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S 바튼 (DD-722)

USS Barton (DD-722)
USS Barton (DD-722) underway on 26 March 1944 (80-G-237954).jpg
USS 바튼
역사
미국
이름USS 바튼
네임스케이크존 케네디 바턴
빌더배스 아이언 워크스
눕다1943년 5월 24일
시작됨1943년 10월 10일
커미셔닝됨1943년 12월 30일
해체됨1968년 9월 30일
스트리킨1968년 10월 1일
운명1969년 10월 8일 버지니아 앞바다에서 목표로 함몰
일반적 특성
클래스 및 유형 앨런 M. 섬너급 구축함
변위길이 2200t(2200t)
길이376피트 6인치 (1967.76m)
40피트(12m)
초안15ft 8인치(4.78m)
설치된 전원60,000 shp(45,000 kW)
추진
속도34kn(39mph; 63km/h)
범위15kn(17mph; 28km/h)에서 6,500nmi(7,500mi, 12,000km)
보완336
센서 및
가공 시스템
레이더
무장을

USS 바튼 (DD-722), 알렌 M. 섬너급 구축함은 존 케네디 바튼 제독의 이름을 딴 미 해군의 두 번째 배였다.

건설

제2 바톤(DD-722)은 1943년 10월 10일 메인 배스 아이언웍스사가 바튼 제독의 손녀인 바바라 딘 바튼 씨가 후원해 출시했다. 이 배는 1943년 12월 30일 사령관 J. W. 캘러한이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1944년 5월 14일 바톤은 노퍽을 출발해 27일 영국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6월 3일부터 26일까지 그녀는 노르망디 침공을 지원하기 위해 검열, 순찰, 폭격 임무를 수행했다. 6월 6일, 그녀는 침몰하는 LCT-2498에서 31명의 미군들을 구출했다. 바톤은 6월 25일 체르부르의 봄바둑에서 독일 배터리와 활발한 교전 중 효과적인 사격 지원을 하는 동안 약간의 손상을 입었다.

7월 10일 미국으로 돌아온 바튼은 곧 노퍽을 떠나 태평양으로 향했고 10월 2일 진주만에 도착했다. 그 후 그녀는 서쪽으로 쪄서 오모크 상륙 (11월 9일–12월 8일), 민도로 상륙 (12월 12일–18일), 링가이엔 만 상륙 (1945년 1월 4–21일)을 포함한 레이테의 생포 작업에 참여하였다. 5함대의 혼슈 및 난세이 쇼토에 대한 지원 급습(2월 10–19, 2월 25일 ~ 3월 1일), 오키나와 침공위한 태스크포스 54(TF 54), 3함대의 대일 급습(7월 10–24일) 등 이와지마 침공.

전후

바톤은 일본 점령군과의 간단한 관광을 마치고 10월 6일 시애틀로 돌아왔다. 1946년 6월 오클랜드에서 비키니 환초(Okland)로 출발해 작전크로스(6월 15일~8월 10일)에 참가하기까지 서해안을 따라 활동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1947년 1월 22일 샌디에이고에서 예비역 사용이 중단될 때까지 서해안에서 작전을 계속했다.

1949년 4월 11일 바톤은 재위촉되어 디스트로이드 디비전 201(DesDiv 201)에 합류했다. 그녀는 태평양 함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다가 7월 11일 노퍽에서 8월 5일에 도착한다. 이후 3년 동안 동부 연안을 따라 작전을 펼쳤고 카리브해로 가는 유람선 2척, 지중해 6함대와 함께 유람선 1척을 만들었다.

USS바통 USS아이오와 주와 USS필리핀해로 일본해, 7월 1일 1952년에 운영된다.

