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스웨덴 전쟁 (1626–1629)
Polish–Swedish War (1626–1629)폴란드-스웨덴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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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1629년 폴란드-스웨덴 전쟁과 30년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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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igerents | |||||||||
스웨덴 제국 | 폴란드-리투아니아 신성 로마 제국 | ||||||||
지휘관 및 지도자 | |||||||||
한스 게오르크 폰 아르님 보이첸부르크 | |||||||||
힘 | |||||||||
47,880명의 병력[citation needed] | 49,480명의 병력[citation needed] | ||||||||
인명 및 손실 | |||||||||
5,680 피살 | 4,080명 사망[citation needed] |
1626년-1629년 폴란드-스웨덴 전쟁은 17세기에 스웨덴과 폴란드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갈등 중 네 번째 단계(1600년-1611년, 1617년-1618년, 1620년-1625년 이후)입니다. 그것은 1626년에 시작되었고 4년 후에 알트마르크 휴전과 함께 스툼스도르프에서 스툼스도르프 조약으로 끝이 났습니다.[2]
코스
1626
전쟁의 첫 만남은 라트비아 월호프 근처에서 이루어졌는데, 구스타부스 2세 아돌푸스 휘하의 스웨덴 군대가 얀 스타니스와프 사피에하 휘하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 7,000명을 매복 공격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사상자는 사망자, 부상자, 포로 150명에 달했습니다. 리투아니아 사령관은 나중에 신경쇠약을 겪었습니다.[3]
1626년 5월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왕은 폴란드 프로이센을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125척이 넘는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8,000명이 넘는 스웨덴군(기병 1,000명 포함)이 피와와(Pilau) 근처의 두칼 프로이센에서 하선했습니다. 이 상륙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방어에 완전히 놀라운 것이었으며,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빠르게 16개의 프로이센 도시를 점령했으며, (프로이센 중립 공국의 소극적인 지원으로) 거의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 마을들 중 많은 곳에 개신교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들은 루터교 스웨덴 세력에게 자유롭게 문을 열었고, 그들은 그들을 공동 종교주의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스웨덴 왕은 방어를 위해 자신의 소규모 군대와 함대를 유지했던 단치히(Gda ń스크)라는 가장 큰 상을 차지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단치히에 대한 그의 주요 공격에 대비하여,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왕은 그의 병력을 22,000명 이상으로 늘렸습니다.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3세는 자신의 봉신인 프로이센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방어전을 벌였습니다. 그는 11,000명의 군대와 함께 북쪽에 배치되었고, 그니우에서 8,150명의 보병, 1,750명의 기병, 74문의 대포로 이루어진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왕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는 지기스문트 3세가 군대를 철수하고 전국에서 지원군을 요청할 때까지 1626년 9월 22일부터 10월 1일까지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폴란드 헤트만(야전 원수에 해당하는 역사적인 육군 계급) 스타니스와프 코니에프폴스키는 4,200명의 경기병, 1,000개의 드래건, 1,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재빨리 국왕을 구하러 왔습니다. 11월 초 왕은 그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넘겨주었습니다. 추가 병력으로 코니에프폴스키는 곧 프로이센에 주둔한 스웨덴군 2만 명에 필적할 1만 명의 병력을 확보했습니다. 적의 통신선을 타격하는 소규모 기동 부대인 헤트만 코니에폴스키는 스웨덴군의 더 이상의 진격을 저지하고 스웨덴군을 방어선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동안 세임(영연방의회)은 전쟁자금 마련에 합의했지만 폴란드군의 상황은 어려웠습니다. 리투아니아군은 1626년 12월 리보니아의 코켄후센 근처에서 심각한 패배를 당했고 드비나 강 뒤로 후퇴했습니다.
1627
헤트만 코니에폴스키는 1627년 4월 2일 퍽 마을을 탈환했습니다. 스웨덴군은 비스툴라 방향의 옥센스티에라와 스웨덴군이 점령한 포메라니아의 요한 슈트라이프 폰 라우엔슈타인, 막시밀리안 튜펠 등 두 방향에서 코니에프폴스키를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 비스툴라호의 홍수로 인해 계획이 차질을 빚었고, 코니에프폴스키는 이웃 포메라니아에서 오는 적 부대를 요격할 수 있었습니다. 4월 중순, 코니에프폴스키(후사르 2,150명, 코사크 기병 3,290명, 서부 보병 2,515명, 폴란드 보병 1,620명, 드래건 1,265명, 우크라이나 코사크 2,000명)는 차르네 마을 안에서 스웨덴군을 포위했습니다.3일 후 스웨덴군은 현수막과 규격을 뒤로 한 채 항복했습니다. 주로 독일 용병으로 새로 길러진 스웨덴군의 상당수는 영연방으로 편을 바꿨습니다. 이 승리는 또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조지 윌리엄이 지기스문트 3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도록 설득했습니다.
