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R. 패터슨
Malcolm R.말콤 R. 패터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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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테네시 주지사 | |
재직중 1907년 1월 17일 – 1911년 1월 26일 | |
선행자 | 존 콕스 |
성공자 | 벤 후퍼 |
의 멤버 미국 하원 테네시 10구 출신 | |
재직중 1901년 3월 4일 – 1906년 11월 5일 | |
선행자 | 에드워드 카맥 |
성공자 | 조지 고든 |
개인내역 | |
태어난 | 앨라배마주 소머빌 | 1861년 6월 7일
죽은 | 1935년 3월 8일 플로리다 사라소타 | (73세)
휴게소 | 테네시 멤피스 포레스트힐 묘지 |
정당 | 민주적인 |
배우자 | 세라 존슨 시빌 호지스 (1903–1906년, 그녀의 죽음) 메리 러셀 가드너(m. 1907년) |
관계 | 요시야 패터슨(아버지) 버지니아 포스터 더르 (니체) |
직업 | 변호사 |
서명 | |
말콤 라이스 패터슨(Malcolm Rice Patterson, 1861년 6월 7일 ~ 1935년 3월 8일)은 미국의 정치인이자 법학자였다. 1901년부터 1906년까지 미국 하원에서, 1907년부터 1911년까지 테네시 주의 30대 주지사를 지냈다. 이후 멤피스(1923–1934)에서 순회법원 판사로 근무했으며, 멤피스 상업상소(1921–1933)에 주간 칼럼을 썼다.[1]
패터슨은 테네시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주지사 중 한 명이었다.[2] 1908년 리푸트 호수 폭동의 나이트 라이더들을 진압한 것에 대해 찬사를 받으면서도, 그는 정치적 우방인, 특히 그의 조언자인 던컨 쿠퍼에게 사면을 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그의 정적 에드워드 W. 카맥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 1909년 패터슨이 대중 금지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1910년 주 민주당 예비선거를 장악하려는 그의 시도로 인해 당내 분열이 발생하여 거의 30년 만에 주(州)에서 선출된 첫 공화당 주지사가 될 수 있었다.
초년기
패터슨은 1861년[3] 6월 7일 앨라배마주 소머빌에서 해밀턴 라이스 패터슨으로 남부연합 기병 장교 겸 하원의원인 조시아 패터슨 대령(1837~1904)과 조세핀 패터슨(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6년, 그의 아버지는 그의 이름을 "말콤"[1]으로 바꾸었다. 이 가족은 1872년 테네시 주의 멤피스로 이사하여 패터슨이 크리스천 브라더스 칼리지(현 크리스천 브라더스 대학)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는 1880년대 초에 밴더빌트 대학에서 공부했고,[4] 아버지와 함께 법을 읽었다. 그는 1883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1]
패터슨은 1894년부터 1900년까지 셸비 카운티의 법무장관으로 일했으며, 이때는 미 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아버지의 옛 지역구였던 옛 10구역을 대표했다.[1]
주지사
윌리엄 B 상원의원의 사망 이후. 1905년 3월 베이트, 주지사 제임스 B. Frazier는 재빨리 총회를 소집하고 공석인 상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주 상원의 의장으로서 프레이저의 헌법상 후계자(그리고 총회에서 프레이저의 기술자의 당선을 도왔던)였던 존 콕스는 그 후 주지사가 되었다. 수년간 미국 상원의원 자리를 노렸던 로버트 러브 테일러 전 주지사는 프레이저의 행동에 격분했고, 프레이저와 콕스, 에드워드 W. 카맥 상원의원이 민주당을 장악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5]