1952년 5월 15일 바톤파나마 운하를 통해 노퍽을 출발하여 하비 B 중령으로 향했다. 6월 18일 일본 요코스카에 도착한 세임 사령탑. 그녀는 한국 동해안의 작전들을 위해 수렵-킬러 그룹의 일원으로 태스크포스 77에 합류했다. 8월 10일, 호도 판도 섬에서 적 전지를 침묵시키는 동안, 바톤은 적 해안 전지에서 105mm(4인치)의 포탄에 의해 그녀의 1번 스택에 맞았다. 두 남자가 부상을 입었다. 세일러 데일 P. 그레이, BM3가 살해되었다.[1] 수리 파티원 MMFN 앤서니 팜(Johnstown, PA)이 파견되어 들어오는 라운드에 의한 손상 정도를 평가하였다. 그의 초기 보고 "... 그것은 작은 구멍이다, 직경이 약 18"인데, 거의 4 킬로피트의 실제 크기를 엄청나게 과소평가했다. 요코스카에서 짧은 수리 기간(8월 25~31일)을 마치고 한국 해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TF 77과 함께 작전을 하던 중 9월 16일 떠다니는 기뢰에 맞아 남자 5명이 실종되고 7명이 부상당했다. 사망한 다섯 명의 선원들은 러셀 J. 그라프, 해롤드 J. 사보이, 존 M이었다. 셰리, 월터 E. 티어펠더 주니어와 흑인 승무원 존 L. 월튼.[2] 그녀는 승무원들의 효과적인 피해 관리로 사세보에게 임시 수리를 위해 9월 29일~10월 19일, 그리고 나서 수에즈 운하를 경유한 노퍽에 영구 수리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12월 12일에 노퍽에 도착했다. 1953년 8월 15일 수리가 완료된 바톤은 남은 일 년을 동부 해안과 카리브해에서 조업하는 데 보냈다.

1954년 1월 4일, 구축함은 7함대와 함께 다시 한번 임무 여행을 위해 극동으로 향했다. 몇 달 동안 오키나와와 대만 사이의 해역을 순찰하고 메기와 함께 사냥꾼-킬러 훈련에 참가한 바톤은 아프리카 남단을 쪄서 케냐, 남아공, 브라질, 트리니다드를 경유했다. 그녀는 8월 10일에 노퍽에 정박했다.

바톤은 노퍽에서 훈련 일정과 대서양 함대 기동 훈련을 시작했으며, 일반적으로 버지니아 케이프 지역과 서인도 제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1955년 찰스턴 해군 조선소에서 정비를 마친 후, 이 구축함은 지중해 순항에 대비하여 3개월간 수렵-킬러 대잠수함전 훈련을 위해 대서양 함대에 재입대했다.

1956년 7월 28일 구축함은 노퍽을 출발해 8월 7일 지중해에 진입했다. 바톤과 솔리는 나토 연습 '휘소'에 참가한 뒤 이집트 포트사이드로 이동해 수에즈 운하를 거쳐 페르시아만으로 호송차를 호송해 중동군과 함께 6주간정기 순찰했다.

10월 29일, 두 척의 구축함은 이란 아바단 인근에서 남쪽으로 출발하여 만을 떠나 아라비아 반도를 일주하고 수에즈 운하를 재전송했다. 같은 날 이집트의 운하 국유화를 놓고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적대관계가 벌어졌다. 전쟁으로 운하가 폐쇄되었고, 이후 국제 군사 행동은 이집트로 하여금 침몰한 배로 운하를 막게 했다. 한편 바톤솔리는 바레인 시트라 항에 정박해 미국인들을 이 지역에서 대피시킬 필요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대기했다. 바레인에서 작전을 시작한 바톤은 이후 두 달 동안 야간에 정박하고 낮에는 전술훈련과 포병훈련을 했다. 마침내, 12월 12일, 그 구축함은 그녀에게 희망봉 주변을 노퍽으로 안내하는 명령을 받았고, 그녀는 1957년 2월 5일에 묶였다.

