두성명이 선행됐지만 나머지 선원 82명을 석방하기로 결정했다.[30][9] 1968년 12월 23일, 대원들은 버스를 타고 한국과의 비무장지대(DMZ) 국경으로 가서 소방관 듀안 D의 시신을 싣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건너갔다. 포로로 잡히는 동안 살해된 호지스. 포로가 된 지 정확히 11개월 후, 선장은 긴 선원들의 줄을 이끌었고, 마지막에 다리를 건너는 마지막 남자인 에드 머피 중위가 그 뒤를 따랐다.[31][9]

Bucher와 모든 장교들과 승무원들은 해군 조사재판소 앞에 나타났다. 항전 없이 투항하고 기밀자료를 파기하지 못한 스티브 해리스 중위와 부처장에게 군법회의가 권고됐지만 존 차피 해군장관은 "충분히 고통받았다"고 권고안을 거부했다. Bucher 사령관은 어떠한 경솔한 행동에도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고 은퇴할 때까지 해군 생활을 계속했다.[32]

1970년, Bucher는 Bucher: My Story라는 제목의 USS Pueblo 사건에 대한 자서전적 계정을 출판했다.[33] Bucher는 2004년 1월 28일 샌디에이고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전직 선원 제임스 켈은 부처가 북한에 있는 동안 입은 부상이 그의 죽음에 기여했음을 시사했다.[34]

케산 전투, 테트 공세와 함께 푸에블로 사건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 여론을 반전시키고 린든 B에 영향을 끼친 핵심 요인이었다. 존슨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물러났다.[35]

푸에블로호는 여전히 북한이 보유하고 있다. 1999년 10월 동해안의 원산,한반도 주변,서해안의 남포항으로 예인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공해상을 통해 선박을 이동시켜야 했고, 제임스 켈리 미국 대통령 특사의 평양 방문 직전에 수행됐다. 푸에블로호남포조선소 정차 후 평양으로 이전해 제너럴 셔먼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 인근 대동강변에 계류했다. 2012년 말 푸에블로호조국해방전쟁박물관에 새로 추가된 옆에 있는 평양의 포통강으로 다시 옮겨졌다.[5]

오늘날 푸에블로호는 미 해군에서 USS 헌법("오래된 아이언사이드")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임관함으로 남아 있다. 푸에블로호제1차 바바리 전쟁 이후 포획된 몇 척 안 되는 미국 선박 중 하나이다.

미국 통신보안 침해

푸에블로 통신장치의 역엔지니어링은 북한 주민들이 소련과 지식을 공유하도록 해 통신장치의 복제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미 해군이 이 시스템을 개정하기 전까지 양국은 미 해군의 통신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었다. 푸에블로호 압수는 미 해군 영장전담관앤서니 워커가 워커 스파이 반지를 설치하며 소련 당국에 자신을 소개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푸에블로호 압류는 탑승한 암호화 장치를 포착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행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by whom?] 그들이 없으면 소련은 워커의 정보를 충분히 활용하기 어려웠다.[36][37][38] 미첼 러너와 종대신은 소련계 루마니아인 독서가 소련군이 함선 포획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기습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39]

미국은 석방된 승무원들에 대한 보고를 마친 뒤 2006년 말 해제된 '크립토그래픽 피해 평가'를 준비했다.[40] 보고서에 탑승 승무원들도 부지런한 노력 그들의 대부분은 암호화 장비 및 간행물에 익숙하지 않았던 민감한 material,[41]을 파괴하게, 그들의 적절한 파괴에,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민감한 materia의 대부분의 회복에서 북한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은 훈련을 받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l 선원들 스스로도 북한 주민들이 장비 대부분을 재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포획 당시 탑재된 암호장비는 '오프라인 암호화를 위한 KL-47 1대, 온라인 암호화를 위한 KWR-7[42] 2대, 해군 작전정보방송을 수신하는 KWR-37 3대, 플릿 방송을 수신하는 KWR-37과 연계해 사용하는 KG-14[43] 4대' 등이었다. 추가 전술 체계와 일회용 패드는 포착됐지만 이를 이용해 보내는 대부분의 메시지가 단기간 동안만 가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선박의 암호 담당자들은 그들이 매우 잘 알고 있는 전자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승무원들이 세부사항을 숨기려 할 때, 그들은 나중에 캡처된 매뉴얼의 페이지들과 마주쳤고 그들의 초기 계정을 수정하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심문을 통해 얻은 정보로 북한 주민은 3~6개월간의 노력을 아꼈지만, 결국 나포된 장비와 함께 동행한 기술 매뉴얼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승무원들은 푸에블로호에 탑승하지 않고 피상적인 정보만 제공한 미국의 많은 암호 시스템에 대한 질문도 받았다.