프레이저 선거를 둘러싼 콕스에 대한 당의 좌절감을 감지한 패터슨은 1906년 콕스의 주지사 지명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패터슨과 콕스가 대의원 쟁탈전을 벌이면서 지난 5월 말 전당대회에서 데이비드슨 카운티에서 패터슨 전 의원이 대의원 확보에 나서면서 룰 변경으로 패터슨 전 의원이 공천을 확정할 수 있게 됐다. 콕스는 분노했고, 총선에서 패터슨을 지지하기를 거부했다.[5]
패터슨의 공화당 상대인 헨리 클레이 에반스는 1890년 의회에서 강제 퇴장당했고 오랫동안 주 민주당원들을 사기 전술로 고발했었다. 패터슨은 에반스가 흑인 유권자들을 보호해 줄 '로지 빌'을 지지했다고 비판하며 에반스가 주 흑인 인구에 힘을 실어주고 싶어 한다고 제안했다.[5] 선거 당일 패터슨은 11만1856표를 얻어 에반스에게 9만2804표를 얻어 승리했다.[5]
패터슨 주지사 시절에는 주 고속도로위원회를 만들고 경마 도박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으며, 식품과 약물 규정을 제정했다.[5] 패터슨은 주지사 최초로 국가가 매입한 주지사 저택(이전의 주지사들은 호텔 객실에 거주했었다)을 차지했고, 새로운 거주지가 건설된 1922년까지 연이은 주지사들에 의해 점유되었다.[5] 1909년 두 번째 임기의 초창기에는 4개의 단과대학을 만든 일반교육법에 서명했다. 이스트 테네시 주립 대학교, 미들 테네시 주립 대학교, 멤피스 대학교, 테네시 주립 대학교.[1]
1908년 주지사 경선 때는 2년 전 로버트 러브 테일러에게 상원 의석을 빼앗겼던 에드워드 카맥이 패터슨에게 공천을 도전했다. 카맥은 강력한 선거운동을 펼쳤지만 패터슨은 대의원의 50%를 조금 넘는 득표율로 간신히 공천을 받았다. 월터 P의 권력투쟁에 휘말린 공화당. 브라운로우와 뉴웰 샌더스는 당초 T. 애스버리 라이트(브라운로우 후보)와 조지 틸먼(샌더스 후보) 두 후보를 공천했으나 결국 라이트가 사퇴했다.[5]
1908년 10월, 리프루트 호수 통제를 둘러싼 웨스트 테네시 랜드 컴퍼니와 오비온 카운티 주민들 사이의 불화로 회사 간부 퀀틴 랭킨과 로버트 Z가 되었다. 테일러, 나이트 라이더로 알려진 자경단 단체에 납치당했어 테일러가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랭킨은 그 무리에게 살해당했다.[6] 패터슨은 직접 주 방위군을 이끌고 오비온 카운티로 들어가 그곳에서 그들은 체포되어 수십 명의 나이트 라이더들을 감금했다. (이후 세 사람은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이 행동은 그의 인기를 상승시켰고, 그는 11월 선거일에 133,166표를 얻어 113,233표를 얻었다.[5][2]
선거 직후, 패터슨은 결국 자신의 정치 경력을 끝내는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었다.[5] 그의 전 상대인 카르맥은 패터슨의 고문인 던컨 쿠퍼 대령을 무자비하게 조롱하는 기사를 실었다. 1908년 11월 8일 쿠퍼와 그의 아들 로빈은 거리에서 카맥과 마주쳤다. 카르맥과 로빈 쿠퍼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져 전자가 숨지고 후자가 다쳤다. 카맥의 지지자들은 패터슨의 총격에 대해 비난했고, 어느 순간 패터슨의 탄핵을 요구했다. 1910년 장로 쿠퍼는 패터슨에 의해 사면되었지만 두 쿠퍼스는 모두 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임 중 1400여 건의 사면을 내렸던 패터슨은 이전에 부패한 정치 동맹국들을 석방하기 위해 사면권을 남용한 혐의를 받아왔다.[1]
패터슨의 두 번째 임기 초에 주 의회는 두 가지 금지 조치를 통과시켰다. 하나는 어떤 학교에서도 4마일(6.4km) 이내의 주류 판매를 금지한 주의 4마일 법(이 법은 이전에는 인구 5,000명 이하의 마을에만 적용되었다)을 주 전체로 확대했다. 두 번째는 판매를 위한 주류 제조를 금지했다.[5] 두 법안 모두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지만, 패터슨은 두 법안 모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것이 제정된 모든 곳에서 금지가 실패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입법부는 그의 거부권을 남용했고, 그 조치들은 법이 되었다.[5]
