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의 상속녀 산차
Sancha, heiress of León싼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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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여왕 (상처) | |
재위 | 1230년 9월 24일 ~ 12월 11일 (법무) |
전임자 | 알폰소 9세 |
후계자 | 페르디난트 3세 |
코모나크 | 덜스 |
태어난 | 1191/2 |
죽은 | 1243년 이전에 비야부에나, 카카벨로스, 레온 |
매장 | 빌라부에나 데 카라세도 수도원 |
하우스. | 이브레아 카스티야 왕가 |
아버지. | 레온과 갈리시아의 알폰소 9세 |
어머니. | 포르투갈의 테레사 |
레온의 산차(, 1191/2 ~ 1243년 이전)는 레온의 여왕으로, 그녀의 여동생 둘체와 함께 통치했습니다. 레온의 알폰소 9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포르투갈의 테레사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산차는 그녀의 동생들 중 한 명이 죽고 다른 한 명이 카스티야의 왕위에 오른 후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산차와 그녀의 여동생은 계모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세우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군림하지 못했습니다.
전기
산차는 아버지의 궁정에서 자랐지만, 여동생 둘체와 남동생 페르디난드는 1195년 부모의 결혼이 무효화된 후 포르투갈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랐습니다.[1][2] 카스티야에서는 여성이 상속받는 것이 관례였고, 산차의 계모는 잠시 카스티야의 여왕이 되었지만, 레온에서는 여성의 계승이 금지되었지만,[1] 그녀의 조상 우라카는 서유럽의 첫 번째 여왕 섭정이었습니다.
알폰소 9세는 산차의 형제가 죽은 후,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페르디난트에 의해 그의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었고, 그는 인판테(infante)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1217년, 알폰소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딸 산차와 둘체에게 포르텔라 데 산후안, 부르고 데 리바다비아, 알라리즈의 마을들을 허락하고 죽을 때까지 그들의 통치를 받게 했고, 그 후 그들은 왕가로 복귀했습니다.[3] 같은 해, 페르디난트의 어머니 베렌가리아는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7월 2일 바야돌리드에서 왕으로 선포된 아들에게 그것을 양도했습니다. 그의 후계자가 왕국을 떠나 다른 곳에서 통치하게 되면서, 알폰소는 그의 큰 딸들을 그의 공동 상속자로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1219년 포르투갈과 맺은 보로날 조약에서 알폰소는 자신이 죽어야 한다면, 포르투갈은 자신의 딸들과의 협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3]
또한 알폰소는 장녀를 예루살렘 왕이었던 브리엔의 요한과 결혼시켜 그의 권리를 확보하려 했으나, 그의 아내 베렌가리아는 아들을 출세시키기 위해 이를 저지했습니다.[1] 1224년 봄, 요한은 알폰소의 왕국을 지나 성 야고보로 가던 중, 그의 예비 신부를 보기 위해 톨레도에 들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곳에서 여왕은 대신 그에게 그녀의 딸 베렌가리아와 결혼할 것을 설득했고, 그의 귀환 여행에서 부르고스에서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카스티야의 왕과 전 여왕이 로그로뇨까지 동행했습니다.[1] 이 실패 후, 알폰소는 산차와 둘세의 후계자를 선언했지만, 1230년 9월 24일 그가 죽자 페르디난트를 지지한 레온 사람들은 그의 딸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은 1230년 12월 11일 그의 이복 형제에게 그의 왕국에 대한 권리를 양도했습니다.[4] 당시 그녀의 나이는 38세였습니다. Berengaria와 Teresa가 Valencia de Don Juan에서 산차와 Dulce가 참석한 가운데 협상한 이 합의는 "엄마들의 팩트"로 알려져 있습니다.[1] 이 조약은 베나벤테에게 체결되었고, 페르디난트는 그의 이복 자매들과 특정 성들의 영주들에게 매년 30,000 마리의 마라베디를 지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포기 후, 산차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어머니가 세운 엘 비에르조의 산타 마리아 시스터교 수도원으로 은퇴했습니다.[5][a] 산차는 톨레도 대주교인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가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에서 포르투갈의 테레사가 아이 없이 죽은 산차와 페르디난드, 그리고 여전히 살아있는 둘체라는 세 자녀를 가졌다고 언급한 1243년 이전에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6][7]
각주
- 1. ^빌라부에나에 있는 산타 마리아의 고대 수도원은 16세기 홍수 때 쿠아 강과 가까웠기 때문에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수녀들은 인근의 산미겔 데 라스 두에냐스 수도원으로 이주했습니다.[8]
참고문헌
서지학
- 잔나 비앙치니. 2015. "1230년 레오네세 승계 위기의 외국인과 적들" 제임스 토데스카, 에드. 레온-카스티야의 출현, c.1065–1500: J. F. 오칼라간에게 제시된 에세이. 알더샷: 애쉬게이트, 47-68쪽.
- 1948년 라몬 부스타만테 이 퀴자노 로망스 드 도냐 산차. 마드리드.
- 마리아 페르난데스 마르케스. 2008. 에스투도소브레아 시스테렘 포르투갈. 코임브라.
- H. 살바도르 마르티네스 2010. 알폰소 10세, 학식 있는 사람: 전기. 브릴.
- 1982년 마리아 다미안 야녜스 네이라 라 프린세스사 도냐 산차, 히자 프리모게니타 데 알폰소 9세 티에라스 데 레온, 22(47):47-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