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러셔

Rusher Kimura
기무라 러셔
출생명기무라 마사오
태어난1941년 6월 30일 일본 홋카이도 나카가와
죽은2010년 5월 24일(2010-05-24) (68세)[1]
프로레슬링 경력
링 이름기무라 마사오
토요 씨
기무라 러셔
빌링 높이6피트 1인치(1.85m)
빌드 웨이트275파운드(125kg)
교육 대상도요노보리
빌리 로빈슨
데뷔1965년 4월 2일
은퇴한2004년 7월 10일

기무라 마사오(木村 政雄, 기무라 마사오, 1941년 6월 30일 ~ 2010년 5월 24일)일본프로 레슬링 선수로서, 그의 반지 이름인 기무라 러셔(基무라 라샤)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그는 I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5번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스모 레슬링 경력

기노무라 시코나 휘하의 스모 선수였는데, 성을 직접 개조한 것이다.그는 서양식 프로레슬링을 위해 스모에 몸을 맡겼기 때문에 1964년경에는 그가 갔던 사단이 높아질수록 그렇게 하기가 더 힘들다는 생각에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프로레슬링 경력

일본 프로레슬링 얼라이언스 (1965–1966)

1965년 다카사키야마 사루키치(후일 뉴재팬 프로레슬링에서 쇼지카이로 알려진 기타자와 모토유키)와의 옛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에서 데뷔했다.도요노보리의 원생으로, 무대 뒤에서 고군분투하는 바람에 나가자 기무라가 따라 나섰다.

오리지널 도쿄 프로레슬링 (1966–1967)

토요노보리, 이사오 요시와라, 기무라, 안토니오 이노키, 마쓰다 히로, 사이토 마사 등이 도쿄 프로레슬링을 결성했다.기무라는 상위 카드에서는 별로 경쟁하지 않았지만, 하위 카드에서는 미래의 라이벌인 아이겐 하루카에게 데뷔 상대역할을 했는데, 이 선수와 함께 1981년부터 2003년까지 푸로레수에서 가장 오래 뛰는 고정장치를 갖게 될 것이다.그때까지 그들의 마지막 경기는 1967년 1월 31일 기무라 감독의 승리였다.[2]

도쿄 프로레슬링이 문을 닫자, 기무라는 도요노보리와 요시와라와 함께 또 하나의 더 큰 승진을 만들어냈다.

인터내셔널 레슬링 엔터프라이즈 (1967–1981)

1968년 4월 20일, '러셔' 기무라 감독은 스기야마 썬더와 팀을 이뤄 스탠 스타작과 탱크 모건으로부터 TWWA(트랜스 월드 레슬링 얼라이언스) 세계태그팀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며 생애 첫 메이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그들은 그 해 가을에 새로운 국제 레슬링 연맹 타이틀 관리 기구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타이틀을 비웠다.1971년 9월 20일, 기무라와 스기야마는 레드 바스티앙과 빌 하워드를 물리침으로써 개명된 타이틀을 되찾았고, 기무라 감독이 해외 투어를 떠난 1972년 5월에 다시 타이틀을 비웠다.

기무라 마사오는 1969-70년 기무라 마사오, 미국 레슬링 협회기무라 대왕으로 출연했다.이것은 그가 AWA에서 실제로 경쟁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AWA 타이틀을 위한 그의 미래의 도전은 모두 일본의 IWE에서 일어났다.1972년 그는 유럽, 특히 독일베르밴드 데르 베르흐프스링거에 본명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970년 10월 8일, 기무라는 데스 박사(가면을 쓴 무스 모로스키)를 물리치고 일본 최초의 케이지 경기에서 승리했다.IWE에서 방영된 이 시합은 키무라에게 명성과 함께 가나미오니(金野美, "강철장 데몬")라는 별명을 얻었다.TBS는 나중에 케이지 경기를 방영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기무라는 슈퍼스타가 되는 길을 가고 있었다.IWE에서 그의 마지막 태그팀 타이틀은 1973년 5월 14일 쿠사쓰 대왕과 팀을 이뤄 IWA 세계 태그팀 챔피언십에서 매드독 바천이반 콜로프를 꺾으면서 획득되었다.기무라의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러셔 기무라 감독은 1975년 4월 19일 5번의 IWA 세계 헤비급 선수권 대회 중 첫 우승을 차지하여 매드독 바천을 물리쳤다.그는 계속해서 장의사(마크 캘러웨이가 아닌 한스 슈뢰더), 슈퍼 어쌔신(로저 스미스), 알렉시스 스미르노프, 베르네 가그를 의 다른 타이틀로 물리치곤 했다.Prominent challengers during his six years at the top of IWE included Killer Tor Kamata, Big John Quinn, Gypsy Joe, Pierre Martin, Crazy Sailor White, Wild Angus Campbell, Gil Hayes, Rip Tyler, Mighty Inoue, Cowboy Bob Ellis, Killer Tim Brooks, Superstar Billy Graham, Ox Baker, John Tolos, André the Giant, Jos LeDuc, The Mongolian Stomper, Killer 칼 크루프, 조니 파워스, 마이크 조지, 랜디 타일러, 론 배스, 레이 캔디, 스티브 올소노스키.

기무라는 1978년 11월 30일 결승전에서 다나카 교수를 꺾고 일본 국제 리그에서도 우승했다.