5월 22일부터 23일까지 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왕은 단치히(그다 ń스크) 남쪽의 키에 ż마크(키에) 근처에서 배를 타고 비스툴라 강을 야간 횡단하려다 가벼운 부상을 입고 퇴각했습니다. 7월에 그는 브라니에우 포위를 해제하고 오르네타(Wormditt)를 포위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헤트만 코니에폴스키는 갑작스런 그니에우의 공격과 함락으로 대응했습니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코니에폴스키의 반응 속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후에 디르샤우 전투(오늘날의 트체우 전투)에서 코니에폴스키는 약 7,800명의 병력(기병과 후사르 포함)과 함께 스웨덴 군대(보병 5,000명 포함)가 단치히에 도달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1627년 8월 17일에서 18일 사이에 스웨덴군이 모트와와 강의 습지 근처에 위치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스웨덴군은 폴란드군을 자극해 무모한 공격을 감행한 뒤 보병의 화력과 포병으로 파괴하기를 바랐지만, 코니에프폴스키는 달리 결정했습니다. 그 후 스웨덴군은 주도권을 잡고 기병대와 함께 공격하였고, 폴란드 기병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군대의 주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습니다(대부분 코니에프폴스키 덕분에 사기는 여전히 높았습니다).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국왕이 폴란드 저격수의 어깨에 총을 맞자 스웨덴군은 폭행을 끝내기로 하고 현장에서 철수했는데, 이는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스타니슬라프 코니에프폴스키는 전쟁을 바다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주로 단치히 시의 원조를 받아 9척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해군을 모았습니다. 그는 1627년 11월 27일 또는 28일 단치히 근처 올리와 전투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했습니다.
겨울 동안 코니에프폴스키는 폴란드 군대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고, 특히 그의 보병과 포병의 화력을 스웨덴 부대에 맞게 강화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인들은 폴란드인들에게 보다 적극적인 전술을 사용하여 기병대를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1628
1628년, 자금이 부족한 폴란드군은 공세를 멈추고 방어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스웨덴군은 노비와 브로디니카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헤트만 코니에폴스키(Hetman Koniecpolski)는 보병과 포병의 지원 사격과 함께 빠른 기병 근접 공격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요새와 지형 이점을 사용하여 반격했습니다. 그 무렵 전쟁은 기동전이 되었고, 어느 쪽도 지형이나 요새의 이점 없이는 상대를 상대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전염병이 엄청난 수의 사람과 말을 쓸어버리는 등 스웨덴 점령군에게 비참한 한 해였습니다.
1629
2월 2일, 구스타프 아돌푸스 왕이 스웨덴에서 겨울을 나고 헤트만 코니에폴스키가 바르샤바에서 자리를 비우는 동안 폴란드군은 고르츠노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고, 헤르만 랑겔 원수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스타니스와프 포토키가 이끄는 폴란드군과 맞섰습니다.[5]: 111 폴란드군은 700명의 사망자와 부상자, 그리고 600명의 포로를 당했습니다. 스웨덴군은 30명의 사망자와 60명의 부상자만을 잃었습니다. 패전 소식을 들은 폴란드 세임은 군대를 위한 자금을 늘리도록 설득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군사 원조를 한스 게오르크 폰 아르님 보이첸부르크 원수가 이끄는 제국 군대의 형태로 받아들였습니다.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지휘하는 또 다른 제국군단은 인근 포메라니아에서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니에프폴스키는 폴란드 프로이센의 몇몇 전략적 거점에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시기에 그는 푸치히(현재의 퍽) 항구를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스웨덴 왕은 5월에 대규모 지원군을 이끌고 폴란드 프로이센으로 돌아왔고, 아르님이 새로 도착한 제국군단이 코니에프폴스키에 합류하기 전에 차단하기 위해 그루덴츠(그루지 ą dz)를 향해 남쪽으로 진군했습니다. 그는 성공하지 못했고, 스툼(Szum)과 마리엔부르크(Malbork)에 있는 스웨덴 수비대를 향해 북쪽으로 철수하던 중 1629년 6월 27일 스툼 근처의 호니그펠트(t) 또는 호니그펠트(Honigfelde)에서 폴란드인들에게 트르지키아나 전투로 알려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스웨덴 기병대는 휘니그펠트, 스트라스제우, 푸우코비체 마을에서 보병대의 철수를 막으려다가 격렬한 교전을 벌였습니다. 