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A. 스완슨

Robert A.
로버트 A. 스완슨
Robert A. Swanson 2000 Biotech Award.tif
로버트 A. 스완슨
태어난1947
미국
죽은1999년 12월 6일
국적미국인의
교육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로 알려져 있다.제넨테크, 바이오테크, 벤처캐피털

로버트 "밥" 스완슨 (Robert "Bob" Swanson, 1947–1999)은 미국의 벤처 투자가로서 1976년 허버트 보이어와 함께 생명공학 거대기업 제넨텍을 공동 설립했다. 제넨텍은 이 분야의 선구자로, 세계 유수의 생명공학 기업 중 하나로 남아 있다. 1976년부터 1990년까지 제넨텍의 CEO, 1990년부터 1996년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밥 스완슨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을 졸업했는데, 그곳에서 시그마학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MIT Sloan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뿐만 아니라 화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두 학위는 모두 1970년에 수여되었다.

그는 생명공학 혁명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이 책의 저자인 1,000년, 1,000명: 밀레니엄을 형성한 남녀의 순위를 매기는 것은 스완슨 씨를 612위로 꼽았다. 스완슨 씨는 2006년에 주니어 어치브먼트 미국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 그는 허버트 보이어와 함께 사후에 2000년 생명공학유산상을 받았다.[2][3]

1999년 12월 6일, 그는 52세의 나이로 뇌암에 걸렸다.[4]

조기생활과 교육

로버트 S. 스완슨은 194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서 J. 스완슨과 알라인 베이커 스완슨 사이에서 태어났다.[5][6][7] 아서 스완슨은 비행기 전기 정비반장으로 교대로 근무했다.[5][6][7]

스완슨에 따르면 그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세대가 마지막 세대인 가족보다 더 잘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5] 그의 가족이 그가 가장 먼저 대학 학위를 따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5][6] 그의 가족은 특히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 관심이 많았다.[5] 그의 가족의 자랑거리인 스완슨은 1965년 MIT에 합격했다.[5][6]

화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중에 학부 교육을 받는 동안 연구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5][6] 다음은 1996년 인터뷰에서 그가 어떻게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한 글의 발췌문이다. "내 주니어 학년 말기에, 나는... 화학 회사에서 일하는 여름 직장을 얻었다. 내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사물보다 사람을 더 즐겁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아마 평생 하고 싶은 일이 아닐 거야.'라고 말했다.[5]

그 결과 스완슨은 MIT에 알프레드 P의 1년 과정을 수강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슬론 경영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들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5] 그가 수강한 대학원 과정 덕분에 그는 특히 조직발전과 혁신적인 아이디어의 사업화라는 두 가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5] 그는 1970년에 MIT를 졸업했고, 화학 학부와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5][6][7]

초기 경력

스완슨은 MIT를 졸업한 뒤 시티은행에 취직해 벤처투자그룹을 경영했다.[5][6][7][8] 그의 연기는 그의 감독관들을 기쁘게 했고, 그와 동료는 시티코프 벤처 캐피탈의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을 열도록 선택되었다.[5][6][7][8] 그러나 새로운 씨티코프 투자는 잘 되지 않았다.[5][6] 나중에 스완슨이 행운의 휴식이라고 믿었던 한 가지 특별한 실패는 씨티코프가 투자했던 과학기반 회사인 안텍스의 파산이었다.[5][6] 그는 또 다른 씨티코프 임원인 유진 클라이너와 함께 회사의 파산으로부터 약간의 돈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유진 클라이너는 벤처캐피털 파트너십 클라이너 & 퍼킨스의 공동창업자였다.[6]