푸에블로호에는 1968년 1월, 2월, 3월 주요 명단이 실려 있었으나, 푸에블로호가 포획된 직후 이들 키의 다른 보유자에게 사용하지 말라는 지침이 보내져 피해가 제한됐다. 그러나 보고에서 푸에블로호가 1967년 11월과 12월 주요 리스트를 대체하여 탑승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는 푸에블로호가 정거장에 도착하기 훨씬 전인 1월 15일까지 파기했어야 했다.[40]: p. 19 이 보고서는 11월과 12월에 대체된 키의 포획을 가장 손상적인 암호손실로 간주했다. 이 열쇠들의 포획은 북한과 동맹국들이 그 몇 달 동안 보낸 11만 7천 개 이상의 기밀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게 했다.[40]: p. 30 북한 주민들도 포획된 시스템의 작동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얻었을 것이지만, 앞으로 추가적인 핵심 자료가 훼손될 경우에만 유용했을 것이다. 워커 스파이 링의 존재는 물론 보도 당시 알려지지 않았다.

보고서는 "북한 주민들은 일부 장비도를 제외하고는 포착된 암호자료를 선원들에게 전시하거나 선전용으로 공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다른 고도로 기밀인 특수 정보 문서들을 포획하는 것에 대한 국제적인 홍보와 대조적으로, 이 자료가 공개되거나 공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중요성과 그 중요성에 대해 철저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후천적인."[40]: A.7

공산진영에서

루마니아 국가기록원에서 공개된 문서들은 1968년 한국에서 적대행위를 재개할 경우 북한의 막대한 물적 지원을 약속하면서 한국에서 적대행위를 재개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것은 소련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24] 청와대 습격사건과 함께 푸에블로호 사건은 소련 지도부와 북한 사이에 점증하는 괴리감의 일부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에서의 적대행위 재개를 촉진하는 것은 북-중 관계를 개선시키고, 중-소 분단 국면에서 북한을 다시 중국 세력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으로 베이징에서 보여졌다. 미국 승무원 석방을 위한 소련군의 (당시 비밀) 외교 노력이 평양에서 묵살된 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소련 공산당 제23차 총회 제8차 본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북한의 행동을 비난했다.[24] 와는 대조적으로 중국(국가통제) 언론은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북한의 행동을 지지하는 선언문을 게재했다.[44]

나아가 소련 지도부는 김일성이 과거 한국에서의 군사적 격화를 피하겠다는 모스크바의 확언과 모순되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특히 불쾌해했다고 소련 지도부는 밝히고 있다. 이전의 비밀 문서들은 소련이 푸에블로호 사건에 놀랐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언론에서 그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같은 문건들은 북한 주민들이 또 다른 분쟁의 골이 된 선원 석방을 위해 진행 중인 미국과의 협상과 관련해 소련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음을 보여준다. 소련의 한국에서의 적대행위 재개에 대한 거부감은 부분적으로 북한과 1961년 체결된 조약에 의해 소련이 공격을 받을 경우에 개입할[45] 의무가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1966년 중국과 맺은 유사 조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련도 미국과의 전면전에 나서기보다는 이를 무시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46]: 12–15

이번 사건을 둘러싼 중국과 북한의 기록물들이 비밀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김일성의 의도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은 1968년 1월 31일 김일성이 알렉세이 코시긴에게 추가 군사경제 지원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폭로했는데, 이는 소련이 김일성의 호전성을 억제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로 해석됐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초청받았으나, 1968년 2월 26일 입국한 김창봉 국방장관을 대신 보내면서 참석해야 하는 '국방준비 강화' 때문에 직접 가는 것을 거절했다. 소련 지도자는 브레즈네프와의 오랜 회담에서 미국과 전쟁을 벌일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그 후 몇 년 동안 있었던 북한에 대한 보조금 증액에는 동의했다.[46]: 15–18

협상 연표

1968년 4월까지 북한(북한)을 대표하는 박충국 소장과 미국을 대표하는 존 빅터 스미스 미 해군 후방 제독이 있는 가운데, 이 때 길버트 우드워드 육군 소장으로 교체된다. 타임라인과 인용구는 Trevor Armbrister의 Matter of Accountability에서 인용한 것이다.[47]