아르님의 육중한 퀴라시어들의 도움으로 더 빠른 '날개 달린' 후사르와 코사크 용병들은 가벼운 스웨덴 기병들보다 큰 이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스웨덴군은 전투에서 600명 혹은 700명의 전사자를 냈고,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은 기병대(헤르만 랭글의 아들 포함)였습니다. 폴란드인들은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의 유명한 가죽 대포 10개와 더불어 300명의 죄수들, 10-15 규격을 가져갔습니다. 영연방의 손실은 300명 미만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스웨덴 왕 자신도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탈출했으며 나중에 "이렇게 뜨거운 목욕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결과
폴란드가 호니그펠트에서 승리한 후, 지기스문트 3세는 구스타프 아돌프가 스웨덴의 왕위를 포기하는 조건하에서만 휴전을 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지기스문트 3세는 스웨덴의 왕위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4세는 그의 뒤를 이어 계속했습니다. 코니에프폴스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1629년 9월 26일 스타리 타르그(알트마르크 3국)에서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스웨덴은 폴란드에게 리보니아의 대부분을 양도하게 되었고, 폴란드는 리보니아의 중요한 항구인 리가와 함께 양도하게 되었습니다. 스웨덴은 또한 발트해에 대한 폴란드의 무역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리(상품 가치의 3.5%)를 얻었으며, 프로이센 왕국과 두칼 프로이센 왕국의 많은 도시들(피와와(필라우), 메멜, 엘블 ą그(엘빙) 등)을 통제했습니다. 당분간 스웨덴은 발트해 남쪽 해안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것은 폴란드의 외교적 노력의 부족이지 군대의 부족은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 공국은 마리엔부르크, 스툼, ż우와비 ś레인을 임시로 양도하면서 스웨덴의 부분적인 점령에 대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영연방 함대의 생존 선박은 스웨덴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스웨덴의 유일한 실패는 중요한 항구인 단치히를 점령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전기 작가인 하르트는 왕이 "태평양의 상업적 도굴꾼들이 그들의 직업과 싸우는 데 성공한 유명한 동료들을 이겨야 한다"고 분노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은 단치히, 푸치히, 쾨니히스베르크, 리파하(리바우)를 제외한 발트해의 거의 모든 항구를 장악했습니다. 이것은 발트해를 '스웨덴의 내호'로 만들겠다는 스웨덴인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데 가장 근접한 것이 될 것입니다. 조약 이후, 스웨덴은 그들의 상과 돈을 30년 전쟁에 참전하는 출발점으로 삼았고, 북부 독일의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1632년 구스타프 아돌프 국왕이 사망하면서 스웨덴이 30년 전쟁의 손실로 약화되고 발트해 항구 일부에서 퇴각하여 3.5%의 세금 징수를 중단하면서 알트마르크 조약은 결국 1635년 영연방에 유리하게 개정되었습니다. 운송료는 스웨덴이 이 전쟁에 참여하는 데 자금을 대주었습니다.[6]
참고 항목
- 폴란드의 전쟁 목록 - 폴란드가 관여한 전쟁의 연대순 목록
- 스웨덴의 전쟁 목록
- 폴란드-스웨덴 전쟁 – 국가 간 군사 충돌의 역사 페이지에 전환
참고문헌
- ^ Hulsenboom, Paul (February 23, 2024). "Diplomats as Poets, Poets as Diplomats. Poetic Gifts and Literary Reflections on the Dutch Mediations between Poland-Lithuania and Sweden in the First Half of the Seventeenth Century". Legatio: The Journal for Renaissance and Early Modern Diplomatic Studies (3): 63.
- ^ 스웨덴-폴란드 전쟁(1620-1629)
- ^ Podhorodecki, Leszek (1985). Rapier i koncerz: z dziejów wojen polsko-szwedzkich. Warsaw: Książka i Wiedza. ISBN 83-05-11452-X.
- ^ Życie i myśl (in Polish). Pax. 1987. p. 167.
- ^ 프로스트, R.I., 2000, The Northern Wars, 1558-1721, Harlow: Pearson Education Limited, ISBN 9780582064294
- ^ Ulf Sundber (1997). "Stilleståndet i Altmark 1629". svenskakrig/frede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January 6, 2016. Retrieved June 1, 2019.
외부 링크
- 스웨덴-폴란드 전쟁(1620-1629)
-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폴란드: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