스완슨은 시티코프를 떠나 1974년 유진 클라이너 자신의 추천으로 클라이너 & 퍼킨스에 입단했다.[6] 동료로서 스완슨은 클라이너와 퍼킨스가 투자한 과학 회사인 세토스의 사장들에게 유전자 재조합 프로젝트를 추진하도록 설득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5][6] 이 기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유명한 과학자, 노벨상 수상자인 도널드 글레이저와의 점심 식사 때 불쾌감을 느꼈었다.[5][6] 하지만 이 회사는 이런 위험한 시도를 거부했고, 클라이너 & 퍼킨스는 이 회사와 결별했다.[6][5] 이 같은 탈락은 이 그룹이 스완슨에게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조언한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5][6] 클라이너 & 퍼킨스는 차라리 혼자 일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했고, 1975년 말에 그곳의 스완슨의 지위는 종료될 것이다.[5][6]

제넨텍의 시작

한 젊은 스완슨은 이제 자신이 실업자라는 것을 알았다. 스완슨은 거의 매일 면접을 보면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5][6]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재조합 DNA 기술의 잠재력에 매료되어, 그 기술을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들 중 한 명이 그것을 상용화하는 데 관심을 갖기를 바라면서 콜드콜로 과학자들을 부르기로 했다.[5][6][7][8] 그가 접촉한 과학자 중 한 명인 허버트 보이어는 관심을 표명했지만 처음에는 스완슨과 만나는 것을 주저했다.[5][6][7][8] 보이어는 학문적 과학자로, 사업 문제에 정통하지 못했다.[6] 스완슨은 보이어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연구실에서 잠깐 만나도록 설득했다.[5][6][7][8]

짧은 만남은 3시간으로 연장됐고 보이어는 개척에 도움을 준 기술을 상용화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는 제품의 이면에 있는 과학을 다루는 반면, 스완슨은 자금을 조달하고 조직 전체를 관리하는 일을 할 것이다.[5][6] 두 사람은 파트너십을 맺기로 합의하고 각각 500달러씩을 소송비를 부담하기로 했다.[5][6][8]

스완슨은 기성 기관이나 회사에 취직하기보다는 상근으로 회사 창업을 추진하기로 했다.[5][6]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논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한 번 해보지 않은 나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렸지."[5]

그 후 스완슨은 그들의 첫 번째 시장성 있는 제품을 식별하기 시작했고, 빠르게 인간 단백질 인슐린에 초점을 맞췄다.[5][6] 과학적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특징 있는 단백질로, 이론상으로는 더 쉽게 작업할 수 있도록 이미 구조가 설명되어 있었다.[5][6] 게다가 당시 널리 보급된 인슐린은 돼지 인슐린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인슐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5][6] 그렇다면 인간의 인슐린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더 선호되었다.[6] 사업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슐린에 대한 큰 시장이 있었다; 그 당시, 세계 판매량은 1억 달러 이상이었고, 성장했다.[5][6] 보이어는 인슐린 호르몬이 그들의 첫 번째 표적 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5][6]

스완슨은 시장조사를 마무리한 뒤 1976년 3월까지 제넨텍의 첫 사업제안서를 작성했다.[5][6] 스완슨이 제넨텍을 클라이너 & 퍼킨스에게 던진 것은 이 제안과 함께였다.[6] 퍼킨스는 나중에 기술적 리스크가 엄청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50 대 50보다 더 잘하면... (하지만) 효과가 있다면 보상은 뻔할 겁니다."[6] 보이어의 과학적 전문지식과 스완슨의 사업계획은 벤처 투자가들을 설득시켰다.[5][6] 클라이너와 퍼킨스는 회사와 관련된 엄청난 리스크를 인정하면서도 제넨텍에 1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5][6] 이것은 클라이너와 퍼킨스가 800만 달러의 벤처캐피털 펀드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6]

제넨텍에서의 경력

클라이너와 퍼킨스 투자로 인해 스완슨과 보이어는 파트너십을 해체하고 법적 실체인 제넨텍을 만들었다.[6] 클라이너와 퍼킨스는 지난 5월 종가 기준으로 10만 달러를 지원했고, 제넨텍으로부터 우선주 2만 주를 인수했다.[6] 스완슨은 제넨텍 사장과 회계 담당자가 되었고, 월 급여 2500달러와 함께 2만5000주를 받았다.[6] 이로써 스완슨의 실업은 끝이 났고, 제넨텍에서의 경력도 시작되었다.[5][6]

