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S. 튀기다

Speed S.
스피드 S. 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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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S 대령 튀기다
출생명스피드 스미스 프라이
태어난(1817-09-09)1817년 9월 9일
켄터키머서 군(현 보이얼 군)
죽은1892년 8월 1일(1892-08-01) (74세)
켄터키주 루이빌 인근
매장지
켄터키 댄빌의 벨뷰 묘지
얼리전스미국
유니온
서비스/지점미국 육군
유니온 아미
순위Union Army brigadier general rank insignia.svg 준장
보유된 명령켄터키 의용 보병 제4연대
전투/와이어멕시코-미국 전쟁
미국 남북 전쟁

스피드 스미스 프라이(Speed Smith Fry, 1817년 9월 9일 ~ 1892년 8월 1일)는 멕시코-미국 전쟁미국 남북전쟁 당시 변호사, 판사, 미군 장교였다.

초년기

프라이는 댄빌 인근의 켄터키주 머서 카운티(현 보이얼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1840년 인디애나주 크로포드스빌의 와바시 칼리지(Wabash College)를 졸업하고 댄빌로 돌아와 삼촌 밑에서 법률을 실천했다. 그는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켄터키 제2봉사연대 대위로 근무했고, 회사가 마지막 전투 사격을 한 부에나 비스타 전투에서 행동을 봤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귀국하여 머서 카운티의 판사로 임명되어 남북전쟁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내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프라이는 즉시 켄터키 민병대의 대령이 되었다. 는 캠프 딕 로빈슨에서 제4기 켄터키 보병 양성소를 도왔고 1861년 10월 9일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밀 스프링스와 졸리코퍼의 죽음

프라이는 1862년 1월 19일 밀 스프링스 전투에서 그의 연대를 지휘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전투가 흐트러져 펠릭스 졸리코퍼 남부연합 장군은 자신들이 남부연합군인 줄 알고 프라이의 연대로 올라갔고, 프라이 대령을 향해 "사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졸리코페르의 보좌관이 숲에서 말을 타고 와서 장군에게 적병들의 한복판에 있음을 경고하려다 총격을 가했다. 프라이는 즉시 권총을 들어 죽은 졸리코퍼에게 총을 쏘았다. 그러나 누가 실제로 장군을 죽였는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프라이는 자신이 졸리코퍼를 죽인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지만, 당시 많은 보도와 그림들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하지만, 프라이 근처에는 세 개의 다른 유니온 연대 소속의 대원들이 서 있었는데, 그 대원들은 역시 총격을 가했다. 그가 졸리코퍼 장군을 사살한 유일한 사람이었든 아니든, 남부연합군은 몹시 격분하여 프라이를 살인죄로 고발했다.

일반 승급

1862년 3월 21일 프라이는 자원봉사자 준장으로 임명되어 돈 카를로스 부엘 휘하의 오하이오 육군 1사단 2여단을 지휘했다. 그의 여단은 둘째 날 말에 실로 전투에 참가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부엘은 프라이의 연기는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보고했다. 그의 여단은 코린트 포위전에 참가했다. 켄터키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페리빌 전투에서 여단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남부 연합군이 켄터키에서 철수하자 프라이는 스톤스 리버 캠페인에 앞장섰던 XIV 군단(컴벌랜드의 군대)의 3사단 센터 윙을 지휘하게 되었고, 그와 그의 사단 대부분은 스톤스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남은 전쟁의 상당 기간 동안, 그는 노스 센트럴 켄터키 소지구역을 지휘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렉싱턴 남쪽의 광대한 유니온의 모집과 배치 창구인 캠프 넬슨을 지휘하고 있었다. 는 1865년 8월 24일 육군 소장의 계급장을 수여받지 못한 채 퇴역하였는데, 보통 프라이의 학년이 있는 준장의 경우 자동적으로 수여되었다.

캠프 넬슨 제명

프라이는 캠프 네슬론에 수용된 많은 흑인 난민들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다. 주로 흑인 신병들의 가족이었던 여성과 아이들이 1864년 11월 23일, 그는 혹독한 겨울 날씨 동안 캠프에서 강제 퇴장을 명령했다. 추방된 400명 이상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 이 명령은 1864년 11월 29일 그의 상관인 스테판 G 버브리지 소장에 의해 뒤집혀 테론 홀 대위가 수용소 내 난민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결국 250여 명의 난민만이 돌아왔고, 그 중 100여 명은 시련의 결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2]

남북 전쟁 후

1866년 프라이는 공화당 하원의원 후보로 낙선했다. 그는 그의 의회 선거구에서 내부 세입 징수 감독관이었다. 그는 군인 가정 교감이었고 장로교회의 장로였다.

켄터키주 루이빌 근처에서 사망했으며, 켄터키주 댄빌의 벨뷰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참고 항목

참조

  1. ^ "NEH Landmarks of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 The Camp Nelson Expulsion: The Union Army, Black Recruits, and their Families". Retrieved 2021-05-02.
  2. ^ Miller, Joseph (1864). "My Boy Was Dead" (PDF).{{cite web}}: CS1 maint : url-status (링크)

[1] NEH 미국 역사의 랜드마크: 캠프 넬슨 제명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