1979년 10월 25일, 기무라는 닉 보크윙클이 루 데스츠를 특별 심판으로 하는 AWA 월드 헤비급 챔피언십 더블 타이틀 매치에 도전했다.기무라에 의해 보스턴 게에 안긴 보크윈켈은 로프에 닿으려다 테스즈를 링 밖으로 밀어내 실격당했다.

기무라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IWA 타이틀 방어전은 1981년 8월 6일 홋카이도 무로란에서 열린 엔페서 루치아노(버스터 고든)와의 경기였다.IWE 프로모션은 9월 30일에 마감되었다.

신일본 프로레슬링(1981–1984)

키무라, 애니멀 하마구치, 테라니시 이사무 등은 IWE '침입' 안정기로 뉴재팬에 합류했고, 곧바로 올해 초 NWF 헤비급 챔피언십을 포기한 이노키를 겨냥했다.이후 1981년 10월 8일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이노키는 실격으로 기무라를 꺾었다.[3]

기무라는 신일본의 충신인 하루카 에이겐과 1981년 12월 7일 외국인 롤랑 보크, 르네 구렛과의 태그팀 경기를 위해 팀을 이뤄 패했다.[4]이는 도쿄 프로레슬링에서 다시 시작된 그들 사이의 라이벌 관계에 다시 불을 지핀 경기였다.

기무라 감독은 일본 엔트리의 하나로 제1회 국제레슬링 그랑프리 대회참가했다(이노키 아키라, 마에다 아키라, 킬러 칸과는 달리, 그의 북미 페르소나에 몽골인으로 청구된 일본인).그는 10명으로 구성된 테이블에서 6위를 차지했다.같은 해 하마구치와 데라니시는 이신군단 마구간에서 리키 초슈를 탈취하여 신일본에 입회하게 되었다.기무라는 남은 시간을 아이겐과 반목하고 배드뉴스 알렌과 같은 힐로 팀을 이루며 보냈다.

뉴 재팬에서 그와 전 IWE 레슬링 선수 류마 고는 마지막 메이저 타이틀인 NWA 아메리카 태그팀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 위해 LA 서킷의 임종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니버설 레슬링 연맹 (1984)

기무라와 고는 히사시 신마를 따라 신일본에서 나와 새로운 프로모션인 일본 UWF를 결성했다.당초 기무라는 서킷의 컨셉을 지지했지만, 원래의 타이거 마스크로 활동한 뒤 수개월 동안 활동을 하지 않고 UWF를 통해 푸로레슈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사토루 사야마가 신마와 함께 일하고 싶어하지 않자 결국 다시 신마를 따라나섰다.그리하여 기무라, 고, 그란 하마다가 몇 달 만에 올 재팬 프로레슬링에 입단하였다.

UWF 투어 중간에 그는 마지막 북미 투어인 캐나다의 스탬프 레슬링에 모습을 드러냈다.1984년 5월 5일, 그는 전 동맹인 배드 뉴스 알렌에게 북미 헤비급 챔피언쉽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전일본 프로레슬링(1984-2000)

처음에 그는 자이언트 바바, 겐이치로 텐류, 스탠 한센, 리키 초슈가 이끄는 파벌들과 불화하면서 마이티 이노우에, 아슈라 하라, 고로 쓰루미와 같은 다른 IWE 레슬링 선수들과 제휴했다.1989년, 펑크족이 올 재팬을 떠난 후, 그는 바바와 화해했고, 두 남자는 종종 진지해지긴 했지만, 주로 코미디 태그 팀과 6인 경기에 참가하기 시작했다.1989년 세계 최강 태그리그 때 텐류 선수가 바바를 핀으로 꽂아 넣으면서 바바와 한센&텐류에게 패했는데, 일본 레슬링 선수가 전일본에서 바바를 핀으로 꽂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이번 대회는 기무라 감독의 마지막 진지한 우승 도전(빈자리 AJPW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 결국 한센&텐류 우승)으로 기록됐다.기무라는 1990년과 1991년 태그팀 토너먼트에서 이노우에와 팀을 이뤘지만 두 차례나 최하위를 기록했다.

기무라와 바바는 주로 모모타 미쓰오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1990년대 내내 코메디 태그팀 경기에서 팀워크를 이어갔다.1999년 바바가 사망하자 기무라 감독은 모모타와 함께 팀의 지휘권을 이어받았다.미사와 미쓰하루가 올 재팬에서 이탈해 프로레슬링 노아를 결성하자 기무라는 일곱 번째, 마지막으로는 새로운 일본 승진에 뛰어들었다.

프로레슬링 노아(20002004)

키무라와 모모타는 아이겐 하루카 등을 상대로 6인승과 태그팀 예선 바운스를 이어갔다.

기무라의 마지막 경기는 2003년 3월 1일 모모타가 에이겐과 기신 가와바타를 상대로 한 태그팀 승리였다.[5]

선수권 대회 및 성과

참조

  1. ^ "ニュース". プロレスリング・ノア公式サイト PRO-WRESTLING NOAH OFFICIAL SITE.
  2. ^ "IWE: 1967: Pioneer Series". Puroresu Dojo.
  3. ^ [1][bare URL]
  4. ^ [2][bare URL]
  5. ^ [3][bare URL]
  6. ^ "PUROLOVE.com". www.purolove.com.
  7. ^ "PUROLOVE.com". www.purolove.com.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