자금이 확보되고 조직 구조가 형성되면서, 인슐린 합성을 위한 절차를 실험하기 시작하는 것이 논리적인 첫걸음이었다.[5][6] 제넨텍은 자체 실험실이 부족했기 때문에, 보이어 연구소는 물론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있는 다른 두 연구실도 하청계약을 맺고 실험을 수행하게 되었다.[5][6]

하지만 과학자들은 인슐린을 합성하는 박테리아를 즉각적으로 개발하기 보다는 더 작은 호르몬인 소마토스타틴을 합성할 수 있는 박테리아를 개발한다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6] 스완슨은 처음에는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면, 진짜를 추구하라"고 믿었기 때문에 저항했다. 이 경우, "진짜"는 인슐린이다.[5][6] 그는 비록 마지못해 승낙했지만 결국 동의했다.[5][6]

새로운 연구 목표를 세우고, 스완슨은 그 기관들과 공식적인 연구 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5][6]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과 희망의 도시와 연구 계약을 맺었다.[5][6] 그 후, 1977년 초, 스완슨은 소마토스타틴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2차 자금 지원을 시작했다. 그는 2월까지 약 85만 달러를 모금했는데, 이는 소마토스타틴 연구 프로젝트에 자금을 댈 수 있는 충분한 돈이다.[5][6] 1977년 8월까지 연구팀은 소마토스타틴을 합성할 수 있는 최초의 박테리아를 만들어냈다.[5][6] 이것은 신생 회사가 추구하는 개념의 증명이었다. 1977년 12월 2일, 스완슨과 과학자들은 그들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5][6]

개념 증명서를 가지고 성공을 거둔 후에, 스완슨은 과학자들에게 인간 인슐린을 합성하는 박테리아의 창조를 추구하라고 지시했다.[5][6] 이미 다른 두 개의 과학팀이 그런 프로젝트를 수행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지만 스완슨은 먼저 그것을 합성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다.[5][6] 1978년 초까지, 그의 우선순위는 과학자들을 위한 실험실 공간, 회사 계약, 그리고 제넨텍을 위한 더 많은 자금 지원을 얻는 것이었다.[5][6]

최고의 과학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스완슨은 보이어의 도움을 받아 학계 과학자들에게 매력적인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제넨텍의 과학자들이 연구결과를 과학저널에 게재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5][6] 해당 특허가 이미 출원된 후에야 출판을 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었다.[5][6]

1978년 2월까지 스완슨은 1만 평방피트의 항공 화물 창고 구역을 임대했는데, 이 구역은 제넨텍의 첫 연구실 공간이 될 것이다.[5][6] 그 해 말, 스완슨은 또한 일라이 릴리와 파트너십을 확보했다; 제넨텍은 인간 인슐린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매달 5만 달러를 받을 것이다.[5][6] 1978년 8월까지 제넨텍 과학자들은 인간의 인슐린을 합성할 수 있었고, 같은 달에 스완슨과 동료들은 일라이 릴리와 수백만 달러의 계약을 협상했다.[5][6] 그들이 개발한 대기업-중소기업 관계는 다른 생명공학 스타트업의 궁극적인 템플릿이 되었다.[6] 인간 인슐린 합성에 대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새로운 수익의 흐름과 상당한 양의 미디어 보도는 제넨텍이 다른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6] 1979년까지 제넨텍은 인터페론, 동물 성장 호르몬, B형 간염 백신, 티모신 호르몬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6]

1980년까지 스완슨은 그들이 제넨텍을 공개함으로써 돈을 모아야 한다고 결정했다.[5][6] 이것은 다양한 요인 때문이었다. 제넨텍은 개발을 지속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했고, 스완슨은 이 기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자본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다.[5][6] 공모는 1980년 10월 14일에 이루어졌으며, 제넨텍이 3,500만 달러를 모금하는 등 역대 최대 규모의 IPO였다.[5][6]

