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치니아누스
Lucius Calpurnius Piso Frugi Licinianus루시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프루기 리치니아누스(38~69년 1월 15일)는 1세기에 살았던 로마의 귀족이었다. 로마 갈바 황제에 의해 왕위 계승자로 채택되었으나, 갈바와 같은 날 4대 황제 연도에 살해되었다.
인생
리치니아누스는 고대의 가장 높은 귀족이었다. 리치니아누스는 마르쿠스 리치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콘술 27)와 드레고니아의 아들 중 한 명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태어나 입양된 리치니아누스는 젠스 리치니아 출신이었다. 그의 이름에서 볼 때, 그는 아마도 Gens Calpurnia에 입양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누구에 의해 확실하지 않다.
리치니아누스의 외조부모는 둘 다 폼페이우스의 직계 후손이며, 세 번째 결혼부터 무키아 테르티아에 이르는 삼두르 폼페이우스의 딸이었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집정관이자 총독인 마르쿠스 리치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4년)였다. 크라수스는 집정관이자 장군인 마르쿠스 리치니우스 크라수스의 양아들로, 3금비르 마르쿠스 리치니우스 크라수스의 손자였다. 그는 삼두박사의 직계 후손이자 그의 이름을 딴 삼두박사의 마지막 직계 후손이었다. 갈바 황제에 의해 입양되기 전의 리치니아누스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아마도 로마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것이다. 그의 동생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황제의 딸로 첫째 남편이었고, 다른 동생 마르쿠스 리치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2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증조부였다.
리치니아누스는 갈바의 69년 1월 10일부터 15일까지 공식적인 후계자였다. 게르마니아 수페르니오르의 2개 군단이 지휘관 오울루스 비텔리우스를 지지하여 그에게 반기를 들자 갈바의 입지를 강화하도록 임명되었다.
고령의 갈바가 후계자를 선택하고 있을 때 티투스 비니우스는 오토를 제안했지만 갈바는 전임자인 네로보다 조금 나을 것이라고 믿으며 오토의 방만한 도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대신 그는 프레이토리아 현판인 코넬리우스 라코의 충고를 받아 리치니아누스를 선택했다. Suetonius는 그를 '손재주가 있고 잘 길들여진 젊은이'라고 묘사한다. 리치니아누스는 그의 성실성, 정직성, 도덕성으로 훌륭한 평판을 누렸었다. 갈바는 리치니아누스를 '내 아들'이라고 불렀고, 그는 아침 리치니아누스를 군중 가운데서 골라내었다. 갈바는 리치니아누스를 자신의 이름과 로마 왕좌, 재산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갈바는 그 후 리치니아누스를 프레이토리아 근위대의 진영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리치니아누스는 정식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입양되었다.
오토는 선택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는 갈바의 선택을 듣고 충격과 실망감을 느꼈고, 그 후 오토는 황제가 되기 위해 두 사람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1월 15일 갈바는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거리에서 해킹을 당해 사망했다. 비니우스도 오토가 죽음을 명령하지 않았다고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했다. 모든 황실 경호원들 중에서 오직 한 백부장인 셈프로니우스 디센스만이 감히 암살자들에 대항할 수 있었다. 단검으로만 무장한 그는 한 손으로도 완전무장한 대군들과 대치하여 그들의 반란을 폄하하고 죽을 때까지 싸우면서 리치니아누스를 탈출할 시간을 벌었다. 리치니아누스는 도망쳐 베스탈 처녀들의 신전으로 숨었다.
그곳에서 그는 안전했어야 했지만, 암살자들은 신전의 성소를 존중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프레이토리아 근위대의 스타티우스 머커스(Statius Murcus)와 갈바(Galba)로부터 막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영국 보조원 술피시우스 플로루스(Sulpicius Florus)라는 두 명의 병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들은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그를 죽였다. 그는 서른한 살이었다.
타키투스는 오토가 '눈이 결코 배부르게 마실 수 없는 것처럼, 특이한 악의로 피해자의 잘린 머리를 연구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리치니아누스의 죽음은 충분하지 않았다; 오토는 또한 코넬리우스 라코를 죽였다.
백 이십 명이 보상을 기대하며 갈바와 리치니아누스를 죽인 공로를 주장하려 했고, 이를 위해 그들의 이름을 적은 명단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토가 비텔리우스에게 퇴위당하자 새 황제는 명단을 찾아내어 모두 사형을 명했다.
리치니아누스는 영사 계급의 가문 출신인 베라니아 게미나와 결혼했었다. 오토는 그 후 리치니아누스의 머리를 베라니아에게 넘겨주었는데, 베라니아는 오토에게 거액을 주고 말았다. 베라니아는 비아 살라리아에 위치한 무덤에 리치니아누스의 머리와 그의 몸을 함께 묻었다. 베라니아와 리치니아누스는 아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항목
참조
원천
- Smith, William, ed. (1870).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Vol. 3. p. 378.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6 September 2007.
- Smith, William, ed. (1870).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Vol. 3. p. 758.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5 March 2009.
- Smith, William, ed. (1870).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Vol. 3. p. 1239.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31 December 2005.
- 스에토니우스, 시저스, 갈바 & 오토
- Lanciani, Rodolfo (1892). "Pagan Cemeteries". Pagan and Christian Rome. Houghton, Mifflin and Company.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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