1910년까지, 주 예비선거를 둘러싸고 민주당에서 균열이 생겼다. 패터슨이 이끄는 '정규 민주당'은 카운티별로 대의원을 주는 낡은 제도를 유지하려 했고, '스테이트와이더'로 알려진 다른 계파는 주 전체의 경선을 원했다. 패터슨이 주 전체 경선을 고려하지 않자, 스테이트와이더스는 전당대회에서 탈퇴하고 자체 후보 슬레이트를 지명해 패터슨이 지명될 수 있도록 했다. 8월 4일 주 사법부 선거에서, 주정부 인사들은 일반 민주당을 패배시켰다. 패터슨은 11월 우승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레이스에서 물러났다. 그의 파벌은 재빨리 전 주지사, 로버트 러브 테일러 당시 미국 상원의원을 지명했지만, 테일러는 스테이트와이더스의 지지 없이 공화당의 벤 후퍼에 의해 총선에서 패배했다.[5]
만년
1913년, 패터슨은 금주 원인에 "전환"했다. 그는 반살롱 연맹에 가입했고, 전국을 순회하며 금지를 요구하는 강의를 했다.[1]
1915년 패터슨은 자신의 당의 미국 상원의원 지명을 노렸고, 반대파인 루크 리아(현역의원)와 케네스 맥켈라(Kenneth McKellar)는 그의 당의 공천을 노렸다. 리아는 3위를 차지해 1차 투표에서 패배했고, 상승하는 정치 지도자 E. H. 크럼프의 지지를 받은 맥켈러는 몇 주 뒤 결선투표에서 패터슨을 물리쳤다.[1]
1921년 패터슨은 멤피스 헤럴드 택배사에 '패터슨 주지사와의 하루하루'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칼럼은 정치와 다른 주제들을 다루었다.[1] 1923년 패터슨은 주지사 오스틴 페이에 의해 셸비 카운티 제1 순회재판소의 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934년 은퇴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1932년 패터슨은 다시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힐 맥알리스터에게 경선에서 패배했다.[1]
패터슨은 플로리다 사라소타를 방문하던 중 1935년 3월 8일 사망했다. 그는 멤피스의 포레스트 힐 묘지에 묻혔다.[2]
가족
패터슨은 1885년 첫 부인 사라 존슨과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5] 첫 아내의 죽음에 이어 1903년 시빌 호지스와 결혼했다. 그들은 1906년 그녀가 죽기 전에 한 아이를 낳았다. 주지사 취임 직후인 1907년 메리 러셀 가드너와 결혼했다. 그들에게는 두 아이가 있었다.[5] 그는 재임 중 결혼하는 두 명의 테네시 주지사 중 한 명이다.
패터슨(그의 여동생 앤의 딸)의 조카인 버지니아 포스터 더르(1903~1999)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저명한 인권운동가였다.[8]
참고 항목
참조
- ^ a b c d e f g h i j k 말콤 라이스를 위한 원조 찾기 패터슨 서류 2013년 7월 12일, 1969년 테네시 주립 도서관 및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었다. 검색됨: 2012년 11월 30일.
- ^ a b c 티모시 에젤 "말콤 R. 패터슨," 테네시 주 역사문화 백과사전, 2009. 검색됨: 2012년 11월 30일.
- ^ 의회 바이오가이드
- ^ 밴더빌트 대학교 등록부(밴더빌트: 1882), 페이지 16.
-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필립 랭슨, 테네시 주: 정치사(프랭클린, 텐: Hillsboro Press, 2000), 페이지 245–263.
- ^ 2009년 테네시 역사문화 백과사전 "리푸팅 호수의 밤 라이더" 빌 트렉켈드. 검색됨: 2012년 11월 30일.
- ^ M. M. Monahan, 진정한 금주에 대한 텍스트북 (미국 브루어스 협회, 1911), 147페이지.
- ^ 버지니아 포스터 인터뷰, G-0023-1 미국 남부 문서화, 1975 검색됨: 2012년 11월 30일.
외부 링크
위키미디어 커먼스는 말콤 R과 관련된 미디어를 가지고 있다. 패터슨 |
- 주지사 말콤 R. 패터슨 페이퍼스, 1907 - 1911, 테네시 주립 도서관 및 기록 보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