스완슨은 여기서부터 계약연구 운영이 아닌 자기 지속 가능한 생명공학 회사로서 제넨텍의 비전을 추구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5][6] 그는 재조합성장호르몬이 미국에 큰 시장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이 제넨텍의 기업진화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5][6] 1985년 10월 18일까지 FDA는 미국에서 판매하기 위해 거의 전적으로 제넨텍에 의해 개발된 인간 성장 호르몬을 프로트로핀이라는 상업적 이름으로 승인했다.[5][6] 불과 20년 만에 프로트로핀 매출이 20억 달러를 넘어섰다.[6] 제넨텍은 자체 제품을 제조하고, 연방 승인을 받고, 마케팅할 수 있게 되어, 스완슨이 자생 가능한 생명공학 회사를 설립하려는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된 것으로 기록되었다.[5][6][8] 스완슨은 1996년 제넨텍에서 은퇴할 때까지 회장직을 맡으며 1990년 CEO 자리를 떠났다.[5][6][8]

레거시

로버트 스완슨의 유산은 그가 공동 설립하고 이끈 회사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찾을 수 있다. 제넨텍은 지금까지도 마약과 치료제를 생산하고 있으며, 기업 과학자의 출판 허용 등 그의 정책 중 일부는 여전히 유효하다.[6][5][8] 제넨텍은 유전공학을 통해 생산된 최초의 의약품을 개발하고, 최초로 공개되는 바이오 기업이며, 자체 의약품을 판매한 최초의 생명공학 기업이 되는 등 스완슨의 주도 하에 많은 첫 번째 점수를 받았다.[8][7] 이러한 업적들은 제넨텍과 생명공학 산업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8][7]

수상 및 수상

다음은 로버트 스완슨이 받은 상과 영예의 목록이다.[5][3]

  • 올해의 기업가, 1981년 수상자(시카고 연구 이사회의 후원)
  • 올해의 기업가, 수상자 1983(Stanford Business School 동창회 수상, 반도 지부)
  • 1986년[9] 미국 공로 아카데미 골든 플레이트상 수상자
  • 올해의 뛰어난 기업가, 1993년 수상자(Awarded Babson College)
  • 1997년 경영학상 수상자(Anderson School of Business)
  • 1999년 국가기술훈장 수상자
  • 생명공학 유산 메달, 수상자 2000(생명공학산업기구 및 화학유산재단 후기상)
  • 스웨덴 왕립 공학 아카데미, 선임 위원

외부 링크

참조

  1. ^ 로버트 스완슨(52) MIT 뉴스오피스 생명공학 산업 창업 동문
  2. ^ "Biotechnology Heritage Award". Science History Institute. Retrieved 21 February 2018.
  3. ^ a b Eramian, Dan (29 March 2000). "Genentech Founders Honored As Recipients Of Biotechnology Heritage Award". BIO. Retrieved 5 February 2014.
  4. ^ 접근 : 자연
  5.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Smith Hughes, Sally (2000). "Co-Founder, CEO, and Chairman of Genentech, Inc., 1976–1996 Robert S. Swanson".
  6.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ap aq ar as at au av aw ax ay az ba bb bc bd be bf bg bh bi bj bk bl bm bn bo bp bq br bs bt 휴즈, 샐리 스미스. Genentech : 2011년 시카고 대학 생명공학의 시작 ProQuest Ebook Central
  7. ^ a b c d e f g h i j "Robert Swanson orbituary".
  8. ^ a b c d e f g h i j k Pollack, Andrew (1999-12-07). "Robert A. Swanson, 52, Co-Founder of Genentech". The New York Times. ISSN 0362-4331. Retrieved 2017-11-11.
  9. ^ "Golden Plate Awardees of the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www.achievement.org.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