일정 기간 동안 유지한 후, 바톤은 3월 14일에 출항할 준비를 했다. 윌리엄 M. 우드와 그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태우고 버뮤다로 가서 해롤드 맥밀런 영국 총리와 협의할 때 순양함 캔버라를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톤은 기자들을 데리고 식장에 가서 윌리엄 M과 함께 보초를 섰다. 항구의 입구에 있는 목재. 그 후, 그 구축함은 ASW 순찰을 실시했고 선체 수리를 위해 뉴포트 뉴스의 드라이덕에 들어가기 전에 유지보수를 위해 노퍽에서 시간을 보냈다. 바톤은 7월 1일 체서피크 만을 떠나 또 다른 지중해 유람선 여행을 떠났다. 바톤은 NATO군 및 6함대 다른 부대와 몇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9월 20일 밤 포트사이드에 정박했다. 다음 날, 설리와 그녀는 수에즈 운하를 다시 한번 함께 갈아탄 다음 이란 해군과 함께 한 달간의 작전을 위해 페르시아만으로 향했다. 라피에 의해 구조된 군함은 지중해로 돌아와 3번의 나토 훈련에 참가하였다. 그녀는 11월 20일에 노퍽으로 돌아왔다.

이후 7년 동안 바톤은 노퍽에서 훈련하는 훈련과 6함대와의 임무 사이를 번갈아 가며 훈련했다. 그녀는 지중해 4개 배치, 서인도 8개 방문, 그리고 노바스코샤의 핼리팩스로 한 차례 항해했다. 이 군함은 또한 쿨브라와 블러드워스 제도에서 여러 차례의 훈련에서 총포 지원선으로서 자격을 얻었다. 1958년 2월 5일, 카리브해에서 노퍽으로 기선을 띄우던 중, 그 구축함은 심하게 파손된 파나마 상선 SS 엘레프테리오호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튼 피해 통제 당사자들은 엘레프테리오가 잡고 있는 커다란 구멍으로 인한 홍수를 억제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유조선의 승무원과 승객들을 승선시켜 노퍽으로 운송했다. 1962년 바튼은 5월 18일 실시된 머큐리 우주발사 프로젝트를 취재했는데, 이 프로젝트에서 USMC인 존 글렌 대령이 지구 궤도를 도는 첫 번째 미국인이 되었다. 10월 말, 대서양 함대의 다른 부대와 그녀는 존 F 대통령이 요구한 쿠바의 검역에 종사하는 군함에 대한 지원으로 섰다. 케네디는 쿠바에서 소련의 핵미사일 포격에 대응했다. 바톤은 노스캐롤라이나주 온슬로우비치에서 수륙양용 부대와 함께 리허설을 하고 즉시 행동을 취할 준비를 하며 대기했다. 위기가 끝나자 배는 노퍽으로 돌아왔다. 1963년 8월 지중해 배치가 끝나자 바톤보리는 발트해를 친선 투어로 삼아 린든 B 부통령을 지원했다. 존슨의 스칸디나비아 투어. 구축함들은 9월 10일 본국으로 향하기 전 덴마크 코펜하겐과 핀란드 헬싱키에서 일반 방문을 위한 '개방선'을 개최했다.

1965년 4월, 바톤은 예비군 데스론 30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녀는 본거지인 필라델피아 항구에서 비행대의 기수가 되었다. 그녀의 진행 기간은 구축함에서 훈련을 받은 예비 부대에 혜택을 주었으며 핵 승무원들에게 포트 로더데일, 포트 에버글레이즈, 웨스트 팜 비치, 플로리다 마이애미와 같은 항구들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메이카의 킹스턴, P.R. 산후안, 그랜드 바하마, 버뮤다, 그리고 노바스코샤의 핼리팩스. 7월에는 바톤도 퀘벡과 몬트리올을 쪄서 세인트로렌스 씨웨이를 거쳐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까지 한 달 동안 해군과 그 임무에 대한 대중의 인식 작업과 결합하여 훈련을 계속했다. 바톤은 남은 임기 동안 주로 필라델피아, 노퍽, 관타나모 만을 오가며 활동했다.

운명

1968년 8월, 조사 위원회는 그 구축함이 경제적 수리를 넘어서는 것으로 결정했다. 바톤은 1968년 9월 30일 해직되었고, 그녀의 이름은 10월 1일 해군 함정 등록부에서 삭제되었다. 그녀는 1969년 10월 8일 표적으로 침몰되었다.

수상

바톤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6명, 한국전 참전용사 2명을 받았다.

참조

  1. ^ 1952년 USS 바튼 월드 크루즈 북.
  2. ^ 1952년 USS 바튼 월드 크루즈 북.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