날짜 수석 협상가 이벤트/각 정부의 입장
1968년 1월 23일
(현지 시간 정오 무렵)
푸에블로호는 북한 항구도시 원산 부근에서 북한군에 의해 요격된다.
1968년 1월 24일
(현지 시간 오전 11시)
스미스 제독 청와대 습격사건에 항의하고 이후 붙잡힌 북한 군인의 '고백' 테이프를 틀다...
박 전 대표님,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리한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씀드리고 싶소만... 나는 지금 한 가지 더 제기해야 할 대상이 있는데 그것은 또한 극도로 심각한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의 형사 승선 및 압류에 관한 것이다. 공해상에 푸에블로. 당신의 정권은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선박과 선원을 즉시 돌려보내라; 둘째, 이 불법 행위에 대해 미국 정부에 사과하라. 미국은 국제법에 따라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보유해야 한다.
박 장군 우리 속담에 '미친 개는 달을 보고 짖는다'는 말이 있다. 나흘 전 열린 제260차 위원회 회의에서 나는 다시 당신측에 다수의 무장 간첩선이 우리 해안으로 잠입한 것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등록했고, 당신에게 그러한 범죄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가장 명백한 행동은 한국의 긴장을 악화시키고 또 다른 침략 전쟁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 들어왔음을 인정하고, 이러한 침입에 대해 사과해야 하며, 다시는 이런 침입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확신시켜야 한다.
인정, 사과 및 보증("3A")
1968년 3월 4일 사망자와 부상자의 이름은 북한이 제공한 것이다.
1968년 4월말 스미스 제독은 미국 육군 소장이 수석대표로 길버트 H. 우드워드 대장이 교체된다.
1968년 5월 8일 박 장군은 우드워드 장군에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 들어왔음을 미국이 인정하고, 침입에 대해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침입이 일어나지 않도록 북한에 보장할 문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해결의 유일한 근거로 삼자를 인용했고 미국을 비난하기 위해 다른 수많은 "크러들"을 계속했다.
1968년 8월 29일 우드워드 장군 니콜라스 캣젠바흐 미 국무부 부장관 (Nicholas Katzenbach)이 초안한 제안서["overwrite" 전략]가 제시된다.
만약 내가 우리뿐만 아니라 당신들이 만족할 만한 서류로 승무원들을 받은 것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모든 승무원들을 석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박 장군 자, 우리는 이미 당신에게 당신이 서명해야 할 것을 말했다.
1968년 9월 17일 박 장군 만약 당신이 우리 서류에 서명한다면, 뭔가 해결이 될 것이다...
1968년 9월 30일 박 장군 당신이 서류에 서명해 준다면, 우리는 동시에 남자들을 넘길 것이다.
우드워드 장군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원들을 가족들과 재결합시키기 위해 우리는 '승인 영수증'을 고려할지도 모른다.
1968년 10월 10일 우드워드 장군 (박 장군에게 '서명'의 본질을 증명함)
여기에 편지를 써서 82명의 남자와 1명의 시체가...
박 장군 당신은 당신측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소피스트와 하찮은 계층을 고용하고 있다...
1968년 10월 23일 "덮어쓰기" 제안은 다시 우드워드 장군에 의해 제시되고, 박 장군은 그것을 다시 "애완한 스트리트옴"이라고 비난한다.
1968년 10월 31일 우드워드 장군 만약 내가 우리뿐만 아니라 당신들이 만족할 만한 서류로 승무원들을 받은 것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모든 승무원들을 석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박 장군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 들어왔음을 인정하고, 이러한 침입에 대해 사과해야 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확신시켜야 한다.
1968년 12월 17일 우드워드 장군 제임스 레너드 국무부 한국과장이 제안한 "사전 반박" 계획을 설명한다. 미국은 이 문서에 서명하는 데 동의하겠지만, 우드워드 장군은 수감자들이 석방되면 이 문서를 구두로 비난할 것이다.
박 장군 [50분 휴식시간]
나는 네가 내 서류에 서명할 것을 주의한다... 우리는 합의에 도달했다.
1968년 12월 23일 미국을 대표해 우드워드 장군은 스리 어스 문서에 서명하고, 북한은 동시에 푸에블로 포로들을 미국 보호소로 돌려보내는 것을 허용한다.

관광명소

푸에블로호는 대동강으로 옮겨진 이후 북한 평양의 관광명소다.[48] 푸에블로 씨는 1866년 제너럴 셔먼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정박해 있었다. 2012년 11월 말 푸에블로호는 대동강 선착장에서 새 조국해방박물관 옆 포통강변으로 옮겨졌다. 이 배는 2013년 7월 말 북한[49] 시각의 영상과 함께 개조돼 관광객들에게 개방됐다. 한국 전쟁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 배에는 새로운 페인트 층이 추가되었다.[50] 방문객들은 배에 탑승하여 비밀 암호실과 승무원 유물을 볼 수 있다.[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