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들 앵글

Middle Angles
다른 민족 집단과 관련된 미들 앵글의 위치, c. 600
머시아 내 미들 앵글

미들앵글앵글로색슨 시대에 잉글랜드의 더 큰 왕국 머시아에서 중요한 민족 또는 문화 집단이었다.

기원과 지역

앵글스는 6세기 초 이스트 앵글리아워시로부터 미들랜즈에 침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배력을 확립한 이들을 미딜 엥글리(중간각)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토는 현대의 레스터셔와 이스트 스태퍼드셔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아마도 캠브리지셔 상류와 칠턴까지 확장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머시아와 영국 양쪽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왓링 가포스 웨이의 위대한 육로 및 트렌트 강의 주요 하천로를 모두 장악했으며, 그 지류인 다임천공도 함께 장악했다.

머시아

미들 앵글은 펜다(c.626–655년) 통치 훨씬 이전에 더 넓은 머시아 왕국에 편입되었는데, 그들은 분명히 그들의 영토에서 그의 근거지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는 그의 장남인 피다를 미들 앵글의 부왕으로 임명했다.[1] 베데는 미들 앵글을 기독교로 개종한 피아다가 부분적으로 노섬브리아 오스위왕의 딸인 알크플라데와 결혼하기 위해 받아들인 4인 기독교 사절의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다.[2] 이 임무는 653년에 도착했고 세인트 세드를 포함했다.[1] 피다의 노섬브리아에서의 세례 전환과 수용은 머시아 내에서의 불화감이나 지역적 특수주의가 지속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피다는 미들 앵글들 사이에서 국지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메르카 왕국의 전략적, 정치적 중심지였던 그의 아버지와 그렇게 다른 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세인트 세드, 미들 앵글 주교

펜다(655년)의 패배와 죽음, 노섬브리아 부인의 선동으로 피다 자신이 살해된(656년)에 이어 오스위우가 머시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는 선교사제사장 중 한 명인 아일랜드인 디우마, 미들 앵글스 주교와 메르시아인을 임명했다.[3] 베데는 성직자가 부족하여 두 민족에 주교 한 명을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메르카 왕국의 중심지였던 미들 앵글이 메르시아 왕국과는 분명히 구별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들을 위한 지정은 북부와 서부로 더욱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4] 디우마는 짧지만 성공적인 임무 끝에 미들 앵글 사이에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후계자였던 또 다른 아일랜드 선교사 설라흐는 베데가 특정하지 않는 이유로 잠시 후 귀국했다. 트럼여와 자루만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펜다의 또 다른 아들인 울페르는 왕실의 중심지인 탐워스를 중심으로 하여 미들 앵글 중 머시아에 대한 통치를 계속하였다. 669년, 자루만이 죽은 후,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새로운 주교를 파견할 것을 요청했다. 이쪽은 세드의 동생 채드였다. 베드에 따르면 차드는 "메르시아인과 린지족의 비숍"으로 지정되었다. 이 경우 미들 앵글이 머시아인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체 광대한 지역을 위한 교회 중심지는 미들 앵글 영토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울피어가 리치필드의 탐워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땅을 기증하여 차드가 수도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머시아 내의 민족들 사이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고 그들 모두가 머시아인으로 묘사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 같다. 이것이 8세기 초의 차드 자신의 시간, 즉 베데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인지는 덜 명확하다.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중심지로서의 미들 앵글리아

미들앵글리아 영토는 그 존립기간 내내 더 넓은 메르시아 정치의 정치적, 교회적 중심지로 남아 탐워스 기지에서 영국 대부분을 지배한 오파(757–796년) 휘하의 그 중요성이 최고조에 달했다. 787년 첼시 평의회에서 리치필드대교구의 자리를 선언할 수 있었는데, 이 협정은 오파 자신이 오래 살아남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 중심지로서의 리치필드의 중요성은 9세기 메르스 주의 일식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그것은 가장 부유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중세 교구들 중 하나가 될 때까지 살아남았고, 따라서 아마도 영국 역사에서 미들 앵글의 중요성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림일 것이다.

참조

메모들

  1. ^ a b Garmonsway 1972, 페이지 28; Bede 1968, 페이지 176.
  2. ^ 베데 1968년, 176-7페이지
  3. ^ 베데 1968년, 페이지 177.
  4. ^ 요크 1990, 페이지 107.

참고 문헌 목록

  • Bassett, S., ed. (1989), The Origins of Anglo-Saxon Kingdoms, Leicester University Press, ISBN 978-0-7185-1317-7
  • Bede (1968) [1955], A History of the English Church and People, translated by Leo Sherley-Price, Penguin, ISBN 978-0-14-044042-3
  • Colgrave, B., ed. (1956), Felix's Life of Saint Guthlac,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0-521-30926-3
  • Campbell, J., ed. (1982), The Anglo-Saxons, Phaidon, ISBN 0-7148-2149-7
  • Davies, W. (1973), "Middle Anglia and the Middle Angles", Midland History, 2: 18–20, ISSN 0047-729X
  • Dumville, D. (1989a), "Essex, Middle Anglia and the expansion of Mercia in the South East", in Bassett, S. (ed.), The Origins of Anglo-Saxon Kingdoms, Leicester University Press, ISBN 978-0-7185-1317-7
  • Dumville, D. (1989b), "The Tribal Hidage: An introduction to its texts and their history", in Bassett, S. (ed.), The Origins of Anglo-Saxon Kingdoms, Leicester University Press, ISBN 978-0-7185-1317-7
  • Gallyon, M. (1980), The Early Church in Wessex and Mercia, Terence Dalton, ISBN 0-900963-58-1
  • Garmonsway, G.N., ed. (1972), The Anglo-Saxon Chronicle, Dent, ISBN 0-460-00624-X
  • Hunter Blair, P. (1963), Roman Britain and Early England 55 B.C. – A.D. 871, Nelson, ISBN 978-0-351-15318-1
  • Kirby, D.P. (1991), The Earliest English Kings, Unwin Hyman, ISBN 0-04-445691-3
  • Stenton, F.M. (1971), Anglo-Saxon England (3rd ed.),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0-19-280139-2
  • Yorke, B. (1990), Kings and Kingdoms of Early Anglo-Saxon England, Seaby, ISBN 1-85264-0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